구로구 궁동 생태공원과 정선옹주
아침산책으로 다녀 온 반나절 나들이
2017년 6월24일 토요일
며칠전 TV프로그램에서 만난 궁동 생태공원을 산책차 찾았다.
홈에서 자동차로 30분거리인 지척으로 구로구 궁동에 위치한 정선옹주묘역이 있는
알찬 역사산책길이기도 했다.
생태공원 산책을 시작으로
정선옹주묘역 역사사책에 이어 마지막으로 구로올레길까지 건강걷기겸 즐긴 반나절이다.
네비에 서울 구로구 궁동 4-5를 치니 서서울생활과학고 정문에 닿는다.
생태공원은 바로 학교정문과 붙어 있었다. 입구는 다른곳에도 있었다.
그 곳엔 주차장이 별도로 없어 자동차는 길옆 일렬로 10여대정도 세울 공간뿐이다.
우리는 학교 정문쪽으로 닿게 되어 교문앞 주차장에 살짝 두고 산책을 시작했다.
마침 학교가 쉬는 주말이라 주차장에 차들이 별로 없어 살짝 이용했다.
서서울 생활과학 고등학교 건물이다. 건물 아래로 교문밖 소규모 학교주차장시설이 있었다.
오른쪽은 서서울 생활과학 고등학교이고, 그 앞 왼쪽으로 궁동생태공원이다.
궁동 생태공원은 시끄러운 도심 속에 위치해 있는 조용한 휴식공간이다.
원래는 그 자리에 배를 타고 다닐 정도로 큰 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저수지라 함은 벼농사를 하면서 농업용수로 쓰인 목적이 첫번째인데 최근에는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보니 저수지의 쓰임이 사라졌다.
1950년대에는 이곳에서 수영도 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큰 길이 나며 저수지의 크기가 반으로 줄었고 옛 궁동저수지의 열악한
환경개선과 더불어 친환경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2007년 궁동 45번지 일대를 시작으로
총 3차에 걸친 공사로 주민 여가공간과 자연생태학습장이자
휴식공간으로 재 탄생하게 되었다.
생태공원을 안내하는 표지판과 지도가 있다.
먼저 생태관찰로를 따라 둘러본다. 뒷편으로 서서울학교건물이 보인다.
부들이다.
부들이란 말은 여름에 꽃가루 받이를 할때 부들부들 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들은 수생 식물이지만 연못가나 늪지에서 살며,
부들꽃은 6~7월에 꽃이삭이 먼저 달리고 꽃이 핀다.
공기 정화용으로 많이 활용되지만, 다양한 꽃장식에도 활용하는 중요한 수생 식물이다.
부들 대끝에 달린 긴 열매가 소세지 모양과 같아서 꽃꽂이 할때도 사용하며
조경 소재로도 많이 활용되는 특별한 장식을 할 수 있는 멋진 소재로 활용된다.
모내기를 마친 벼들이 간이 논에서 푸르고 싱싱하게 자란다.
노오란 두 민들레꽃이 간이 논두렁에 다정하게 피어있다.
개구리밥이 물 위를 촘촘히 잔디처럼 뒤덮고 있다.
개망초꽃
무리지어 피어있는 개망초꽃밭
벼락구덩이
음용수 사용불가
궁동저수지는
구로구 궁동에 있는 저수지로 궁동저수지 자리에는 원래 '벼락구덩이 우물'이라고
불리던 곳이 있었다. 마치 '벼락을 맞아 생긴 것 같은 구덩이에서 샘이 솟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벼락구덩이 우물을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했다고 말한다.
그러다 일제가 벼락구덩이 우물 자리에 저수지를 팠고, 우물에서 샘솟던 물이 저수지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고 한다. 저수지가 생기자 마을은 벼농사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풍수지리적으로도 산을 뒤에 업고 물을 품은 배산임수 명당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농업용수로서의 궁동저수지 역할은 오래가지 않았다. 현대화가 진행되고 마을에
연립주택이 들어서면서 수궁동의 농업인구는 점차 줄어들었다.
해방되기 전 일본 사람이 소유했던 궁동조수지 땅은 해방이후 국유지로 바뀌었다.
마을 사람들은 궁동저수지를 낚시터로 임대하고 수익금을 마을 기금으로 사용했다.
예부터 이곳에서 샘솟는 물은 마을의 생계를 책임지는 주요 수단이자 풍수지리적으로는
배산임수의 조건을 완성하는 요소였고 2008년 4월 궁동저수지가 포함된 궁동 45번지 일대
1만 205제곱미터에 조성된 궁동생태공원은 현재 주민들이 애용하는 쉼터로 자리잡았다.
우물안
구로 올레길은 바라만 보고 그냥 지나친다.
생태공원을 둘러보고, 또 경선옹주 묘역을 둘러 본 후 맨 마지막 일정으로 미룬다.
궁동저수지생태공원은
옛 궁동저수지의 열악한 환경개선과 더불어 친환경적인 공간을 조성하여 구로구 지역
주민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고자 조성되었다. 저수지 위 데크산책로와 전통 정자,
파고라, 벤치 등의 휴게 시설 및 체육시설, 공연을 위한 야외무대가 설치 되어 있으며,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는 공간과 어린이놀이터도 조성되어 있다. 윗 글 한 부분 옮겨씀
기 받는 방법은
태양이 뒷머리를 비춰야 합니다. 라고 쓰여져 있네요.
수궁정(水宮亭) 정자가 이 녹색 생태공원을 지키는 주인장처럼 떡허니 버티어 있다.
운치있는 멋들어진 수궁정 정자이다.
그다지 넓지 않은 생태공원이지만 오밀조밀 갖출 건 다 갖추고
짜임새있게 꾸며놓은 멋진 휴식공간이자 아름다운 공원이다.
수궁정
우리 동네 야외 영화관 및 야외 공연무대
매월 (5월~9월까지) 둘째, 넷째 목요일 저녁 8시에 바로 이곳에서 영화가 상영됩니다.
주최: 수궁동 주민자치위원회 *우천시 취소됩니다.
주민들의 문화생활을 위한 참 질 좋은 서비스를 봅니다.
어린이들이 역사현장인 경선옹주묘역을 해설선생님과 함께 체험학습 왔다.
궁동저수지 생태공원 종합 안내도가 있는 이곳이 정문이고
길옆에 1열로 주차를 했더군요. 약 10여대 정도?
충정공 권협 공 묘역(忠貞公 權悏 公 墓域)으로 오르는 입구이다.
이 묘역안에 권대임공과 정선옹주의 묘소가 있다.
권협(權悏) 신도비(神道碑)
충정공 권협 신도비문(忠貞公權悏神道碑文)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贈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길창부원군(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吉昌府院君)
행 효충장의 선무정훈공신 숭정대부 예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길창군
(行效忠仗義宣武正勳功臣崇政大夫禮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吉昌君)의 신도비(神道碑)는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조경(趙絅)이 비문을 짓고, 중직대부(中直大夫) 허목(許穆)이
전액(篆額)을 쓰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조위명(趙威明)이 글씨를 썼다.
권협(權悏,1553~1618년,명종8~광해군10년)은 이조중엽 임진왜란(壬辰倭亂)때
큰 공훈을 세운 뒤 정유재란(丁酉再亂)때 고급사(告急使)로 중국 명나라에 들어가 많은
지원군(支援軍)과 군량(軍糧) 및 화약과 군수물자들을 많이 지원 받아와서 위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크게 공훈을 세운 명신이다.
이름은 협(悏),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 시호(諡號)는 충정(忠貞),
본관은 안동(安東), 시조는 고려 태사(太師) 권행(權幸)이고, 부친은 증 영의정 동흥부원군
(贈領議政東興府院君)으로 행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상(常)이고,
어머니는 어모장군(禦侮將軍) 나운걸(羅云傑)의 따님이며 공은 그 다섯째 아들이다.
영특한 천성으로 일찍이 문장에 뛰어났으며 서기 1577년(선조10년) 25세에 알성문과
(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춘추관(春秋館)의 벼슬을 거쳐 한림(翰林)이 되었고
통진현감(通津縣監) 병조, 형조, 예조의 낭관을 거쳐 동벽(회의나 연회시 요직의 관원들이
앉는 좌위)에 이르는 동안 항시 지제교(知製敎 : 임금의 교서 등을 작성하는 관원)의
삼자함(三字銜)을 겸대하였다.
서기 1592년(선조25년) 임진난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임금이 도성을 떠나려고 하니
대사헌(大司憲) 김찬(金瓚)과 함께 대궐로 달려가 주상께 아뢰기를, "서울에는 종묘와 사직이
있고 많은 관리와 만백성이 있는데 천하께서 이를 버리시고 장차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비록 다급한 형편이지만 성을 등지고 최후의 결전을 감행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니, 종묘사직을
죽음으로 지켜 이 땅을 버리지 마소서." 라는 비장한 말로 간하였다.
그 충정을 가상히 여긴 임금이 그 차고 있던 패검(佩劍)을 상으로 주셨다.
호조참의.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서기1604년~1605년(선조37년~38년)
선무정훈 3등 공신이 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져서, 한성우윤(漢城右尹)과 호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그 후 서기1607년(선조40년)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 후 서기1608년 무신(戊申)년에
선묘기세(宣廟棄世 : 선조임금이 세상을 떠남)후 광해군이 신립(新立)된 뒤에 물러나 두문불출
(杜門不出)하며 매사를 사절하다 서기1614년(광해6년 갑인년)에 숭정대부에 올랐다.
1616년(광해군8년,병진년)에 사은정사(謝恩正使)가 되어 연경(燕京 : 북경)에 갔는데,
5천리 길을 서둘러 달려갔다 돌아와 왕에게 보고한 때는 엄동설한이었다.
쇠잔한 노인이 촉박한 일정에 병이났다.
1618년(광해군10년,무오년) 정월 27일 집에서 별세하니 그가 태어난 1553년으로부터
향년 66세이다. 주상이 부의를 내리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길창부원군에
추증하였다. 공이 돌아간 때에 마땅한 묘자리를 얻지 못하여 부평(富平)의 수탄리
(水呑里 : 지금의 서울 구로구 궁동)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가 이듬해 봄 그곳의
남쪽을 향한 자리에 안장하였다.
공은 약관의 나이에 비범함이 드러나 높은 스승인 도정(都正) 순천군(順天君) 이관(李琯)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충효한 가문의 후손으로서 학문 또한 뛰어나서 선조대왕의 깊은 인정을
받았으며, 임진년 뒤 정유난에 왜란이 다시 일어나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하니 이 나라가 망국의 지경에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에는 공의 힘이 아주 크고 많았다.
자제들에게는 엄격하여 법도를 지켰으며 "내가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항상 읽었지만 그 중 가장
의미있는 말이 있으니 적선(積善)한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우리 집안이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하게 된 것이 어찌 모두 충효했던 조상들의 덕택이
아니겠느냐? 지키는 것은 얻는 것보다 어려우며 잘 지키는 방도는 검약밖에 없다" 라고 하였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남을 헐뜯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고 평생을 하루처럼 조금도 변함없이
살아온 공은 진실한 군자라고 할 수 있다.
부인은 전주 최씨로 정숙하고 절개가 있어 군자의 배필이 되었으며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서기1620년(광해군12년,경신년) 11월 19일에 향년 70으로 별세하니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자녀는 7남2녀를 두었는데, 신중(信中), 필중(必中), 경중(景中), 정중(正中), 근중(謹中),
심중(審中), 위중(偉中)은 이들이고, 딸은 유업(柳業)과 이시환(李時煥)에게 출가했으며,
자제가 모두 관직에 나갔다.
권협 공의 증손과 현손 등 후손이 당시에 무려 2백여 명이었다고 하니 과연 번성한
가문이라 할 만하다. 이 비석이 몇 백 년의 나이를 먹을 수록 유명한 문장과 명필의
글자 획이 점점 마멸되어가는 것이 안타까우니 잘 관리 보존에 가야 할 것이다.
충정공 권협 공 묘역(忠貞公 權悏 公 墓域)
이 묘역안에 권대임 공과 정선옹주의 묘소가 있다(在此墓域內 權大任公 和 貞善翁主之墓所)
임진왜란 선무정훈공신(宣武正勳功臣) 권충정공 권협공 묘역
이 묘역 맨 위 묘소가 이 묘역의 주인공인 안동권씨 22세 권충장공 권협 공과 배위(配位)
정경부인 전주최씨(貞敬夫人全州崔氏)의 묘소이다. 권충정공은 고려충신인 시조 권행 태사공
(權幸太師公)의 후예로 조선중엽(1553~1618)의 명신(名臣)인데 공의 아버지는 하늘이 낸
효자로 임금님이 내린 효자정려(孝子旌閭)가 있고 추은삼세(推恩三世)의 성은(聖恩)을 입고
선공감정(繕工監正)에 명을 받고 당상(堂上)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된 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에
실린 증 순충보조공신 영의정 동흥부원군(贈純忠輔祚功臣領議政東興府院君)에 추증이 되여
사림(士林)에서 호(號)를 남강(南岡)으로 추호(追號)하고 청주백록서원(淸州白鹿書院)에서
봉향(奉享)하고 있는 권상(權常)공 이다.
권충장공은 그 분의 자랑스러운 5남인데, 공은 임진왜란 선무공신(宣武功臣) 총 9,078인 중 아주
큰 공훈을 세운 선무정훈공신(宣武正勳功臣)은 18인인데 공은 그 중의 1인이고 또 정난원종
(靖難原從) 1등 공신이며, 호성원종(扈聖原從) 1등 공신인 1인이 3역(役)을 한 찾기 힘든 3중
공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나라를 구하는데 크고도 대단한 결정적인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세(戰勢)가 매우 위급해져 왕과 조정중신들이 피란(避亂)갈 방책을 논의하는
어전회의가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대사헌 김찬(金瓚)과 함께 그곳으로 달려가 무릎으로 왕앞에
달려나가서 서울을 버리고 파천(播遷)을 하시지 마시고 사수하시라고 강력히 주청(奏請)을 한
당차고 강직한 신하로 임진왜란 중에는 왕을 호위하고 따르다 관서운량어사(關西運糧御史)가 되서
경서삼도(京西三道)의 군량(軍糧) 조달을 총독(總督)하였고 삼남도체찰사부(三南都體察使府)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서는 여러 지방들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군무를 전관해 살피고 가목하였다.
정유재란 때 왜군 15만 대 병력이 부산 동래 근방으로 재 침범을 해오자 다급해진 왕과 조정중신들이
의논해 권협공을 고급사(告急使)로 발탁 차출하여 배신(陪臣,작은 나라 사신이 큰 나라 황제에게
자신을 고할 때 쓰는 직칭) 예조판서의 직함을 주어 명나라로 들여보내니, 서둘러 달려가 명나라
조정에 당도한 공이 죽기를 각오한 필사진력(必死盡力)으로 모든 노력과 신명을 모두 다
경주(傾注)해서 명나라 군부와 황제를 감동시켜 많은 대군의 구원병력과 많은 군량미와 화약,
기기류 및 우근(牛筋, 활만드는 재료)등 여러가지 많은 군수 물자들을 원조받아 내와서 패색이
먹구름처럼 뒤덮여있던 우리나라의 국운과 전세를 동시에 확 뒤바꿔 놔서, 우리나라의 의병과
승병, 육군과 해군들이 명나라 구원군과 연합작전을 펼쳐서 전세를 뒤집어서 잏었던 땅들을
차차 회복해 갈 수있게끔 명나라에 가 전기를 만들어 내 왔기 때문에 전세를 역전 시킬 수 있었으며
결국 이순신 장군도 명나라 해군과 노량해전 등에서 연합작전을 폄으로써 왜 해군의 대선단 들을
대파 시키고 승리를 함으로써 7년을 끌어온 긴 전쟁을 우리의 완전한 승리로 끝낼 수 있게
권충장공이 큰 공훈을 세워온 정유년(1597)으로부터 8년째 되던 갑진년(甲辰年,1604년)이 되서야
효충장의선무정훈공신길창군(效忠仗義宣武正勳功臣吉昌君)이 되었다. 그러나 공은 성정이 너무
강직하고 아첨(阿諂)을 싫어한 탓에 전쟁이 우리의 완전한 승리로 끝이 났어도 명나라에 가서
원군을 끌어 들여오는데 크게 성공하고 돌아온 정유년 이후에도 호조참의, 황해도관찰사, 나주목사,
동부,우부,우승지,형조호조참의 등으로 전전시키다 선무정훈공신으로 녹훈(祿勳)이 돼 길창군
(吉昌君)에 책봉이 된 갑진년 이후에, 한성우윤, 호조참판, 대사헌 등에 올랐다가 을사(을사,1605)에
전라관찰사 겸 전주부윤으로 2년을 나가 있게 오래고도 먼 세월 동안을 돌리고 돌려서 10년이 되던
정미(丁未,1607년)에서야 옛 배신(陪臣)때의 직함이던 예조판서에 정식으로 취임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 때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임하게 하였다.
권충정공의 호는 석당(石塘)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사후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영경연(領經筵)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世子師) 등 여러가지 귀하고 많은 벼슬등과 품계를 높혀 길창부원군으로
승격 추증이 되었다. 묘역 남쪽 앞에 세자 좌빈객 조경(世子 左賓客 趙絅)이 비문을 지어
충직대부 사헌부 장령 허목(中直大夫 司憲府 掌令 許穆)이 전(篆)을 해 통훈대부 사간원정언
조위명(通訓大夫司諫院正言趙威明)이 글씨를 쓴 오래된 신도비(神道碑)가 있어 2014년 늦은
가을에 나라에서 비각(碑閣)을 만들어 세웠다.
위에서 두 번째 묘소는 돌 봉분주위석(封墳周圍石)이 둘려져있고 봉분앞에 장명등(長明燈)이
있는데 이 묘소는 권충정공의 長孫 선무원종 1등공신 길성군 권대임(吉城君 權大任,1595~1645)
공과 그 배위 정선옹주(貞善翁主, 1594~1614)의 합폄묘소(合窆墓所)이다. 정선옹주는 선조
임금님의 제7녀로 정빈 민씨(靜嬪閔氏)소생인데 21세의 젊은 시절에 시아버지인 길흥군(吉興君)
내외분 보다도 훨씬 앞서서 타계를 한 불행이 있어 시부모인 길흥군 내외가 타계하기 오래전에
묘를 쓰게 돼서 위치가 역(逆)으로 바뀌어져 있다. 권대임공은 인조 때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두 번이나 역임한 후 청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 때 병자호란 때 심양(瀋陽)에
인질로 끌려 가서 풀려나지를 못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고생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난민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자기의 사재를 털어주고 많은 난민들을 구해온 통이 큰 인물로
당대 서예의 대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서 문예계의 인사들과도 교류 및 왕래가 있어 많은
유명인사들의 선망(羨望)의 대상이던 인물인데 51세에 일찍 졸해 정1품수록대부(綏祿大夫)로
추증이 되었다. 이 묘역 중간부위의 빈공간의 동편에 권대업공의 큰 신도비가 있는데
이 신도비는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 허목(右議政兼 領經筵事監 春秋館事 許穆)이
현종(顯宗 13년) 임자(壬子, 1672)에 찬(撰)해 논 것을 43년째 되는 숙종40년(甲午,1714)에
임자년 당시 태어나지 않아 신도비문에 올리지 못한 자손들을 추록(追錄)해 종질(從質)인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권규(嘉善大夫 司憲府 大司憲 權珪)공이 전(篆)을 해 통정대부
승정원좌부승지 지제교겸(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知製敎兼)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이징귀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李徵龜)가 글씨를 써서 동향을 해 세운 것이다.
세번째의 묘소는 권충정공의 長子 선무원종공신 길흥군(吉興君) 권신중(權信中,1575~1633)공과
그 배위인 증 정경부인 전주이씨의 묘소인데 먼저 타계한 며느리 정선옹주의 묘소가 먼저 써져
있어서 부득이 그 밑으로 모시게 돼 용미(龍尾)를 약간 올려서 펴져 있는 것을 보아 알 수가 있다.
권신중공은 김제, 여산, 단양, 풍덕군수 등을 역임, 풍덕군수 때는 장단진관 병마동첨절제사
(長湍鎭管 兵馬同僉節制使)를 겸했었고 통정대부로 올라있다가 큰 아들인 대임공이 귀하게 돼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고 길흥군에 봉해졌다. 후일 선무원종공신이라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겸 영경연사 길흥군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그 아래 네번째 묘소는 권충정공의 증손(曾孫)이고 권대임공의 장자로 정선옹주가 나은
유일한 독자아들 권진(權瑱,1613~1659)공과 그 배위인 증 숙부인 남양홍씨(贈淑夫人
南陽洪氏)의 묘소이다. 권진공은 조봉대부 돈녕부 봉사(朝奉大夫 敦寧府 奉事)를 역임하고
통정대부 이조참의로 추증되었다.
다섯째 묘서는 권충정공의 4대 현손(玄孫)이고 권진공의 장자인 길평군(吉平君) 권이경
(權以經,1638~1686)공과 그 배위 증 정부인 초개정씨(증정부인처계정씨)의 묘소이다.
통정대부 길평군은 함열현감(咸悅縣監), 전주진관 병마 절제도위(全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역임 가선대부 이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 吏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와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증이 되었다.
여섯번째 묘소는 권충정공의 래손(來孫)이고 권이경공의 장자인 권세태(權世泰,1659~1722)
공과 그 배위 숙부인 안동김씨(淑夫人 安東金氏)의 묘소이다. 통훈대부 권세태공은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 翊贊)과 안산군수, 수원진관 병마동첨절제사(水原鎭管 兵馬
同僉節制使)등을 역임했다.그리고 권충정공 묘소 뒤 북북서쪽 90m 지점에 권충장공의
제5자 증 영의정권근중(贈 領議政 權謹中,1586~1650)공과 그 배위 증 정경부인 전주이씨
(全州李氏)의 쌍분묘소가 있다. 권근중공은 회인현감(懷仁縣監)을 지내고 세자익위사 사어
(世子翊衛司 司禦) 일때 아버지 상을 당해여묘(廬墓)를 살던 중 2년여 뒤 또 어머니상을 당해
근 6년을 여묘로 산 효자인데 장자 권대운(權大運,1612~1699)공이 남인의 거두로 귀하게 돼
숙종때 영의정에 올라 자신도 영의정에 추증된 광영을 입었다.
이곳 권충정공 묘역안과 인근에는 권충정공 묘소와 정선옹주의 묘 총 8기의 묘가 있는데
묘역내의 묘소 주위에 비석(碑石), 봉분둘레 주위석(周圍石), 문인석(文人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촛대석, 장명등(長明燈), 신도비(神道碑) 등 여러가지 석물들이 잘 보전되어
있어 역사문화 탐방과 금석문화 조사 연구 등에 많은 참고가 될 자료와 역사가 많이
깃들어 남아 있는 곳임
-안동권씨[22세]권충정공 종친회-
묘역으로 오른다.
묘역 꼭대기 상단에는 권대임의 조부인 길창군(吉昌君) 충정공(忠貞公)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무덤이 있다.
그 아래에 부마도위(駙馬都尉) 길성군(吉成君)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무덤이 있는데,
권협의 무덤보다 규모는 크지만 비석이 작고 비문도 간략하다. 권대임의 아래에
아버지인 길흥군(吉興君) 권신중(權信中)과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무덤이 있다.
그 아래는
권대임의 아들 권진(權瑱)과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의 순서로 되어 있다.
권대임과 아버지 권신중의 순서가 바뀌어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권대임이 왕의 부마라는 특례를 인정하여 부자간의 순서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묘역 아래 저수지가 있었던 언저리를 비석거리라고 하는데, 남쪽 끝에 권협의 신도비가
있고, 서북쪽 끝에도 새로 세운 비가 있다.
정선옹주 묘역 내에는 신도비 외에도 안동권씨의 묘와 묘비 등이 다수 남아 있어
당시 묘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맨 아래: 권세태 공 묘소
권세태 묘소(權世泰墓所)
조선왕조 중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충정공(忠貞公) 권협(權협)의 6대 손으로, 고조부는 길흥군(吉興君)
권신중(權信中)이며, 증조부는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부마도위 길성군(吉城君)
권대임(權大任)이고, 조부는 권진이며, 아버지는 길평군(吉平君) 권이경(權以經)이고,
어머니는 증 정부인 초계정씨이며,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이다.
아버지 길평군 권이경의 장자로 태어나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지냈으며,
수원진관병마동첨절제사(水原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지냈다.
위에서 5번째: 길평군 권이경 공 묘소
길평군 권이경 묘소(吉平君權以經 墓所)
조선왕조 중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길창부원군 충정공 권협의 현손으로,
증조부는 길흥군 권신중이며, 조부는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부마도위 길성군 권대임이고,
아버니즌 권진이며, 어머니는 증 숙부인 남양홍씨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초계정씨이다.
함열현감(咸悅縣監)으로 지냈고, 전주진관병마절제도위(全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지냈다.
사후 가선대부(가선대부)로 추록되면서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고, 겸하여 동지의금부사
(同知義禁府事)로 추증되었으며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으로 추증되었다.
다른 묘역의 석물보다는 이 곳 길평군 권이경의 묘소의 석물에 눈이 더 가는 곳이기도 하다.
다른 곳도 이렇게 사대부 묘역의 품위를 느낄 수 있게 조각되어 있지만 묘소 자체가 넓지
않으면서도 격식이 있고 석물 배치가 간단 명료하면서도 예쁘게 잘 조각되어 있다.
위에서 4번째: 권진 공 묘소
권진(권진)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무덤이다.
권진(權瑱) 묘
권진(權瑱)의 자는자옥(子玉)이며 권대임과 선조의 7녀 정선옹주가 결혼하여 낳은
맏아들이다. 1694년에 건립된 권진묘비(權瑱墓碑)는
홍만조(洪萬朝)가 비문을 지었으며, 박경후(朴慶後)가 글씨를 썼다.
묘비 : 有明朝鮮 朝奉大夫 行敦寧府奉事 權瑨 之墓, 令人 南陽洪氏 祔左
위에서 3번째: 길흥군 권신중 공 묘소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권신중의 묘소.
능선 위에서부터 세 번째 묘소가 권신중 묘소이다.
권신중(權信中) 묘
길흥군(吉興君) 권신중과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무덤이다.
권신중[權信中, 선조 8년(1575)~인조 11년(1633)]은 자는 군집(君執), 본관은 안동,
아버지는 예조판서 권협(權悏), 어머니는 최말(崔沫)의 따님 전주최씨,
배위는 전주이씨, 아들은 길성위 권대임(權大任)이다. 선조 38년(1605)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 한성부판관 등을 지내다가 풍덕군수(豊德郡守)로 재임 시
제릉(齊陵)을 수리한 공으로 통종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묘는 단분 합장이고, 좌향은 남향이다.
묘표 묘갈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등을 갖췄다.
묘표는 봉분 앞에 있으며 원수형 2면비이다.
비신 전면에
“有明朝鮮贈議政府右議” “政吉興君行通政大夫豊” “德郡守權信中之墓”
“贈貞敬夫人 全洲李氏 祔左”라 새겼다.
규모는 비신 56*26*125cm, 비좌 94*59*27cm이다.
묘갈은 봉분 우측앞에 있으며 팔작지붕 옥개형 이다.
비좌 윗면에는 복련을 전면과 측면에는 덩굴문을 장식 했다.
묘갈의 전액은 “贈右議政吉興君權公墓碣”
비제는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義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
吉興君行通政大夫豊德君守長湍鎭管兵馬同僉節制使權公墓碣銘이다.
비문은 우의정 허목(許穆)이 찬(撰) 및 전(篆)하고 개성부 유수 윤심(尹深)이 서(書)했다.
규모는 옥개석 113*78*51cm, 비신 64.5*31*140cm, 비좌 112*78*37cm 이다.
문인석은 양관조복을 착용했고, 상(裳)위에 페슬(蔽膝)을 표현 하였다.
등 뒤의 대(帶)에는 화문을 장식 했으며, 대 아래로 후수(後綬)를 늘어뜨리고
후수 양 측면에는 패옥을 후수의 아랫단에는 술을 내렸다. 규모는 총고 190cm이다.
망주석은 운각에 여의두문, 그 아래 염의를 조각 했고 주신에는 상하 구분 없는 꽈배기
모양의 세호를 양각 했다. 규모는 총고 184cm이다.
권신중(權信中)은
가선대부(嘉善大夫) 권협(權悏)의 아들로 자(字)는 군집(君執)이다.
1575년(선조 8)에 태어나 1633년(인조 11)에 사망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풍덕군수를 지냈다.
아들 권대임(權大任)은 선조의 7녀 정선옹주(貞善翁主)와 혼인하였다.
위에서 2번째: 길성군 권대임 공과 정선옹주 묘
정선옹주(貞善翁主)
정선옹주(貞善翁主)는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대왕의 7녀로 안동권씨 권대임(權大任)과
결혼하여 지금의 구로구 궁동 67번지일대에서 궁궐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현재 궁동이라고 하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정선옹주가 시집을 간 안동 권씨 집안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과 그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의 대공을 세운
도원수 권율(權慄)이 있다.
또 영의정을 지냈던 이항복(李恒福)은 권율의 사위로 역시 이 집안과 관련이 있다.
정선옹주의 남편인 권대임은 안동 권씨라는 집안의 배경을 갖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잘 써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여기에 선무공신의 칭호를 받고 예조판서를 지낸
권협(權협)의 손자이며 부인 또한 임금의 딸이라 그의 집은 가히 궁궐 못지 않았으며 때문에
궁동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이다.
묘역에는 정선옹주와 그 남편 권대임의 묘를 비롯하여 여러 기의 안동권씨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흔히 풍수가에 의해 명당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궁동의 북쪽 끝 와룡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가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와룡산 서쪽으로는 궁동 서부를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우백호(右白虎)를 이룬다.
주산에서 좌우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한 가운데를 다시 짧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었고,
그 끝에 저수지가 있다. 고추처럼 생긴 그 산줄기가 낮은 언덕을 이룬 곳이 궁동의 한 복판이다.
이것이 풍수지리설에서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 즉 금계포란형(金鷄包卵型)으로 찬탄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고추 모양 언덕 끝 부분에 안동권씨 문중묘가 있으니, 누가 보아도 명당 중의 명당이다.
정선옹주 묘
정선옹주는 1594년(선조 27년) 음역 4월1일 선조와 정빈 민씨 사이에서 셋째 달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민사준이며, 같은 정빈 민씨를 어머니로 둔 형제로는 오빠 인성군, 언니 정인옹주,
여동생 정근옹주, 남동생 인흥군이 있다. 정선옹주는 영가 권씨(안동 권씨) 권협(權협)의
손자이자 권신중의 아들 권대임과 혼인하였다.
권태임은 당시 부평부(지금의 서울시 구로구 궁동 일대)에 살고 있었는데,
선조는 이곳으로 시집을 가는 정선옹주에게 해당 지역 인근의 땅을 하사하였다.
당시 권대임과 옹주의 집이 매우 크고 으리으리한 궁과 같다 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궁동이라는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
권대임은 정선옹주와 혼인한 후 길성위에 봉해졌으나 정선옹주는 1614년(광해군 6년)
음력 8월 1일 21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사후 궁동에 있는 시댁 식구들의 묘역에 묻혔으며,
1645년(인조 23년) 남편 권대임도 이곳에 같이 묻혔다.
아들 권진은 돈녕부봉사를 지냈다. 정선옹주의 어머니 정빈 민씨는 성격이 어질고 예절을 잘
지켰는데, 옹주도 이러한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 항상 근신하고 부덕을 잘 지켰다고 한다.
맨 위: 권충정공(길창부원군 권협)공 묘
맨 꼭대기 권협공 묘에서 아래로 내려다 풍경
밤나무꽃
정선옹주와 권대임(權大任) 묘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더 상세히 알아본다.
권대임[權大任, 선조 28년(1595)∼인조 23년(1645)], 자는 홍보(弘輔),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권협(權悏), 아버지는 길흥군 권신중(權信中),
어머니는 광평대군 이여(李璵, 세종의 아들)의 7세손 이정필(李廷弼)의 따님 증정경부인
전주이씨 이다. 선조의 7녀 정선옹주와 결혼하여 길성위(吉城尉)에 봉해졌고,
돈령부봉사 권진(權瑱)을 낳았다.
서예가(書藝家)로 선조로부터 여러 번 상을 받았고, 통헌대부에 이르렀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공주로 피난 가는 어가를 호종하였고,
그 공으로 봉헌대부가 되었다. 인조 13년(1635) 아버지 상이 끝나자 선무공신(권협)의
적손으로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는 어가를 호종하여 숭덕대부로 승진되고 도총관이 되었다.
인조 17년(1639) 심양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재화를 모두 털어서 미 송환 포로를
속환시켰다. 사후에 선무원종공신으로 유록대부(綏祿大夫)를 더하여 정1품이 되었다.
묘는 단분 합장이고,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다. 좌향은 남향이며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 신도비 등을 갖췄다. 묘표는 원수형 2면비 이다.
비좌 윗면에 복련 전측면에 덩굴문을 장식 했다.
비신 전면에는 “有明朝鮮 吉城君” “權大任之墓” “貞善翁主 祔左” 라 새겼다.
규모는 비신 57*23.5*129.5cm, 비좌 96*60*37cm이다.
문인석은 양관조복을 착용했고, 상(裳)위에 폐슬(蔽膝)을 표현하였다.
등 뒤의 대(帶)에는 화문을 장식 했으며, 대 아래로 후수(後綬)를 늘어뜨리고 후수
양 측면에는 패옥을 후수의 아랫단에는 술을 내렸다. 관모의 武부분 앞면에는 운문을
조각했다. 규모는 총고 194cm 이다. 망주석은 운각에 여의두문, 그 아래 염의를 조각 했고,
주신에는 좌상우하의 세호를 양각했다, 규모는 총고 180cm이다.
장명등은 사모합각지붕의 옥개석을 갖췄고, 옥개석 위에는 보주를 얹었다.
화사석에는 4면에 화창을 내었다 총고는 186.5cm이다.
장명등
맨앞으로 향로석이 있고, 그 뒤에 놓여있는 넓은 돌은 혼유석이다. 왕릉에서는
혼유석 앞에 향로석을 놓지 않고 있으나 민묘에는 향로석을 두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혼유석은
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설치하는데,
묘제 때에는 후손이 올리는 제수(祭需)를 흠향(歆饗)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무덤 앞에 있는 문인석은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정선옹주 무덤의 양쪽에 있는 문인석들은 옅은 미소를 띄거나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은 망주석, 그 망주석으로 도룡용이 올라가는 조각이 새겨져 있다.
망주석은 생긴 모양은 남자의 심볼을 나타낸다. 즉, 다산 다복의 의미이다.
또한 이는 촛불을 의미하며 묘의 주인이 나가 놀다가 불빛을 보고 자기 집을
찾아오는 것이다.
망주석은 무덤의 오른쪽과 왼쪽에 하나씩 쌍으로 서 있는데,
그 기둥에 다람쥐 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원래 도룡용이나 일반인의 무덤에
내려오면서 모양이 좀 더 우리에게 친근한 다람쥐로 변해 갔다. 그래서 그 앞에
알밤까지 조각해 놓은 곳도 종종 본다.
왕릉이나 대가집은 무덤 앞에 또 다른 등이 있는데 이것은 장명등이다.
장명등은 귀신이 나와서 혼유석- 보통 일반 인들은 이것을 상석이라하고
그위에 음식을 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사실 이것은 귀신의 의자또는 놀이터이다.
그래서 그 아래 받침은 북치고 장구치고 노는 뜻의 북 모양으로 되어 있다
- 위에서 노는데 사용하는 등이고, 망주석은 집(무덤)을 찾는 등이다.
즉 장명등은 안방 내실이나 거실에 있는 집안 등이고, 망주석은 대문에 붙인
현관 등불인 셈이다. 그런데, 이 망주석 기둥에 조각된 짐승이 한마리는
위로 올라가고, 한마리는 내려온다.
정확하게 어느쪽이 올라가고 내려오는지는 정의되어 있지 않으나,
내려가는 것을 외출하는 것을 뜻하고, 올라가는 것은 집에 돌아오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혹자는 말하기를 서자의 망주석에는 다람쥐가 한쪽은 오르고 한쪽은 내리고,
적자는 모두 오르고.. 등등의 설도 있으나.. 그냥 설일 것이다
- 즉, 무덤속 귀신이 이것을 타고 외출하고, 또 돌아온다는 것이다.
원래 왕가의 무덤에 있는 이것의 이름은 다람쥐가 아니고.. 세호(細虎)라고 한다.
즉, 작은 호랑이라는 뜻인데, 원래 이 짐승은 용중에 제일 하치 쫄다구 용인 도룡용이다.
임금이 도룡용을 탄다는것은 체신 머리가 없으니 호랑이라고 칭했다. 원래 왜 귀신이
도롱용을 타는 것인가 하는 것은 풍수지리설과 기(氣)에 관한 연유에서이다.
즉, 귀신(혼)은 기가 뭉친 것인데,
기란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야 뭉친다는 풍수설이다.
즉 무덤 뒤에는 산으로 막아서 바람을 막고, 그산줄기에서 기가 더 모여들며,
앞에는 냇물이 흘러서 물을 만나야 기가 빠져 나가지 않고 멈추어 모인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가 바로 뒤에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놓아야 명당이라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지리설이다.
그래서 귀신은 물과 친한 도롱용을 타고 다닌다고 한다.
*다음카페 李炳하 글에서 옮김
밤나무꽃
맨 아래서 올려다 본 묘역
하와이안 무궁화꽃이 주변에 예쁘고 시원하게 피어 있었다.
비행기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 본다.
권대임(權大任) 신도비(神道碑)문
증 수록대부(綏祿大夫,정1품) 행 숭덕대부(崇德大夫,종1품) 길성군(吉城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정2품) 권공의 신도비는 우의정 허목(許穆)이
글을 짓고 승정원좌부승지이징귀(承政院左副承旨李徵龜, 정3품관)가 글씨를 쓰고,
사헌부 대사헌 권규(大司憲 權珪, 종2품관)가 전액(篆額)을 썼다.
권대임(권대임,1595~1645,선조28~인조23)은 이조중기의 문예와 서예가 특출하였던
문신으로 이름은 大任이요 자는 홍보(弘輔)이다. 성은 권씨이며 본관은 영가
(永嘉,지금의 안동)이다. 권씨는 태사(太師) 행(幸)이 고려 태조에게 성(姓)을 받은 이후
8백년 동안 대대로 현달하여 귀하게 된 사람이 많다. 조부 협(悏)은 임진.정유 왜란 때
공훈이 많은 명신으로 예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이르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증직되었다.
부친 신중(信中)은 군수를 연임하였고 아들 대임이 귀해져 좌찬성(종1품)에 증직되었으며
길흥군(吉興君)에 봉해졌다.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모친 이씨(李氏)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세종대왕의 별자인 광평대군의 7대손 사평(司評) 정필(廷弼)의 따님이다.
공은 1595년 11월 24일에 태어났는데, 수려한 용모에 총명하고 민첩하며 공부를 잘하였다.
정선옹주(貞善翁主)에게 장가들어 길성위(吉城尉)가 되니 주상이 남달리 총애하였다.
특히 글씨를 잘 써서 임금이 칭찬해 마지 않았으며 수없이 상을 하사하시고 여러번 승진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정2품)에 이르렀다.
인조대왕 2년에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주상이 공주로 피난하자 공은 주상을 수행하여
봉헌대부(奉憲大夫,정2품)에 올랐으며, 1635년(인조 13년)에는 길성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겨울 청나라의 군대가 서울을 침입하자 또 남한산성에서 주상을 수행하여 숭덕대부에
올랐으며, 또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관의 요직을 두 번 역임했다. 3년이 지난 후 왕명을
받들고 중국 심양(瀋陽)에 갔었는데 당시에 우리나라는 겨우 병란에서 벗어난 터였다.
공은 행장(行裝)속에 가지고 있는 자기 재물을 모두 내어 대전(代錢)으로 주고 아직
그곳에 잡혀있던 노약자를 귀환시키니 사람들이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1645년(인조 23년) 10월 26일에 졸하니, 향년 51세였다. 공이 병에 들자 주상은 특별히 왕실과
혼인한 의빈(儀賓)이라하여 끊임없이 의관(醫官)과 약재를 내리셨다. 부음이 전해지자 주상은
공을 위해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가게문을 닫게 하였으며, 조문과 부의를 내려주고
담당관에게 장례를 돕게 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라 하여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추증하니 정1품이 되었다. 공은 성품이 인자하고 후덕하여 부모 형제에게는 물론이고
인척에게까지 잘 하였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두 아우와 누이동생에게 노비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중에서 온순하고 건강한 자를 택하여 후하게 나누어 주고도 부모께서
살아계실 때와 같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공은 그 중에서도 가장 어린 아우를 매우 사랑으로 돌보며 그의 의식(衣食)이 언제나
자기에 비하여 손색이 없도록 하였다. 차분하고 검박한 성품을 지닌 공은 언제나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처럼 처신하였다. 진실되게 사람과 사귀고 글을 애호하였으므로 당대의 많은 고관과 학자가
흠모하여 더불어 교유하였다.
평생에 사치방종과 일락(逸樂,편안하고 즐거움)을 몰랐으며, 오직 삼가고 바른 일을 행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이 더욱 어질게 여겼다. 나라의 법에 옹주(翁主)의 집에는 노비와 전답을 주도록 되어
있는데 공은 이것을 기어이 받지 않으면서 "내가 받은 은혜가 이미 후한데 다시 이것 때문에
담당 관리를 번거롭게 하는 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소행이다" 라고 하였다.
정선옹주는 선조대왕의 일곱번째 따님으로서 정빈민씨(靜嬪閔氏)의 소생이다. 정빈은 성종대왕의
사위인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의 손녀이자 강화도호부사 민사준(閔士俊)의 따님이다.
정빈은 어질고 예절을 좋아하였으며 옹주 또한 공손하고 삼가며 조금도 부덕(婦德)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는 평소에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옹주는 1594년(선조27) 4월 1일에 태어나
1614년(광해군6) 8월 1일에 졸하였다. 옹주는 공보다 한 살이 많았으며 당시 연세는 21세였다.
부평(富平)의 수탄(水呑,지금의 구로구 궁동)에 장사지냈다가 이때에 이르러 길성군(吉城君)과
합장을 하였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돈녕봉사(敦寧奉事)인 증 이조참의 진(瑱)이다.
일찌기 1672년(현종13,임자년)에 미수 허목(眉叟許穆)선생이 이 신도비의 글을 지었다.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1714년(숙종49,갑오년)에 비로소 비석에 새기게 되었는데 비문에 기록하지
못했던 자손들을 이때 추가로 기록하였다. 길성군(吉城君,權大任)이 돌아간 1645년(인조23) 이후
70년 1714년(숙종40) 월 일에 이 신도비를 세웠다.
이 신도비의 허목 미수선생의 문장과 명필은 유명하거니와 특히 이징귀(李徵龜)선생의 능숙하고
우아한 필치와 석수명장(石手名匠)의 조각얘술은 후인들이 아끼고 보존해 가야 할 일이다.
역사산책까지 마치고 구로 올레길을 걷다가
다리에 힘이 빠져 산길을 내려온다.
구로올레길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작동생태공원~궁동터널~대봉산~ 문학공원(금호어울림아파트)
총 3.5Km (약 1시간 30분)
날아가는 비행기 두번째 만난다.
드넓은 하늘을 보니 푸른하늘이 아니더라도 시원하다.
다리 피로도 풀결 쉬어 갈까?
내 속에 살고 있는 6명의 각각 다른 내가 이 의자에서 쉬고 있네. 하하하
양치질에 사용되었던 '버드나무' 이야기
세번째 만난 비행기엔 손을 흔들어 준다.
그리고 반나절의 산책을 마무리한다.
반나절,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인 역사공부에 빠져 길게 느껴졌던 반나절기행이었다.
권충정공(길창부원군 권협)공 묘소
묘역에 있던 밤나무꽃이 멀리서 바라보며 우릴 배웅해 준다.
하얗게 피어난 밤꽃을 보니 하루의 피로가 풀린다.
*궁동 생태공원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온수역 하차 -> 버스 6613,6716,6616 서서울 생활 과학고 하차
사진 글
찬란한 빛/김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