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의 비경 '용아장성'을 넘다
출입통제구간으로 안전시설이나 비상시 중간탈출루트 없어 위험
스릴만점인 개구멍바위 등 특히 기억에 남아
2011.6.20
설악산(1,708m)은 '천의 얼굴'을 가진 산이다. 설악산 등반코스 중 외설악 천화대 리지와 더불어 설악산을 대표하는 암릉인 용아장성. 용의 이빨(牙)처럼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 긴 성벽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하여 '용아장성(龍牙長城)라 불리우는 이 능선은 내설악을 가르며 대청봉을 향해 뻗어오른 암릉으로서 설악산의 심장과도 같은 도상거리 약 5km의 장쾌한 바위능선이다.
소청봉에서 시작되어 구곡담 계곡과 가야동 계곡을 가르며 수렴동대피소까지 이어진 이 암릉은 설악산 국립공원 내 여러 등산로 중에서도 울산바위, 적벽, 장군봉 등 정식 암벽코스를 제외하고 암릉코스 중에서는 가장 험한 코스 중 하나이며, 자연생태계 보호와 사고위험 예방을 위해 현재는 출입이 금지되고 있는 코스이다.
서북주능선을 걸으면서 좌측으로 내려다보이는 용아장성. 이루지못할 사랑을 흠모하듯 바라만 보고 늘 그리워만 하던 용아장성을 우연한 기회에 다녀오게 됐다. 전에 용아장성을 여러번 올랐던 경험이 있고 현재 모 산악회 암벽등반 대장을 하고 있는 베테랑 산우와 함께 용아장성에 도전해보기로 한 것이다. 필자를 포함, 등산학교 암벽반을 수료하고 암벽등반 경험도 어느 정도 있는 남자 5명, 여자 1명이 팀을 이뤄 설악산으로 향했다.
팀 멤버 중 나이가 가장 많은 필자로서는 다소 부담감도 있었지만, 별로 어렵지않은 코스라는 대장의 말과 암벽등반 경험이 풍부한 후배들과 함께 한다는 점에서 크게 걱정은 하지않았다. 다만, 출입금지지역이라 만일 예상치못한 돌발사고 발생시 대처방법이 조금 우려되기는 하였다.
출입금지지역이라 용아장성의 안전시설이 대부분 철거됐다는 정보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암벽화 및 리지화는 물론, 보조자일, 잠금캐라비너, 퀵드로, 슬링줄 등 암벽등반 기본장비를 갖추고 6월 19일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한계령 쪽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속초행 버스로 6:30, 8:30, 9:20, 10:00,11:30, 14:00 등이 있다. 필자 일행은 이중 9시 20분 차를 탔다. 약 2시간 25분 걸려 한계령에 도착, 약 5시간 반의 서북주능선 산행 후 중청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6월 20일(월) 아침. 중청대피소 공동숙소에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새벽 4시 반에 중청대피소를 출발, 봉정암으로 향했다. 날씨는 쾌청했다.
아침 5시50분에 봉정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하고 6시 10분경 사리탑 방향 계단을 올랐다. 사리탑에 오르니 서서히 날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산 능선이 붉게 타오른다. 암봉 위의 소나무가 역광으로 실루엣을 이뤄 신비감을 준다.
용아장성 리지루트는 편의상 봉우리를 중심으로 총 9개 구간으로 나눈다. 봉정암에서 출발하는 첫 봉우리는 9봉.
9봉 진입로에는 출입금지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법을 어기는 행위라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안전확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스스로 진다는 각오 하에 마음을 다져잡고 암벽등반 경험이 많은 동료산우들과 함께 리지등반을 시작한다.
사리탑에서 10여분 쯤 가면 급경사 하강골짜기인 '꿀르와르'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안전로프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로프의 부식상태를 확인하면서 조심스럽게 직벽하강을 한다. 하강 후에는 곧 20m 수직암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 암벽은 9봉을 오르는 루트이다. 로프 등 안전시설이 없는 직벽이지만 바위가 살아있고 손잡이와 발디딤이 좋아 조심스럽게 오르면 별로 어렵지는 않다.
9봉 바위봉우리가 우람하다. 정상 바로 아래 안부를 넘어간다.
9봉을 지나면 트래버스 형태의 허릿길을 타야한다. 이곳에도 기설치된 로프가 그대로 있다. 기설치된 로프는 항상 부식상태 등을 꼼꼼히 체크하면서 이용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설치해놓은 안전시설을 그대로 믿고 의지하다보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트래버스 구간을 지나면 다시 직벽이다. 이곳 역시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로프를 타고 내려가면 8봉 고래등바위로 이어진다. 뒤를 돌아본다. 필자 일행이 지나온 암봉들이 용의 이빨처럼 삐쭉삐쭉 솟아있다.
8봉은 고래등 모양의 바위능선이 길게 뻗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래등바위는 폭이 2m정도, 100여 m의 완만한 바위벼랑이 좌우로 있어 제법 고도감이 있다. 좌우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조심스럽게 고래등을 타고 내려간다.
고래등바위를 내려가다 보면 정면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암봉이 막아서 있고 그 뒤로 암봉들이 이어진다. 첫번째 바위봉우리는 7봉. 7봉-6봉-5봉은 오르지않고 좌측으로 우회로를 탈 수 있다. 우회로는 폭 2m 정도의 바위비탈길이다.
6봉 구간은 병풍바위. 우회로를 지난 후 되돌아보면 거대한 수직암벽이 빌딩처럼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6봉을 지나 잠시 쉰 후 봉우리 사이 고개를 넘는다.
6봉에서 5봉 넘어가는 고갯길은 고사목지대이다. 거대한 돌이 서로 받치고 있는 석문을 지나가면 좌측으로 고사목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우측으로 5봉-4봉-3봉이 보인다. 고사목의 모양도 다양하다. 누가 일부러 다듬어놓은 듯 송곳모양의 줄무늬고사목도 보인다.
바위능선을 타는 도중 여기저기 기암들이 눈에 띈다. 기둥 모양의 바위도 보이고...
다시 봉우리에 올라서면 칼날같은 암봉이 우뚝 서 있다. 용아장성 리지루트 개념도를 보니 이곳이 3봉 쯤 되는 것 같다. 봉우리들이 너무 많아 어느 봉이 어느 봉인지 잘 구별이 안간다. 칼날암봉 뒤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칼날과 벗이라도 되어주는 듯 소나무 한 그루 옆을 지키고 있다.
칼날암봉을 지나 뒤를 돌아다보면 지나온 암릉이 지그재그 모양으로 긴 줄을 이루고 있다. 역시 용의 잇빨다운 모습이다. 멀리 중봉 정상도 보인다.
3봉에서 다시 고정로프를 잡고 수직암벽을 내려간다. 고사목 너머로 나머지 암봉들이 내려다 보인다. 오랜 풍상에서 다듬어진 듯 고사목의 줄무늬모양이 매우 곱다. 암벽을 계속 넘고 또 넘는다.
쌍봉 모양의 봉우리도 오르고... 송곳 모양의 암봉은 우회한다. 좌측 우회길 역시 급경사구간이다. 로프를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좌측 계곡 쪽에는 손가락 모양의 기암도 우뚝 서 있다. 오랜 세월 모진 비바람에도 부러져나가지않은 게 신기할 뿐이다.
송곳봉에서 20여 분 암릉을 타면 조망이 좋은 마당바위에 이른다. 이곳이 2봉 전망대 바위인 것 같다. 바로 정면에는 삼각형 모양의 암봉에 가운데가 홈이 있는 거대한 봉우리가 보인다. 저 봉우리는 1봉인 듯 하다. 전망대바위에서 내려가는 길은 절벽이다. 기설치된 로프를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계속 암릉을 타고 넘는다. 푸석바위 같은 암봉에 소나무 두그루가 우뚝 서 있는 봉우리도 보이고, 병풍 모양의 절벽 능선도 넘어간다. 1봉을 이미 지났는지 시야에 큰 봉우리는 보이지않고 작은 기암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사모바위 모양의 봉우리도 오른다. 층층바위 정상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저 바위. 바람 만 불어도 떨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무너지지않고 버텨왔을까.
1봉에서 20분 쯤 내려오면 개구멍바위에 도착한다. 용아장성 암릉에서 가장 공포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좌우는 천길 낭떠러지. 정면으로 내려가는 급경사 바위길도 보이지가 않는다. 다행히 기설치된 로프가 있어 로프만 믿고 내려간다. 어둠이 무섭듯이 보이지않는 건 공포의 대상이다. 막상 로프를 잡고 내려서 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루트는 아니다.
대문 모양의 정면 바위벽에는 이곳에서 추락해 사망한 산악인의 추모동판이 붙어있다. 대장이 자일을 까는 동안 주위경관을 다시 둘러본다. 우측 가야동 계곡 건너에는 오세암 암자가 보인다. 산 허리에 들어선 모습이 그림같다. 불경소리가 지척인 듯 들려온다.
개구멍바위는 사람 하나가 바짝 엎드려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바위 틈이다. 이곳 역시 이미 로프가 매어져 있다. 로프를 잡고 기어가야 한다. 개구멍 아래는 천길 절벽. 자칫 실수하여 미끄러지면 끝이다. 기설치된 로프의 안전성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일행이 가져온 보조자일도 함께 깔아놓는다. 배낭을 메고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폭이다. 먼저 배낭을 자일에 걸어 내려보낸 후 한사람 한사람씩 기어서 통과한다.
개구멍바위를 통과하면 다시 급경사길. 조심스럽게 하강한 후 하단에서 설치된 로프를 잡고 트래버스한다. 급경사루트를 내려오면 짧은 침니절벽도 만난다. 로프하강한다.
이제 어려운 구간은 다 내려온 것 같다. 입석바위가 우리 일행을 반겨준다. 원래 계획은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 비석바위, 뜀바위, 옥녀봉을 지나 수렴동 대피소로 내려갈 예정이었는데 우리 일행은 시간일정을 고려, 이곳에서 바로 하산하기로 한다.
입석바위에서 가파른 비탈숲길을 30분 쯤 내려오면 계곡에 이른다. 봉정암에서 이곳 수렴동계곡까지 용아장성을 넘은 시간은 총 8시간. 어쩌다 보니 봉정암에서 미역국밥으로 아침식사 후 점심도 굶었다. 긴장 속에 험준한 바위능선을 계속 넘다보니 배고픈 것도 잊었던가 보다.
용아장성 리지는 정식으로 모든 암봉을 넘는 리지등반 종주를 할 경우 암벽등반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비박을 해야 한다. 3인 1조 등반시 16시간 이상 소요되는 코스이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사정상 당일코스 등반으로 일부 우회로를 이용했다. 어려운 구간에서 우회로를 이용할 경우 경험자의 리딩을 받는다면 큰 어려움은 없다. 개구멍바위와 뜀바위 만 조심하면 비교적 쉬운 코스이다.
수렴동 계곡을 따라 30분 정도 내려가면 수렴동 대피소를 만나고, 수렴동대피소에서 다시 영시암을 거쳐 1시간 30분 정도 호젓한 평지숲길을 내려가면 백담사에 이른다. 중청대피소-봉정암, 수렴동 계곡-백담사 구간까지 포함하면 용아장성 종주에 거의 11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전날 서북주능선 5시간 반 포함, 총 16시간 반 정도의 대장정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백담사 주차장에서 용대리 행 셔틀버스에 올랐다. (글,사진/임윤식)
* 이 산행기는 오래전인 2011.6.20에 다녀온 용아장성 릿지등반기를 재정리한 것임.
첫댓글 10년 전이라도 60대인데, 목숨 걸고 다녀오셨군요 ㅎㅎㅎ. 중국 곤명 石林에 뒤지지 않는 절경입니다. 덕분에 국내에도 이렇게 훌륭한 石林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즐감했습니다.
출입금지구간이라서 다녀와서도 이제껏 산행기를 혼자 기록으로 써놓기만 하고 공개를 못했다가 이번에야 11년만에 처음 오픈 한 거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