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산다!
2025년 3월 23일 요 12:20-26
1. 썩는 것, 죽는 것
(1) 바나나통조림
여러 가지 많은 음식과 과일들을 통조림으로 제조합니다만 바나나는 통조림이 없습니다. 바나나통조림이란 건 없습니다. 왜 바나나는 통조림이 없을까요? 그 까닭은 바나나가 무르기 때문입니다. 바나나는 물러서 쉽게 뭉그러지고 썩기 때문에 통조림 제작에 부적합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른 바나나가 어떻게 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수입산 바나나는 보통 생산지를 떠나 화물선에 실려 여러 날, 길게는 여러 주를 지나야 도착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 에서도 신선하게 보존, 전달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농약과 살충제 덕분입니다. 미처 익지 않은 푸릇한 바나나를 따서 화물선에 싣고 오는 동안에 농약과 살충제를 골고루 뿌려줍니다. 그러면 배로 운송되는 동안 썩지 않고, 오히려 잘 익게 된답니다. 간혹 특수하게 비행기로 운송되는 바나나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바나나들은 이와 같이 수입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바나나도 물로 한번 씻어서 먹는 것이 좋답니다. 껍질의 잔류 농약 때문입니다. 저는 본래 바나나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저런 사정을 들으니 더욱 매력이 없어졌습니다. 특히나 말린 바나나에는 뭘 더 넣었을까 하는 생각에 움찔해져서 더더욱 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썩은 것보다는 썩지 않은 것을 좋아합니다. 깨끗한 과일을 선호하지요. 썩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일만이 아니라 다른 물건도 썩는 것보다는 썩지 않는 것을 좋아합니다. 종이봉투보다는 비닐 봉투를 많이 사용하지요.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썩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건지는 좀 생각해봐야 합니다. 언제부턴가 마트에서 비닐 봉투를 값을 받고 팔지요. 많이 사용하지 않도록 하려는 조치입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썩지 않기 때문입니다.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편하게 살아왔는데, 편하다고 생각해서 많이 사용했는데, 이제는 이것 때문에 골치입니다. 비닐, 플라스틱 모두 마찬가지지요. 이제 썩지 않는 것들을 없애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지요. 이미 늦었다고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그래도 없애려고, 줄이려고 노력해야지요. 여러분, 썩지 않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적당히 썩어야 합니다. 죽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적당히, 아니 잘 죽어야 합니다.
(2) 죽어야
할아버지들 바둑 두시는 것을 구경한 일이 있습니다. 한쪽 편의 말이 몰려서 삼시사방으로 쫓기는데, 그 미생인 말을 살리려니 온갖 악수, 이적수들을 다 두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미생마 하나로 말미암아 주변의 우리 편 돌들이 다 피해를 입게 되고 바둑을 그르쳐, 지게 되었습니다. 그 바둑을 옆에서 구경하시던 할아버지가 안타까운 마음에 한마디 하는데, 그 말이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그만 좀, 죽어!” 어찌나 웃기던지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런데요, 그 말이 정답입니다. 곤마는 죽이는 것이 바른 방법인 때가 많습니다. 미생인 말을 끌고 다니면서 판 전체를 그르치느니 죽이면서 그 대가를 찾는 것이 바른 전법입니다. 사석작전(捨石作戰)이라고 하지요. 사석? 돌을 버린다, 죽인다는 말입니다. 바둑이나 인생사나 죽는 것이 정답인 경우가 많습니다. 듣기에 좀 그렇습니다만, 뜻은 맞습니다.
2. 요한복음 12:20-26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그리스 출신의 사람들 몇몇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께서는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1) 밀알의 비유
24절,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로 내가 죽는 것을 말합니다. 내 주장, 내 생각, 내 욕심을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여전히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들에 대한 단 하나의 도전도 허락하지 않으며, 단 하나의 양보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것을 지키려고만 할 때는 전연 열매가 없는데, 자기의 것을 버리고, 죽일 때는 열매가 많이 맺힌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입니다. 버림으로 얻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고 비밀입니다.
이현주목사의 ‘십자가의 길’이라는 글입니다. “말씀을 어기면 자기를 따르게 되고, 말씀을 따르면 자기를 어기게 된다. 뜻을 버리고 저 좋아하는 것을 잡으면 이로써 애욕(愛慾)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어겨 자기를 따른 사람이 아담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자기를 버린 사람은 예수다. 우리는 아담이 될 것인가? 예수가 될 것인가? 결정권은 우리 손에 있다. 애욕을 좇아서 좋을 것 하나 없다. 그 결과는 밑바닥 모를 고(苦)일 뿐이다. 삶의 길이 이토록 분명하고 쉬운데 어째서 우리는 그 길을 이토록 힘겹게 가야 하는가?”
자기를 온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에 생명이 있다는 신앙의 역설적 진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생명에 대한 가르침
25절,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25절은 밀알의 비유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밀알 대신에 사람의 목숨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렇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농사법에 대한 가르침은 아니지요. 우리의 삶에 대한 말씀이지요. 사람이 자기 목숨을 사랑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생명존중 사상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요즘처럼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세상에서는 더욱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 이 구절이 관심하는 바는 인생의 궁극적인 삶의 법칙, 원리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을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붙잡고 살아서 되는 일이 아니란 겁니다. 오히려 자기의 인생을 아낌없이 바칠 때, 나누어줄 때, 세상의 표현대로 돈 안 되는 일에, 남 좋은 일에 허비하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생명, 본문의 표현으로는 영생,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할 때에만 깨달을 수 있는 매우, 매우 역설적인 신앙의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3. 죽어야 산다!
(1) 험한 세상
오늘 우리네 생활에서 우리를 시험에 빠뜨려 넘어지게 만드는 유혹자, 악한 영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토록 사랑하였지만 오히려 배신감을 느끼게 만드는 연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힘겨운 가운데 부양해야 할 가족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늙고 병드신 부모님으로, 멀리 떠나 있는 기러기 가족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백번을 양보한다 해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괘씸한 친구의 배신으로 나타납니다. 정말 하루하루 속상하게 만드는 직장 상사와 동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족들을 배려하지 않는 고집이 센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네 사는 삶의 자리에서 이런 시험이 닥칠 때마다 우리가 이 말씀, 밀알의 비유를 떠올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법칙, 십자가의 원리, 십자가의 도를 되새겨야 합니다. 그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죽어야 산다는 겁니다. 내가 죽어야, 내가 죽어야 비로소 살 수 있습니다.
(2) 오르페우스의 리라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노릇인가요?”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러한 신앙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희랍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이렌(복수형 Seirenes, 영어 Siren이 여기서 나왔습니다.)이라는 여신이 어느 섬에 살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얼굴에 독수리의 몸을 지닌 이 세이렌, 사이렌은 자기의 섬 가까이 배가 지나갈 때 환상적인 노래를 부릅니다. 선원들이 그 아름다운 노래에 취해 넋을 놓고 따라가다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오디세우스(Odysseus)가 이 사이렌 여신이 사는 섬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선원들의 귀에 왁스를 틀어막아 겨우 그 섬 옆을 빠져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무사히 통과한 이가 또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오르페우스(Orpheus)입니다. 오르페우스는 자기가 탄 배의 선원들을 위해 리라라는 현악기를 연주하는데, 사이렌 여신이 부르는 노래보다 더 멋지게 리라를 연주하였습니다. 오르페우스가 자기보다 더 아름다운 음악으로 맞대응하자 이에 모욕감을 느낀 사이렌은 바다에 몸을 던져 바위가 되어버렸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으면 자폭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이렌 여신의 노랫소리에 너무 귀 기울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이렌의 노랫소리는 가히 환상적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에 취할 때 결과는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는 것뿐입니다. 알기는 압니다만 그러나 살면서 어떻게 사이렌의 소리가 안 들리겠습니까? 들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더 크게 들어야 할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르페우스의 연주입니다. 사이렌의 노래를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의 리라 연주를 들어야 합니다. 이 오르페우스의 연주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한 사이렌의 노래는 힘을 쓰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쉬지 마십시오.
사순절 한 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유혹하는 온갖 시험과 시련들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오늘 주신 주님의 말씀, ‘죽어야 산다, 죽어야 산다!’는 이 가르침을 마음속 깊은 곳에 새기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