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청량산으로 남명과 퇴계 읽기
정우락(경북대 교수)
합천 함벽루에 가면 수많은 제영(題詠)이 걸려 있다. 그 가운데 들보를 마주하고 있는 남명의 시와 퇴계의 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남명의 시는 초서체로 호기롭고, 퇴계의 시는 해서체로 단아하다.
남명과 퇴계의 기상을 잘 아는 누군가가 이렇게 새겨 걸어 두었을 것이다. 이 두 분은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성호 이익은 이들이 영남을 둘로 나누어 학단을 이끌며 인의(仁義)를 가르칠 때를 들어
‘여기에서 문명의 극치가 이루어졌다!’라고 외쳤다.
함벽루에서 마주하고 있는 남명과 퇴계의 시판 함벽루에서 남명은 개방적 사유를 지니고 노장세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장자는 장자 「제물론」에서 남곽자기와 안성자유의 대화를 통해 나와 너의 완전한 화합, 완성과 훼손의 일치,
사물과 자아의 평등을 노래했다. 남명이 유가적 질서의 세계로 다시 환원하지만 이 같은 장자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아득히 흘러가는 황강의 물줄기를 보았다. 물길 너머로는 백사장이 있어 가을 햇살아래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끝나는 자리 장자적 자유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퇴계의 시는 남명의 그것과 다르다. 북쪽에서는 산이 달려와 우뚝이 멈추어 서고,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은 유유하다.
그는 여기서 마름 돋은 모래톱 가로 내려앉는 기러기, 대나무가 있는 집 위로 오르는 연기도 보았다. 이 같은 정경 속에서
공명의 굴레를 벗어던지니 가고 오는 것이 자유롭다고 했다. 퇴계가 수없이 관직을 사양하고 자연 속에서 심성을 기르며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같은 생각에 기반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함벽루의 들보 사이에 설 때마다 팽팽한 긴장감을 느낀다. 남명과 퇴계가 경상도에서 태어났으니 출생한 지역이 같고,
신유년에 태어나 대체로 70평생을 살았으니 생몰년이 비슷하다. 그러나 이들은 세계관과 현실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편지로는 서로를 그리워한다면서
신교(神交), 즉 차원 높은 정신적 사귐을 강조한다. 그러나 주변에 흩어져 있는 편지들을 보면 이들은 내적으로 상당한 경쟁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퇴계’와 ‘남명’이라는 호를 주목한다. 당호나 자호를 어떻게 짓는가 하는 것은 이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남명은 ‘남쪽 바다[南冥]’를 의미하는 것으로 장자 「소요유」에서 따온 것이다. 노장적 세계가 그의
문집에 다량 내포될 수 있었던 이유를 여기서 알게 된다. 이에 비해 퇴계는 ‘개울로 물러난다[退溪]’는 의미이다.
개울은 자연이며 강의 출발점이니 자연으로 물러나 학문을 연마하고 심성을 기르고자 하는 뜻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남명의 ‘바다[冥]’와 퇴계의 ‘개울[溪]’, 이 바다와 개울은 남명과 퇴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대단히 긴요한 요소이다.
샘물이 원두에서 솟아나 개울을 이루고, 개울은 강을 이루고, 강은 다시 바다를 이룬다.
이 때문에 바다는 구체적인 넓이를, 개울은 추상적인 깊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바다로 나아가려고 하니 의식은 ‘개방’적 일 수 있었고, 개울로 물러나려고 하니 그 의식은 ‘순수’할 수밖에 없었다.
개방과 순수, 이것이 바로 바다와 개울이며, 남명과 퇴계다.
남명과 퇴계는 ‘현실’과 ‘이상’도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하고 풀어냈다.
바다에 작용한 힘이 ‘원심력’이라면, 개울에 작용한 힘은 ‘구심력’이다. 모두가 성리학자이지만 남명은 원심력에 입각하여
노장학과 양명학을 수용하였고, 퇴계는 구심력에 의거하여 순수이성이라 할 수 있는 주리적 세계인식을 분명히 하였다.
이 두 힘이 낙동강의 좌우에 공존하면서, 때로는 조화를 이루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보다 큰 영남학을 만들어갔다.
이 공존이 ‘의(義)’와 ‘인(仁)’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지리산’과 ‘청량산’ 혹은 ‘우도’와 ‘좌도’로 설명되기도 하였다.
남명과 퇴계가 바다와 개울을 지향한 것은 이들의 청소년기와 일정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남명은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청소년기를 서울에서 보내고, 퇴계는 처음부터 시골에서 보낸다.
서울은 문화의 첨단기지다. 이 때문에 남명은 여러 친구들과 노장서도 읽으며 기생과 만날 약속도 한다.
그러나 퇴계는 청량정사 등에서 논어 등을 수십 번 읽으며 천리유행(天理流行)의 묘를 체득한다.
기질적 상이성도 있었겠지만, 청소년기의 서로 다른 생활환경은 이들로 하여금 한 사람은
남명이 되게 했고, 다른 한 사람은 퇴계가 되게 했다.
남명의 바다와 퇴계의 개울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명의 활동무대인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 및 하도는 변한지역에서 가야 및 신라로 병합한 지역인 바, 역대로 정권이나 관권에 대한 저항이 빈번했다.
이에 비해 퇴계의 활동무대인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 및 상도는 진한지역에서 신라로 발전한 지역으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정권과 관권에 대한 반항세력이 거의 없었다. 이 같은 분위기가 결국
서늘한 남명과 따뜻한 퇴계를 만드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지리산과 청량산을 중심으로 남명과 퇴계를 이야기 해보고 한다.
이 두 산은 남명의 산과 퇴계의 산처럼 인식되면서 인구에 회자되어 왔고 일찍이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주목된 바이기도 하다.
지리산의 경우 남명이 만년을 보낸 곳이고, 청량산의 경우 퇴계가 초년부터 독서를 하던 곳이다.
이후 이들의 제자는 이 두 산을 오르며 스승에 대한 순례의 길을 떠났다고 하겠는데, 우선 다음 글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잡아보자.
내 일찍이 이 두류산을 덕산동(德山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청학동(靑鶴洞)과 신응동(神凝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용유동(龍遊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백운동(白雲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 장항동(獐項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이었다.
그러니 어찌 산수만을 탐하여 왕래하기를 번거로워 하지 않았겠는가? 평생 품고 있었던 계획이 있었으니, 오직 화산(華山)의
한 쪽 모퉁이를 빌어 그 곳에서 일생을 마칠 장소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빼어난 명산에는 반드시 고사(高士)와 은사(隱士)가 숨어 살고 노닐며 쉬는 곳이 있다. 여산(廬山)의 백련사(白蓮寺),
화산(華山)의 운대사(雲臺寺), 무이산(武夷山)의 정사(精舍)는 모두 절이 아니면 도관(道觀)인데, 유학자가 숨어서 수양하던
곳이다. 그러니 백운암이 청량산에서 또한 우연이겠는가? 문득 고사가 있어 원공(遠公)이나 도․륙(陶․陸)처럼 결사를 하여
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문득 비승(飛昇)과 황백(黃白)의 도술을 이루게 되어 마치 진도남(陳道南)과 같이 문을 닫고 높이 누워
한 번 자고 나면 한 달이 지나가지 않겠는가? 이 또한 천 년 후에 진유(眞儒)로 진리를 밝힐 사람이 그 무리들과 왕래하며 노닐지 않겠는가?
지리산 청왕봉 앞의 글은 남명이 58세에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의 일부이다. 지리산이 두류산이니 이렇게 이름하였다.
이 글에 의하면 남명이 「유두류록」을 짓기까지 지리산을 12번이나 올랐다. 당시 남명은 진주목사 김홍, 황강 이희안, 이공량,
구암 이정 등과 함께 쌍계사 방면으로 유람을 하였다. 그 기간은 1558년(명종 13) 4월 10일부터 4월 26일까지였다.
그리고 남명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되는데, 남명은 그 말미에 위와 같이 적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남명은 지리산을
일생을 마칠 장소로 생각했고 마침내 그렇게 했다. 즉 61세에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德山)의 수굴운동(水窟雲洞)으로
들어가 산천재를 짓고 지리산을 닮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지리산에 들어갈 때의 심경을 남명은 「덕산복거」라는 시에서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즉 ‘봄 산 어딘들 꽃다운 풀이야 없겠는가만, 단지 천왕봉이 상제와 가까이 있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두류작(頭流作)」이라는 시에서도 ‘천 자나 되는 높은 회포 걸기 어려우니, 방장산 꼭대기 상상봉에나 걸어둘거나.’라고 하면서
지리산 천왕봉에 자신의 높은 회포를 걸고자 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늘이 때려도 끄덕하지 않는 지리산, 그 천왕봉의 기상을 남명을 통해 전달받게 된다. 뒤의 글은 퇴계가 28세에 쓴 청량산의 「백운암기(白雲庵記)」의 일부인데, 퇴계집에는 없고 청량지에만 실려 있다.
1528년 6월에 백운암의 승려가 요청하자 쓴 기문인데 청량산을 소재로 한 퇴계의 첫 작품이다. 이 글에 의하면 명산에는 절과
도관(道觀)이 있어 승려나 도사들이 살고 유학자들도 더러 이들과 어울린다고 하면서 ‘원공’와 ‘도․륙’을 들었다.
원공은 진(晉) 나라의 고승 혜원법사(慧遠法師)인데, 그가 광산에 있을 때 도연명(陶淵明)이나 육수정(陸修靜)과 어울려 놀았던
사실을 생각한 때문이다. 더욱 나아가 도남(道南)에 살았던 진(晉) 나라의 완적(阮籍)과 완함(阮咸)을 떠올리며 세속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그 스스로 진유(眞儒)로서 이들과 어울려 진리를청량산과 청량사 밝히고자 했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백운암에 걸려 있는 퇴계의 이 글을 보고 어린이나 아낙네의
솜씨라 폄하한 바 있지만, 퇴계와 청량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퇴계가 신재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나는 어려서부터 부형을 따라 책 상자를 메고 이 산을 오가며 글을 읽은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 모른다.’라고
한데서 사실의 이러함을 잘 알 수 있다. 청량정사(淸凉精舍)에서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瑀, 1469-1517)로부터 여러 형제들이
글을 배우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스스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는 별호를 짓기도 하고,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이라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지리산은 해발 1,915m로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두류산(頭流山)이라는 별칭이 보여주듯이 백두산(白頭山)이 흘러
국토의 남단에 우뚝 솟은 민족의 영산(靈山)이며, 방장산(方丈山)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보여주듯이 봉래산(蓬萊山) 및
영주산(瀛洲山)과 더불어 신선이 사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다. 역대로 이 산에 청학동이 있다고 믿어 왔고, 남명도 청학동을
찾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지리산에서 살고자 했던 남명은 이 산을 둘러보고 결국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다음 자료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높은 산과 큰 시냇물을 보면서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유한(韓惟漢)과 정여창(鄭汝昌), 그리고 조지서(趙之瑞) 등의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시냇물에 견주어 본다면, 십 층 봉우리 꼭대기에 옥 한 덩이를 더 올려놓은 격이고, 천 이랑 물위에 달
하나가 떠오른 격이라 하겠다. 바다와 산 3백 리 사이에서 세 군자의 자취를 하루 동안에 보았다. 물과 산을 보면서 사람과
세상을 보게 되니, 산속에서 열흘 동안 좋았던 생각이 하루 만에 뒤집혀 좋지 않은 생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뒷날 정권을 잡은 사람이 산수를 구경하러 이 길로 와본다면 어떤 심정일는지 모르겠다.
청량산의 청량정사 1558년 4월 24일의 기록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남명이 현실에 더욱 철저한 면을 보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것을 ‘산수자연(山水自然)’과 ‘인간세상(人間世上)’의 논리로 설명하려 하였다. ‘간산간수(看山看水)’와 ‘간인간세(看人看世)’가 그것이다.
전자는 자연을 본다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남명은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세 사람의 역사적 인물을 만난다.
악양현의 한유한, 화개현의 정여창, 정수역의 조지서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기개를 높이 샀기 때문에 남명은 이들을
‘고산대천(高山大川)’과 비교하여 ‘십 층 산봉우리 위에 옥 하나를 더 얹어 놓은 격’, 혹은 ‘천 이랑의 물결 위에 둥근 달 하나가
비치는 격’이라 하였다. 자연보다 인간을 더욱 긍정하였기 때문에 이 같은 비유가 가능했다. 유람을 통해 소득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지닌 정신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열흘 동안 산 속에서 가졌던 좋은 생각이 하루 만에
언짢은 생각으로 변하고 말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자신이 극복해야 할 현실이 바로 눈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청량산은 해발 870m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태백산맥에서 들로 내려오다가 예안강 위에서 고개를 이루었다.
밖에서 바라보면 단지 수개의 꽃송이와 같은 흙산 봉우리일 뿐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 골짜기 마을로 들어가면 사면이
돌 벽으로 둘려 있는데 모두 대단히 높고 엄하며, 기이하고 험하여 그 모양을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산 이름 청량산은 문수보살이 산다는 불교적 산이지만 퇴계 이후 유가의 수양론적 측면에서 이해되던 산이다.
퇴계는 청량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한 적이 있다.
반생토록 속마음이 강철처럼 굳세지 못해, 半世心腸未鐵剛 신선의 산 묵은 빚 오래도록 갚기 어려웠네. 仙山宿債久難償 꿈속의 혼은 다시 맑고 빼어난 곳 넘는데, 夢魂時復凌淸峭 육체의 구속은 아직도 먼지구덩이에 떨어져 있네. 形役今猶墮軟香 이태백은 여산에 들어가 햇빛 읊조렸고, 白入匡廬吟日照 한유는 화산에 올라 하늘빛을 흔들었지. 韓登華岳撼天光 뛰어난 작품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巨編何幸投來看 천 길의 기상에 도리어 옷자락을 날리는 같네. 千仞還疑共振裳
이 작품은 퇴계가 신재의 「유청량산록」을 읽고 그 감상문을 시로 지은 것으로, 제목은 「제주경유유청량산록후
(題周景遊遊淸涼山錄後)」이다. 퇴계가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 있을 때 신재의 청량산 유람록을 읽은 적이 있고,
1552년 서울에 올라와 있을 때 신재가 청량산 유람록을 고쳐서 퇴계에게 보내자 퇴계는 이에 대한 발문을 써서 신재에게 보낸다.
이에 신재의 「유청량산록」은 완성이 되는데, 신재는 이 완성본을 퇴계에게 다시 보낸다. 퇴계의 위 시는 바로 이 완성본을 보고
쓴 것으로 1553년의 일이다. 이 시는 퇴계의 호기로움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가 어릴 때 이곳에서 글을 배운데서 알 수 있듯이,
청량산은 퇴계에게 유가적 심성을 도야하는 어떤 공간이었다. 즉 구도(求道)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다음의 시조 역시 남명의 두류산과 퇴계의 청량산을 이해하는데 일정한 도움을 준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듯고 이보니 도화(桃花) 은 물에 산영(山影)조 잠겨셰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오 나 옌가 노라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峯)을 아니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야 헌사(獻辭)랴 못 미들 도화(桃花)ㅣ로다 도화(桃花)야 나지 마로렴 어주자(漁舟子) 알가 노라 가투의 「두류산가」가투의 「청량산가」
위의 두 작품은 그 첫 구절을 따서 각각 「두류산가」와 「청량산가」로 불린다. 그 작자가 각각 남명과 퇴계로 알려져 있으나
앞의 것은 남명의 제자 도구 이제신의 작품, 뒤의 것은 신재 주세붕의 작품으로 의심받고 있다. 그러나 많은 시조집에서 이
작품을 남명과 퇴계 소작으로 보는 것은 시조집이 구전에 의해 수집된 자료집이며, 이 구전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들 시조에서
제시하는 거주지나 삶의 지향 등이 남명과 퇴계의 그것에 부합되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증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문화나 정신의 측면이 강조된 까닭이다.
남명의 「두류산가」비 「두류산가」는 두류산 가운에 중산리와 대원사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덕산의 양당(兩堂)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청량산가」는 예안에서 도산을 거쳐 청량산에 이르는 물굽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문학의 생성공간이 전혀 다르다.
두류산에서 흐르는 물줄기에 양당수가 있고, 청량산으로 가는 시냇가로 육육봉[36봉우리]이 있으니 초장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무릉’과 ‘도화’를 제시하여 유토피아를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지향점이 같다. 즉 두류산이나 청량산이라는
서로 다른 물리적 공간을 갖고 있지만, 이 두 작품은 같이 ‘무릉’이라는 정신적 공간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의 이러함은 이 작품이 누가 지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남명과 퇴계를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알게 한다. 바로 이 측면에서 두 작품을 다시 주목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남명과 퇴계의 제자들은 두류산과 청량산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것을 파악하는데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제자들의 문집을 살펴보면, 남명의 제자들은 두류산을 통해 스승 남명을 생각했고, 청량산을 통해서 스승 퇴계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산행은 스승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며, 또한 발자취를 따라 걷는 순례의 길이었다.
남명의 제자들은 지리산을 오르며 거대한 남명의 기상을 생각했고, 퇴계의 제자들은 청량산을 오르면서 진유(眞儒) 퇴계의 정취를 느꼈다. 다음 두 작품을 보자.
거대한 종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洪鍾無大扣 천고토록 마침내 소리를 내지 않는다네. 千古竟含聲 저 두류산을 보아라, 請看頭流山 산이 어찌 하늘로 인해 우는 것을 배우리. 山豈學天鳴
누가 독서를 유산에 잘 비유하였던가, 誰把遊山曾善喩 흡사 성현의 책을 모두 읽은 듯하네. 恰如窮讀聖賢書 백층으로 용맹정진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고, 百層勇往知由已 하나의 거울처럼 맑은 것을 그에게 물어보네. 一鑑淸來試問渠 가슴은 시야와 함께 넓어져 구름이 흩어진 뒤 같고, 胸與眼寬雲散後 기운은 정신과 함께 고요하여 달이 처음 뜨는 듯하네. 氣兼神靜月明初 언제 진실로 아름다운 경계에 이를 수 있으랴, 何時得到眞佳境 수많은 골짜기와 봉우리가 모두 나에게 달려 있다네. 萬壑千峯摠在余
앞의 작품은 진주에서 살았던 서계(西溪) 박태무(朴泰茂, 1677-1736)의 「경차남명선생성자운(敬次南冥先生聲字韻)」으로,
남명의 저 유명한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를 차운한 것이다. 남명이 이 작품에서 ‘보아라 천석들이 종을(請看千石鍾),
큰 북채가 아니면 쳐도 소리 나지 않는다네(非大扣無聲). 어찌 두류산이(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 것과 같으리?
(天鳴猶不鳴)’라고 하면서 거대한 기상을 노래하고 있듯이 서계 역시 남명과 같은 정신세계를 꿈꾸며 두류산은 하늘이 울어도
절대 울지 않는다고 하였다. ‘저 두류산을 보아라, 산이 어찌 하늘로 인해 우는 것을 배우리.’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청량사에서 본 청량산 뒤의 작품은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의 「경차독서여유산운(敬次讀書如遊山韻 )」으로,
퇴계의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을 차운한 것이다. 퇴계는 1564년 이문량, 금보, 금란수, 김부륜, 이덕홍 등과 청량산을 유람하게
된다. 퇴계의 제자들은 주자가 장식(張軾) 등과 남악을 유람하고 창수시를 지은 고사에 따라 스승을 모시고 산을 오르며 시를
지었다. 즉 퇴계가 ‘책을 읽는 것이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더니(讀書人說遊山事), 오늘 보니 산을 유람하는 것이 책을 읽는
것과 같네(今見遊山事讀書)’라면서 시를 짓자 이에 따라 제자들은 여러 편의 작품을 지었던 것이다.
위의 시에서 설월당은 스승이 그러하였듯이 유산을 독서에 비유하며 구도를 향해 스스로 힘쓸 것을 다짐하였다.
남명과 퇴계, 혹은 퇴계와 남명. 이들은 두류산과 청량산을 중심으로 기상을 드러내기도 하고 독서와 학문을 즐기기도 했다.
더욱이 퇴계는 남명의 「유두류산록」을 읽고 독후감을 쓴 적도 있다. 이 글에서 퇴계는 ‘그가 별난 것을 높이고 남다른 것을
좋아하여 중도를 찾기가 어렵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아! 예로부터 산림의 선비들은 흔히 이와 같다.
이 같지 않다면 남명답지 못한 것이다. 그 절박(節拍)의 기미(氣味)가 나오는 바는 다소 알 수 없는 곳이 있다.
이는 뒷사람 가운데 반드시 판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남명의 비유가적(非儒家的) 요소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남명의 여행기가 ‘지론’ 혹은 ‘천고영웅의 탄식’이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비판과 인정이라는 높은 단계의 화해를 퇴계의 남명 비평으로 통해 알게 된다.
(선비문화 2009. 03 남명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