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여름
KISA 단기선교훈련을 다녀와서
중국 실크로드팀 1조
M.Div 3차 최 영 기
중국 선교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내가 중국 단기선교훈련을 가게 된 것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학교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걸려있는 큰 플래카드는 내가 오고 갈 때마다 KISA의 단기선교훈련을 살펴보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저곳에 가는 사람들은 고생스럽겠다 그리고 한편으로 좋은 경험되겠다하는 마음만 가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난 해 필리핀으로 단기선교여행을 다녀왔던 한 자매의 선교여행 후 좋았던 경험을 우연히 듣게 되었고 어느 사이에 나도 한 번 가보았으면 하며 선교여행을 꿈꾸고 있었다.
그 후 6월 1일쯤 나도 중국 선교여행을 가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고 6월 2일 손순철장로님께 중국 선교여행을 가고 싶은데 가능한지에 대해 여쭈었더니 여권, 비자 등의 문제와 비행기표 예약 등의 문제가 있어 장담할 수는 없지만 가능할 것 같다고 조금은 낙관적으로 얘기해 주셔서 희망을 갖고 중국 선교여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 동안 열심히 중국어 및 중국교회의 이모저모를 공부하며 준비하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늦게 합류하였기에 준비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고 또한 계속되는 기말고사 및 밀린 Report 등으로 인해 그 이후에도 이 단기선교여행에 대해 제대로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하였다. 다행히 손장로님께서 그 동안 받았던 자료 등을 복사토록 해주셨고 같은 조에 편입시켜 주시는 등 큰 걱정 없이 이 선교여행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여행 당일 기말 Report 마무리로 밤샘을 하다 새벽 5시까지 마치고 1시간만에 짐을 싸서 6시 15분 경에 약속장소인 서울신대 교문 앞에 모였다. 학교 근처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공항버스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8시가 조금 넘었다. 처음 가보는 김포공항에서 일행들과 함께 팀원들을 점검하고 오지 않은 사람들을 체크하였다. 손장로님의 도움으로 6만원정도를 환전하고 화물칸에 넣을 짐도 부치고 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출국 수속을 밟는 데에도 해외여행객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까다롭게 심사를 해서인지 많은 시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결국 비행기 출발 예정시각인 10:00시를 좀 넘긴 10:10분 경에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고, 비행기는 10:20분 경에 김포공항을 이륙하였다. 창문 쪽에 앉지 않아 아래쪽을 다 볼 수는 없었지만 비행기 안에서 바라보는 창공은 낯설기도 하거니와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서안의 함양(咸陽)국제공항에 북경시각 기준 11:50(서울 기준 12:50)에 도착하였다. 함양국제공항은 작고 아담했으며 근무하는 공안과 공무원들은 엄격하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입국심사를 간단히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우리들을 마중 나온 중국 선교사님이 계셨다. 선교사님 안내로, 빌려온 소형버스에 다 함께 타고 우리들의 목적지인 서안시내로 향했다. 도로와 풍경은 한국과는 달랐으나 도로는 한산한 편이었고 주변 풍경은 한국이 구릉지가 많은 것과는 달리 끝없는 평야가 양쪽으로 펼쳐졌다.
1시간쯤 달려서 시내를 통과하여 서안시의 남쪽에 위치한 외국어대학의 Guest House에서 짐을 풀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처음 먹어보는 중국 음식은 면 종류였는데 스파게티와 비슷하였다. 가격도 4-5元 정도로 저렴하였다. 중국 음식이 기름기가 많다고 들었는데 별로 기름기도 없어 보이고 배도 고파서 우리들은 깨끗하게 잘 먹었다. 오후 3시에는 서안이 자랑하는 역사박물관을 구경하였다. 역사박물관은 시내 중심에 있었는데 역사박물관까지는 택시를 타고 갔다. 그런데, 그 택시는 70년대 현대가 처음 생산한 소형차인 pony와 비슷하였다. 그리고 운전석의 앞좌석과 뒷좌석에는 철망이 쳐져 있었다. 10분 정도 걸렸는데 7元의 차비를 내고 역사박물관에서 도착하였다. 날씨는 우리나라 보다 훨씬 덥고 건조하였다. 흥분된 마음으로 다들 처음 여정인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1시간 30분 가량 역사박물관을 둘러보았는데 문화유적들이 2, 3층까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박물관을 보면서 중국인들이 스케일 크고 호방한 성품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1층에는 그림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한국의 동양화와 그림의 형태는 비슷하였지만, 한국화가 정적이고 은둔적이며 오밀조밀한 맛이 난다면 중국화는 패기와 힘이 넘치고 호쾌하고 활동적인 맛이 두드러졌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며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밖으로 나왔다. 저녁 무렵이었지만 여전히 날씨는 무더웠다.
저녁 시간에는 선교사님의 가정교회 청년들과 조별로 나누어서 식사와 교제를 하였다. 우리 팀도 손선생님과 여진자매와 같이 한 조가 되어 중국 청년 3명과 같이 식사하러 갔다. 양고기가 들어간 면을 시켰는데, 밀가루 빵을 잘게 각자 자기 것을 직접 손으로 찢어서 번호표를 달아 각자 것을 구분하여 요리한 후 가져다주었다. 요리 시간이 꽤 길었으므로 그 동안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중국어(漢語)와 영어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중국 고전어를 전공하는 장씨 성을 가진 자매와 가장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자매는 영어도 꽤 능숙하게 하였고 대화에도 적극적으로 임하여 여러 질문도 하고 또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20시쯤에는 숙소로 돌아와 조별로 함께 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더 나누었고 즐겁게 보내다가 헤어졌다. 학부 자매들도 중국인 형제자매들과 의사소통하며 사귀는 것에 신이 났으며 재밌어 하였다. 미약한 영어실력, 중국어 실력이지만 같은 청년이며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울타리만으로도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또 서로 간의 호감이 쌓이는 것을 느끼며 즐거워하였다.
조별 모임을 22시쯤에 다시 가졌는데, 서로 이 Vision Trip을 통해 목표를 점검하고 기도해 주며 한 아픈 자매를 위해 안수 기도해 주고, 내일은 더욱 힘차게 살 것을, 새로운 이곳에 그리스도인의 향기와 사랑을 전하고 살기를, 그리고 새로운 중국 형제자매들과도 더욱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길 기도하면서 서안에서의 첫날밤을 맞이하였다.
6월 21일 (수) 이튿날이 밝았다. 아침 Q.T를 조별로 모여서 하였는데 본문은 시편 139편이었다. 중심내용은 '날 세밀하게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었다. 이 말씀내용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체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전에는 한국인 유학생인 서선생님의 통역으로 중국인인 껑꾸형제의 간증 및 중국교회 발전사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 형제의 간증에 의하면 중국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모택동도 들어 쓰셔서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책 아래 북경중국어로 모든 지역에, 모든 소수민족까지도 통일되어 복음을 이젠 더 쉽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인구도 현재는 중국공산당 집권 전인 70만의 100배 이상 성장한 700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교회가 고난 속에서도 발전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껑꾸형제님의 간증을 통해 언제나 어디서나 동일하시고 공평하시며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오후에는 서안의 유명대학 중의 하나인 교통대학으로 향했다. 교통대학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안내도의 크기에 놀랐다. 안내판의 크기가 우리나라 일반적인 대학의 안내도의 대여섯 배나 컸다. 또한 대학도 굉장히 광활하였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건물들로 빼곡한 데 비하여 여기는 어린이대공원 마냥 넓었다.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 중국 학생들을 보았다. 물 한 통씩을 옆에 놓고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구경하다 나와서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남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며 관광차 왔다고 하고 준비해간 쉬운 영어로 된 간단한 5개 항목의 질문지를 중국어로 번역해달라고 하며 말을 붙였다. 만 30세인 그 청년은 열공학과에 재학중인데 유명한 엔지니어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친절하게 질문지 외에도 다른 것까지 중국어를 영어로 설명해가며 열심히 알려주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여기서는 마음대로 복음을 전할 수 없기에 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와 17시 30분쯤 헤어져서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조수아선생님 댁에서 수요예배를 드렸다.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찬양을 드리며 기도하고 김선생님이 우리말로 설교를 하고 조수아선생님이 중국인 청년들이 들을 수 있도록 통역하였다. 중국인 청년들은 김선생님의 위트 섞인 설교에 재미있어 하면서도 진지하게 들었다. 교제시간에는 수박을 함께 먹으며 주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였다. 그리고 자매들은 율동을 알려주며 서로 친밀한 교제시간을 가졌다. 예배를 마치고 10시쯤 되돌아왔다. 중국인 친구들 중 마리리, 리 펑 등은 우리를 숙소까지 바래다주며 따뜻한 정을 보여주었다. 우리 팀원들 모두 중국인 형제자매들이 보여주는 따뜻한 정과 사랑에 깊은 감동을 간직하며 둘째 밤을 맞이하였다.
6월 22일 (목) 사흘 째 날이 밝았다. 오전에는 호주출신의 스미드선교사와 사업을 하며 교회를 이끄는 황선생님의 간증을 들었다. 스미드선교사님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과 우리의 삶은 급진적이고 변혁적이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인상적이었다. 황선생님은 천안문사태이후 지식인의 꿈이 깨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사업과 학교를 통해 그리고 노인들을 위한 병원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저녁에는 2박 3일간의 긴 기차여행을 출발하였다. 서안 북부에 위치한 기차역까지는 서안 남부에 있는 숙소로부터 40여분이 걸렸다. 조선생님과 중국인 친구 라이언이 역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서안 기차역에는 명절 때 서울역에 모여든 인파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중국이 인구가 많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역 화장실은 유료이어서 1인당 3마오를 주고 이용하여야 했다. 밤 9시가 넘었는데도 인파의 열기로 실내온도는 훨씬 높아져 역 안은 무척 후텁지근하였다. 생전 처음으로 하는 장기간 기차여행이라 어떻게 준비할지 몰라 걱정하였지만 일단은 뜨거운 물을 받아먹을 수 있도록 김선생님을 따라 물통을 하나 산 것으로 준비를 마치고 저녁 9시 30분 기차를 타기 위해 승강장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려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승강장을 향해 갔다. 기차는 양편으로 두 대가 함께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왼편에 있는 기차인 줄 알고 갔다가 우리가 타려는 기차가 아니어서 짐을 들고 다시 오른편의 기차로 옮겨 탔다. 여승무원이 승차권과 플라스틱으로 되어있는 좌석표를 교환해주었다. 기차는 상·중·하 3층의 침대 칸, 그리고 창문 쪽으로 작은 간이탁자와 접혀지는 간이의자가 부착되어 있었다. 우리들이 지정된 좌석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한바탕의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와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열심히 언쟁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왜 이렇게 큰 소리로 싸우나 속으로 생각하면서 이번 기차여행도 꽤 고생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를 바꿔 주었던 여승무원이 들어오더니 싸우는 그 아주머니를 말렸다. 계속 투덜거리는 아주머니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점점 잠잠해졌다.
기차 안에서의 첫날 밤, 취침시간이 11시라고 하여 얼마 남지 않는 시간 동안 짐을 정돈하고 필요한 것을 꺼내놓고 중국어공부를 하려고 하였다. 옆자리 손님 자리를 나는 바꾸어 앉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일행과 붙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간이탁자에서 앉아 계시던 아저씨가 내가 지금 앉아있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면서 함께 가는 친구들이 있으니 좀 바꿔 달라는 양해를 구하였더니 쾌히 허락하셨다. 더구나 중국어로 이름을 여쭈었더니 이름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내가 보고 있는 책에 있는 구절들을 읽어주며 내 발음을 친절하게 지도해주셨다. 11시 20분쯤 되니 실내등이 꺼져 일기를 쓰다가 덮고 기차에서의 첫 날 밤을 보냈다.
6월 23일 나흘 째 날이 밝았다. 6시에 일어나서 밖을 보니 밖은 온통 황토 색깔의 광야였다. 넓고 넓었지만 그 곳에는 물이 없어서인지 나무와 풀이 자라지 않는 메마른 황무지였다.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모두들 놀라며 기차 안에서의 첫날을 시작하였다. 세면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조별(組別) Q.T를 하였다. 고린도전서 9:19-23의 말씀은 내가 신학 공부를 하게 된 중심 말씀이었는데 선교여행지에서 이 말씀을 보니 말씀이 더 훨씬 구체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아침에는 한국에서 준비해간 햇반과 사발 신라면을 먹었다. 다들 먼 이국에서 대하는 반가운 고국음식이라 고국 땅을 생각하며 맛있게 먹었지만, 이후 한국음식을 너무 많이 준비해 왔으며 이는 선교여행자로서의 기본적 자세에서 벗어났다는 김선생님의 호된 질책을 받아야만 했다.
아침을 먹고 우리는 토론학습을 위해 NCD를 읽고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역자를 세우는 지도력, 은사적 사역, 열성적 영성, 기능적 조직 등 8가지 자연적 교회성장의 질적 특성 중 전반부를 토론하며 그 의미를 배웠다. 그리고 기차 안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서 처음 탔을 때 큰 목소리로 싸우던 아주머니와도 친해져서 아주머니가 자신이 가지고 계시던 과자와 해바라기 씨 등을 우리에게 주시며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여승무원은 매우 부지런하여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객실 안을 정리정돈하고 깨끗이 청소하였다. 우리들이 지저분하게 객실 바닥을 어지럽혀도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으며 깔끔하게 치워주시곤 하였다. 중국인의 저력은 저렇게 묵묵히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에게서 나오는구나 하며 감탄하였다.
현지 적응을 위해 기차 안에 있는 다른 중국인들과의 교제 훈련을 하였다. 처음에는 바로 옆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였다. 할머니 친정 가족이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라고 그러시는 것 같은데 중국어 실력이 얕아서 확실하지는 않다. 아무튼 우리들에게 무척 호의적으로 대해주셨고 나중에는 중국어로 된 4영리를 읽어달라고 하였더니 거부감 없이 끝 기도문까지 잘 읽어주셨다.
점심은 기차 앞부분에 있는 식당 칸에서 먹었는데, 맛있게 먹을 정도로 음식 맛도 깔끔하고 좋았지만 값이 인당 30원(元)으로 무척 비쌌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기차 내에서 사발면으로 식사를 때우고 있는 것이 이해되었다. 점심 먹고 관계 훈련의 두 번째로 옆 칸에 있는 40대 정도의 아저씨들 만났는데 그들도 역시 즐겁게 우리들을 맞이해 주셔서 소개도 하며 친분관계를 맺었다. 같은 조원인 진희자매, 형숙자매와 함께 갔는데, 중국어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진희자매는 중국인에게 자기 이름과 한국 출신이고 지금 우루무치로 여행 중이라는 간단한 몇 마디를 계속 하며 중국인에게 다가갔고, 형숙자매도 영어를 섞어가며 중국인과 친해 가는 데, 나는 (준비를 하지 못하였으므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녁 무렵엔 모두 함께 호경형제의 기타 반주와 자매들의 율동을 곁들인 찬양을 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옆에 있던 많은 중국인들이 신기해하며 호기심 있게 우리 일행들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어떤 아저씨는 우리 바로 옆 테이블까지 오며 즐거워했다. 복음을 노래하는 즐거운 마음은 음악을 통해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중국인들에게까지도 자연스럽게 전해지고 있나 보다. 기차 안에서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밤은, 이렇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중국인의 열린 마음을 확인하며 기뻐하는 마음과 내가 중국어 등 준비하지 못한 것을 여실히 실감하며 더욱 준비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두 가지 마음이 교차하며 어둠이 짙어지는 황토사막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
6월 24일 닷새 째 날이 밝았다. 새벽부터 분주히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일어났더니 정미자매의 생일이라며 함께 생일 축하를 해주자고 하여 중국어로 '생일 축하합니다'를 부르기로 하고 화장실에서 정미자매가 나오기를 모두들 기다리며 있었다. 마침내 정미자매가 등장하였고 모두들 함께 목소리를 맞추어 중국어로 '생일 축하합니다'를 불러주었다. 간단히 씻고서 조별로 Q.T시간을 가졌다. 본문은 '요나서'였는데, 이방백성들의 구원을 보며 '요나'의 분노하는 모습과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대조를 이루며 하나님의 모든 민족에 대한 사람이 크게 와 닿았다. 그리고 요나가 박 넝쿨로 인해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가 박 넝쿨이 벌레로 없어지니 죽기를 자청하는 모습을 보며 나의 박 넝쿨이 무엇인지 묵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N.C.D 공부는 영감있는 예배, 전인적 소그룹, 필요중심적 전도, 사랑의 관계 등 8가지 자연적 교회성장의 질적 특성 중 어제 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하면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토론하며 배워 나갔다. 다들 열정적으로 얘기하며 그 주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조금은 책에서 의도하는 내용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었으나 오히려 잘못 이해하였던 여러 가지 특성들에 대해 셀 교회 운동이 갖는 특성이 무엇인지 그 의미하는 바를 새롭게 세우는 소중한 시간들이 되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관계 훈련의 세 번째로 종혁이와 한 조가 되어 특등실에 있는 카자흐족 사람을 만났는데, 이닝에 산다고 하면서 우루무치에서도 18시간을 버스 타고 가야 한다고 알려 주어서 함께 갔던 종혁이와 함께 중국은 넓다는 것에 놀랐다. 대화를 통해 우리들이 알고 싶어하는 여러 주요 정보들, 우루무치의 종족 구성, 기후 그리고 명소와 음식 등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삼일 째 바깥 풍경은 점차 주변에 푸른 빛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오후에는 양 떼들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곳은 오아시스 지역이라고 한다. 역시 푸른 식물이 자라야 그것을 먹고 자라는 동물이 살 수 있고 식물과 동물이 살 수 있어야 인간이 살 수 있나 보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의 역사처럼 말이다. 드디어 포도의 중국 명산지라는 트루판을 지나 20시 20분 우리들의 목적지인 우루무치에 도착하였다.
밤 8시 반이 넘었지만 우루무치는 대낮처럼 밝았다. 베이징과 시간차가 2시간이 나고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 무렵이었기 때문이겠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또 한 번 놀랐다. 부산 역과 비슷한 우루무치 역 앞에서 5분 정도 기다리니 그곳에서 어학 공부중인 조선생님이 만날 수 있었다. 우루무치 역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우루무치가 서안과는 달리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의를 듣고 조선생님이 준비한 소형 버스에 올라탔다. 신장에서 가장 큰 대학이라는 신장대학교내의 숙소인 후빙거(湖賓閣)로 향했다. 후빙거까지는 15분 가량 걸렸다. 가는 도중 길거리에는 유난히 공안들이 많이 띄었습니다. 시내버스에 타고 있는 승객들에게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했지만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역시 이곳은 심상치 않은 차가운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후빙거에서 여장을 푼 후 조선생님의 우루무치에 대한 안내를 들었다. 신장위그르지역은 면적이 중국의 1/6이며 남한 면적의 17배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이며 유전 등 자원이 풍부하다고 한다. 전도하다 걸리면 정치범에 해당되며 최근에도 한국인이 전도지를 돌리다 공안에 의해 조사 받고 쫓겨난 가정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주셨다. 범죄율이 높고 소매치기도 많다는 것과 한족이 94%를 차지하고 소수민족의 정부 및 한족에 대한 반발심이 크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사실을 알려주셨는데, 신장위그르만의 특수한 갈등구조를 알 수 있었다. 신장 후빙거에서의 첫날밤은 2시간의 시간 차 때문에 12시가 넘어서 늦게 잠이 들었다.
6월 25일 엿새 째 날이 밝았다. 선교여행에서 맞이하는 첫 주일이었다. 우리는 예정대로 삼자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며 참관하는 날이었다. 시간차가 베이징과 2시간이나 났지만 이곳의 습관대로 베이징 기준시각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06시 50분에 기상하여 간단히 세면을 마치고 Q.T를 하고 8시 10분에는 다 함께 모여 찬양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8시 40분 아침식사를 이 곳 사람들처럼 간단히 '낭'이라는 한국의 호떡과 비슷한 것으로 해결하고 8시 50분 출발하였다. 남문 근처에 있는 삼자교회는 간판은 기독교당이라고 써 있었고 정문은 닫혀있고 옆문을 통해 들어갔다. 예배당은 매우 커서 6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4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3,4층이 대예배당이었고 2층은 C.C.T.V가 설치되어 3층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를 생중계하며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였다. 마치 여의도성전처럼... 그리고 9시 15분쯤 도착하였는데 우리가 들어갈 때에는 이미 90% 이상의 좌석이 다 차있었다. 찬양인도자는 찬양을 한 소절 한 소절씩 계이름으로 먼저 부르고 회중들은 따라 부르며 배워 나갔다. 그리고 나서 가사를 또 한 소절씩 배우는 것이다. 주일 낮 예배시간에 그렇게 찬양을 배우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시편 1편을 교독하고 대표기도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그리고 찬양 그리고 설교 이런 순서는 한국교회의 예배와 매우 비슷하였다. 단지 예배시간이 한 번에 3시간으로 드리는 것이 특이하였고 설교도 1시간 반 가량이나 된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저는 설교를 다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간간이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등의 몇 단어만 알아들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중간에 저는 졸립고 또 졸았지만 몇몇 회중들은 내내 열심히 적기도 하였다.
3시간의 긴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을 나오니 예배당은 빠져나오는 인파와 예배당 앞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 등으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주로 옷 장사들이었다. 이후 우루무치의 대형백화점인 천산백화대루(天山百貨大樓)를 가 보았다. 백화점에는 한국 유명백화점처럼 많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값이 비쌌다. 화장품 코너에는 한국화장품과 한국모델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백화점을 나와 신장지구 해방비문이 세워져 있는 인민광장을 보고 가장 값비싼 호텔 하루 밤 투숙요금이 12,800元에 달하는 홍콩계 자본으로 세워진 海德호텔에서 잠시 쉬고 시내 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그 음식점에서 가장 저렴한 메뉴인(저희들한테는 비싼 식사였지만) 28元 정도 하는 Pepper Beef Steak를 먹었는데, 오래 만에 입맛에 맞는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샐러드를 무료인 줄 알고 두 접시를 자매들이 더 시켰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샐러드도 별도로 계산되어 반찬(Side dish)도 더 주문할 때는 가격을 고려해야...
점심 식사 후에는 이슬람 사원과 전통시장들을 둘러보았다. 이슬람의 모스크 사원도 있어서 문 앞에까지 가 보았습니다. 그러자 한 노인이 나와서 이슬람교도이냐고 물었다. 손선생님이 저희들의 대표로 '아닙니다. 저희들은 한국에서 온 관광객입니다.'라고 하자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고 제지하여 내부는 구경할 수 없었다. 전통시장에는 장식용 칼과 옷, 음료수 등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다. 장식용 칼은 위그르 남성들이 힘과 권위의 상징으로 전통적으로 애용하는 장신구라고 한다. 장사하는 사람 속에는 초등학생 나이의 어린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하여 생업에 몰리는 아이들의 실상을 볼 수 있었다.
시장을 둘러 본 후에는 홍산공원과 농업대학에 갔다. 홍산공원은 우루무치의 대표적인 공원으로 입장료가 10元이었다. 휴일이어서 그럴까? 공원 안에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가족들끼리 또는 젊은 남녀들이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연못도 있고 보트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산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 양 옆으로는 수도관이 설치되어 있고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면서 나무와 풀에게 수분을 공급하고 있었다. 정상은 해발 910M 높이인데 우루무치 시가지를 한 눈에 다 볼 수 있었다. 시가지를 볼 수 있는 바위에 올라가 저희 일행은 찬양하고 이 땅이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복된 곳이 되기를 기도하였다.
내려오면서 일행들은 목이 많이 말랐던지 물을 많이 마셨고 새로 물을 사 마시기까지 할 정도였다.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작은 개울 옆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런데 개울물 안에는 깨진 병조각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병조각들이 있다고 하자 나뭇잎이라고 일행중의 한 명이 말했다. 저는 병조각임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아이들에게 위험할 것 같아 병조각들을 건져냈다. 그러는 사이에 일행은 밑으로 사라지고 없어졌다. 10분쯤 뛰고 걷고 내려가니 다행히 일행이 나무그늘이 있는 넓은 잔디밭에 앉으려고 하였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내려간 것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일행에서 이탈한 내 잘못도 크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합류하였다.
저희 일행은 함께 모여서 게임도 하고 놀다가 음료수 내기 3/6/9 게임을 하였는데, 3명을 뽑는 데 제가 두 번이나 걸려 6원을 벌금으로 냈다. 게임에 약하기도 하거니와 Go/Back/Jump 게임과 유사하여 헛갈렸다. 그렇지만 벌금은 기쁘게 냈다. 내려오면서 호경형제와 자동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일제차가 이 곳 우루무치에도 매우 많은 곳에 공감하며 차에 관한 얘기를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현주자매와도 가정에 관하여, 비전에 관하여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농업대학은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1952년에 설립된 농업대학은 그동안 우루무치의 많은 지도자를 배출한 유명한 대학이었는데 교정도 넓었고 오래된 나무들도 많았다. 조별로 나누어 친구를 사귀고 친구들로부터 내일 모레 출발할 지역에 관한 정보들도 알아와야 하는 사명을 받았다. 저희 조는 다시 둘로 나누어서 진희, 형숙, 소영 여성 트리오 자매가 한 조가 되고, 손선생님과 제가 다른 한 조가 되어 우리의 파트너를 찾았다. 교정은 넓었기 때문에 손선생님과 저는 일단 한 번 교정을 둘러본 후, 중앙 건물 앞 잔디밭에서 책을 읽고 있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손선생님은 그와 소개를 하고 저도 간단히 소개를 해주었다. 손선생님은 그 청년학생과 여러 대화를 하였다. 중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저는 옆에서 대화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저녁 8시 30분까지 후빙거에 들어오라는 김선생님과의 전체 일행과의 약속이 있었지만 대화는 길어져서 8시에 진희자매 일행과 만나기로 한 교문으로 가서 진희자매와 만났는데 진희자매와 만난 친구들도 이야기가 길어지고 함께 식사하자고 하여 우리 조는 새로 알게 된 친구들과 함께 모였다. 교문 앞의 음식점에서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도 많이 이야기가 오갔으나 저는 이야기를 조금 밖에 하지 않았다. 그들이 영어에는 서툴고 또 중국어를 잘 하시는 손선생님이 옆에 계셔서 능숙한 중국어를 하시므로, 서툰 중국어마저 할 의욕이 사라졌다. 제가 그들에게 몇 마디 간단한 영어를 하면 잘 못 알아들으므로 손선생님이 통역을 해주어야 했고 손선생님은 다른 대화할 것이 많으므로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두 저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른 좌석에서는 중국어로, 또는 영어로 간단하지만 의사표현을 시도하였지만 저는 만족할 만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9시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그들과 헤어져 숙소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손선생님이 나에게 좀더 자세히 통역을 해주고 배려해 주었으면 하는 원망도 생기고 또 한 편으로는 내가 너무 준비 없이 와서 고생하는구나 하는 생각과 내가 중국에 왜 왔지 하는 근본적인 회의까지 여러 가지 마음이 들어 착잡해졌다.
신장대학에 도착하여 후빙거로 가기 위하여 교정을 통과하여 걷는 데 휴일이라 많은 시민들이 교정에서 거닐고 있었다. 한 시민 일행이 애완견 두 마리와 함께 가는 데 애완견 두 마리가 서로 심하게 짖으며 싸우는 것을 그 시민이 한 마리를 부둥켜안으며 떼어놓고 있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사람도 사실 속마음을 감추어서 그렇지, 저렇게 서로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물은 숨길 게 없으므로 저렇지만 인간은 그것을 감추는 것이 우습게 여겨졌다. 그리고 교실 옆을 지나가는 데 9시 30분이 넘었는데도 교실은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렇게 저들은 열심히 밤늦도록 공부하고 있는데 먼 곳에 와서 나는 작은 감정적인 동요에 휘말려서 기분 상해 있다니 제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좁은 마음을 가졌구나 하는 반성이 일어났다. 미리 준비하지 못함으로 인한 불편과 괴로움들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쉽게 해결하려 하고 그것을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나 보다. 그런 반성을 하며 신장에서의 두 번째 밤을 맞이했다.
6월 26일 (월) 이레 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우루무치의 명소인 천지에 가는 날이다. 8시 45분 대절한 소형버스를 타고 조선생님의 가족, 그리고 다른 한국인 가족과 함께 천지로 향했다. 도심을 빠져나가자 도로 옆으로 스프링클러를 통해 수분을 유지하는 잔디 등을 다시 목격하였고 또 다행스럽게 농작물들도 많이 자라고 있었다.
산 어귀로 들어간 지 15분쯤 지나자 냇가는 물도 많이 흘렀다. 그런데 산에는 전혀 나무들이 자라지 않더니 그 물 흐르는 냇가를 따라서는 나무들이 줄지어 자라고 있었다. 시편 기자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하는 그 의미를 실감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한국이라면 물이 비교적 풍부하므로 산이든지 들판이든지 어디서든지 나무가 잘 자라지만, 이 곳에서는 다른 데서는 자라지 않고 이 물이 흐르는 냇가에서만 자라고 있는 것이 시편 기자의 정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냇가 옆으로는 곳곳에 유목민들이 몽고빠우라는 양가죽으로 만든 원형 천막집에 살고 있었다. 도로에는 200여 마리의 산양을 몰고 가는 원주민들을 볼 수 있었고 산 속 깊이 들어올수록 산에 풀은 더욱 많아졌다. 10시 45분에 드디어 매표소에 도착하였고 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11시 05분에 마침내 해발 1910m, 남북 3.4Km, 동서 1.9Km의 거대한 천지 호수에 도착하였다. 천지는 계곡을 중심으로 침엽수림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점심은 조선생님 가족이 준비한 김밥과 김치 등을 아주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김치를 여기서 먹고 있다는 것에 모두들 굉장히 즐거워하였다. 말을 타고 다니며 관광객을 끌려는 위그르인들도 있었고 그것을 막는 공안도 보았다. 개인적인 시간을 줘서 자연관찰을 하고 시도 써 보며 묵상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저는 자연을 관찰하는 시간을 갖다가 한 친구가 다른 선물보다 중국가면 돌 하나 부탁한다고 했던 생각이 나서 선물해 줄 만한 돌을 골랐다. 작은 돌맹이 대여섯 개를 가방에 넣었더니 가방이 너무 무거워졌다. 모이는 시간이 되어 함께 모여서 신장에 와서 관찰한 것을 정리하고 함께 그것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 나누니 서로가 몰랐던 부분들을 많이 알게 되어 유익하였다. 특히 삼자교회의 예배형태에 대한 서로 조금은 다른 이해를 함께 토론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17시 천지를 출발하여 시내로 돌아왔다. 시내로 오는 도중에 주무시고 계시는 김선생님을 사진 찍기 위하여 잘 찍히지 않는 사진기로 고생하면서도 모두들 즐거워하는 모습이 남는다. 저녁에는 조별로 정탐할 지역을 선정하였는데, 저희 조는 처음에 치타이로 결정되었으나 진희, 형숙자매의 이닝을 가자는 요청으로 이닝으로 변경되었다. 이닝은 우루무치에서도 더 서쪽으로 17시간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세 지역 중 가장 먼 도시였는데 국경 인근지역이어서 위그르인 등 소수민족이 더 많이 산다고 하였다. 제 마음 속으로는 치타이에서 이닝으로 바꾸는 것 보다는 가까운 치타이로 가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랬지만, 자매들이 원하는 곳으로 하자는 손선생님의 말씀으로 인해 의견을 통일해서 이닝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잠이 들었다.
6월 27일 (화) 여드레 째 날이 밝았다. 제가 1조의 총무를 맡았기에 2, 3조의 총무인 종혁형제와 성민형제에 함께 차표 예약을 하러 조선생님과 함께 갔다. 쿠알라로 가는 성민형제는 제일 먼저 간 남부터미널에서 12시 출발하는 차표를 끊었다. 그러나 서부터미널로 간 우리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버스표를 끊어주지 않았다. 치타이로 가는 종혁형제도 가서 바로 타면 된다고 하여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남아있던 일행들은 이미 떠날 준비를 다 마쳤다. 우리 일행은 다 함께 2조인 쿠알라팀과 함께 남부터미널로 가서 쿠알라팀을 살아 돌아오라며 격려를 하고 헤어져서 1, 3조는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서부 터미널로 갔다. 12시 15분쯤 도착하여 조선생님을 따라 우리 일행은 주차장이 있는 뒷문으로 들어갔다.
호객하는 버스 차장들이 많았다. 조선생님이 흥정한 이닝으로 가는 버스에 우리 조 다섯 명은 올라탔다. 자리는 두 사람씩 쓸 수 있는 2층 침대식이다. 자매가 3명이었으므로 한 명은 따로 있어야 했는데 진희자매가 제일 앞자리에 있는 1인용 침대를 언니답게 용감하게 사용하겠다고 하여 자리배치를 끝내고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좀 특이한 복장을 한 위그르인들은 뒤편의 좌석에 앉고 한족들은 앞쪽에 배치되어 앉아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딱딱한 분위기여서 자매들은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위그르인에게는 꼬마들이 있어서 꼬마들을 예뻐해 주며 위그르인들과 또 주변 사람들에게 진희자매가 사탕을 건네주었더니 사람들 모두 즐거워하며 분위기가 다소 화사해진다.
14시 15분이 되어서야 버스는 출발한다. 그 사이에 옆 좌석에 있던 한 한족자매가 표를 확인해봐야겠다며 데리고 나간 차장과 함께 없어지더니 출발 때까지 나타나지 않아 걱정이 많다. 그런데 터미널에서 10여분쯤 지나서야 길거리에서 기다리던 그 자매와 다른 승객들이 함께 탄다. 그 자매의 이름은 챠오정(曹靜)인데, 왜 여기서 타냐고 물었더니 자신도 모르겠다고 한다. 아마도 차가 개인 소유 차량들이고 따라서 승객 수에 따라 터미널에 사용요금을 내기 때문에 사용요금을 덜 내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뜨거운 들판을 향해 버스는 내달리기 시작한다. 이닝으로 향하는 이 지역 벌판에는 그래도 농작물들이 많이 자라고 있고 바람을 막는 나무들도 심어져 있다. 오후 4시 45분쯤 되어 첫 번째 정차하여 휴식시간을 가졌다. 지하수가 넘쳐서 시원한 물이 개울에 흐르는 곳이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얼굴도 씻고 물도 떠오고 수건도 적셔서 목에 두르고 건조함을 이겨내고자 하였다. 30분쯤 쉬고 5시 15분쯤 차는 다시 출발하여 6시 30분쯤 두 번째 휴식을 맞았다. 꽃과 나무를 파는 가게 앞이었는데, 운전기사는 나무를 하나 사왔다. 우리는 음료수를 나눠 마시고 6시 40분쯤 다시 버스는 출발하였다. 그 사이 옆에 있던 챠오정과 많은 대화를 하였다. 베이징의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영어통역가가 되고 싶다고 하여서 주로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챠오정의 옆좌석에 있는, 병원에서 카운터를 담당하신다는 아주머니와도 친해져서 음식도 나누어 먹고 저녁 7시 30분쯤 세 번째 휴식 때는 모두들 식사를 하는 데 챠오정과 함께 우리조원은 함께 식사를 하였다. 닭고기로 만든 요리인데 먹을 만 하다.
0시 15분 어느 주유소에서 네 번째 휴식을 가졌다. 밤이었는데 여전히 무덥다. 화장실을 다녀오며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버스 안에서의 잠을 청한다. 한밤에는 추워진다는 챠오정의 조언을 들으며 이불을 챙겨 덮으면서 잠이 들었다.
6월 28일 (수) 아흐레 째 날이 밝았다. 아침 6시 15분 최씨 아주머니가 내린다는 이야기에 눈을 떴다. 한 번 자기 집에 들르라고 저희들을 초대한 최씨 아주머니와 인사를 하고 다시 졸린 눈을 부치려고 하니 어느 새 버스는 이닝 시내에 들어서고 있다. 6시 50분 터미널에 도착하여 챠오정과 우리 일행은 함께 내렸다. 챠오정과 함께 저희 일행은 택시를 타고 5분쯤 가서 조선생님이 추천해준 友渲賓館(Friendship Hotel)에서 챠오정의 도움을 Check-in을 하고 챠오정은 2년 만에 가는 집에 가고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쉬었다. 챠오정은 저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우리들은 챠오정을 천사라고 불렀다.
숙소에서 몸을 좀 씻고 지도를 사서 함께 가 볼 것을 논의하여 가장 먼저 가까운 곳으로 인민공원으로 정하고, 저희들은 가까운 인민공원과 박물관으로 향했다. 인민공원은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있었는데 평일이고 오전이어서 사람들은 많지 않다. 공원에 들어가기 전에 모두들 배가 고프다고 하여 공원 가까이에 있는 사천식당에 들어가 만두 등으로 점심을 먹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그 식당집의 어린 소녀-초등학교 2학년이고 이름은 하정(何 )-을 보면서 이 아이들에게도 한국교회의 유년부처럼 그런 혜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을 먹고 입장료를 내고 공원에 들어갔다. 공원시설들은 좀 단순하였지만 오래된 나무들은 많이 있어 시원한 편이다. 특이한 것은 공원 곳곳에 소파가 놓여져 있고 소파 근처에 음료수를 파는 가게가 있는 점이 색다르게 느껴진다. 바닥에 빨간 천을 깔아서 더욱 색다르다. 중국인들은 빨간 색을 무척 좋아하나 보다. 버스에서도 택시에서도 빨간 천을 달고 다니는 등 빨간 색 선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빨간 색이 잡귀를 쫓아낸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흰색을 선호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이해하면 될까?
지구(地區)역사박물관은 공원 한 모퉁이에 있었는데, 박물관치고는 규모가 작은 편이어서 그냥 지나칠 뻔하였다. 박물관은 허름하였으나 기원전 110년 자료로부터 중국공산당이 신장지구를 해방하였다는 현대사까지의 역사가 다른 고대 유물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기원전 시대부터 수렵민족으로 사냥하는 모습 등이 암각화에 남겨져 있다. 그리고 당나라 시대로 보이는 기독교도가 성행하였다는 돌비석도 전시되어 있다. 역사박물관을 둘러본 후 전통시장을 보기 위하여 2원씩 주고 2개의 황바우처(자전거를 개조한 인력거)를 이용하여 시내에 도착하였다. 아직까지 인력을 이용한 상업적 교통수단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 곳은 평탄한 지대이기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곳은 자가용, 버스, 택시, 황바우처, 개인용 자전거 또는 오토바이 등 많은 종류의 교통수단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특수한 지역이다.
이닝 도심은 한산하고 깨끗한 편이다. 도심에서 버스를 타고 5분 정도 가서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강이며 이 도시의 젖줄인 이리허(伊犁河)를 보았다. 황톳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이리허는 넓고 큰 강이다. 한강보다 강폭은 더 넓고 규모가 커 보인다. 그러나 흐르는 수량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리허를 둘러보고 다시 도심에 있는 서점과 시장에 가 보았다. 도심 중앙에 있는 이닝에서 가장 좋은 신화서점에 들어갔다. 서점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깔끔하게 잘 진열되어 있다. 손선생님은 소수민족에 관한 책을 사고, 나는 중국 전국지도책을 샀다. 중국어 성경책도 사고 싶었지만 손선생님이 나중에 한국에 가도 있으니까 거기서 사도록 하라는 충고를 따라 성경책은 사지 않았다. 혹시 중국어 성경책으로 인해 무슨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르겠다는 대비도 있었지요. 도심의 시장을 둘러보았으나 공산품을 파는 별 다를 게 없는 시장이어서 우리 조원들은 실망하며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챠오정에게 연락하여 전통시장을 소개달라고 부탁하였다. 저녁 9시에 군인이라는 남동생과 함께 왔다. 전통 위그르시장을 안내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니 이리허 주변에 위그르인들이 많다고 하여 다시 이리허로 갔다. 한족과 소수민족은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데도 우리들의 부탁으로 위그르인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안내를 해준 차오정과 그의 남동생에게 감사하며 낮에 가 봤던 이리허로 향했다. 밤의 이리허는 훨씬 활기를 띠어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강가의 한 2층 음식점에 들어가 얘기를 나누었다. 차오정과 남동생에게 음식을 추천하라고 했더니 물고기 요리(이리허에서 잡았다는 민물고기)를 70원이나 주고 먹었다. 바다에서 먼 내륙지방인 이곳은 귀한 손님들에게는 해산물, 물고기를 대접한다고 하니 비싸게 먹었어도 이해해야 하겠지요? 챠오정 그리고 그녀의 남동생과 저희 일행은 작별인사를 헤어졌다. 챠오정의 착한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며 잠이 들었다.
6월 29일 (목) 열흘 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이닝에서의 마지막 날이지요. 6시 30분에 기상하기로 시계 알람을 맞추어 놓았으나 피곤하여 조금 더 잠을 자고 있었는데, 6시 50분쯤 진희자매 방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챠오정이 와 있다는 것이다. 챠오정은 저희 일행이 오늘 국경쪽에 있는 국제무역센타에 가기로 하였는데, 잘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저희가 떠나기 전에 오려고 아침 일찍 서둘러 온 것이다. 간단히 씻고서 챠오정을 맞이했다. 그리고 저희의 계획을 함께 말하였다. 국제무역센타를 보고 오는 것, 사리목호라는 이 일대 최대 호수를 보는 것, 그리고 버스를 함께 타고 오면서 저희 일행을 초대했던 최씨 아주머니 댁을 방문하는 것 등을 놓고 오늘 일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챠오정과 상의하였다. 결국은 국경부근의 국제무역시장과 사리목호 중 하나를 보고 그리고 나서 시간이 나면 최씨 아주머니 댁을 방문하여 저녁에 이닝으로 와서 우루무치로 출발하는 것을 계획하고 터미널로 향한다.
터미널에서 저희 일행은 장애물을 만났다. 장애물은 다름 아닌 외국인이므로 따로 차를 대절해야 하고 차 대절요금도 500元을 달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쉽지만 국제무역시장이나 사리목호 가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긴급히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의논한 결과 그동안 보지 못했던 전통시장을 보고 사범대학에 가서 학생들을 만나보는 것으로 정하였다. 먼저 사범대학에 가기 위해 터미널을 나와 가던 중 손선생님을 따라 골목길로 들어갔는데 길을 잘못 들은 것 같은 골목길에서 이닝의 생활실태 즉 병원, 시장, 유치원 등을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소수민족인 위그르인 할아버지를 만나 할아버지 댁에 들어가 거실도 구경하고 위그르 언어도 배우고 할아버지 친척분과 소수민족의 한(恨)도 듣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사범대학에서는 몽고족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일곱 분을 만나서 함께 얘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거기서 위그르어를 공부하는 한족 자매를 만나 교육제도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한족과 소수민족은 서로 초등학교 때부터 나누어 배우고 그러나 교사는 서로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로 한족교사가 소수민족 학생들을 가르치는 상황이겠지요?
사범대를 나와 학교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도심으로 버스를 타고 들어가 시내도로를 걷다가 우체국이 보여 함께 기념우표와 엽서에 부칠 우표도 샀다. 엽서의 경우 중국 국내는 전역이 4마오, 외국은 42마오의 우편요금이었다. 우체국을 나와 이슬람사원을 밖에서 구경하고 불교사원도 보고 청년가시장도 둘러보았다. 불교사원에서 국제무역시장까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는 전통시장이 있었다. 전통시장에는 채소, 과일, 의복 등 많은 가게들이 있다. 전통시장을 둘러보고 과일을 좀 사고 저희일행은 저녁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터미널로 가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저녁 8시 20분 갑작스럽게 퍼 붓는 비를 피하여, 이닝 올 때 보다는 좀더 고급스런 버스에 탔다. 저는 한 청년과 함께 자리를 사용하였다. 28세라는 그 청년은 심천에서 회사를 다니는데 고향인 이 곳 이닝에 와서 부모님을 뵙고 지금은 우루무치로 가서 우루무치에서 베이징으로 갈 것이라고 한다. 그 청년은 자신은 공산당원이라는 것을 말하며 제가 기독교인인지를 묻는다. 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거짓말 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중국이 더 세계화되길 바라고 있었고 세계 속에서 자랑할만한 뭔가가 있기를 바랬다. 그 청년과 얘기하며 친해졌고 버스로 가는 도중에 사리목호를 볼 수 있다는 그 청년의 말에 사리목호를 보기를 기다리다 그만 피곤하여 잠이 들었다.
6월 30일 (금) 열 하루 째 날이 밝았다. 피곤했는지 아침 내내 자다 눈을 떠보니 9시가 넘었다. 이닝을 출발한 버스는 10시에 창길(昌吉)을 통과하고 있다. 드디어 우루무치에 11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다. 어제 밤 9시쯤 출발했으니 14시간이 소요되었고 이닝 올 때의 17시간에 비해 3시간이나 단축되었다. 날씨가 비가 조금씩 와서 고온이 아니었기 때문에 약간이라도 운전하기 편하고 그래서 중간에 쉬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우루무치까지 다시 안전하게 도착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숙소까지 잘 찾아왔다. 가장 먼 곳으로 떠났던 저희 1조가 가장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먼저 왔기에 여유를 갖고 점심을 먹고 수퍼마켓도 둘러보며 오리온 초코파이, 신라면 등을 살펴보며 신기해하였다. 저녁 5시경에는 치타이로 갔던 3조도 돌아와 조선생님의 식사 초대를 받아 함께 갔다.
조선생님이 사는 집은 학교내 기숙사 아파트인데 교수들도 살고 있다는 그 아파트는 페인트칠이 다 벗겨지고 횟가루가 날릴 정도로 낡았다. 다만 그 실내는 깨끗하게 잘 쓰시고 계셨지만. 조선생님 댁에서 오랜만에 쌀밥과 김치를 맛있게 먹고 2조도 그 사이 돌아와서 그동안 각 조별로 있었던 경험담을 함께 나누었다. 다들 난처했던 여러 경험을 무용담처럼 신나게 나누었지요.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마음을 감추고 돌아와서 우루무치에서의 마지막 밤을 잤다.
7월 1일 (토) 열 이틀 째 날이 밝았다. 9시부터는 신장 남부 도시 호탄에서 농업공동체 사역을 하시는 분의 꽃과 복음사역에 대한 간증을 듣고 부랴부랴 서둘러서 체크아웃을 마치고 10시 반쯤 후빙거를 출발하였다. 우루무치로 올 때에는 우리가 손을 흔들었지만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시내버스에 타고 있던 한 살로 보이는 아이가 우리를 보며 노래를 불러주고 손짓도 하고 그러는 것이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소형버스의 같은 한 살짜리 아이가 있어서 일 수도 있겠지만 그 변화된 모습에 모두들 기뻤다. 외국에 있더니 너무 작은 것에 민감해하고 있는 걸까? 13시 비행기여서 두 시간 전에 도착해야 한다며 서둘렀지만 차가 의외로 도심에서 정체되어 12시쯤 공항에 도착하였다.
서둘러 탑승수속을 밟고 배웅 나오신 조선생님 가족과도 아쉬운 작별을 하고 중국 민항기 산동항공을 타고 우루무치에서 서안으로 돌아왔다. 기류가 불안정한지 기체가 심하게 흔들려 머리가 아프다. 13시 30분쯤 출발한 비행기는 15시 30분쯤 서안에 도착하였다. 마중 나와있던 라이언과 만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소형버스를 타고 이제는 낯설지 않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학교 숙소로 돌아왔다. 먼저 와 있던 내몽고팀과 합류하여 함께 저녁식사도 하고 서로에 대한 작은 환영 공연도 하며 친목을 다졌다. 내몽고팀과 혼합해서 조를 편성하여 함께 나누는 시간을 통해 내몽고에서 일어난 따끈따끈한 기사(奇事)를 들을 수 있었다.
7월 2일 (일) 열 사흘 째 날이 밝았다. 중국에서 두 번째 주일이지요. 오전 9시에 예배가 시작되므로 모두들 서둘러서 8시 30분 출발하여 다른 가정교회, 즉 중국인이 사역하고 있는 가정교회를 가보았다. 9시에 한 가정집 도착한 약 20cm 높이의 야트막한 의자가 많이 놓여져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예배는 곧 시작되어 한 자매의 인도로 찬양과 기도가 이어지고 50대 정도의 푸근한 아버지 같은 이미지의 한 남성이 말씀을 전했다. 따로 통역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메시지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이어 저희 일행을 소개하고 손선생님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영어와 중국어를 섞어가며 간증하였다. 함께 친교의 시간을 통해 점심으로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고 그 교회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시간에는 식당에서 우리일행이 모여 찬양과 예배를 드렸다. 조선생님은 중국 복음의 역사를 설명해주면서 오랫동안 중국을 위해 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기의 전 생애를 바친 위대한 선교사들, 사비에르(프), 마태오리치(이), 로버트 모리슨(영), 허드슨 테일러(영) 등 그들은 모두 Long-term Commitment(장기적 언약, 맹세)를 가지고 평생을 바치며 중국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단기 선교여행을 온 우리들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전을 주었다. 그 자리에서 중국선교사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김정진형제의 고백을 들었고 많은 자매들과 형제들의 헌신을 목격하며 내 삶도 하나님께 붙잡히고 하나님께 헌신된 삶이 될 것을 다짐했다. 내몽고팀과 합류하면서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낯설어 하였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알게 되어 기뻐할 수 있었다.
7월 3일 (월) 열 나흘 째 날이 밝았다.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이 자랑하는 진시황 병마용을 관광하는 날이다. 내몽고팀과 함께 가기 때문에 대형버스를 빌려서 9시쯤 출발하였다. 시내를 벗어난 교외에 위치한 병마용에 10시가 좀 못 되어 도착하였다. 먼저 제일 오른쪽에 있는 건물에 들어갔다. 원형영화관인데 화면이 원형으로 되어 있는 10개 정도의 대형화면에 다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촬영하여 마치 내가 현실에서처럼 360도 돌면 환경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영화도 그렇게 보인다. 진시황 병마용의 탄생배경과 그리고 발굴배경에 대한 다큐멘터리식 영화이다. 영화를 본 후 전시된 기념품을 둘러보는 사이에 일행이 다 없어져서 일행을 찾으려고 나가서 둘러보았으나 일행의 어느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단독건물인 제3전시관을 들어가 보았으나 일행은 없다.
결국 제2전시관에 들어가 보니 거기에서 일행들이 관람하고 있다. 일행과 합류하여 발굴이 현재도 진행중인 2전시관 구경을 마치고 일행과 함께 다시 제3전시관을 다시 관람해야 했다. 宋北朝라는 친구는 전시된 유물들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우리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설명 듣는 사람이 저 혼자뿐이다. 그래도 밖에 있겠거니 생각하며 간단히 설명을 듣고 나온 우리들은 일행을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이 넓은 지역에서 일행을 어떻게 찾을까 걱정하는 北朝였다. 하지만 저는 좀 전에 헤어졌던 경험이 있으므로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휴대폰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고 삐삐번호도 모르기 때문에 직접 찾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밖으로 나왔을까를 생각하여 정문 앞으로 와 봤지만 정문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으므로 일단 안쪽부터 찾아보기로 하고(한 번 나가면 못 들어오므로) 비 오는 와중에 제3전시관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을 둘러보았지만 찾을 수 없어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1시간 정도를 둘이서 일행들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밖으로 나왔지만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가게 쪽으로 좀더 나가니까 쇼핑을 하고 있는 일행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반갑게 일행들을 만났다. 그런데 이미 다 점심을 먹었다고 하여 그 중국인 친구와 만두를 사 먹으려고 하니 만두 가격이 시내의 7-8배나 비싸서 사 먹는 것을 포기하였다. 병마용 관광을 마치고 시내로 들어와서 서안에서의 사실상 마지막 날이므로 기념품이나 선물도 사고 쇼핑할 시간을 가졌다. 서선생님과 라이언의 인도를 따라 정찰제로 운영되는 차 가게로 가서 녹차를 사고 그리고 문구 등을 파는 시장으로 가서 문구류와 시계 등을 골랐다. 그리고 백화점을 구경하고 서점에 들러 책과 지도를 샀지. 근처에 옷을 싸게 팔아서 옷도 조금 샀구(제가 아니라 우리 일행 중의 일부가...).
쇼핑을 마치고 한국음식을 파는 식당에 모였다. 마침 조선생님의 생일이라고 하여 깜짝 생일축하파티까지 곁들여서 맛있게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어와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이한다.
7월 4일 (화) 여행의 마지막 날인 열 다섯 째 날이 밝았다. 11시 30분 경에 출발한 버스는 시내가 많이 정체되어 13시경에 공항에 도착하였다. 조선생님과 배웅 나온 중국인 형제자매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탑승 수속을 밟고 14시 15분 반가운 우리나라 비행기인 아시아나 항공에 올랐다.
비행기 여행이 처음인 저는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땅과 하늘을 보고 싶어서 종혁형제의 양보로 창 쪽에 앉아 이륙할 때부터 유심히 땅을 보았다. 비행기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더니 비행기는 하늘을 향해 치솟고 땅은 점점 작아져서 건물과 사람은 개미 크기와 같고 도로는 실이나 끈처럼 보인다. 중국의 산천은 참으로 넓다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고 구릉지대가 많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 곳은 평야지대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다보는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모양도 참으로 아름답고 하늘의 푸른색도 예쁘다. 오랜만에 한국의 소식을 알고자 승무원이 주는 신문을 달라고 하여 모두들 열심히 읽는다. 그렇게 모두들 열심히 신문을 읽는 모습은 처음 본다. 물론 나도 열심히 신문을 보았지.
비행기가 우리나라와 가까워지니 인천 앞 바다와 인천항이 보이고 영종도국제공항 등이 보인다. 그리고 인천시내가 보이면서 한국의 내륙으로 점점 들어가면서 중국과 달리 한국은 참으로 구릉지대가 많고 녹색지역도 많고 집이 매우 조밀하게 밀집되어 있는 것이 중국과 다른 이미지를 준다. 실제 비행시간 2시간, 한국시각으로 17시 05분쯤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밟고 짐을 찾고 6시쯤 함께 모였습니다. 화이팅을 한 번 외치고 학교 쪽으로 가는 일행과 부천으로 가는 공항버스를 타고 귀가하며 14박 15일 여정의 중국 실크로드 단기선교여행을 마쳤다.
중국 실크로드 단기선교여행을 마치며
준비도 별로 하지 못하고 KISA 다른 친구들이 준비한 여행에 함께 끼어 간 실크로드 단기선교여행. 나에게 첫 해외여행이기도 한 이 여행은 한반도의 작은 지역 안에서 한국 중심으로만 생각했던 내 세계관이 무너지고 중국의 거대한 대륙과 수많은 중국인들을 보면서 요나서 4:10-11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온 열방에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울러 팀을 이끄신 김인호목사님과 안성민팀장, 그리고 조장으로서 열심히 섬겨주신 손순철장로님, 오주헌, 강호경조장과 회계로 섬겨주신 오현주자매, 그리고 14박 15일 동안 동고동락한 모든 팀원들, 그리고 기도해 주시며 후원해 주신 교회 청년들과 성도님들에게 감사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