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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 특별히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다윗의 큰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해 세 번 절기를 정하여 특별한 감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이고 맥추절은 우리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처음 열매를 거두어 감사하는 것입니다. 수장절은 가을에 마지막 거둔 열매를 저장하면서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러한 절기를 지켜 구약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도바울의 말처럼 더 이상 절기를 지킴으로 구약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기억하며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골2:16이하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림자인 절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머리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즉 유월절은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죽음이 넘어간 것처럼, 이제 어린 양 대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 죄를 사하심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맥추절의 첫 열매를 거둬들여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우리가 생활의 첫 것을, 으뜸을 드려 감사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고 수장절을 통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도 잘 익은 알곡이 되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라고 했습니다. 감사 생활을 하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매사에 원망과 불평하는 자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감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주님께 말씀했습니다. “주님, 이 십자가는 왜 갈수록 점점 무거워집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즐겁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십자가가 점점 가벼워지지만, 너 같이 불평하며 짜증내고 지고 가는 사람에게는 점점 더 무거워지느니라." 우리가 말하는 대로 됩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감사의 사람이었습니다. 시편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생활이 늘 기쁘고 즐거웠겠습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이 정도면 만족하오니, 지금만 같았으면...”하고 언제나 행복하며 만족했겠습니까? 그는 누구보다 도피 생활을 많이 하고 전쟁을 많이 치르고 모반과 반역을 통해 환란을 겪고 고통의 날을 보냈습니다. 그런 그가 감사의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환란 중에서도 그와 함께 하심을 믿었고 하나님이 피난처요 안식처가 되심을 경험했고 그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더 강하게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었고 슬픔 중에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오늘 다윗은 먼저 주의 손이 하신 일로 인해 감사드렸습니다. 27절에 보시면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그들은 모르지만 다윗은 알고 있고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입니다. “하나님이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으로 행하신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드렸습니다. 자기가 힘써 싸웠지만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고 봉헌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할 마음을 주셔서 이 일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느2:12입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하나님을 위해 일할 마음도 하나님이 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할 줄 아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을 주시길 축복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처럼 이루어주시고 베풀어 주신 것만 아니라 때로는 시험(테스트)도 하십니다. 때로는 채찍으로 징계도 하십니다. 그릇된 길로 갈 때는 막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거두어 가시기도 하십니다. 이 또한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믿고 그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욥은 고백하기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고 했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을 본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차라리 죽으라고 하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욥은 그의 아내와 달리 그럼에도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고 설교했던 윌리엄 캐리는 인도에 선교를 가서 정말 위대한 일들을 했습니다. 선교초기에 무엇보다 성경을 인도어로 번역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1812년 어느 날, 그가 산책을 나간 뒤 강아지가 촛불을 건드려 집에 화재가 났습니다. 이 불로 8년 동안 번역한 인도 언어 사전, 문법책, 완역한 성경원고 1100페이지가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 강아지를 욕하거나 죽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캐리는 강아지를 탓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지금까지 번역한 원고가 어설프고 부족하였으니 완벽하게 다시 번역하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다 태우신 것 감사합니다. 다시 번역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다시 시작했습니다.
어느 차에 에어콘이 고장났습니다. 수리하려고 카센타에 가서 주문을 했는데 한 달이 되어도 부품이 안 내려옵니다. 이 무더운 날에 창문을 내리고 타고 다녔습니다. 사거리에서 큰 사고가 났는데 조수석 옆면을 받았습니다. 차를 폐차할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에어백이 다 터져서 사람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에어콘을 고쳤으면 창문 안 내려서 다칠 수 있었을 텐데, 또한 에어콘 수리비도 들고 폐차했을 텐데. 지나보니 에어콘이 안 되는 차도 감사, 빨리 수리 안 해준 것도 다 감사였습니다. 두 주 전에 우리 집 앞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2.그리고 다윗은 영혼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31절에 보면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 구원하실 것임이로다”고 했습니다. 우리 영혼이 구원받은 것은 이 땅의 깊은 웅덩이에서 건짐 받은 정도가 아닙니다. 육체가 질병과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케 된 정도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와 사망의 쇠사슬에서 벗어난 구원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구원입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긴 구원입니다.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인 사망의 형벌을 담당하고 우리 죄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에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나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3:17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죄 사함 받은 은혜, 용서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시32:1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로부터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가 진정으로 복된 자라는 감탄의 고백입니다. 사도바울도 이 크신 구원의 은총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만일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용서하셨다는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면 아직도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이거나 아니면 구원받은 처음 은혜와 감격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 되고 뜻한 바대로 되었어도 그로 인한 기쁨과 감사보다 구원받은 은총을 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것도 구원받은 은총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궁핍한 자들의 오른편에 서사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요일2:1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 오른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대적 마귀한테 그의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보이시면서 내가 저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으니 저에게 더 이상 죄를 찾지도, 묻지도 말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진실로 구원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3.마지막으로 30절을 보시면 다윗은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라고 합니다. 어떻게 감사드리는가 하면 크게 감사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은총에 크게 감사드렸습니다. 시9:1에서는 전심으로 감사하리라고 합니다. 시30:12에서는 영원히 감사하리라고 했습니다. 전심으로 한다는 것은 힘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크게 하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고 특별한데 감사의 분량은 너무도 적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 정도 일가지고는 감사하지도 않는 사람! 감사가 인색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과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고, 말로만 감사하는 사람과 감사하다는 말도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더 사랑받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삼하7:18~29입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29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시 116:12에도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심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두게 하십니다. 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드렸으나 하나님은 다섯 자녀를 더 주셨습니다(삼상2:21).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게 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믿음으로 심는 거룩한 도전을 해보십시오. 맥추절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감사드리라고 하실 때 주신 것과 주실 것을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주신 것이 얼마 없다고 조금 감사할 것이 아니라 주실 것을 믿고 힘을 다해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심어 받으시길 바랍니다.
작은 것 하나도 반복되면 습관이 됩니다. 그리고 그 습관이 평생을 즐겁게 할 수도 있고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가 습관이 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불평이 습관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있어도 불평하고 없어도 불평합니다. 그리고 그 불평은 더 큰 불평을 낳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계속 감사를 낳습니다. 감사로 은혜가 더하여 넘치게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고후4:15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윗처럼 감사하는 자가 되길 축복합니다. 마귀가 제일 감당하기 어려운 성도는 감사하는 성도입니다. 늘 감사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고 넘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다니엘을 사자들이 삼키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불평, 원망하지 않은 사람 욥을 사탄이 삼키지 못했습니다. 회개한 사람 요나를 물고기가 삼키지 못한 것처럼 감사하는 사람을 세상이 삼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감사로 승리하는 생활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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