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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경(北京, 뻬이징)
북경은 현재 중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고 있다. 화북 지방에서는 최대의 도시로 인구는 약 1100만명. 서북쪽으로는 산지로 둘러 싸여 있으며 동남방면으로는 발해까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기후는 우리나라 중부지역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북경의 역사는 매우 길다. 북경에서 남서 50 km 지점에 있는 주구점(周口店)에서 50만년전의 북경원인(北京原人)이 발견된 바 있다. 그리고 기원전 1000년경 주(周)나라 때에 이미 성곽을 쌓아 도성을 이루고 있었으며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에는 당시 강국의 하나였던 연(燕)나라의 도읍으로 역할을 하였다. 북경은 요(遼) 금(金) 원(元)대에도 연경(燕京) 중도(中都) 또는 대도(大都)라 불리면서 수도로 계속 커 왔으며 명(明)나라 제3대 성조(成祖) 영낙제(永樂帝) 때 자금성(紫禁城)을 건축하고 이곳으로 다시 수도를 옮겨 와 약 1000년간에 걸쳐 중국의 도읍으로 되어 왔다.
원래 북경시의 중심부는 네모꼴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으나 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난 이후 이 성곽을 제거하여 넓은 도로를 만들고 그 밑에 지하철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1989년 4월 아시아개발은행 연차총회가 이곳에서 열려 필자가 최초로 북경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북경 시내가 아직 옛 모습 그대로 있었으나 최근에는 많은 빌딩이 들어서고 일류 호텔들이 건설되어 면모가 크게 바뀌었으며 또 넓어졌다. 전에는 길거리가 온통 자전거로 뒤덮여 있었는데 요즘은 자동차로 미워지고 있다. 북경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번화가는 천안문광장 옆 북경반점(北京飯店) 왼편쪽에 있는 왕부정(王府井) 거리이다.
북경에는 많은 중국음식점이 있으며 잘 찾아보면 적당한 값에 맛이 좋은 곳도 많이 있다. 특히 북경 오리를 한번 맛보는 것은 빼어 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 전취덕(全聚德)이나 북경까오야오(北京烤鴨)에 가면 본바닥의 페킹 덕을 맛 볼 수 있다.
북경시내에는 자금성을 비롯하여 천안문 광장 이화원 등 볼만한 곳이 많으며 교외로 나가면 팔달령 만리장성과 명 13능 등 관광할 데가 적지 않다.
자금성
자금성(紫禁城)
자금성은 명조 영낙(永樂) 18년( 1420)에 완공되어 오늘날 까지 580여년 동안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세계 최대의 제왕 궁궐이다. 원나라의 궁궐터에서 약간 위치를 바꾸어 자리를 잡고 건축하는데 14년이 걸렸다. 자금성은 1420년 명나라 3대 황제 성조(成祖) 주체(朱棣)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해 와서부터 1911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물러나기까지 491년 동안 명왕조의 14명 황제, 청 왕조의 10명 황제가 최고 권력을 행사했던 곳이다.
자금성은 북경성의 남북 중추선위에 좌우 대칭으로 건설된 장방형의 성지로서 남북 길이 960m 동서 너비 750m이며 72만 평방미터의 면적에 9000여 칸의 건물이 지어져 있다. 사위는 높이 10m, 길이 3,428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네 모퉁이에는 각루(角樓)가 건조되어 있다. 성 밖에는 너비 52m 길이 3,800m의 성호(城壕)를 팠다. 네 면에 문을 하나씩 냈는데 남쪽에 오문(午門) 동쪽에 동화문(東華門) 서쪽에 서화문 (西華門) 북쪽에 신무문(神武門)이 있다.
자금성 앞에는 영정문(永定門)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양문(正陽門), 대명문(大明門), 승천문(承天門), 단문(端門)의 다섯 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자금성의 오문(午門)에 이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중 승천문이 소위 천안문(天安門)이라고 하는 대문이다.
오문을 통과해서 자금성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정원에 금수교(金水橋)라는 다리를 지나게 된다. 다리 밑을 흐르는 금수천(金水川)은 성 밖에서 들어와 성안의 빗물을 받아 성밖으로 내어보내는 역할을 겸하는 물길이다. 다시 태화문(太和門)을 지나면 넓은 광장이 나오고 맞은편에 태화전(太和殿)의 웅장한 자태가 보인다.
태화전
태화전은 명나라 때에는 봉천전(奉天殿)이라 불린 것인데 한때 황극전으로 개칭되고 다시 청나라 때에 태화전으로 개칭되었다. 이 궁전은 전형적인 황궁양식으로 건축된 건물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중수 개축되었으며 현재의 태화전은 청나라 강희(康熙) 황제 때 개수된 것이다. 태화전은 동서 너비가 11칸 남북 길이가 5칸으로 면적은 2,377 평방미터이며 건물 높이 37.44m로서 중국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건물을 받치는 기둥을 보면 높이 12.7m, 직경 1.06m의 둥근 기둥이 동서로 12개 남북 6줄로 도합 72개가 서 있다.
태화전은 황제의 즉위 원정 또는 동지(冬至) 의식 등 공식 행사와 중요한 만찬장으로 사용되었다 한다.
태화전을 지나 뒤로 돌아가면 이번에는 작은 규모의 중화전(中和殿)이 있으며 이곳은 태화전 행사를 전후하여 황제가 잠시 휴식하거나 준비를 하기 위한 장소이다.
중화전 뒤에는 보화전(保和殿)이라는 전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과거의 최종단계인 황제의 전시(殿試)가 실시되는 곳이며 때로는 외국 귀빈이나 사절을 위한 만찬장으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건청궁
이들 세 전각을 삼대전(三大殿)이라 하며 여기까지를 외조 (外朝)라 한다.
보화전을 돌아 뒤로 들어가면 건청문(乾淸門)이 나오고 건청문 안쪽에는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의 세 궁전으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내정(內廷)이 된다. 건청궁은 황제의 일상 집무실과 침전으로 쓰이고 교태전은 황후를 위한 각종 연회등이 열렸던 곳이며 곤녕궁은 황후의 침전이다.
내정의 동서 양편으로 많은 부속 궁궐들이 있는데 왕자나 공주들 그리고 후궁 궁녀 환관들이 거처한 곳이다. 또한 내정 동편에는 진보관(珍宝館) 등이 있어 황실의 보물 회화들을 보관 진열해 두고 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강제 퇴위당한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는 옥좌에서 물러난 뒤에도 13년 동안 자금성의 내정에 그대로 눌러앉아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군은 1924년 11월 부의를 쫓아내고 그 이듬해에 자금성을 고궁박물원(故宮博物園)으로 개편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건청궁 내부 옥좌
청말 자희태후가 수렴청정한 방
영수문앞 구리사자
태화전앞 구리거북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
천안문은 명대에는 승천문(承天門)이라 하던 것인데 청대에 와서(1651년) 재건하고 천안문(天安門)이라 개칭하였다. ‘천명(天命)을 받아 나라와 백성을 태평스럽게 다스리다’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붉은 벽돌로 벽을 쌓아 올리고 황색 기와를 입힌 2층 구조의 붉은 황궁건축양식의 누각이 지어져 있다.
명 청 시대에는 이곳에서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였으며 중요한 조칙(詔勅)을 발표하거나 과거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등 중요한 행사가 치러진 자리이다. 또한 황제가 천 지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나가거나 원정군을 전송할 때에도 반드시 이문을 통해 출입하던 곳이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 발족할 때에도 모택동주석은 이 천안문 앞에서 이를 내외에 선포하였다. 그 이후 천안문 중앙에는 중국의 국장이 걸리게 되었으며 그 밑에 모택동의 초상화가 걸려 오늘날까지 그대로 있다.
천안문 앞에는 약 40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넓은 광장이 펼처져 있다. 소위 천안문 광장이다. 이 광장에는 한번에 50만명이상의 사람들이 들어 설 수 있으며 가끔 정치적 행사가 치러지기도 한다. 광장 중앙에는 높이 약 40m에 달하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현 중국 성립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위한 것이다. 한편 이 광장은 몇 차례 역사의 중요한 무대가 되기도 하였는데 유명한 것으로는 1989년 6월 4일 민주와 자유를 요구한 북경 대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천안문사건이 있다.
천안문에서 남쪽으로 멀리 중앙에 보이는 작은 건물은 모택동 주석의 능묘(陵墓)이다. 모주석기념당이라고 하는데 그 앞에는 항상 긴 줄이 서 있다. 각지에서 북경을 방문한 사람들이 모주석의 얼굴을 한번 보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넘어 더 남쪽으로 정양문(正陽門)이 있다. 정양문은 옛 북경성의 정문으로 보통 전문(前門)이라 불린다.
오른편에 보이는 큰 건축물이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이다. 1959년에 준공되었으며 건축면적이 약 17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여러 가지 색의 대리석으로 내장되어 있다. 인민대회당에는 대강당과 리셉션 홀 그리고 각종 사무실들이 있다. 대강당에서는 우리나라 국회와 같은 인민대표대회를 비롯하여 중요한 정치 행사가 열린다. 이 밖에도 인민대회당에는 외국 원수나 사절들을 접대하는 장소도 있으며 또 여러 가지 국제회의도 할 수 있도록 크고 작은 회의실이 마련되어 있다.
광장 왼편에는 중국역사박물관 과 중국혁명박물관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천안문
인민대회당
경산공원(景山公園)
자금성 북쪽 신무문(神武門) 앞 큰 길 건너편에 솟아 있는 높이 43m의 자그마한 산이 있는 공원이다. 산정에는 만수정(萬壽亭)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다. 경산(景山)은 최초 금나라 때에 공원 서편에 북해(北海)를 파면서 나온 흙을 쌓아 이루어진 산이었다. 원나라 세조 후비라이가 이 산을 황족전용의 공원으로 조성했다. 그 뒤 자금성을 건조했을 때 성 밖 해자(垓字)를 팔 때 나온 흙을 다시 덮어 경산이 더욱 높아 졌다고 한다.
이화원(頤和園)
이화원은 북경 서북 교외에 자리한 총면적 290만 평방미터의 대표적인 황실정원이다. 건륭(乾隆) 황제 시대에는 여기에 삼산오원(三山五園)이라 불리던 커다란 리궁(離宮)이 있었던 곳이다.
1860년 영불 연합군의 포격으로 한때 폐허로 변하였으나 서태후(慈禧太后)가 권력을 잡고서는 해군 예산을 유용해 새로이 수복하여 이화원이라 하였다. 서태후의 사진과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문인 동궁문(東宮門)을 들어서서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인수전(仁壽殿)이며 이것은 정무를 보던 곳이다. 그 옆으로 덕화원(德和園)이라는 경극(京劇) 무대가 있으며 그 서쪽에 728m나 된다는 긴 회랑이 있다. 이 회랑의 난간을 따라 삼국지나 서유기 등의 명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이어진다.
이화원 안에는 곤명호(昆明湖)라는 엄청난 크기의 인공 호수가 있으며 호수 중앙으로 연결된 십칠공교(十七孔橋)의 난간에는 500여 마리의 사자가 조각되어 있다.
팔달령 장성(八達嶺 長城)
북경시에서 북쪽으로 약 70km 되는 지점에 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일부를 관광 할 수 있는 곳이다. 만리장성이라고 하면 동쪽으로는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감숙성 (甘肅省) 가욕관(嘉峪關)에 이르는 성을 말하는데 중국에서는 보통 장성(長城)이라고 부른다.
장성을 처음 쌓기 시작한 나라는 춘추시대 제(齊)나라이었으며 전국시대에도 연(燕) 위(魏) 등 여러 나라가 북방 방어선으로 부분 부분 쌓았던 것이었다. 기원전 221년 진(秦)의 시황제가 천하통일을 이루고 흉노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이를 개축하고 일부 연장하였으며 그 뒤에 한(漢)의 무제는 돈황(敦煌) 밖 옥문관(玉門關)에 이르기까지 이를 연장하였다.
흔히 달에서도 장성이 보인다는 말이 있으나 그것은 터무니 없는 과장일 것이다. 그러나 장성의 가지까지 합친 총 길이는 약 6,300km나 된다고 하니 인류 역사상 최대 토목공사임에는 틀림 없을 것 같다.
이곳 팔달령의 장성은 명나라 때에 건축된 것이며 특히 북경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높으게 그리고 전망이 좋게 수복한 부분이다.
필자가 최초 1989년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오는 사람들이 적어 한산했었는데 최근에 다시 가 보았더니 관광객이 너무 많아 심지어 성벽에 오르는 계단의 벽돌이 달았으며 지갑을 조심해야할 정도로 사람들이 붐벼 무척 놀랐던 일이 있다. 아무튼 왕복에 소요되는 시간에 비해서는 볼거리가 변변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장성 팔달령
명십삼능(明十三陵)
팔달령 장성을 보고 오는 길에 명나라의 황제 13명의 능묘를 볼 수 있다. 제 3대 황제 성조(成祖) 주체(朱棣)로 부터 17대 의종(毅宗)까지 13 황제와 그 황후들의 능묘군(陵墓群)이 있는 곳이다.
현재 공개되어 있는 곳은 정능(定陵) 장능(長陵) 소능(昭陵)만이고 그 밖의 것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정능은 명나라 제 14대 황제 신종(神宗)과 2명의 황후 능으로서 일반인들이 쉽게 방문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현궁(玄宮)이라고 하는 지하궁전은 깊이 27m의 지하에 조영되어 있으며 그 속에는 전전 중전 후전 및 좌우에 있는 횡전을 합하여 모두 다섯 개의 궁실이 있다. 발굴당시의 관의 복제품과 황제 황후의 대리석 보좌가 전시되어 있다. 신종 만력제(万曆帝)는 1572년 10세 때에 즉위하여 무려 48년간 보위에 있었던 황제로서 가장 오래 제위를 유지했으나 정무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는 특별한 관계가 있으니 바로 임진왜란 때에 육해군 원정군을 파견해 주었던 황제이다.
명 십삼능(정능)
(2) 상해(上海, 샹하이)
상해는 인구 약 1400만의 중국 최대의 국제도시이다. 상해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아니하며 약 700년이라고 보고 있다. 양자강 하구로 흐르는 황포강 양변에 위치한 상해는 일지기 중국을 대표하는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했다. 특히 2차대전 이전에는 구미 열강들의 조차지로 나누어져 첩보전이 치열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상해는 우리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특별한 곳이다. 일제 강점 시대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피신해 떠났던 곳이 상해였으며 1919년 4월 이곳에서 최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김구(金九) 이승만(李承晩)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 독립지사들이 모여 국권회복을 위해 노심초사했던 곳이다.
특히 1932년 4월 홍구(虹口)공원에서 윤봉길(尹奉吉)의사가 일본의 상해 침략전쟁 기념식전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사령관을 위시한 간부 장성들을 살상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 사건은 중국에서 우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국민당 정부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후원하게끔 한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경제발전의 계기가 마련되면서부터 상해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빨리 시장경제로 전환하는데 성공하여 최근에 와서는 엄청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원래 상해시내는 좁은 길에 자전거들로 홍수를 이루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자동차 홍수로 교통체증이 심한 곳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고가도로와 황포강 다리를 건설하여 전보다는 교통사정이 많이 좋아졌다. 엄청난 변화이다. 안내양의 말로는 “상해에서는 일년에 작은 변화, 삼년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특히 포동지구에는 아시아 최고(468m)를 자랑하는 동방명주탑(東方明珠塔)을 비롯하여 고층 빌딩들이 밀집한 신도시를 건설하여 상해는 지금 동아시아의 물류 산업 및 금융 허브를 노리고 있다.
상해시내에서 가 볼만한 곳으로는 황포강연안의 구도시 중심 외탄(外灘)지역, 번화가인 남경로(南京路) 일대, 그리고 전통적 상가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예원(豫園) 지역 등을 들 수 있다.
외탄지역은 상해의 근대사를 나타내는 구미양식의 석조건물들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저녁에는 시내 중심부의 고층건물과 강 건너 포동 신도시지역의 화려한 야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남경로 일대에는 백화점과 고급 전문상점 일류 레스토랑 영화관들이 모여 있다.
예원
예원(豫園)
예원은 소위 강남(江南)식 건축과 정원양식으로 잘 지은 개인 사저이다. 명나라 때의 건축물로서 전통적 주택 누각 정자 화목 및 태호석(太湖石)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하고 있다. 이 저택은 사천성 포정사(布政使)를 지낸 반윤단(潘允端)이라는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했던 연로한 자기 아버지를 위하여 무려 19년간 걸려 1577년에 완성한 집이다. 건축을 지휘 시공한 사람은 명나라 때의 조원(造園) 명공(名工) 장남양(張南陽)이라 한다. 상해를 처음 들리는 사람은 반드시 한번 가 볼만한 곳이다.
예원 바로 근처에는 예원상성(豫園商城)이라고 불리는 전통적 건물과 상점들이 이어진 숍핑가가 전개되고 있다. 또한 전통 상해요리를 맛볼 수 있는 음식점도 많다. 그 중에는 예원 입구 바로 왼편에 소롱포로 유명한 남상(南翔) 만두점도 있다. 이 가게는 우리나라에도(압구정동) 진출해 있다. 한 가지 유의 할 것은 이 일대가 길이 좁은데다 자동차가 붐비는 곳이라 차 세우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예원 태호석 정원
노신공원(魯迅公園)
이것은 시내 동북방면에 있는 공원으로서 전에는 홍구공원(虹口公園)이라 했던 것을 지금은 노신공원이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 이는 중국의 저명한 사상가이면서 문학자인 노신(魯迅, 뤼신)의 무덤과 기념관이 이 공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노신(본명은 周樹人, 1881-1936)은 일지기 일본 유학시절 러일전쟁이후 일본의 악랄한 중국 침략을 목격하고 의학공부를 포기하고 귀국하여 중국국민들의 민족혼을 깨우치는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는 1920년대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문인이면서 동시에 사상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말년에는 상해에서 지하단체 좌익작가연맹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던 인물이다.
이 공원은 앞에서도 잠간 언급한바 있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필수 방문 코스이다. 지금 의거 현장에는 윤봉길의사의 아호(梅軒)에 따라 매정(梅亭)이라는 2층 건물의 기념관을 지어두고 그 앞에 널따란 기념비석을 세워두고 있다. 비석 앞에 ‘윤봉길의거현장’(尹奉吉義擧現場)이라는 표지돌이 놓여 있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윤봉길의사 기념관 매정
윤봉길 의사의 활동상을 다시 새겨보면 윤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 나 보통학교에 다닐 때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어린 나이지만 윤봉길은 이에 자극받아 일본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아니하고자 보통학교를 자퇴하여 한학을 대신 공부하고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1930년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청도(靑島, 칭따오)를 거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들어가서 김구(金九) 선생 등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만나게 되고 드디어 1932년 4월 29일 일군의 전승기념 및 천장절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하게 된다. 이리하여 상해 파견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와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瑞貞次) 등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 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은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일본으로 압송된 후 그해 12월 가나자와(金澤)에서 총살형을 당하였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대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장개석(將介石)은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다고 한다.
윤봉길의사 기념비
임시정부 구지(舊址)
지금 우리가 상해 여행시 찾아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리는 당시 프랑스 조차지였던 마당로(馬當路) 306번지에 있는 오래된 3층 벽돌 건물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직후 그 여세를 몰아 4월 13일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나 변변한 사무실도 없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여 여기 저기 옮겨 다니다가 1926년 비로소 이곳으로 옮겨와서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까지 7년 동안이나 머물었던 곳이다. 비록 초라한 건물이지만 당시의 어려웠던 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감개무량한 느낌 없이 바라볼 수가 없다.
필자가 최초 이곳을 찾았던 1989년에는 아무른 표지 없이 이름 모를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한 민가에 불과하였다. 물론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 앞에서 사진만 몇 장 찍고 뒤돌아서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임시정부 구지(구지)라는 간판까지 내어걸고 당시의 집무실을 재현해 놓고 상해시정부가 관리하면서 찾아오는 한국 관광객들을 마지하고 있다. 1층에는 전시실을 그리고 2층 집무실에는 김구 선생의 밀납상을 만들어 두었다.
상해를 처음 방문하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둘러보아야 하는 필수 코스라 할 수 있다.
임시정부 구지
주장(周莊)
상해시와 강소성(江蘇省)의 경계에 있는 9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강남지방 수향촌(水鄕村)이다. 이 동리에는 약 1000호 가까운 고가(古家)들이 있는데 그 대부분은 명 청 시대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이 마을은 운하를 통하여 배로 출입하게 되어 있는데 그 운하에 걸려 있는 다리(石橋)들이 유명하며 오래된 것들은 12세기 원(元)대에 건설 된 것이라 한다. 중국 강남지방의 옛날 사람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며 한번 찾아 볼만한 곳이다.
(3) 항주(杭州, 항쪼우)
절강성(浙江省)의 성도인 항주(杭州)는 상해(上海)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190 km 떨어진 고도(古都)로서 인구 약 110만 명의 도시이다.
항주는 멀리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도읍이었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 등의 고사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오(吳)와 월(越) 양국이 소주와 항주를 각각 근거로 하여 서로 처절히 싸우고 또 복수하던 시절이었다. 이곳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시대에는 전당현(錢塘縣)이었다. 항주(杭州)라는 이름은 589년 (隋의 開皇 9년)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특히 수(隋) 양제(煬帝) 때에 양자강과 황하라는 양대 남북 수로를 연결하고 항주와 북경을 잇는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가 개통된 이후 항주는 강남(江南)의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운하는 특히 수 양제가 2차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할 때 강남에서 북쪽으로 군량미를 운송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북경에서 요하와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까지 가는 보급로는 상상외로 험난하여 수나라 대군은 대부분 기아와 질병으로 죽게 되었고 이 패전 때문에 수나라는 결국 망하게 된다.
그 뒤에 오대십국(五代十國) 때의 오월(吳越, 893 -978)과 특히 남송(南宋, 1127 -1280)의 수도로 되면서 항주는 급속히 발전하였다. 일지기 13세기말경에는 인구 90만을 헤아리는 대 도시로 번성했으며 이 무렵 이곳을 방문한 말코 포로는 항주의 규모와 번영했던 모습을 보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라고 절찬한 바 있다.
중국 속담에 ‘천상에 낙원이 있다면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항주와 소주를 천상낙원에 비유하곤 했다. 당(唐)나라 때 시인 이태백(李太白)도 ‘강남이 그리운데 그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곳은 항주다’(江南憶 最憶是杭州)라며 항주의 경치를 잊지 못하는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최근에는 상해(上海)의 배후지역으로서 절강성(浙江省)의 경제가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항주는 현대적인 산업 도시로 크게 변모하고 있는 중이다. 상해에서 항주로 가는 고속도로변에는 무수히 이어지는 뽕나무 밭을 볼 수 있는데 과연 이 지방의 양잠과 견직물 생산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광경이다. 그러나 아직 도로가 완전하지 못해서 상해로 돌아가는 길은 차가 무척 정체되고 있었다.
항주는 무엇보다 서호(西湖) 차(茶) 견직물(絹織物)로 유명하다.
서호(西湖)
서호는 주위의 먼 산과 어울려 매우 아름다운 호수이다. 15 km 나 되는 호수 둘레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로 숲이 무성하고호수의 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소식(蘇軾)의 이름을 딴 소제(蘇堤)라는 제방이 남북으로 가로 지르고 있으며 호수 북쪽에는 동서로 걸친 백제(白堤)라는 재방이 있다. 호수 안에는 크고 작은 섬도 네 개가 있다. 서호의 물은 그리 깊지도 않고 또 맑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나 물고기들이 서식하기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호수 주위에는 산외산(山外山) 누외루(樓外樓)와 같이 시적인 이름의 식당들이 여럿 있고 호텔도 다수 있다.
춘추시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던 서시(西施)가 이곳 월(越)나라 출신이며 서호라는 이름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서시(西施)는 오(吳)나라에 가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총애를 받게 되고 부차가 서시에 반해서 정사를 소홀히 하자 이를 기회로 월나라 구천(勾踐)은 오나라 부차에게 복수를 하게 된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그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서시(西施)를 높이 추앙한다.
서호
서호(西湖)에 가면 또 소동파(蘇東坡)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소식(蘇軾, 1036 -1101)이 이곳에 와서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문인(文人)으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식(蘇軾)은 원래 사천성 출신으로 북송(北宋)의 수도 변경(汴京)에 나아가 과거에 급제하고 유명한 구양수(歐陽修)의 제자로 관계(官界)에 진출하게 된다. 소식(蘇軾)은 나이 37세에 항주 통판(通判, 지금의 副知事級)으로 처음 이곳에 부임하게 되며 나중에 나이 54세에(1089년) 항주 지사(知事)로 다시 오게 된다. 다시 와 보니 그렇게 아름다웠던 서호가 바닥에 진흙이 차서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이에 실망한 소식(蘇軾)은 대대적인 준설공사를 폈으며 공사로 파낸 흙과 모래로 남북을 잇는 제방을 쌓았는데 그 제방이 바로 지금 보는 소제(蘇堤)라 한다. 이 공사로 서호는 다시 옛날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 아름다운 경치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동파(蘇東坡)는 서호의 아름다운 정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水光欽艶晴方好 물빛의 영롱함은 맑은 날 더욱 좋고
山色空濛雨亦奇 그므스레한 산색은 비올 때 뛰어나니
欲把西湖比西子 서호를 가지고 서시에 비한다면
淡粧濃抹總相宜 엷은 단장 짙은 화장 모두 다 좋으네.
서호십경(西湖十景)에 뇌봉석조(雷峰夕照)라는 것이 있다. 뇌봉산(雷峰山)의 석양을 보는 경치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 산에는 뇌봉탑(雷峰塔)이 있는데 원래의 것은 허물어 졌고 지금 서 있는 것은 근래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뇌봉탑(雷峰塔)과 앞에서 언급한 백제(白堤)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있어 소개해 본다.
옛날 허선(許仙)이라고 하는 빈한한 청년이 하루는 서호(西湖)에서 뱃놀이를 하였는데 백낭(白娘)이라고 하는 어여쁜 처녀가 시녀와 함께 물가에서 노는 것을 보고 배에 태워 주고 뒤에 이 여자를 다시 찾아 결혼하여 백제(白堤) 근처에서 가게를 열고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법해(法海)라는 스님이 지나다가 허선(許仙)을 보고 안색이 괴상하고 오래 살 수 없다면서 그 여자와 빨리 헤어지라고 충고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백낭(白娘)과 스님은 서로 싸우게 되었는데 여자는 스님을 이기지 못하고 힘이 빠져 흰 뱀이 되어 그 스님의 탁발(托鉢) 그릇 속에 숨었다고 한다. 스님은 그것을 뇌봉산(雷峰山) 언덕위에 파묻고 백사(白蛇)의 진혼을 위하여 그 위에 탑을 세운 것이 바로 뇌봉탑(雷峰塔)이었다.
그런데 이곳 양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탑의 기왓장 조각을 신주로 모시면 누에들이 무병하다고 하는 전설로 근처의 양잠농가에서 기왓장을 하나 둘씩 뜯어 가는 통에 이 탑은 견디지 못하고 드디어 1924년 9월 어느 날 커다란 굉음과 함께 무너졌다고 한다.
백제(白堤)에 얽힌 전설이 그렇다 하더라도 백제(白堤)라는 이름은 백낭(白娘)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며 당나라 때의 대문호 백거이(白居易, 樂天)가 항주(杭州) 차사(刺史, 郡守)로 와 있을 때 이 제방을 크게 보수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허선(許仙)과 백낭(白娘)의 전설은 백제(白堤)가 보수되고 나무들이 우거저서 아름다운 산보 길로 변한 이후 훨씬 뒤에 생긴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서호 유람
우리 일행은 점심을 위하여 누외루(樓外樓)라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두 가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하나는 ‘거지닭’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 어느 황제가 근처를 지나다가 거지들이 무엇인가를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조금 얻어먹었더니 그렇게 맛이 좋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것은 닭을 흙 속에 파묻어 구운 것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동파육’(東坡肉)이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돼지고기를 비개와 함께 양념을 하여 간장에 담가 오래 동안 찐 것이었다. 그 맛은 과연 일품이었다. 이것은 옛날 소동파가 서호(西湖) 준설공사를 시킬 때 수고하는 인부들을 먹이기 위하여 특별히 만들었던 것이라 하며 그래서 동파육(東坡肉)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 중국음식점들 메뉴에서도 동파육이라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국제화의 여파로 수입된 것이리라.
용정차(龍井茶)
서호 근처에는 녹차 밭이 많다. 원래 차밭은 기후가 온난하고 강수량이 많으면서 안개가 자주 끼는 습도 높은 곳이 적지이다. 서호 부근의 기후는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하는 곳이라 차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우리나라 보성 일대도 이러한 조건을 가추고 있어 차 농사가 잘 되는 것이다.
용정차(龍井茶)는 서호 근처 용정촌(龍井村)에서 나는 녹차라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 근처 마을들은 수목이 잘 자라 있으며 청죽(靑竹)이 바람결에 소소스런 소리를 내고 안개가 잦은 명차(名茶)의 산지들이다.
일행은 매가오(梅家塢)라는 매씨(梅氏) 집성촌 마을에 들려 전시장에서 차도 사고 시음도 하였다.
용정차(龍井茶)의 최고급품은 명전차(明前茶)라는 청명(淸明)전에 따는 것이며 그 다음은 우전차(雨前茶)라고 곡우(穀雨)전에 따는 것이다.
차 잎을 따는 데는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데 잎 따는 방법에 따라 몇 가지로 차에 이름을 붙인다. 어린 눈(芽) 하나씩만 따는 것을 연심(蓮心)이라 하며, 눈 하나와 잎 하나를 같이 따는 것을 기창(旗槍)이라 한다. 잎은 기와 같고 눈은 창과 같다는 점에서 부친 이름이다. 눈 하나에 갓 핀 잎 두 장을 같이 따는 것을 작설(雀舌)이라 하는데 이는 새가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미는 모습에 비유한 것이다.
갓 따온 차 잎은 실내에서 펼쳐 약 열시간정도 그늘에서 말려 수분과 푸른 잎 냄새를 제거하고 나면 차의 향이 새로워진다고 한다. 이것을 상품으로 만들 때에는 마지막 단계로 넓은 가마 같은 쇠 그릇에 차를 담고 밑에서 약한 불을 놓아 떳떳한 상태에서 손으로 휘휘 저어 가며 가볍게 볶아낸다. 전시장에서는 이러한 차 볶는 시범을 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이 때 화력과 손놀림에 따라 차의 질이 좌우된다고 하며 그 사람의 솜씨가 차에 묻어난다는 것이다.
현지에서도 최상품(最上品)은 살 수 없으며 보통 상품(上品)이라는 것을 사게 된다. 용정차(龍井茶)의 맛은 쓰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은은한 향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며 옛날부터 중국녹차의 최고 명품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영은사 대웅보전
영은사
항주 교외에 영은사(靈隱寺)라는 유명한 큰 절이 있다. 이 절은 인도의 고승 혜리(慧理)가 남북조시대 초기(326년)에 선종(禪宗)을 전파하기 위해 개산한 것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엄청나게 큰 사찰이다. 사찰 정문을 들어서는데 입구의 사천왕상의 크기가 엄청난 데에 한번 놀라고 다음 대웅보전에 모셔진 불상의 엄청난 크기에 두 번째 놀랐다. 이 금동 좌불(座佛)은 전체 높이가 24 m 나 된다고 하는데 아마 중국 최대의 불상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 절 안의 모든 건물들도 이 불상의 크기와 어울리도록 장대하게 건축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웅전 앞에는 팔각의 둥글고 높은 인도 양식의 탑 두기가 양쪽에 서 있다. 1700년의 풍우를 이기지 못했던지 탑신이 많이 훼손되었을 뿐더러 상층부 몇 층은 아예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이 절에는 500나한당(羅漢堂)이 유명하다. 500명의 나한상을 모두 동(銅)으로 주조한 것이다.
영은사 대불
영은사(靈隱寺)를 향하여 올라가는 길 왼편에는 작은 계천이 흐르고 건너편 산기슭에는 규모는 작지만 용문석굴처럼 수 많은 석각 불상들이 조영되어 있다. 이 석굴들은 주로 오대(五代)시대로부터 원대(元代)에 이르기까지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무려 338체의 부처가 조각되어 있다.
(4) 계림(桂林, 꾸이린)
계림은 중국대륙의 최남단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의 동북지역에 위치한 세계적으로 이름난 관광도시이다. 계림은 2000년 이상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지명은 이 지방에 많이 자생하는 계수(桂樹)나무에서 따온 것이라 하며 지금도 시내의 가로수는 모두 계수나무로 되어 있다.
계림 일대의 아름다운 산들은 옛날 바다 밑의 커다란 석회암들이 지각변동으로 융기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풍화되면서 이끼와 식물로 덮어져 수많은 봉우리로 변한 것이란다. 마치 동양화에서 보는 절경이 현실 세계에 펼쳐져 있는 느낌이다. 마침 근처를 흐르는 아름다운 이강(灕江)과 더불어 계림의 산수는 천하 으뜸가는 경치를 자랑한다. 시인들이 계림산수갑천하 (桂林山水 甲天下)라 노래한 것도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시내에는 국보급 문화재가 다수 있으며 많은 문인 묵객들이 절벽에 새긴 시문들이 2000여 개소 이상에 산재 되어 남아 있다.
계림 시내는 그리 큰 도시가 아니며 인구 약 70만의 시골도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사는 길어 일지기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계림군(桂林郡)을 설치한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영남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내려오고 있다. 자치구 전체인구의 약 4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는 쭈앙족(壯族)은 막상 계림시내에서는 소수에 불과하고 관광지로 발전한 특수성 때문인지 현재 시내 인구의 대부분은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한족이라 한다. 일직부터 공항이 개설되었으며 외국자본과 합자로 지은 일급 호텔들도 많아 세계 각지에서 오는 관광객이 연간 50만 명을 초과하고 있다.
이강
계림 시내에서 가 볼만한 곳으로는 독수봉(獨秀峰) 복파산(伏波山) 첩채산 疊彩山) 상산공원(象山公園) 등이 있으며 석회암 동굴(鐘乳洞)도 구경할만하지만 계림관광의 백미(白眉)는 역시 배를 타고 이강(灕江, 리쟝)을 유람하는 것이다.
이강은 계림에서 남동방향으로 흐르며 하류에 가서는 계강(桂江) 서강(西江) 주강(珠江)이라 이름이 바뀌며 광주(廣州)를 거쳐 마카오 옆 주해(珠海)에서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 간다.
이강 뱃놀이는 계림선착장에서 양삭(陽朔)까지 약 80 km를 배로 내려가는 것이다. 아침 8시경 각 호텔에서 단체로 모여온 관광객들은 선착장에서 수 십 척의 유람선들에 각각 나뉘어 타고 서로 앞서가니 뒤서거니 마치 경주나 하듯이 기다란 줄을 지어 함께 내려간다. 이강의 좌우에는 칼스트 지형으로 형성된 수많은 기암(奇岩) 기봉(奇峰)들이 그림처럼 전개되며 강변에는 푸른 대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진다.
도중에 배에서 제공되는 점심(중국요리)을 먹고 양삭에는 오후 2시경에 도착하며 돌아오는 길은 양삭에서 버스로 약 두 시간 걸려 계림으로 오게 된다.
계림에서 살 만한 기념품으로는 계화차(桂花茶)가 있는데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 독특한 향으로 유명하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번 시음해 볼만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배웠습니다.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