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귀농이라는 단어를
들어 본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네요.
요즘은 많이들 익숙해진 단어라...
한 마디로
농촌으로 돌아간다는 말인데...
저는 귀농의 의미를
귀의의 한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삼귀의...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는,
즉 이 세 가지에 돌아가 의지하는 것 말입니다.
대자연인 법신 부처님과
법신 부처님의 가르침인 대자연의 가르침
그리고 그곳에 의지하여
대자연의 이치와 하나 되어 사는 사람들 바로 승가
그곳으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 말입니다.
물론 앞서 말했던 것처럼
농부가 되는 그런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자연을 파괴하는 농부가 아닌
자연과 하나 되고
온 우주 법계와 하나 되어
조화롭고 평화롭게 사는 농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일이야말로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일이며,
흙과 대지인 우리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의 모습일 것입니다.
저도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이 들기만 했다가
이젠 좀 더 실천하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데요.
조화로운 삶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삶 말입니다.
그래서 귀농하시는 분들 얘기를 이따금씩 듣는데
모두들 수행자 같이
욕심도 없고
마음도 참 자연을 닮았고
눈빛도 참 선하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엊그제는 TV에서
전라도 어디에 있다는 중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참 많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중학생들인데
농사를 배우는 학교 얘깁니다.
얼마나 조화롭고 평화롭고
흙처럼 대지처럼 자연처럼 닮아 살고 있는지...
실상사 귀농학교나
실상사 공동체 이야기며
도법스님의 화엄세계 가르침들도
다 맞닿아 있는 가르침들이더군요.
아래에
귀농통문이라는 곳에서 옮겨 온
귀농한 이들 이야기를 하나 옮겨 봅니다.
---------
불영계곡의 단풍이 제 치장에 겨워 물위에 눕는다.
물은 소리없이 찾아온 이를 반갑게 받아들이고 제 몸도 물들인다.
거기에 햇살이라도 가세해 보라. 누가 물이고, 누가 그림자인지 알 바 아니다.
서로 어우러져 햇살에 몸을 쬐며 옹알이를 한다.
자연은 그리 스폰지처럼 세상 것을 온전하고 감내하며 받아들이는데
유독 사람만이 제 잘난 멋에 삐딱하게 서서 구경만 하며 옷깃을 여민다.
혹여 제안에 물이라도 들까봐서인지...
산골로 온 이유
나이들면 가서 살기 위해 춘천에 땅을 천 평 사두었다.
우린 거기에 주말농사를 지었다. 어린 아이들 데리고 주말마다 가는 그곳은
도시에서의 찌든 때를 벗길 수 있는 유일한 아지트였다.
어느 날 남편이 회사 끝나고 유기농 관련 교육을 받는다기에
춘천 땅도 있으니 도움될 성싶어 그러라고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귀농"이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렸다.
그런 단어도 있구나 했을 뿐 내 귀에 남아두진 못했다.
그러나 점차 그 강도와 횟수가 한겨울 눈 쌓이듯 푸짐해져 갔다.
"귀농하고싶은데...." 이제 제법 문장까지 구사하는 거였다.
두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어느새 그 문장은 권유형으로 바뀌었다.
"우리 귀농하자."
남편은 그 때 대기업 과장이었고, 난 한국생산성본부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다
95년에 둘째 육아문제로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 될 법이나 한 소린지....
남편의 그 말은 일시적인 생각이 아니고, 현실도피도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어디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겠는가.
여러 차례 마주 앉아 대화를 했지만 언제나 싸움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일방의 고집으로 흙탕물 가라앉듯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라앉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마주 앉았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춘천에 주말농사를 지으면서 흙과의 교감을 느꼈고, 귀농교육을 받으며
사람의 삶에 대해 유리알처럼 다시 투명하게 들여다보게 되었단다.
그보다 더 진한 이유는 남을 밟고 내가 서야 하는 사회,
제정신보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가 싫더란다.
그러한 생활을 정년퇴직 때까지 할 생각을 하니 삶이 너무 팍팍하더란다.
어차피 한 번 태어나 가는 인생, 나머지 시간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죽고 싶더란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 아이들만큼은 이 학원 저 학원 뺑뺑이질 않고
흙을 밟고 흙에 뒹굴며, 새소리 듣고 자라게 하고 싶단다.
이번에는 내가 밤새 고민할 차례였다.
첫째, 남편은 가장으로서 단 한번도 자신의 일로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일에 대해서는 서로 존중해주고, 믿어주는 마음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어떤 새로운 결정, 모험적인 결정을 하더라도
가족들은 실망시키는 일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둘째, 나 또한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주말에나 배낭 싸매고 산과 들로 싸돌아다니는 것이 다일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어린아이에게 학원 가방 들려주고 현관문을 닫을 때 가슴으로 들려오는
꽝 하는 차단되고 차가운 소리...
그 소리를 아이도 듣고 나도 들으며 언제까지 그 바퀴에서 살아야 하는지 답답했지만
도시에서의 당연한 코스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자연에서 뒹굴며 키우는 것이 아이의 정서 면에서, 창의력 면에서,
심성 면에서 더 없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셋째, 난 성당에 다니지만 평소에 존경하는 법정스님이 무소유적인 삶을
책으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법정 스님의 이 글은 떨리는 나의 손을 잡아주기에 충분했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자기답게 거듭거듭 시작하며 사는 일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거듭거듭 둘레에 에워싼 제방을 무너뜨리고라도 늘 흐르는 쪽으로 살아야 한다."
스스로 여러 날 생각해 보았다.
"난 흐르는 쪽으로 살고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주 앉았다.
"가장이 나를 따르라" 하는데 "너나 가라"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정작 주동자가 바짝 긴장하는 눈치
귀농을 허락하니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한 몇년 버버거리며 끈덕지게 이해시킬 요량이었는데
의외의 빠른 반응에 며칠 말이 없더니, 자신의 고집으로 온 가족을
정말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는데 조금이나마 고생을 덜기 위해
한 3년만 열심히 직장을 계속 다니며 더 돈을 모은단다.
쉽게 말해 철저히 준비한 후 귀농하잔다.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몸으로 노력해서 살아야 하는 농사는 한 살이라도 젊어서 가야 한다.
둘째로,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기 위해 선택한 일인데
그 애들이 계곡에 단풍 물들 듯 도시에 물들기 전에 자연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어차피 호강하려고 산골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라면 도시가 빠르다.
물질적 호강이 아니라 마음의 호강을 위해 선택한 일이니 빠를수록 좋다고 했다.
부모, 형제들에게는 무어라 해야할지
내 자신이 귀농을 결정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통과의례를 또 거쳐야 했다.
친정과 본가의 허락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그저 통보하는 것으로 끝을 봐야 했다.
시어머님은 "아들 하나 있는 거 갈켜서 존 직장 보내 놨더니 이게 무슨 소리 하는거냐?
그 놈 미쳤으니 에미야 니 이혼해라. 호적 파서 혼자 가라 해라"
하시며 어린 손자들을 끌어 안고 통곡을 하셨다.
남편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고
난 코흘리개 때 서울로 유학을 왔으니 나 역시 농사는 잼뱅이라
부모님들의 걱정은 대단했다.
그리고 친정 엄마와 언니들의 허탈해 하시는 모습이란....
왜 안그렇겠는가? 친정 엄마는 충남 천안의 어느 종갓집 맏며느리셨다.
부족할 것 없었지만 자식들은 공부 많이 시켜 서울의 회사 다니는 사람과
결혼시킨다는 이유 하나로 여섯이나 되는 코흘리개 이끌고 과감히 서울로 오셨던 분이다.
"죽으라 대학원까지 갈켜 놨더니 막내 니가 어떻게 엄마에게 이럴 수 있니?
다른 자식들은 엄마 소원대로 서울에 말뚝박고 잘 사는데
잘 나가다가 니가 시골 가서 농사라니...."
자식 이기는 부모 있는가.?
지금도 엄마 생각하면 두릅가시보다 더 큰 것이 가슴을 찌른다.
도시의 끈을 정리하는 일
우선 도시의 끈을 다 정리하기로 했다.
귀농을 허락하고 이내 난 내가 하던 일을 정리했고,
두 군데 일정이 잡혀있던 강의도 취소했다.
그리고 가느다란 끄나풀이라도 남겨 두면 혹여 쉽게 되돌아갈까봐,
그리고 거기에 경제적으로 의지하여 반쪽짜리 귀농이 될까 봐 모두 정리하기로 했다.
땅을 보러 다니다 보니 땅이 맘에 들면 돈이 부족하고,
돈이 되면 서울에서 너무 멀고....
친정, 시댁 모든 가족들이 서울에 계시니 서울 근교를 보러 다녔던 것인데,
그러나 그것도 또 다른 미련이었다.
남편은 "당신 생각해서 서울 근교로 가려고 했는데 어렵네.
그러니 우리 서울이라는 조건을 던져버리자" 고 했다.
나 역시 이왕 귀농하기로 한 것 또 서울의 끈을 부여잡고 양다리 걸치는 삶은
더더욱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결정한 곳이 이곳 경북 울진 산골,
그리고 이내 아파트도 팔고, 춘천의 땅도 팔았다.
차도 지금의 차는 너무 사치스럽다고 중고 더블캡으로 바꾼상태다.
이제 남은 일은 남편이 사표를 내는 일, 그러나 사표 수리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파트 비워줘야 할 날이 되어가는데, 결국은 반대하며 악악거리던 나와 아이들
그리고 무서움을 많이 타니 애꿎은 친정엄마를 모시고
우리 먼저 낯선 산골로 둥지를 옮겨 앉았다.
주동자인 남편은 넥타이 매고, 중고 트럭 타고 아는 집에서 사표 수리될 때까지
굳세게 다니고, 한참 후에야 남편이 산골로 합류했다.
다른 집은 남편이 먼저 귀농하고, 반대하던 아내가 나중에 합류한다더니만
이 놈의 경우는 어찌된 영문인지 뒤집어져도 한참 뒤집어졌으니....
아이들 교육을 걱정하지만
많은 분들이 묻는다. 아이들 교육은 걱정 안되느냐고,
난 아이들 때문에 하루라도 더 빨리 내려왔는데 말이다.
이곳은 마을 입구에 분교가 있었다.
그나마 아이들이 줄자 폐교되어 본교까지 다닌다.
폐교까지 스쿨스타렉스가 온다.
본교라고 해봤자 전교생이 25명, 학원까지 가려면
구불구불 불영 계곡을 돌아돌아 50분 정도 걸리는 읍까지 가야 한다.
그러니 구경도 못한다.
지금의 별난 주입식 교육으로 치자면 모든 아이들이 다 서울대에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주요한 것은 아이의 마음에 샘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모가 주입해서 될 일도 아니고, 학원을 보내서 될 일도 아니다.
하늘을 보며, 흙을 만지며, 홍수를 보며, 별을 보며,
입에 겨울 양식을 잔뜩 문 다람쥐를 보며 스스로 마음의 샘을 파야 한다.
물론 산골로 데려왔다 하여 아이들이 다 훌륭히 된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도시에서 찌들고, 시간에 쫓겨 다니는 아비만 보다
산골에서는 친구로 만들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있는지....
도시에서야 거의가 교육을 애미가 책임진다.
애비야 책임지고 싶어도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허수아비 아닌가.
그러니 머리 약은 애미가 요리조리 잘 교육시키면 되는 줄 알았다. 최소한 난 그랬다.
그러나 산골로 와서 아이들과 애비의 어우러짐을 보고 큰 착각이었음을 알았다.
아이들은 애비에게서 자신감, 진취적인 사고, 모험심, 강한 용기 들을 배운다.
글뿐인가?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책을 더 많이 읽는다.
시간 나면 책을 보는 아이들,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앞으로의 시대는 창의력과 정서가 주도하는 사회이니 부모가 깨어 있다면
아무리 깊은 산골에 살더라도 교육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책을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아이들은 스스로의 샘을 팔 것이므로....
귀농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농사가 힘든데 후회하지 않느냐고 많이 묻는다.
힘들지만 좋다고 말한다. 그것은 농사 자체만 말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농사를 짓지 않고 다른 직업을 택했을 때와 비교해야 한다.
다시 말해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을 생각해서 말해야 한다는 거다.
그것을 감안했을 때 좋다는 말이다.
그리고 산골로 와서 덤으로 좋은 것은 꿈을 키우며 산다는 거다.
도시에서는 꿈이 아니라 욕심을 키우고 살았다.
남편이 승진을 더 했으면 좋겠고, 더 큰 아파트를, 더 좋은 차를 샀으면,
아이들이 공부를 잘했으면 한다.
그러나 그건 꿈이 아니라 욕심이었다.
그러나 산골에 와서는 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그것이 꼭 이루어지든 어떻든, 작은 꿈을 키워가면서
하나 하나 실현시켜 갈 수 있다는것, 그보다 더 큰 "얻음" 이 있을까?
삶의 주체가 가족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14평 정도 되는 오래된 오두막이다.
구들방이 하나 있고, 나무보일러 때는 방이 하나,
그리고 부엌은 작은 방 하나에 싱크대를 놓은 상태다.
이 모습은 우리가 이사 들어오던 모습 그대로다.
도배도, 장판도, 어느 것 하나 손댄 것이 없다.
처음엔 손님이 오면 그런 오두막이 신경쓰였다.
그러나 그것은 도시 물이 덜 빠진 상태의 사고였다.
집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산골에 와서 체득했다.
집이 어떻든, 오는 손님이 어찌 보든 중요한 것은 그 오두막의 주인이 만족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여름이면 학교 다녀온 아이들이 밭에 와서 계곡으로 수영 가자고 조른다.
그리 되면 더 버팅길 수가 없다. 아이들 때문에 귀농할 부분이 크기 때문에,
일하던 괭이와 호미를 던지고 물과 과일 몇 개 바구니에 넣고 조금 내려가면
천지가 자연 수영장이다.
그때부터 아비와 아이들의 수영, 잠수가 시작된다.
그래서 아이들이 오기 전에 죽어라 쉬지 않고 일하는 버릇이 생겼다.
도시에서의 고민은 명과외선생, 학원강사 찾는 것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자빠지게 놀아주고,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어야 할까다.
이젠 학교 다녀온 산골아이들의 표정만 봐도
그 놈들이 이 더운 날 뭘 원하는지 아비가 얼추 읽어낸다.
그것은 보통 변화가 아니다.
사실 도시에서야 아비가 술기운이 아닌 맨정신으로
아이들 얼굴 보는데 2박3일 걸리는 것은 보통이었으니 말이다.
양손에 떡을 다 쥘 순 없다.
옛말에 양손에 떡을 다 쥘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자연에서 키우면서, 학원도 보낼 수 있고,
문화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귀농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그런 말을 한다.
귀농하면서 우선 순위를 정하라고...물론 모두가 다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야
사람이라면 다 원하는 바이지만 양손에 떡을 다 쥘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시 여기는 부분부터 순위를 정해 살면 크게 실망할 일도 없고
그 부분에 치중할 수 있어 마음이 넉넉해질 수 있다.
나의 경우는 "아이들"이 우선 순위의 맨 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과 자연에서 잘 지냈다면 그 다음의 아쉽고 힘든 부분은
완전자동으로 우선 순위 뒤에 숨어 버린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간 데 없이 펼쳐진 바다처럼 어디 끝이 있는지....
바람이 차다.
여기 저기 걸어둔 풍경에서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낸다.
바람이 놀러왔다가 그 소리에 놀라 달아나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어느새 다시 와 풍경 위에 앉는다.
난 풍경을 좋아한다.
풍경소리는 도시에서 덕지덕지 붙이고 온 욕심덕갱이를 털어주고,
지친 내 영혼을 흔들어 깨워주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소리로, 내일은 저 소리......
그 덕분에 산골에서는 영혼이 가라앉을 시간이 없다.
도시에는 그대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줄 그 무엇이 있는가?.........
[법상스님/목탁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