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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센도르프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장미십자회의 역사적 기원
장미십자회(Rosicrucian)의 연대적 기원은 기원후 11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컬트이다.
이 무렵에 장미십자회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티보 드 페인스(Thibaud de Payns, A.D. 1110~1148)라는 인물을 알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12세기에 생뜨 콜롱브(Sainte-Colombe, 인명)의 대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원장으로 재직했던 프랑스 수도사였다.
티보 드 페인스 수도사는, 성전 기사단(Knights Templar) 혹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신전의 가난한 전사들’ 속칭 성전 기사단을 조직했던 9명의 기사 중에 한 명이자, 성전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초대 총장)인 위그 드 파앵(Hugues de Payens, 1070~1136, 또는 휴고 드 파옌스(Hugo de Payens)의 아들이다.
성전기사단 위그 드 파앵(휴고 드 파옌스)의 여동생 애들레이드(Adelaide)의 손자 장 쇼몽(Jean Chaumont) 1188년 역사상 최초로 장미십자회(Rosicrucians) 종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장 쇼몽은 기원후 1717년 런던에 있는 4개의 프리메이슨 랏지(Lodges)에 합류하여 장미십자회(Rosicrucians)를 이끌었다. 영국의 런던의 마더 그랜드 랏지(Mother Grand Lodge of London)는, 영지주의와 합리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장미십자회를 존경받는 형제단으로 인정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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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시커(seeker)님께서 아래와 같이 질문하였습니다. 아래의 질문 내용은 seeker님의 질문으로 알았는데, seeker님이 제 삼자에게 필자의 책을 스캔하여 보내주었더니 아래와 같이 질문했다고 합니다.
“진젠도르프 관련 질문
1. 진젠도르프의 장미십자회가 일루미나티의 전신이라는 주장의 근거
2. 장미십자회는 인터넷에서 13세기에 잠깐 있었던 단체로 나오는데 진젠도르프가 18세기에 만들었다고하니 정보가 서로 상이함.
3. 일루미나티의 뜻이 계몽이라고는하지만 계몽주의는 당시 시대적 사조로 일루미나티만을 칭하는 것이 아닌데 '계몽주의=일루미나티' 이런 도식이 어떻게 성립되는가?”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추가질문...
엄격한 경건주의 학교인 할레의 페다고기움(Pedagogium)에서 중등 교육을 받은 그는 1716-1719년에 비텐베르그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721년 드레스덴 선제후의 사법 자문위원이 되었다.
교회용어사전
여기서도 할레대학교에 10세에 들어갔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대학교를 10세에 간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네요. 더구나 할레대학이 아니라 할레라는 지방에 있는 라틴어학교 페다고기움에 들어갔습니다. 음...
뭐하나 맞는 것이 없어서.... 저는 2장만으로도 이 책을 신뢰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지인이 감리교와 진젠도르프에 대해 궁금하다고 해서 책 몇 쪽을 스캔해서 보내주었더니 질문이 생겼네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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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1(한국기독교정보학회 카페지기 안병삼 박사)
한국기독교정보학회 카페지기 안병삼 박사의 답변(장미십자회의 역사적 기원)
필자는 장미십자회가 일루미나티의 전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마치 필자가 장미십자회가 일루미나티 전신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내용으로 질문하신 저의와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추가 질문 부분에서는 네이버 나오는 글을 펌하여 질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질문자의 글도 아닙니다.
1. 일루미나티의 역사적 기원 요약
일루미나티 기원은 고대, 중세, 현대 일루미나티가 있습니다. 고대 일루미나티 조직은 스파라디 유대인에 의하여 스페인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중세 일루미나티는 로마 카톨릭의 제수이트 창설자인 이그나티우스에 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현대 일루미나티는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에 의하여 창설되었습니다.
그리고 현대 프리메이슨 기원은 주후 1717년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조직은 초창기에 매우 다양한 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프리메이슨 그랜드 랏지(United Grand Lodge of England) 빌딩 정문 상단에는 1717년과 1917년이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고고학과 역사 기록에는 15세기 이전에도 프리메이슨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다양한 견해가 생긴 것입니다.
2. 장미십자회의 역사적 기원
필자는 보편적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내용만 간략하게 책에서 다루었으나, 책의 쪽 수가 많이 늘어나기 때문에 여러 내용을 대폭으로 생략하여 부분적으로 다루었다.
책을 출판하고 보니, 생략하였기 때문에 한국기독교정보학회의 카페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내용도 포함하지 않았다. 전문적인 내용을 누락하여 아쉬움을 갖게 되어 다시 내용을 추가하는 중입니다.
필자의 저서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단의 정체” 203쪽을 인용하여 봅니다.
“사탄의 회 장미십자회 창시자는 다른 문헌에 보면, 크리스티앙 로젠크로이츠(Christian Rosenkreutz, 1378~1484, 106세)이다. 이 조직은 독일에서 1614년과 다음 해인 1615년에 독일에서 익명으로 출판된 2통의 성명서를 통해 장미십자회의 교리를 담은 책들이 출판되고 난 후에 세상에 알려졌다.”라고만 썼습니다.
이 내용은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내용에 불과합니다.
한국기독교정보학회 학술회에서 발표한 장미십자회의 역사적인 기원에 관하여 다룬 사실이 있는데, 국내 학술계 최초로 발표한 것이다. 그 내용은 간략하게 요약하여 아래에서 다시 소개한다. 아래의 내용은 저작권이 있는 내용이다.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지한다.
“1. 역사상 최초의 장미십자회의 기원
장미십자회의 역사적인 기원에 대한 견해는 몇 종류가 있다.
첫째, 로마가톨릭이 일으킨 십자군 전쟁 때에 기사단에서 장미 십자 회가 나왔다는 견해이다. 사학자는 이 견해가 역사적으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유럽의 역사에서 기원후 476년부터~기원후 1000년까지의 역사를 중세 전기(Early Middle Ages) 시대라고 지칭한다. 물론 사학자마다 견해는 차이가 있다.
장미십자회(Rosicrucian)의 연대적 기원은 기원후 11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컬트이다.
이 무렵에 장미십자회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티보 드 페인스(Thibaud de Payns, A.D. 1110~1148)라는 인물을 알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12세기에 생뜨 콜롱브(Sainte-Colombe, 인명)의 대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원장으로 재직했던 프랑스 수도사였다.
티보 드 페인스 수도사는, 성전 기사단(Knights Templar) 혹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신전의 가난한 전사들’ 속칭 성전 기사단을 조직했던 9명의 기사 중에 한 명이자, 성전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초대 총장)인 위그 드 파앵(Hugues de Payens, 1070~1136, 또는 휴고 드 파옌스(Hugo de Payens)의 아들이다.
성전기사단 위그 드 파앵(휴고 드 파옌스)의 여동생 애들레이드(Adelaide)의 손자 장 쇼몽(Jean Chaumont) 1188년 역사상 최초로 장미십자회(Rosicrucians) 종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장 쇼몽은 기원후 1717년 런던에 있는 4개의 프리메이슨 랏지(Lodges)에 합류하여 장미십자회(Rosicrucians)를 이끌었다. 영국의 런던의 마더 그랜드 랏지(Mother Grand Lodge of London)는, 영지주의와 합리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장미십자회를 존경받는 형제단으로 인정하여 주었다.
2. 장미십자회 두 번째 창시자
장미십자회(Rosicrucians)의 역사적인 기원을 보편적으로는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Christian Rosenkreuz)로 본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로젠크로이츠가 역사적인 실제 인물이 아닌 허구의 인물이며, 단지 그룹의 창립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는 1378년에 태어나 106년을 살았다.
그는 은밀한 지혜를 찾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다녀온 뒤에 독일로 돌아와서 1403년도 장미십자회를 조직하였고, 1409년에 성역을 세우고 1484년에 사망한 후 그곳에 묻혔다. 120년 후에 그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기사단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일루 학자는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가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1460–1524)의 가명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실명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3. 요한 폰 슈타우피츠는 독일 장미십자회의 의장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1460–1524)는, 1460년 신성 로마제국 작센 선제후 모터르봐츠(Motterwitz, Electorate of Saxony)에서 체코 출신의 옛 작센 가문(그의 조상 성은 원래 스투픽)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로마카톨릭의 신학자로 독일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총대리로 독일의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를 가르치고 감독했다. 마틴 루터는 자신의 상관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를 아버지와 같이 때로는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요한 폰 슈타우피츠는 독일 뉘른베르크 장미십자회 랏지의 의장을 맡고 있으면서 마틴 루터를 장미십자회 일원이 되도록 이끌었다.
마틴 루터는 뉘른베르크에서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1460~1524)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가문을 위해 장미십자의 문장(로고, 심벌, 상징)을 만들었다. 이 문양은 마틴 루터의 후원자이며, 종교 개혁자로 알려져 있고, 유명한 찬송가 작곡가로도 알려진 라자루스 스펭글러(Lazarus Spengler, 1479-1534)가 제작했다. 이 장미십자회 문양은 마틴 루터가 1518년 10월 23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돌아오는 길에 라자루스 스펭글러에게 맡겼던 것이다. 라자루스 스펭글러는 이 문양을 제작하여 마틴 루터에게 건네주면서 좋아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4. 마틴 루터의 인장 장미십자회 문양 제작
일루미나티 계열에 하나인 장미십자회(Rosicrucian)는 자신들이 회원이라는 점을 비밀 싸인과 함께 장미 꽃 중앙에 십자가를 그려 놓는 문양을 상징으로 사용했다. 독일의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책이나 초상화를 보면, 반드시 장미 꽃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문양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이 문양을 어떤 과정을 걸쳐서 제작되었는지를 아래에서 인용하여 본다.
"루터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라자루스 슈펭글러(Lazarus Spengler)가 실제로 착안하고 설계했으며,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수도회 사제가 정교하게 다듬었다. 1530년에 루터는 슈펭글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장에 대해 설명했는데 놀랍게도 여기에는 TRF 엠블럼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라고 하였다(원문: "was actually conceived and mostly designed by Lazarus Spengler, Luther’s friend and supporter, which was then elaborated on by the Augustinian priest. In 1530, Luther described the Seal in a letter to Spengler, which, remarkably, contains most of the elements that appear in TRF emblem:").
마틴 루터가 사용하고 있는 장미십자회(로고, 심벌, 문양, 상징)를 상징하는 빨강색 장미 꽃과 흰색의 장미 꽃을 놓고 논쟁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는데, 색깔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도 모두 확인되었다.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독일의 화가이자 인문주의자인 라자루스 스펭글러(Lazarus Spengler,: 1479-1534, 독일 뉘른베르크)는 장미십자회 일원이자 시의 서기를 지냈다. 라자루스 스펭글러가 마틴 루터의 장미십자회 인장을 제작했다는 내용은 영문 위키백과사전을 비롯하여 여러 문헌 등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5. 마틴 루터에 관한 요하네스 로스크란츠의 증언
요하네스 로스크란츠(Johannes Rothkranz)는 독일 필젠 암 라인(Filsen am Rhein) 출신의 로마카톨릭의 신학자로 독일의 우익 극단주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다작의 작가로 체코어의 논문과 여러 종류의 책을 집필했다. 그의 저서 중에는, “다가오는 "인류의 독재" 또는 적그리스도의 통치, 1990/3권”, “행동하는 어둠의 세계 지배자”(1992년 2판) “적기독교적 세계국가에서 연합된 종교들, 1992”) 요하네스 로스크란츠의 논문 “기독교 서부의 붕괴, 카톨릭 신앙을 위하여”(원제:“Rozval křesťanského Západu, Pro fide Catholica”)라는 체코어 논문에서 마틴 루터가 장미십자회이며,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1460–1524)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발표하고 있다. 요하네스 로스크란츠의 저서는 많은데, 유대인 일루미나티가 카톨릭 신앙을 망친 자라고 성토하면서 카톨릭의 전통주의자들에게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 주는 글을 많이 쓰고 있다. 요하네스 로스크란츠의 체코어 논문을 아래에서 인용하여 본다.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1460-1524), 마틴 루터는 어거스틴 은둔자의 독일 회중에 속해 있었다. 1503년부터 그가 비텐베르크에서 교수직을 맡았을 때, 요한 폰 스타우피츠는 "루터의 지지자이자 후원자"였다."라고 하였다(원문: “b) Johann von Staupitz, Martin Luther náležel k německé kongregaci augustiniánských eremitů. Od roku 1503, kdy ve Wittenbergu převzal profesuru, byl generálním vikářem tohoto řádu, Johann von Staupitz, „Lutherovým příznivcem a podpůrcem“.26 O něm nám „LThK“ (heslo „Staupitz, Johann“) mj. sděluje:").
“루터는 뉘른베르크 랏지의 지도자에게 의존했다. “당신은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남겼다. 엄마 없는 아이처럼 슬펐어요. 나는 어젯밤에 꿈을 꾸었다. 당신이 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고 나는 몹시 울었다. 당신은 다시 오겠다고 손짓하며 진정하라고 손짓했다. 호무스(Homuth)는 "뉘른베르크의 프리메이슨 랏지는 인본주의 정신으로 활동하고 폰 슈타우피츠의 리더십 역할을 따서 '스타우피탄의 회원'(Sodalitas Staupitan)이라고도 불렸으며 초기 종교 개혁과 젊은 루터의 주요 원동력이었다."29”라고 하였다(원문: ““Luther byl závislý na vůdci norimberské lóže,“ konstatuje Norbert Homuth výstižně, a uvádí k tomu jako jeden z mnoha dokladů následující pasáž z Lutherova dopisu Staupitzovi z 3. října 1511: Až příliš jsi mě opustil; byl jsem kvůli tomu smutný jako dítě bez matky. Dnes v noci jsem snil. Bylo mi, jako by ses se mnou loučil, a já jsem hořce plakal. Pokynul jsi mi rukou, abych byl klidný, že se zase vrátíš.“28
Homuth dále uvádí „Zednářská lóže v Norimberku, pracující v duchu humanismu a podle vůdčí role von Staupitze nazývaná také ‚Sodalitas Staupitana‘, byla hlavním motorem rané reformace i mladého Luthera.“29").
6. 마틴 루터는 어떻게 살아 남았는가?
마틴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고발하는 교황의 칙서가 1520년 6월에 공포되었다. 공식 사본은 10월에 마틴 루터에게 전달되었다. 루터는 1520년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교황 칙서와 로마카톨릭의 캐논법을 불태웠다. 이제 루터는 언제든지 잡혀서 화형을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로마카톨릭은 마틴 루터를 이단으로 재판에 넘겼다. 루터는 유죄 판결을 받고 로마카톨릭에서 파문당했다. 이제 남은 것은 마틴 루터의 화형식만 남겨 놓은 상태에 있었다.
이 당시에 로마카톨릭의 정치적인 권력은 그 시대의 군주의 권력 보다도 더욱 막강했다. 뿐만 아니라 1521년 4월에 소집되었던 신성 로마제국의 보름스 국회에서도 마틴 루터가 양보하기를 거부하자, 카를 5세 황제는 마틴 루터를 무법자로 정죄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누구든지 마틴 루터는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거나 살해 해도 문제가 없었다.
마틴 루터가 재판을 받기 전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재판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보호하는 강력한 세력이 도와 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중에는 마틴 루터의 스승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의 공이 가장컸다. 이 외에도 마틴 루터가 사는 지역의 지도자인 필립 왕자는 로마카톨릭의 교황청에 세금을 바치는 일에 불만이 많았고 지쳐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필립 왕자는 마틴 루터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마틴 루터가 재판을 받는 동안에도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재판받을 수 있도록 서한을 요구하기도 했다. 재판이 무사히 끝나자 루터의 지지자들은 가명으로 변장하고 마틴 루터를 독일의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시켰다.
마틴 루터는 이곳에서 1년을 숨어지면서 로마카톨릭과 국가를 무시하고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독일어 신약 성경은 독일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마틴 루터가 살벌한 시대에 활개를 치고 다녔던 것은 그 당시의 장미십자회의 귀족과 정치인, 유럽의 거대 상인, 교수, 수도사 등의 거물급 인물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에 면제부를 논하여 보자는 95개 조의 논제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단순하게 서로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정도의 내용에 국한되어 있어서 로마카톨릭을 자극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로마카톨릭의 내부에서는 장미십자가 세력이 활동하면서 로마카톨릭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지배층을 압박하여 문제가 되었고, 루터가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자 인쇄 기술의 발전으로 1년 이내에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배포되면서 큰 반항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을 신학자는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폈다고 말하는 것이다. 면죄부에 관한 95개의 논조는 처음에는 라틴어로 썼으나 나중에는 여러 나라의 말로 번역되어 독일어 성경과 함께 부각되었다.
마틴 루터의 면죄부에 관한 95개 논조는 학문적인 것은 아니었다. 로마카톨릭의 성당의 건축비를 마련하게 위해 오랫동안 고해성사를 하여 온 신자의 죄를 사면하여 주겠다고 면죄부를 팔았다.
반면에 마틴 루터는 면죄부를 반대하고 비판하였으나, 마틴 루터 자신은 수입원의 하나로 면죄부를 지속적으로 팔았던 것이다. 마치 부적처럼 팔아서 이익을 챙겼다. 파렴치하기는 로마카톨릭의 교황청이나 마틴 루터나 매 일반이었다.
한국 교계의 어떤 신학자나 목사는 마틴 루터의 면제부에 관한 95개조 논조의 영향을 받아 종교 개혁에 모토가 되었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말이 생겼났다고 주장하지만, 이 말은 여러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자 학자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7. 마틴 루터는 마법과 연금술에 도취되어 지냈다.
마틴 루터는 마법을 통해 신이 되려는 인간의 시도인 연금술이라는 신비주의 과학을 칭찬했다. 마틴 루터는 자신이 남겨 놓은 책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나는 연금술이라는 과학을 아주 좋아하고, 실제로는 고대인의 철학이기도 하다. 나는 금속을 녹이고, 허브와 뿌리를 달이고, 준비하고, 추출하고 증류하는 데서 가져오는 이익 때문에 그것을 좋아한다. 나는 또한 마지막 날에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비유와 은밀한 의미 때문에 그것을 좋아한다."라고 하였다.
참고 문헌: Martin Luther, The Table Talk of Martin Luther, (1566), "17세기 시에 나타난 연금술과 종말론'(Alchemy and Eschatology in Seventeenth-Century Poetry), 애들레이드 대학교 논문 "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에 나타난 연금술사의 이미지와 정체성"("THE IMAGE AND IDENTITY OF THE ALCHEMIST IN SEVENTEENTH-CENTURY NETHERLANDISH ART"). 등 다수.
"Martin Luther commended the Hermetic science of alchemy which was man’s attempt to become divine by means of sorcery.
“The science of alchymy I like very well, and indeed, ‘tis the philosophy of the ancients. I like it not only for the profits it brings in melting metals, in decocting, preparing, extracting and distilling herbs, roots; I like it also for the sake of the allegory and secret signification, which is exceedingly fine, touching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t the last day.” - Martin Luther, “Table Talk,”
8. 결론
독일의 종교 개혁자로 알려진 마틴 루터가 일루미나티 조직에 하나인 장미십자회 멤버라는 증거들은 너무나 많다.
루터교는 사탄의 회인 로마교(로마가톨릭)와 하나가 되기로 상호간에 서명했다. 로마교의 주교(교황?) 프란시스(Francis, 2013년 취임)가 스웨덴을 방문하던 첫날에 룬드 대성당(Cathedral of Lund)에서 루터교 세계연맹과 한 자리에 모여 상호간에 하나가 되기로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하나로 통합했다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 소식은 전 세계의 각 뉴스에서 빅뉴스로 다루어졌다.
로마뉴스 TV 통신사(ROME REPORTS TV News Agency) 룬드, 2016년 10월 31일(Lund, 31 October 2016)의 기사를 보면, “믿음이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면서, 함께 기도하고, 서로 듣는 것으로, 우리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모함으로써 우리 가톨릭 신자들과 루터교 신자들은 우리 자신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으로 연다(소집, open)고 했다.”라고 하였다. 사실 로마교(로마가톨릭)는 바벨론 종교인 이교도인 동시에 일루미나티 조직이다.
로마카톨릭은 개혁신앙과 개혁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신앙의 정체성을 상실하도록 만드는 현대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조직에 하나로 매우 강력한 조직이다.
오늘날의 루터교는 프리메이슨을 회원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물론 1957년 루터교는 회원 중 한 그룹이 프리메이슨 랏지에서 회원 자격을 반대하여 모임에서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한국 교계의 신학자나 목사는 2024년 해를 종교개혁 507년이 되는 해라고 말할 것이다. 종교개혁을 몇 년으로 정하는 기준은 독일의 로마카톨릭 사제이자 수도사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정문에 로마카톨릭의 면죄부에 관한 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하여 보자는 뜻에서 95개 조항은 붙였던 것 날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 95개 면죄부에 관한 조항은 마틴 루터가 로마카카톨릭에 대항하거나 반기를 들기 위한 목적으로 95개 조항을 붙인 것이 아니었다. 면죄부에 관하여 보편적으로 논하여 보자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 관하여 세계사 백과사전(World History Encyclopedia)의 내용을 아래에서 인용하여 본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의 95개 논제는 개신교 종교 개혁의 시작을 나타내게 되었지만 로마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성직자에게 제안의 일부 또는 전부를 토론하도록 초대한 것이었다.”라고 하였다(원문: "Martin Luther's 95 Theses of 31 October 1517, although they have since come to represent the beginning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were not written to challenge the authority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but were simply an invitation to clergy to debate any or all of the propositions listed.").
한국 교계의 신학자와 목사는 독일의 로마카톨릭 사제인 마틴 루터를 칭송하고 그가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정문에 95개 조의 논제를 붙인 연대를 기념하고 있지만, 마틴 루터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마틴 루터는 사탄을 숭배하는 일루미나티 조직 계열에 하나인 장미십자회(Rosicrucian) 일원이자 초대 교회의 이단인 영지주의자였다. 이단자인 마틴 루터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카톨릭의 어거스틴 수도회 총대리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를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한국기독교정보학회
안병삼 박사(카페지기 필레오~)
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연합회(70여개 교단 연합 단체)
상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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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레오작성자 20:32 새글
첫댓글 필자는 진선도르프가 일루미나티의 전선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없습니다. 일루미나티, 장미십자회, 프리메이슨 등은 원래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다른 조직인데 나중에 서로 연결되었으며, 장미십자회 조직의 역사적 기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하고 프리메이슨 기원도 25가지가 넘습니다. 필자는 장미십자회가 일루미나티 전신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없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은 어디에서 근거한 것입니까?
필레오작성자 20:33 새글
진센도르프가 장미십자회는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필자는 그런 주장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진센도르프는 장미십자회 대표를 역임했을 뿐입니다. 특정 조직의 대표를 지냈다고 해서 그가 장미십자회를 창시한 것이 아니므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필레오작성자 20:36 새글
일루미나티 역사적 기원은 고대, 중세, 현대로 나눠집니다. 계몽주의는 17~18세기의 유럽의 사조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인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754)는 말하기를,
“17세기 말과 18세기 전반에, 할레는 프러시아안의 경건주의를 위한 중심이 되었다.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754)는 합리주의의 중요한 제안자였다. 17세기와 18세기에 이 대학은 독일 계몽주의의 중심지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루미나티가 계몽주의라는 뜻입니다. 일루미나티는 빛(사탄의 빛)으로부터 온다. 빛을 계몽받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계몽주의는 17~18세기의 유럽의 사조가운데 하나였으나, 일루미나티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교는 할레의 대학교와 합병하여 현재 할레에 있는 할레 비텐베르크 마르틴 루터 대학교로 남아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합리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발트주의) 등의 마귀 사상이 널리 확산되어 루터교, 개신교, 정교회, 로마카톨릭까지 붕괴되어 혼란이 극심하게 되었습니다.
합리주의, 이성주의 등에 기초한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발트주의)를 통해 성경을 소위 새로운 학문이라는 잣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에 귄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철학자나 신학자는 계몽주의를 일루미나티와 전혀 상관없는 유럽의 특정 사조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자유주의창시자인 슐라이허마허도 일루미나티 일원입니다. 신 정통주의(칼바르트, 발트주의)도 일루미나티 일원입니다. 이 부분은 필자의 저서에서 국내 학술계 최초로 밝혀 놓았습니다.
사악한 합리주의적 학문의 맹공격을 받은 무리는 경건주의를 갈망하였는데, 그 틈새를 또 다른 이단인 장미십자회 조직의 계층 구조에 충족되는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여기에 신비주의와 영지주의까지 가세하여 참다운 기독교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일루미나티 일원이자 불가지론자의 창시자이고, 계몽주의의 인물 중에도 포함되어 있는 볼테르도 계몽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볼테르는 일루미나티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일루미나티와 계몽주의를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볼테르는 계몽주의 사조를 이끌었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사조란 철학에서 한 시대의 사상을 이끌었던 특정 사상을 지칭합니다. 볼테르는 현대 일루미나티 핵심 일원으로 불가지론의 창시자입니다. 불가지론은 이성에는 한계가 있어서 이성 밖에 존재하는 신은 없다고 하면서 약 250권의 반기독교적인 책을 남겼습니다.
일루미나티라는 뜻은 '빛을 계몽하다''라는 뜻입니다. 계몽이라는 그 자체가 일루미나티를 지칭하는 것인데 철학자와 신학자는 그 사실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레오작성자 20:41 새글
질문자는 필자의 저서 제5장 진센도르프 정체와 할레대학교(240쪽)와 241쪽 각 주에서 할레대학교가 마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대학교라고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필레오작성자 20:44 새글
질문자는, 아래와 같이 질문하였습니다.
"여기서도 할레대학교에 10세에 들어갔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대학교를 10세에 간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네요. 더구나 할레대학이 아니라 할레라는 지방에 있는 라틴어학교 페다고기움에 들어갔습니다. 음...뭐하나 맞는 것이 없어서.... 저는 2장만으로도 이 책을 신뢰하기 어려워졌습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10세 대학교에 들어 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누가 보아도 오타인데, 걸고 넘어지고 있습니다.
필레오작성자 20:52 새글
진센도르프는 10세인 기원후 1710년에 할레(Halle)에 있는 왕립 교육원(Royal Paedagogium)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이곳의 수장은 유명한 프랑케(Franke)였습니다. 진센도르프는 16세인 기원후 1716년에 비텐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1719년에는 당시의 젊은 귀족들의 관습에 따라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필자의 저서 242쪽의 내용 곧 "진센도르프(찐젠도르프, 독일 발음)는 10세에 할레 대학교에 입학하였고"라고 하였는데, 이 부분 필자가 오타를 친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정중하게 사과합니다.
그러나 필자가 마치 진센도르프를 허접하게 연구한 것처럼 국내 학술계 최초의 내용들을, 질문자는 "신뢰하기 어려워졌습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어느 나라도 10세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오타라고 인식할 수 있는데도 비평할 거리가 없으니까 오타를 가지고 흠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받은 목사나 성도라고 한다면, 필자의 책이나 한국기독교정보학회 카페에 필자가 올려 놓은 글에 비성경적인 내용이 있는지를 찾아서 비평하는 것인 옳은데도 아주 작은 사소한 오타를 가지고 흠집내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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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필자는 진선도르프가 일루미나티의 전선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없습니다. 일루미나티, 장미십자회, 프리메이슨 등은 원래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다른 조직인데 나중에 서로 연결되었으며, 장미십자회 조직의 역사적 기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하고 프리메이슨 기원도 25가지가 넘습니다. 필자는 장미십자회가 일루미나티 전신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없습니다.
진센도르프가 장미십자회는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필자는 그런 주장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진센도르프는 장미십자회 대표를 역임했을 뿐입니다. 특정 조직의 대표를 지냈다고 해서 그가 장미십자회를 창시한 것이 아니므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일루미나티 역사적 기원은 고대, 중세, 현대로 나눠집니다. 계몽주의는 17~18세기의 유럽의 사조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인 볼테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그가 일루미나티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일루미나티와 계몽주의를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사조를 이끌었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사조란 철학에서 한 시대의 사상을 이끌었던 특정 사상을 지칭합니다. 볼테르는 현대 일루미나티 핵심 일원으로 불가지론의 창시자입니다. 불가지론은 이성에는 한계가 있어서 이성 밖에 존재하는 신은 없다고 하면서 약 250권의 반기독교적인 책을 남겼습니다.
질문자는 필자의 저서 제5장 진센도르프 정체와 할레대학교(240쪽)와 241쪽 각 주에서 할레대학교가 마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대학교라고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상대히 무례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질문자는 아래와 같이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할레대학교에 10세에 들어갔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대학교를 10세에 간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네요. 더구나 할레대학이 아니라 할레라는 지방에 있는 라틴어학교 페다고기움에 들어갔습니다. 음...뭐하나 맞는 것이 없어서.... 저는 2장만으로도 이 책을 신뢰하기 어려워졌습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진센도르프는 10세인 기원후 1710년에 할레(Halle)에 있는 왕립 교육원(Royal Paedagogium)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이곳의 수장은 유명한 프랑케(Franke)였습니다. 진센도르프는 16세인 기원후 1716년에 비텐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1719년에는 당시의 젊은 귀족들의 관습에 따라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필자의 저서 242쪽의 내용 곧 "진센도르프(찐젠도르프, 독일 발음)는 10세에 할레 대학교에 입학하였고"라고 하였는데, 이 부분 필자가 오타를 친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정중하게 사과합니다. 그러나 필자가 마치 진센도르프를 허접하게 연구한 것처럼 국내 학술계 최초의 내용들을, 질문자는 "신뢰하기 어려워졌습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박사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거 같은데 제가 위 질문들을 한게 아니고 같이 이단을 연구하는 신학생인 제 지인이 여쭤본거에요.. 감리교 얘기가 나와서 이 책을 읽고 존 웨슬리가 프리메이슨이었고 감리교 측근들이 대부분 프리메이슨 출신이라는 근거가 있으니 책에 있는 내용 쪽수를 스캔해서 보내줬는데 이런 무례한 질문들을 보낸거구요.. 다만 그분도 그 책을 보고 의아해해서 그런 질문들을 한것일테지 비아냥 거릴 의도로 질문하지는 않을것 같습니다.
아! 그렇다면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제가 오해를 한 것이군요.
아닙니다 맨 처음 글에 질문들이 제 질문들이 아닌 지인의 질문이라고 적었지만 못 보셨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는 오해 소지 없이 맨 위에 글을 먼저 올려야겠어요 ㅎㅎ
대한민국의 교계에서 진센도르프를 정확하게 분력하신 분은 총신대 교수로 재직하셨던 박용관 박사의 저서인 이단종파연구에서 진센도르프를 이단으로 정의하셨습니다. 이 외에 필자가 국내 학술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북부 일리노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아론 스펜서 포글맨 교수가 전 세계에서 진센도르프 연구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자입니다. 신학자는 아론 스펜서 포글맨 교수의 책을 아마존에서 구입하여 한번 읽어야 자신들이 그 얼마나 진젠도르프를 허접하게 연구하였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 궁금하것이 이렇게 권위있으신 박사님들과 또 맹목적으로 그냥 사람들이 말하는 음모론과는 격이 다른 연구와 자료들이 있으신데 교단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알고도 침묵하는 건가요 아님 알려고 하지도 않는건가요? 근거와 실증이 있는데 왜 교단이 받으드리지 않는게 궁금합니다.
질문하시는 분이 특정 교단을 언급하지 않이 어떤 교단을 말씀하시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과 관계가 깊은 교단을 지칭한 것이라면, 어림도 없는 말씀입니다. 자신들의 치부가 한 순간에 모두 드러나기 때문에 함구할 것입니다.
또 신학자도 목사도 깊이 연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필립 샤프같은 인물인 프리메이슨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에 관하여 엄청난 업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이런 학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센도르프 연구에 있어서 아론 스펜서 포글맨 역사 학자를 뛰어 넘을 실력은ㅌ가진 학자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 프리메이슨 세계에서 앨버트 맥키 박사를 뛰어 넘는 학자는 없습니다.
저는 포글맨 역사 학자가 쓴 책 원서 2권을 소장하고 있고 맥키 박사의 책은 100권 가까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필자의 저서를 읽으시고 오타나 문제가 발견되면 댓글로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현재 저의 책은 책 내용 추가와 오타 등을 바로잡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