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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목사님 말씀
"그래도 지구는 돈다!"
어려운 것을 잘하는 사람 앞에 가면 저절로 잘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많이 아는 사람 앞에 가면 저절로 무식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상대적이다. 압도적으로 많이 아니 할 말이 없고 아이고 나는 무식하구나 이것밖에 안 남았다. 내가 많이 못 배웠으니 무식한 건 당연하다. 그래도 내가 주워들은 풍월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워낙 많이 아는 사람 앞에 가니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 몰라서 미안한데 그래도 지구는 돈다. 마지막에 그 말을 했다. 내가 무식해도 상관없고 유식해도 상관없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아침에 그 생각이 나니 얼마나 좋은지. 그래도 지구 돈다. 그렇게 많이 아는데 왜 이 한가지는 모를까? 모르는 게 아니라 사실 거부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할 말이 없어서 내가 물었다. 이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니 아무 말도 안 한다. 그래서 끝났다. 오늘 성준 형제 말씀을 들으니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 내가 문경에 약 18년간 다녔다. 갈 때마다 마음 편히 쉬고 잠도 잤던 집이다.
옥합은 누가 깨뜨리는가? 제일 불쌍한 사람이 깨뜨린다. 깨뜨릴 데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귀한 것을 준비해서 일생에 한 번밖에 못 쓴다. 여자라면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나면 옥합을 깨는 것인데 마리아는 그런 사람을 못 만난 것이다
기생 라합이 오죽하면 자기 조국을 버렸겠는가. 라합은 옥합을 깨뜨릴 곳이 없었다. 우리도 자기를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 거기서 사람이 귀해진다. 바울이 말하길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 했는데 이것은 배설물이 아니라 반대로 가장 좋은 것을 쏟아부었다. 그냥 둬도 다른 좋은 곳에 부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CCC에 가서 처음으로 그런 것을 보았다. 김준곤 목사님이 밤낮 주야로 민족 복음화를 생각한다. 어찌 저렇게 끈질기게 저것만 생각할까 할 정도였다. 자기 가족은 학살당하고 그 한이 오죽하겠는가. 그리고 그 후 재혼을 했는데 부인이 약사인데 김 목사의 뒷바라지를 다 해주었다. 김 목사에게 어린 딸이 있었는데 아무리 해도 아버지와 계모의 생각은 다르다. 여자는 자기 자식이 없으면 남의 자식이라도 잘 키운다. 그런데 자기 자식이 생기면 생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내 큰 누님이 계신대 이 분이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첩을 데려다 자식을 낳게 했는데 그 아들들을 자기 친자식 이상으로 키워서 아이들이 생모보다 그 누님을 더 좋아했다. 여자는 자기 자식이 없으면 남의 자식이라도 정말 잘 키운다.
옥합을 깰 곳이 없는 여자니 세상적으로는 가장 불쌍한 여자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니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되었다. 그러니 이 세계가 완전히 다른 세계다. 세상에서 쓸모있는 게 나쁜 게 아닌데 쓸모가 많은 사람은 그렇게 되기 어렵다. 안 그래도 받아주는 곳이 많고 자기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찌 옹색한 곳에 가겠는가.
올데 갈데 없는 사람,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 사람이 예수 앞에 오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예수를 좋아하는 것 같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이 의미깊은 말이다.
세례요한은 의인이다. 의인이 감옥에 갇혀서 목이 날아가게 되어서 사람들을 예수에게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물었다. 얼마나 애가 타서 사람을 보냈겠는가.
그런데 예수는 본 대로 말하고 들은 데로 전하라며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마태11:5) 하였는데 이것이 옥에 갇힌 의인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당장에 무엇을 할 사람도 못된다.
마지막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리고 시골로 내려가 버렸다. 두 사람의 세계가 완전히 다르다. 교회가 참 중요하지만 교회를 위해서 세상과 타협을 안 할 수 없다. 왜냐 교회가 세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칼빈의 최대 저서는 ’기독교강요‘다. 강요의 강이 '그물 강'이다. 그물이 줄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그것을 뒤집은 사람이다. ’교회교의학‘은 교회 중심이다. 교회를 세상 속에 살게 하려다 보면 다 잘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을 세상이 좋아하겠는가.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러니 그 말을 안 해야 한다. 그러면 교회가 세상에 있을 수 없다. 그런 예수를 제시했다가는 아무도 안 올 것이다. 교회가 중요하지만 그리스도 보다 더 중요하면 안 된다.
이번에 이것을 철저히 배우고 있다. 마지막 꽃은 교회다. 맞긴 맞는데 그것을 위하려다 보면 근본이 없어져 버린다. 세상이 좋아하고 거리끼지 않은 것만 내놓으려고 하다 보면 그리스도의 몸이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런데 몸이 안 된다. 그 생명에 그 몸이다. 사람 100명을 가지고 개를 만들 수 없다. 사람 생명을 가지고 다른 생명에 쓸 수 없다. 사람 생명은 사람 생명으로밖에 못 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교회가 되어야지 ’기독교강요‘도 아니고 ’교회교의학‘도 아니다
생명만으로 교회가 되겠냐는 생각에 자꾸 무엇을 만든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니 내가 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엇이기에 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가? 이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것이 바울 신학의 부족한 점이다
바울이 부족했다는 것보다 편지니 다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바울도 어쩔 수 없었다. 예수도 어쩔 수 없는 게, 살아계신 동안은 그 이상 안 되었다. 한 알의 밀이라고 말했지만 살아계실 때는 보여줄 수 없었다.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게 해준다고 했지만 그 이상 벗겨주지 못했다.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가시적인 것은 해결하지만 구체적으로 벗겨줄 수 없다.
필연적으로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죽음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자꾸 했다. 자원해서 죽었다고 하지만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보였던 것 같다. 그게 나오지 않으면 복음의 완성이 안 되는 것이다
나도 정말 천만다행으로 어떤 동기로 인해 예수의 뼈다귀를 찾아갔는데 결국 인류가 살길이 있었다. 예수의 뼈다귀를 찾아서 뭐하겠는가. 그런데 거기에 우리 살길이 있었다. 모든 사람의 살길이 있었다.
볼트만에 대해서 어떤 사람의 논문을 듣고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만은 사실이다. 역사이지 신화가 아니라고 어떤 사람이 눈문을 써서 내가 그것을 인용했는데 나보고 무식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다 검색해보니 가짜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보고 한 말이다. 볼트만이 그 말을 안 했다고 하는데 그와 같은 말을 했다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논문을 쓴 사람이 있다. 그것을 이번 토요일까지 정리해 오기로 했다.
그렇다고 될 일도 아니지만 하여간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그렇다. 무식하다는 것은 고사하고 이 복음 자체를 부인한다. 그러니 이것을 밝히려고 한다. 어젯밤에 철학박사가 섹터냐 컬트냐 이야기한 것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그러니 안다는 것 위에 또 안다는 것이 있으니 끝이 없다.
안다고 자랑해봐야 또 언제 당할지 모른다. 나는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더 아는 사람이 또 있다. 그러니 끝도 없고 몰라도 되고 무식해도 되고 못 가져도 되는 게 오히려 영원하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내가 무식해도 괜찮다. 지구는 도니까. 내가 착해도 괜찮고 착하지 않아도 괜찮고 여기 오니 아무 상관이 없다.
모두 세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착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환경적인 영향으로 그렇게 되었다. 근본적인 자리에 가니 이것저것 다 무효가 되었다. 도둑질한 사람이 도둑질할 세계가 없어져 버리면 원인 무효 된다.
판이 바뀌면 전에 중요하던 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돈 아니면 절대 해결될 수 없는 내 환경에서 돈과 전혀 상관없는 판으로 옮기니 그동안 했던 고민과 절망이 원인 무효가 되었다. 공부만 하면 되니 돈과 아무 상관 없게 되었다. 나는 공부를 좋아하니 누워서 떡 먹기다.
판을 바꾼다는 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은 이판저판 자유롭게 바꾸면서 놀라운 일을 하고 계시다. 사람처럼 판 하나 가지고 죽자사자 매달리는 게 아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여러 판을 옮겨왔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판이 있었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른 판으로 사람을 신이 되게 하는 판이다.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우리는 그 이야기를 겁 없이 받아들였다. 내가 너를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겠다는 이 말이 그때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상하다. 그때는 안 들렸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 그 말이 생각난다
다섯 여자도 마찬가지로 다 버려진 여자들이고 쓸모없는 여자들이다. 그런데 다윗 때문에 쓰인다. 다윗으로 연결하려니 그런 여자들이 있어야 한다. 처녀 마리아 때 갑자기 달라져 버린다. 아주 쓸모 없는 여자들만 나오다가 갑자기 예수의 어머니는 처녀고 동정녀니 여기서 헷갈려버린다
이것 때문에 싸워서 보수와 진보가 나뉜 이유가 동정녀 마리아 사건 때문이다. 그래서 기장과 예장이 갈라져 버렸다. 마리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갈라졌다.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라‘ 했다. 백성을 구원할 자의 어머니는 꼭 처녀라야 하는가. 그게 아니라 발꿈치를 물렸던 여자라야 한다. 발꿈치를 물린 선악과를 먹은 그 여자다.
너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다. 분명히 하와는 책망을 들어야 한다. 하와가 아니었으면 선악과를 안 먹었을 것이다. 아담은 ’저 여자가 먹으라 해서 먹었습니다‘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연히 하와를 책망했어야 한다.
다 책망하고 하와에게 네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최초의 복음이라고 한다. 그래야 복음이 된다. 깨끗한 시집 안 간 처녀가 예수를 낳았다면 복음이 안된다. 보수와 진보가 갈라질 일도 없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
거참 성경이 묘하게 써있다. 문제 없이 써놨는데 사람들 생각 때문에 문제가 된다. 나는 옛날에 몰라서 헷갈렸다. 우리야의 아내까지 4명은 다 이해가 된다. 그런데 마리아에게 오면 헷갈려버린다.
기독교에 가서 딴소리하면 큰일 난다. 나야 어차피 버린 몸이라서 그렇다. 이 말이 맞다. 네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다. 예수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고 온 사람이다.
뱀이 완전히 머리를 밟혀서 죽는 곳이 어디인가? 이적을 행하는 곳인가? 아니다. 좋은 말씀을 하는 곳인가? 그것도 아니다. 뱀이 머리를 밟히면 죽는다. 뱀이 머리를 밟히는 자리는 십자가다. 이론적으로 우리가 알기는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밟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온 인류를 포함한 이 자리는 사탄이 있을 자리가 없다. 밥이 없기 때문이다. 계시록에 보면 너무너무 잘 먹어서 붉은 용이 되었다고 한다. 옛 뱀이라 하는데 얼마나 살이 쪘으면 붉은 용이 되었겠는가.
붉은색을 띤 것은 힘이 좋다는 의미다. 눈 밑이 불그스름하다는 말은 힘이 좋다는 말이다. 바다의 해삼 중에 붉은색 홍삼이 가장 좋은 것이다. 붉은색은 생명력과 힘의 상징이다. 여인의 발꿈치를 물은 옛 뱀이 붉은 용이 되었다. 그 붉은 용을 죽이려면 여인의 후손밖에 없다.
뱀이라는 놈은 입이 끝까지 벌려지고 한번 물리면 아무리 커도 다 삼킨다. 뱀은 머리만 밟으면 꼼짝 못 한다. 뱀의 무기는 입에 있다. 독도 거기서 나오고 뭐든지 한번 물면 야곰 야곰 다 삼켜버린다. 산채로 들어간다.
그놈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면 예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놈의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는다. 먹을 것이 많으니 붉은 용이 되었다. 잔뜩 먹었다는 것이다. 여자도 음녀라 하기를 개신교에서는 천주교라 하는데 천주교만이 아니라 큰물을 타고 있는 여자다. 큰물은 세상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예수를 깊이 아는 것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된다. 구원받는데 전혀 상관없다. 어디 가서 복음 전하기 위해서 다른 것이 필요 없고 이것 하나만 알면 된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그리스도와 사람의 연합은 아귀가 딱 맞아서 더 이상은 필요 없다.
예쁜 여자를 만나면 이력서가 필요 없다. 너무 예쁘기 때문이다. 똑같이 하나님도 자기가 보기에 너무 예쁜 여자를 만나면 이력서를 안 본다. 요즘은 결혼하는데 건강진단서부터 학벌까지 다 내놓아야 중매가 된다. 그러나 예수에게 시집가는 것은 학력증명서나 건강증명서가 필요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나 같은 사람이 딱이다.
생각할수록 신난다.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늘 똑같은 것을 생각하는데도 어찌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모르겠다. 내 이야기니 그렇지 남의 이야기면 이렇게 좋겠는가. 예수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다. 그러니 재미있지 예수 이야기만 계속하면 진력난다.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다. 또 내 이야기만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이야기도 되고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지금 여유가 있어서 그럴 뿐이지 어느 날인가 다 그 자리로 간다. 갈 데가 없다. 때가 되면 다 그 자리로 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소용없다. 이병철 씨가 재산이 없어서 죽었겠는가. 마지막 죽을 때 그래도 인생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27개의 질문을 차동혁 씨에게 내놓고 죽었다
답을 보니 신통치 않던데 그것을 보고 위로를 받고 죽었는지 모르겠다. 이병철 씨가 삼성은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자부심이 있다. 아무것도 없어도 되고 무식해도 된다. 옛날 같았으면 나보고 무식하다 했으면 기분이 나빴을텐데 기분 나쁠 것도 없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 하니 다 해결되어버린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뜻민 통하면 되는데 그것을 트집 잡고 무식하다고 하는데 지구만 돌면 된다. 그러면 됐다. 좌우간 이 복음만 있으면 되었지 다른 것은 없어도 된다. 이 안에 모든 답이 다 들어있다.
예수가 살았을 때 한 말이 모두 여기와야 이루어진다. 그러니 예수의 말씀이 예언적이다. 아직 완성이 안 되어서 죽는다고 했다. 그때 다 완성되었으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왜 하셨겠는가. 무엇인가 답이 안되고 확실한 것이 안 되니 죽는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것을 몰랐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몰랐다. 우리는 왜 그렇게 말하는지 생각도 못 했다.
이제 보니 우리가 완전하게 들었던 말씀도 사실은 미완성이었다. 그러니 예언적이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 명이 먹었다 해도 그게 어찌 되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이 하시면 무엇을 못하겠나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둘 다 시원치 않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건 신화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하시니 무엇을 못 하겠는가' 그렇게 말해도 아니다. 예수가 우리 생명의 떡이 안 되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나 부정적으로 버리나 매한가지다. 여기서 두 종류의 사람이 다 한자리에 모인다. 그러니 싸울 일이 못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