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남해현령공(동전)
남해현령공 휘 동전(東峑, 1649~1713)은 임진왜란 때 임금 선조를 호종한 판서공 휘 덕화(德和)의 손, 방어사공 휘 정철(廷喆)의 아들이다. 그는 1676년 28세 때 투필(投筆)⑭로 무과에 급제, 북백 취몽헌(醉夢軒) 이수언(李秀彦)의 보좌관이 됐다. 이후 병조판서의 별선(別選)⑮으로 근무하다 1693년(癸酉) 상원(祥原)군수에 제수됐다.
1697년(丁丑)에는 민진장(閔鎭長) 총수어사(摠守禦使)의 오백장오, 1698년(戊寅) 민진원(閔鎭遠)의 호서감진어사(湖西監賑御史)를 수행했다. 1702년(壬午) 진도(珍島)군수에 임명됐으나 민진원이 전라도안접사(全羅道安接使)로 제수되면서 발령을 취소하고 그를 수행했다. 1710년(庚寅)에 남해현령을 역임한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⑭ 投筆 : 문필을 그만두고 무예에 종사함. 즉 문과응시를 포기하고 무과에 응시, 합격함.
⑮ 別選 : 조선시대 힘센 장사를 특별히 뽑아 임금을 호위하던 군관. 별선관은 관상감에 소속된 군관. 여기서는 이조판서의 군관.
31) 수우옹공(세직)
수우옹 휘 세직(世稷, 1655~1721)의 자는 우경(虞卿)이다. 그는 아버지 청우당(淸友堂) 휘 동익(東翼)과 어머니 해남(海南) 윤씨(尹氏) 사이의 4남 중 장남으로 1655년(孝宗 6․乙未) 태어나 1721년(景宗 1․辛丑)에 6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공은 1675년 당쟁에 휘말려 유배 온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 장흥조(長興條)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금당별곡(金塘別曲)은 삼족당(三足堂) 문집(石屛集)에 들어있어 휘 세보(世寶․1669~1707)의 작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선대 이종출(李鍾出) 교수는 석병집 1권 7언절구편에서「次三從兄世稷金塘韻」(장흥문화 p.158)을 밝혀냈다. 그래서 1967년에 발행한 國語國文學 제 34~35 합병호에서 그의 작품으로 확인했다. 그럼에도 1972년의 임자보와 1999년에 발행된 대동보에는 삼족당 작품으로 기록했다.
이교수는 "금당별곡의 내용은 배로 금당도와 만화도(萬花島)를 유람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서정적으로 읊은 일종의 기행가사이다. 이 작품의 영향 관계를 따져보면 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기봉(岐峯) 백광홍(1522~1556)의 '관서별곡'은 송강의 관동별곡에 영향을 주고, 관동별곡은 금당별곡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평했다.
그런데 기봉과 송강의 가사가 모두 북방의 경승을 노래하는 기행가사라고 한다면, 금당별곡은 남방의 해양도서의 경승을 노래하는 가사라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이종출 교수는 금당별곡에 대해 "작자의 자유로운 시상이 마음껏 펼쳐져 있고, 비록 은일적(隱逸的)인 시상이 다소 엿보이기는 하되, 평민적이면서도 자연에 순화된 정도로는 오히려 관동별곡보다 승(勝)한 느낌마저 없지 않다."고 밝혔다.
32) 寶城郡守公(혁만)
公의 諱는 赫萬인데 생졸년은 미상이다. 자는 華卿, 괴봉공의 현손 天相의 막내아들이다. 감영의 수행관원 재직 중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 주부, 총경도사, 사헌부감찰 등 내직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1696년(숙종 22) 아산만호, △1705년(숙종 31) 임치(臨甾)첨사, △1707년(숙종 33) 부호군, △1710년(숙종 36) 겸내승, △1710년(숙종 36) 낙안군수, △1716년(숙종 42) 정의현감, △1721년(경종 1) 진해현감, △1722년(경종 2) 경복궁 가위장, △1723년(경종 3) 군산첨사, △1724년(경종 4) 잉임사승전, △1725년(영조 1) 부호군, △725년(영조 1) 보성군수, △1726년(영조 2) 단부부호군, △1728년(영조 4) 법성첨사 등 1731년까지 14직급에서 35년간 재임한 바 있다. 의금부나인(義禁府拿因) 서용(敍用), 전교(轉交), 장계(狀啓) 등 30건의 기록이 남아있다.
제주도 정의현감(旌義縣監)을 나갔는데 흉년을 만나 현민을 지극히 구휼하니 치적이 임금에게 알려져 친필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상으로 말 한필을 하사 받았다. 이후 낙안과 보성군수 등 현감을 역임하였는데 부임(赴任)한 곳마다 모두 선정비(碑)가 세워져 있을 정도로 선정을 베풀었다. 후사가 없어 伯氏(泰萬)의 둘째아들 원징(原徵)을 입양했다. 정의현감 때 아들 原載를 낳았는데 그 후손들은 주로 표선을 중심으로 세거했는데 지금은 제주시내로 진출해 살고 있다. 배는 숙부인 이씨이며 묘는 장흥 마치(馬峙) 간좌이다.
보성군수공께서 새롭게 조명되셨습니다. 제주도와 우리 문중도 관련이 매우 깊군요~~,
오늘도 휼륭하신 문중조상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하게 되는군요.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