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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고사성어 중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용어가 있다.
<피루스>는 오늘날 그리스 서북부의 에피루스라는 작은 지역의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먼 조상이 아킬레스와 알렉산더라는 자부심을 갖고, 자기도 대제국을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 반도까지 가서 로마제국과 맞붙었다.
두 번의 전투에서 피루스는 모든 것을 몽땅 쏟아부어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두 번의 전쟁으로 인해 가까운 친구와 역전노장, 그리고 엘리트 병사들을 전부 잃었다.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입고 그리스로 돌아갔다.
몇 년 뒤 전쟁의 후유증으로 그가 죽자, 그의 왕국은 지리멸렬하다가 결국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기원전 167년).
모든 것을 다 바친 한때의 승리가 제 명을 단축시킨 것이다.
<피루스의 승리>는 승리하긴 했으나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승리를 가리키는 고사성어이다.
실속이 없는 승리 혹은 최종적으로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 없는 승리를 가리킨다.
지난 7월에 미국 대통령 민주당의 바이든과 공화당의 트럼프가 TV토론을 했다.
바이든의 어눌한 언변으로 인해 트럼프가 TV토론의 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트럼프의 승리는 <피루스의 승리>가 될 것이라 예측했다.
TV토론 후 민주당에서는 해리스 부통령으로 대통령후보를 교체했다.
이후 대선후보 각종여론조사에서 민주당 해리스후보가 박빙의 우세를 유지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TV토론에서의 트럼프의 승리가 트럼프에게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속이 없는 승리였다.
이것이 피루스의 승리이다.
오늘 본문에 또 하나의 피루스의 승리가 소개되었다.
북이스라엘 왕 여호람의 주도로 남유다 에돔 3개국 연합군이 모압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출정 7일만에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났다. 광야에서 물부족 사태가 벌어졌다(9)
이에 북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하나님을 원망했다(10) 다 같이 읽자.
"여호와께서.."
우리 주변에도 여호람 같은 성도가 있다.
자신의 뜻대로 일을 시작해 놓고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성도들이 있다.
여호람은 전쟁을 준비하기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을 주도했다.
그러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을 들먹인다.
반면에 남유다왕 여호사밧은 달랐다.
그는 일이 잘 풀리지 않자,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11) 다 같이 읽자.
여호람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때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인물이었다.
여러분의 절친중에도 여호사밧 같은 인물이 있기를 바란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자. 13-14절을 한 목소리로 읽자.
여호사밧의 뜻에 따라 세 왕이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엘리사를 방문했다(13)
이에 엘리사는 여호람을 질책했다.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 왔습니까 당신 주변에 있는 그 잘난 예언자들에게나 가 보시지"(공동번역본)
이런 식의 말투가 익숙하다.
"평소 아는 척도 하지 않더니 왠일로 나를 찾아왔대"
그러자 여호람왈 "하나님께서 우리로 모압의 밥이 되게 하셨소"(13b)
여호람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도모했던 일을 물거품으로 만드셨다고 항의하고 있다.
여호람은 아직도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몰랐다.
간혹 이런 부류의 성도들을 만난다.
고통을 겪는중에도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겪는지 모르는 인물이다. 안타깝다.
자신이 왜 이런 고난을 겪는지 남들은 다 아는데, 자기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인물이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가 안 된다.
여호람도 말이 통하지 않고 대화가 안되는 상대이다.
그래서 엘리사는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14)
여호람과의 대화를 차단한다. 전화번호 삭제하고 카톡 차단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사밧의 얼굴을 봐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14)
오래전에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내가 너희 아버지 얼굴을 봐서 한번만 봐준다"
엘리사가 여호사밧의 얼굴을 봐서 여호람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여호사밧 한사람 때문에.
한 사람 때문에 위기에서 탈출한다.
성경에는 이런 예가 빈번히 나온다.
한 사람 때문에 구원받기도 하고, 한 사람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아브라함 한 사람때문에 롯의 가족이 구원받는다.
아간 한 사람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고난을 당한다(수 7장)
여러분은 어떤 한 사람인가?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한 사람인가? 아니면 악한 영향을 미치는 한 사람인가?
여러분은 여호사밧이 되시길 바란다.
여러분 한 사람 때문에 그 가정이, 그 직장이,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란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골짜기에 여러 개의 웅덩이를 파라고 주문한다(16)
"골짜기"? 히) "나할" 건기 때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지형.
"개천"? "웅덩이"를 가리킨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골짜기에 웅덩이를 파라고 주문.
다음날 아침 에돔 쪽에서 물이 흘러들어와 웅덩이를 채웠다(20)
비도 오지 않았는데,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물부족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리고 전쟁에서도 승리했다(24-25)
하지만, 이 전쟁에서 연합군대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승리는 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갔다.
하나님께서 이들 모두를 빈손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모압땅에서 자생하는 가치 있는 수목들을 모두 베어 버리고, 오아시스도 막아버리고, 옥토를 돌밭으로 만들어라고 주문(19)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래서 연합군대는 노획물을 얻지 못했다. 옥토에서 생산되는 과일이나 양식을 얻지 못했다.
또 하나, 모압의 왕도 사로잡지 못했다(26-27)
모압왕은 자신의 성으로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코자 자신의 첫째 아들을 인신제사 드렸다.
극악한 짓을 범했다.
모압의 왕은 더 이상 방법이 없자, 자신의 맏아들을 번제로 드려버린다.
이것은 자신들의 신에게 얼마나 간절한지 진심을 보이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성경은 이 장면을 목격한 연합군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27) 난해 구절이다. "진노가 임했다"
영어로는 "there came great wrath against Israel."라고 말한다.
한글도, 영어도, 그리고 히브리어 성경책을 봐도 그 내용이 명확하지 않다.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했다고 했는데, 누구의 진노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하나님의 진노인지, 모압의 진노인지, 모압이 섬기는 신의 진노인지??
그래서 세 가지 정도로 해석한다.
1) 인신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화가 났다는 의미
2) 자신들의 왕위 계승자가 불타 죽는 것을 보면서 모압군은 분노했고, 그 분노를 연합군을 대적하는 일에 사용했다는 의미
3) 하나님의 진노가 그 전쟁터에 임했다는 의미 등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각 해석들도 의미가 있기에 어느 쪽으로 확실히 말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의 진노가 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아도,
그 결과, 연합군은 전쟁터를 떠나서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결국 이스라엘, 유다, 에돔 동맹군들은 승리는 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승리했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승리는 했으나 아무 소득도 없이 시간만 허비했다. "피루스의 승리"
우리도 이런 일들을 경험했다.
회사를 위해서 큰 공적을 이루었는데도 실속이 없는 승리가 되는 경우가 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신앙생활하면서 날마다 은혜로 산다고, 감사한 일밖에 없다고 고백하는데도 자신의 사는 모습이 지지멸렬하는 경우가 있다.
사업을 한다고 부지런히 돌아다니기는 하는데 통장에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동안 수고하고 노력하는데 보상이나 소득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그 이유?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시작한 일에는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
피루스를 보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로마제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승리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여호람을 보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압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 문제를 만났다.
다행히 좋은 동료 덕분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위기를 넘겼다.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우리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자.
우리 주변에도 피루스나 여호람 같은 성도가 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청취한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배 참석한다.
이런 분들에게는 열심히 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특심을 부린다.
열심히 하고 부지런히 하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소득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제가 어느 교회를 섬길 때 청년 중에 이런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여름, 겨울방학이 되면 아웃리치를 간다. 학기 중에 알바를 해서 선교여행 비용을 감당했다.
어떤 경우에는 학기 중인데도 주일예배에 불참해서 전화해 보니 학교 휴학하고 어느 단체의 선교여행에 따라갔다고 했다.
그래서 교인들이 이 청년의 열심을 칭찬했다. 기도로 물질로 후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교여행에 참석한다고 학점이수를 제대로 못해 졸업을 못하고 휴학하고는 잠적을 했다.
자세한 사항은 잘 모르겠지만, 이 청년이 그토록 선교여행에 목숨을 걸었던 연유가 무엇일까요?
믿음일까요? 욕망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에너지원을 바꾸어야 한다.
그동안 자신의 뜻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움직이게 만드는 에너지원이었다면
이제는 그 에너지원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서야 한다.
우리 머릿속에는 하나님의 생각을 가득 차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차면 기적의 물웅덩이를 경험하게 된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골짜기에 웅덩이를 팠다.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바람도 없었고 비도 오지 않았지만 웅덩이에 물이 가득 찼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차면 별로 열심히 하지 않는데도 자신의 웅덩이에 물이 계속 들어온다.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다.
반면에 영적인 사람이라는 말 신실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데, 기도 많이 한다고, 성경지식도 풍성하다는 말 자주 듣는데 그 사람의 생활은 보잘것이 없고 보상도 받지 못한다.
열심히 없어서가 아니다. 주일 성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헛수고하게 된다.
이렇게 사는 것은 죄는 아닌데 보상을 받지 못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럴 때가 있다. 무언가 내 생각 속에 가득 찰 때가 있다.
며칠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그러면 성도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한다.
목회자를 찾아와서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을 주셨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목회자가 그 말을 들어보니, 너무나 터무니없고 황당한 이야기이다.
간혹 목회자가 납득하고 이해할만한 이야기도 있다.
여러분! 여러분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신앙의 팁을 드린다.
회사 사장이 선호하는 직원은 열심히 하는 직원보다 사장의 뜻을 실천하는 직원이다.
신앙생활에서도 열심히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
대체로 아이러 이 하게도 자신의 뜻대로 사는 이들에게 열심히 특심한 경우가 있다.
제일 좋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열심이 특심인 경우이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야 하나님의 생각이 보인다.
생각보다 삶이 먼저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생활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교회 내 생활을 강조 안 한다.
대신에 교회밖 생활을 강조한다.
교회밖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한다.
교회밖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는
너무나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성경을 생각하면서 살지 말고, 성경대로 살면서 성경을 생각하라.
이렇게 살 때 진정한 승리 진정한 보상이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