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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며 기억에 남거나 감동받은것을 여럿이 같이 하고자 자유게시판
에 추천의 글을 올립니다.
영화를 올리다 보니...어째 좀 슬픈영화가 많이 올라가게 됩니다.
이 영화도 좀 슬픕니다.
같이 하며 사랑하는 사이지만 같이 할때는 몰랐던 것을 떠나 보낸 후에 알
게되고 .... 이제 같이 있진 않지만 못다한 것을 해주는 사랑의 아픈 마음...
이영화는 일본춤 '부토'를 소재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나도 이영화
를 보고 나서야 부토를 알개 됐지요. 아내가 추는 부토를 이해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던 남편이 먼저간 아내의
춤 부토을 알게 됐고 그 부토를 남편이 추며 아내를 느끼며 하나 가 됩니
다.
그리고 영화가 잔잔히 흐르면서 화면에 들어 오는 하나하나의 영상들이 사진 작가 찍은 작품 사진 같습니다. '마을 길' '창밖 마을풍경' '걸어가는 오리' '창밖 후지산' '수채화 같은 담' 등등 많습니다..
이야기를 따라 영화 감상 하는 것도 좋지면 영상들을 세심하게 바라보면 예쁜 사진들이 눈에 들어 옵니다.
이영화 18세 이상 관람 이라서 좀 아쉽습니다.... 노년 부부의 죽음에 대한 얘기라서 그런지 관람
등급 나이를 높여 논것 같습니다..
청춘 게시판에 올릴까 말까 고민 하다 올립니다....
결국은 가족과 사람에 대한 사랑얘기라서 걍 올려 봅니다...
내 판단으론 청소년이 봐도 될듯 한데...
부토의 이해를 돕고자 퍼 왔습니다.
죽음의 춤, 어둠의 춤으로 불리우는「부토(舞踏)」는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춤이다.
부토(舞踏)의 어원은 메이지유신때 서양의 무용에 대해 ‘부토’,
즉 새로운 차원의 것이라는 의미로 불리던 것으로 히지카타 다쓰미(土方)가
‘59년에 만든 첫 작품 ‘암흑부토’가 널리 알려지며 그 이름도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토는 폐허의 춤이다. 전후 일본에서 탄생한 부토는 서구의 정신과 문명에 매몰된
아시아 근대의 진혼곡이었다. 폐허 속의 인간은 재(災)를 뒤집어쓰고 냉혹한 자연으로 돌아간다.
‘타나토스’의 숲으로. 거기서부터 부토는 ‘순수한’ 육체를 재발견하고자 했고,
기형적이라는 느낌까지 주는 동양인의 신체를 그대로 드러내 서양무용에 저항했고
그것이 바로 부토 창시자 히지카타 다쓰미의 육체의 이념이었다.
서구의 정통발레나 모던 댄스와는 물론, 일본에서 태동했으면서도
일본전통 예술형태인 노(能)나 가부키(歌舞伎)와도 다르기 때문이다.
형식화된 룰을 깨고 무용수가 즉흥성을 발휘할 여지를 많이 남겨놓는다는 면에서
기존의 모든 테크닉과 미적 개념을 깨뜨리는 작업이다.
지난 78년 처음 파리에 소개된 부토가 오늘날까지 유럽 무용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이유의 하나는 부토가 매우 정신적인 춤이라는 점이다.
서양춤의 역사가 겉으로 보이는 기교에 치중해 온 반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예민한 감수성으로 폭력, 기쁨, 분노 등 모든 것을 표현하는 부토는
신체의 모든 가능성을 탐험하기 위해서 양식화된 모든 스타일을 거부한다.
그래서 일부 무용인들은 부토의 핵심을 '자기 자신이기를 멈추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물건이 되는 메카니즘', 즉 변형으로 보기도 한다.
보는 이들에게 가장 쉽게 와닿는 특징은 빡빡 민 머리와 얼굴 등 온몸에
흰 분칠을 한 벌거벗은 무용수가 매우 느린 움직임으로 일그러진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다.
때로 참기 어려울만큼 지루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 안에 매우 충격적이고 도발적이며,
영적(靈的)이고 에로틱하며, 허무적이고 신비스러운 면이 담겨 있다.
전후 일본의 정서를 담아낸 것으로 인식되는 부토의 출발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히지가타 타츠미(土方選)가 59년 오노 가즈오(大野一雄.93)와 함께 펼친
'킨지키' 공연이 '원조'격이며, '부토'라는 용어는 60년대 들어 쓰이기 시작했다.
1999년 6월 9일 용실리 야외극장에서 막을 올린 제5회 죽산 국제예술제에서
일본 부토춤의 명인 오노 가즈오(93)가 출연,
고령의 노체에도 불구하고 <참차카의 곰>과 <20세기를 위한 진혼>에서
인간육체의 생명력을 조심스러우면서도 강렬한 몸짓으로 보여주어
관객들의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