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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해인 1990년12월 106호>>
유마의 방 - 김지하
<세계반조>
해인지하면 생각나는 게 있다. 여러 해 전 전라도 해남에 칩거하고 있을 때다. 어느 날 해인지 편집진 두 분과 대흥사 스님 한 분, 그리고 해인사 홍제암의 현응스님(2020년 현재 해인사 주지)이 날 찾아온 적이 있다. 해인지 쪽의 말씀은 내게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고, 현응스님의 말씀은 날더러 대승승가회와 함께 불교사회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내 대답은 둘 다 거절이었다. 까닭인즉 몸도 좋지 않고 할 말도 없고 불교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몸이 좋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돼 큰 병을 앓았으니까. 병 중에 나는 여러 가지 꿈을 꾸었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불교와 관계있는 것이었다.
꿈속에 한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너는 곧 성철스님을 만나게 된다. 그때 이렇게 말해라. ‘지금 있는 그대로 장바닥으로 내려오시오’라고. 그리고 깔고 앉은 방석을 허공에 들어 보여라. ‘세계반조(世界返照)’라는 것이다.”
꿈은 꿈일 뿐이요 환(幻)은 환일 뿐이다. 허나 보살의 방편도 환이라면 꿈도 꿈 나름, 꿈이 도리어 착한 방편의 끄트머리가 될 수도 있을 터. 회복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이 꿈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지금 있는 그대로 장바닥으로 내려오시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지금 있는 그대로라면 산중불교 그대로라는 뜻일 텐데. 그러니까 민중불교와 같은 그런 혁명정치적인 거친 방편을 거쳐서가 아니라 선방의 화두, 조사의 몽둥이를 그대로 들고 내려와 중생의 먹통에 걸어놓고, 그 머리통을 곧바로 내리갈기라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중생의 근기가 화두를 붙들만하고 혹은 중생의 마음에 선기(禪機)가 무르익기라도 했단 말인가? 번뇌의 극치는 시대의 징표요, 줄탁(啐啄)의 기미는 생명의 비밀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란 말인가? 꿈은 꿈일 뿐, 환은 환일 뿐이라고 혼자서 한번 크게 웃고 머리를 내젖다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역시 심상치 않은 꿈이다. 불교에 대해 별반 깊이 아는 게 없어 해인지의 원고청탁을 이번에도 사양하려다 그래도 이렇게 몇 자나마 쓰게 된 것도 기실 그 꿈 때문이다.
생각해보았다. “지금 있는 그대로”라!
과연 가능한 일일까?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세상이 온통 미쳤다!” 미쳤다? 그런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정신분열증에 걸려있다. 원인이 무엇일까? 이중구속이다. 이중구속이란 무엇일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이중의 억압. 이중구속은 이것을 선택하거나 저것을 선택하도록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그러나 이것을 선택해도 고통, 저것을 선택해도 고통이다. 결과는 분열이다. 분열된 사람은 끝없이 우왕좌왕하거나 무감각 상태에 빠져든다. 우왕좌왕하는 자는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무감각한 자는 낙오자로 버림받고 중간을 선택하여 제 나름으로 어물쩡 절충하는 자는 양쪽에서 협공당하여 오징어포가 된다. 혹은 이 상태를 폭력적으로 ‘돌파’하려고도 하고 혹은 환상적으로 ‘도피’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돌파와 도피는 또 하나의 이중구속이 될 뿐이다. 어디서부터 이중구속이 시작되었는가?
생명질서의 이탈로부터 시작되었다.
인류문명사는 한편 놀라운 생산력 증가와 문명창조의 역사였지만, 다른 한편 우주생명활동의 근원적인 질서로부터 점차 이탈해 온 역사다. 그 절정이 현대 산업문명, 기계문명이며, 이 문명의 기초는 서양의 기계적 세계관에 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서로 분리된 것으로 보았고, 육체를 기계와 같은 물질로 보았다. 뉴튼은 우주를 하나의 정태적이고 폐쇄적인 동력 체계로 보고 모든 사물, 모든 계(系)는 자기완결적 실체로서 고립적인 입자와 입자 사이에 충돌이나 삼투에 의해 운동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입자 사이의 통신은 있을 수 없으며, 관계성도 실재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절대공간․절대시간이며, 음파․입자, 그리고 견고하고 변치 않는 개별적 사물들이다. 이러한 기계적 세계관은 다윈의 자연도태론에, 홉스의 사회투쟁설에,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설에 그대로 그 기초로서 작용해 왔다. 그 결과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며 인간과 인간은 주종관계, 경쟁관계에 있는 것이 당연하고, 인간은 어차피 육체와 정신이 분리돼 있으며 남자와 여자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이며, 민족과 민족은 우월과 열등으로 나누어지고 자연생태계는 인간의 고문 대상, 약탈대상, 정복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을 도태, 살육하고, 남자는 여자를 멸시하며, 타민족을 침략, 굴복시키고, 계급을 억압, 착취하며, 자연생태계를 무한정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바로는 얼핏 독립적인 실체인 듯 불연속적인 우주만물이 사실은 서로 연속적이요 상호규정적관계에 있어 서로 통신하는 개방계로 연기하는 총체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살아 있는 하나의 큰 생명인 것이다. 따라서 기계적 세계관과 생명의 실상 사이에서 인간은 이중구속 당하며 분열한다.
현대 산업문명은 그 자체로서 이중구속이다. 문명도 하나의 생명체이므로 성쇠가 있듯이 입력(入力)과 출력(出力)이 있을 터. 현 문명은 입력에서 엄청난 자원소모와 자원고갈의 모순, 출력에서 막대한 폐기물 배출과 그에 의한 자연의 황폐화라는 모순의 이중구속이다. 자유․평등․박애와 평화를 앞세우고 군함, 대포로 제3세계를 침략하고, 통일의 이름 아래 분열시키고 해방의 약속 아래 억압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산업문명이라는 한 괴물의 몸에서 나온 두 개의 대가리다.
양자의 대결과 경쟁이 하나의 이중구속이었으나 이제는 양자 모두 결정적으로 쇠퇴하면서 수렴되어 제3세계의 그 추종자들과의 사이에 또 하나의 복잡한 이중구속을 형성하고 있다. 지구생태계와 대기권 파괴의 위기가 심각해지는데도 공업생산을 더욱 강화하며, 폐기물을 대량배출하고 자원을 더욱더 약탈한다. 스스로 썩은 물 썩은 공기를 마셔 병이 깊어지는데도 자가용차는 더 타야 맛이고, 합성세제는 더 써야 맛이다.
오존층이 뚫어져 지구 기온이 상승하고 시베리아 동토대가 녹아 해수면이 올라가며, 생태계에 큰 변동이 오고 있음에도 프레온가스를 뿜어대는 에어콘, 냉장고 등은 날이 갈수록 날개 돋은 듯 팔린다. 대기 중 산소량이 날로 줄어드는데도 지구의 허파라고 하는 아마존과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은 대량으로 벌채된다. 동서냉전이 풀리는데도 지구를 몇 번씩이나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 등이 계속 막대한 돈을 들여 개발되고, 드리마일과 체르노빌 참사를 보고서도 우리나라 정부처럼 원전을 50기까지 늘리겠다는 미친 계획을 세우고 자빠졌는가 하면, 미국놈들은 원전을 계속 제3세계에 팔아먹고 있다. 학교에서는 경쟁․도태․약육강식․기계적 합리주의․분석적이며 도구적인 이성․입신 출세만을 가르치고, 교회에서는 환상적 도피를 설교한다.
마약․섹스․폭력․광란․살인․강도․강간․방화․인신매매가 판을 치는데 문화․예술․대중매체 등은 이것을 부채질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쇠퇴에 따른 전망의 불투명 상태에서 여러 변형된 모습으로 다시금 파시즘이 고개를 쳐든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이 같은 현 문명의 이중구속이 다중적으로 집약된 곳이 우리나라다. 남북의 오랜 분단은 그 자체로써 민족 전체에 이중구속이었고, 오늘날에는 이것이 더 복잡해진다. 북쪽은 파쇼적 사회주의를 고집하면서도 개방․자유화의 압력에 밀리고 있고, 남쪽은 파쇼적 자본주의를 고수하면서도 민주화와 평등사회로 구조를 변혁하라는 여론의 압력에 부딪히고 있다.
주변 열강의 변화 또한 다중적 이중구속이 될 수 있다. 중국과 소련이 남쪽에, 일본과 미국이 북쪽에 접근하고 있으며 교차승인이 된다 하더라도 통일에 그리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며, 오히려 4강(四强)의 국익에 따라 분단의 골은 더 복잡해지고 깊어질 가능성마저 있다. 이 모든 것을 만약 우리 민족 주체적으로 활용하고 통합하지 못한다면 민중의 삶은 한없이 분열하여 고달픔은 더 커질 공산도 있다. 지금 민중의 삶은 어떤가? 농촌에서 뿌리 뽑혀 도시로 흘러들어와 고달픈 나날, 마음속에는 농촌공동체의 옛 삶의 기억과 농업적 세계관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돌아갈 농촌은 이제 없다. 도시 산업화의 세계관이나 관습에 전혀 익숙치 못한 채로 그 생활에 억지로라도 적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도리가 없다. 그 위에 정보화의 물결이 닥쳐와 시대적 차원 사이의 이중구속은 다중화하고 분열은 깊어진다. 노동은 천태만상으로 분화되고 확장되어 계층은 세분화되며, 삶은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져서 통합은 절망적이다.
신 식민지적 조건 위에 대형 공업수출국에다 후기 자본주의적 현상들이 거듭 겹쳐져 삶과 세계의 총체적 이해는 날로 어려워진다. 절대다수 민중의 현재의 임금과 처우 조건 등은 삶의 근본이나 정신적 평형을 성취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눈은 높아지고 번화해져 끝없는 욕구의 분출은 의식과 생활의 파탄을 가져온다.
기계 리듬에 의한 생체리듬의 교란, 산재, 잔업, 혹독한 노동 강요와 약물복용에 의한 생체파괴, 정신과 신체의 분리, 개인과 사회생활의 심각한 괴리 등은 온갖 질병을 낳고 소외나 정체성 상실의 상태를 넘어 아주 복잡한 형태의 분열, 곧 해괴한 인륜 상실 상태에 이르러 있다. 농민은 U.R(우루구라이 무역협정)태풍으로 바닥까지 거덜 나고 풍비박산의 공포 아래 단순히 분열 운운할 정도를 이미 훨씬 넘어서 있다.
도시 빈민은 분열의 극을 경험하고 있으며, 소시민 역시 끝없는 동요에 시달린다. 신 중간층 역시 경제적으로는 유족해졌지만 여러 형태로 분열되고 강가지 신경증․성인병 ․만성병 ․인격장애 둥 생명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이 계층에 특히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투박하게 말해서 돈벌이 좀 하자고 인간관계를 팽개친 결과가 아닐까? 풍요해졌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사회적 위치가 안전해졌다고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다. 과소비하고도 허망함에서 도망 못가고 마음의 불안에 쫓기는 사람들이 이 계층 사람들이다.
민중운동은 어떤가? 역시 분열이다. 70년대 민중개념은 노동자, 농민을 비롯하여 빈민, 소시민, 중간층, 여성, 노인, 청년학생과 어린이, 장애인, 지식인 등을 모두 포함하는 소외대중 전체의 총괄개념이었다. 그런데 80년대 중반부터 급진혁명세력에 의해 산업노동자 중심의 고전적인 계급개념으로 변해버렸다. 지금의 민중운동이란 산업노동자를 주체로 하는 계급운동을 말한다. 이 경우 당파성과 대중성의 분열, 혁명주의와 개량주의의 분열, 주사파와 민중민주계열의 분열, 독립당 노선과 전선 노선의 분열, 연합당과 전선당의 분열, 노동자-농민동맹은 말뿐. 이들은 대체로 시민운동은 비웃고 환경운동은 멸시하고 주민운동은 이용하고 빈민운동은 경계한다. 매우 고전적이어서 이론과 현실의 분열이 심하다. 오직 폭력적 돌파, 곧 산업노동자 주체의 혁명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거의 폭동주의에 가깝기까지 하다. 어떤 그룹은 소련 공산당에게 혁명 지원을 요청하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분열이 아니라 착란이다.
분파투쟁 ․사상투쟁은 정당한 발전과정이라고 말하지만 불과 몇 살 차이, 불과 몇 가지 개념 차이에서 세대론이나 정통론 둥 분열이 아주 심한 것은 자본주의적 속도생산 구조의 톱니바퀴에 끼어 들어간 증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민중생활의 내용, 노동내용의 복잡화․세분화․첨단화, 전체 사회정세의 급진적 변화와 다중의 분열현상 때문에 고전적 사회과학 이론의 틀이 들어맞지 않는 데서 오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 위에 동구․소련의 변화는 이 운동 전체에 심각한 절망, 허탈상태와 분열을 가져다주고 있다. 시민운동이 이제껏 일종의 귀족운동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제 막 시작되는 새로운 시민운동도 광범위한 민중 전체의 권익과 요구 등을 수렴, 통합하는 대승적 운동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환경운동을 비롯하여 생산자 운동, 소비자 운동, 생활운동, 지역주민 운동 등 공동체 운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야당은 지역적 분열의 깊은 골짜기를 뛰어넘지 못하면 통합불능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불신은 물론이지만 서양식 대의제도에 대한 회의도 강하다. 어디로 갈 것인가? 수많은 종교집단과 교회들은 환상적 도피의 메시지를 뿌리며 사람을 긁어모으고 돈을 번다. 역시 아편이다. 도피와 돌파는 또 하나의 민중의 이중구속이다.
이 같은 사분오열 속에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고 욕구와 현실 사이에, 충동과 처벌 사이에서 갈갈이 찢어져 반항과 도피 아니면 수동적 태도로 절망한다. 극단적인 상대연기, 유전연기(流轉緣起)의 극치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물론 중생의 무명과 분별지와 집착, 망상 때문이겠다. 생명의 변화, 연기의 움직임에서 이탈하여 물질주의, 기계적 형상론, 요소적 실재론에 집착한 결과다.
역사가 분명 분산․확산추세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견 엔트로피 진행과정의 정점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인류문명사 전체의 일대 전환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현 문명의 복잡한 이중구속에 의한 개인적 또는 집단적 정신분열증이라고 보아야 한다.
문명의 분열현상은 바로 모든 인간의 구체적인 생활의 분열양상으로 나타난다. ‘돌파’와 ‘도피’는 처방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이중구속이며, 동시에 분열의 증상이다. 독사가 있는 같은 생태계에 영약이 있듯이 이중구속과 그에 의한 정신분열에 대한 처방은 이중구속적인 모순적 메시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 머리 위에 몽둥이가 놓여있다는 것을 알아도 매 30대, 몰라도 매 30대, 알거나 모르거나 매 30대 !’ 바로 이것이다. 이변비중(離邊非中)!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고 파시즘이나 사회민주주의 따위 절충 수렴의 사잇길도 아니다. 산업사회 기계문명의 지속도, 농업사회로의 복귀도 아니고 생명의 상품화도 유전자 공학 사회도 아니다. 이 모든 것 밑에 잠재해 있으며, 그로부터 생성하며, 이 모든 것을 그치게 하고 또한 모든 것을 새롭게 아우르는 전(全)으로서의 참다운 중도(中道), 총체적인 연기의 세계관, 큰 생명의 세계관, 그리고 이에 입각하여 건설할 우주적 생명해방의 새 문명에 대한 전망이다.
이것이 처방이다. 엔트로피의 해체 방향을 도리어 그것을 타고 생명의 질서형성 과정으로 역추진하는 ‘포지티브 피드백(positive feedback)’의 원리, 생명의 연기성을 철저히 인식함으로써 유전연기를 환멸연기(還滅緣起)로 바꾸어 놓는 것. 번뇌가 곧 보리요 중생이 곧 부처라면, 이 문명의 이중구속과 분열체험의 극단화, 보편화는 중생이 중생을 인식하고 스스로 해방할 근기의 성숙, 중생이 제 생명의 연기성을 바로 깨칠 선기의 무르익음은 아닐까?
그렇다면 절집의 선방이 ‘지금 있는 그대로 장바닥으로 내려와’ 중생의 머리통에 몽둥이를 내리갈김으로써 그 생활 속에서부터 낡은 문명의 구속을 해체 시켜 곧바로 새 문명, 새 생활의 씨앗을 틔우는 일이 가능한 때가 되지 않았는가!
지금 세상은 큰 갈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복잡하고 광활하게 확장된 삶과 세계를 살아 생동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통합하며 해결해나갈 큰 세계관의 수레를 기다리고 있다. 서양과학이 동양에서 기초 세계관을 구하는 것은 그 때문이고, 절집을 찾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계와 삶은 극단에서 극단으로 방전하는 심한 요동을 통해 전혀 새롭고 드넓은 차원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병아리가 알을 깰 즈음이면 심한 진동이 있고, 부리가 어느 한 곳으로 회향하게 된다. 아이가 어미 찾듯, 배고픈 자가 밥 찾듯,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요소환원주의, 폐쇄적 동력학, 유물주의, 객관적 실재론, 직선적 진보주의, 기계론적 세계관, 심신이원론 따위 등에 의한 현 기계, 산업문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광범위한 생명파괴 속에서 중생은 생명의 진면목을 묻기 시작하고 참다운 생명의 세계관을 찾기 시작하며, 그에 따른 새 생활양식, 새 문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세기말 현상이 아니라 전인류문명사의 대전환이다.
생명에 대한 자각은 다만 제 목숨이라는 생각에 머물지 않고 결국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에 이르기 때문이다. 현대 생물학․심리학․물리학․생태학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선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불교는 이때 여기에 대답해야 한다. ‘지금 있는 그대로!’ 나는 이 대답, 이 방편을 생명운동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는 분명 암에 걸려있다. 사회도 분명 하나의 생명체다. 독재와 독점세력, 그리고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무서운 집단, 곧 기계적 세계관이나 실재론, 물질주의로 인류의 생각을 감금하고 세뇌하는 과학문화 집단이라는 암세포의 무차별 확장에 의해 생명 전체가 입자적 고립과 폐쇄체계 속에 병들고 있다. 그러나 암세포만을 절단해 내는 외과수술로 과연 몇 사람이나 실아났는가? 폭력혁명에 의해 사회적 암세포를 타도한다고 지상의 관료주의가 청산되었는가?
암은 통신하지 않는다. 모든 세포는 생체 전체와 통신함으로써 세포끼리 서로 통신하는 개방계다. 무기물도 통신한다. 입자끼리 정보를 교환한다. 따라서 무기물도 생명활동을 한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통신은 산 것의 증거이며, 영성(靈性)의 증거다. 초미립자 안에도 정신의 발아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나와 너는 우리라는 사회, 인류 그리고 생태계와 시공연속체로서의 우주 전체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서로 통신하며 상대적․이중적․상보적으로 다양하게 그러나 통일적으로 살아 있는 연기적 생존이다. 그 관계를 끊거나 감금, 고정하거나 폐쇄하는 상태에 있는 세포, 그 관계가 소극적인 세포도 사실은 숨어있는 관계, 보이지 않는 통신체계 속에 살아 있다.
바로 이러한 근원적 생명관계의 움직임을 타고 현상적으로 닫혀 있는 세포들에게로 급격히 확장하는 것이 암이다. 암의 원인은 암세포 자체 안에 있지 않고 암세포 바깥에 있다고 한다. 생체 전체의 개방적 관계, 그 연기적 관계의 이러저러한 상태와 상황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중구속의 압력 속에서 분열된 생체, 즉 극단으로 감금되거나 무감각으로 위축되거나 돌파로 응축되거나 환상에로 해체된 생체는 본래의 생체리듬, 24시간의 사카디안 리듬에 혼란이 생기며, 정신-신체적으로 교란이 일어나고, 통신에 장애가 생기고, 외계와의 관계에도 병통이 생긴다. 이때 암이 발병한다.
따라서 처방은 생체 전체의 개방적 생명활동, 그 통신체계의 전체적인 생명력 회복에 주어져야 한다. 이때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이 명상이라고 한다. 명상은 개아(個我)를 넘어서 전아(全我) 곧 전체적 우주생명의 광활하고, 생생한 연기관계를 총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요, 그 연관의 총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오히려 그것까지도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이 체험에서 뇌파에는 알파파(波)라는 것이 발생하는데, 이 알파파는 자기치유력, 집중력, 창조적 기능을 나타낸다고 한다. 세포들의 통신은 활발해지고, 외계와의 순환도 활기를 띠며, 면역기능이 되살아나고 생체는 일종의 신령한 생명력으로 고양된다고 한다. 이때 생체 내에서 암에 대한 복합적 항체가 생산되는데 이 항체는 모든 세포들의 메시지의 복합이며, 이 항체복합의 효과는 단순히 ‘1+1=2’와 같은 총화나 집합이 아니라 ‘1+1=4’이거나 ‘1+1=100’과 같은 놀라운 결과, 이른바 ‘칵테일 효과’나 ‘시너지효과’ 같은 신비한 효과로 나타난다고 한다. 바로 이 항체가 암을 이겨내며, 암세포마저도 정상세포로 부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암치유를 한 생체는 이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진다고도 한다. 이것은 일본에 있었던 한 암치료 과정의 보고다.
우리는 계급투쟁설이나 파동설 등의 낡은 패러다임에서 이제 떠나야 한다. 현대과학은 생명을 지향한다. 생명의 세계관, 생명사고로 사회를 보아야 탁월한 의미에서 사회의 과학적 인식이 가능하다. 암은 국소적, 폐쇄적, 독재적, 독점적이다.
독재 ․독점 ․오염 ․세뇌 ․분단․감금세력이란 사회암의 극복은 요소환원주의나 선악이원론 등에 입각, 메스로 부분 또는 계급을 절개해 낼 것이 아니라 전-사회 생체세포들의 개방성과 그 항체생산력에 대한 생명론적 이해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극복의 실천은 먼저 대중 차원에서의 명상과 연구를 통한 깊고 광활한 생명의 체득과 이해, 생명의 세계관, 화엄적 세계관의 현대적, 과학적, 대중적인 재해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선은 우리 농산물을 먹는 운동,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원리를 깨달아 우리 쌀, 우리 배추를 먹는 운동, 그것도 살아 있는 유기농산물을 먹는 운동, 건강을 위한 식생활운동, 농업 노동 혹은 공업노동 혹은 정보 및 서비스 노동 등에서 자기 생체의 움직임과 노동에 의한 생체교란 현상에서 나타나는 생명연관을 내관(內觀)하는 일이나, 복식호흡 혹은 체조로부터 시작해서 차츰 넓은 차원, 깊은 관계의 생명의 움직임을 깨달아가는 방법도 좋다. 그러나 어떤 활동에서도 먼저 명상을 앞세우는 것이 가장 좋다.
개인이 우선 스스로 무궁한 우주생명임을 깨우쳐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을 각성시키는 ‘촉매’로서의 보살의 역할이 여기에서 중요하다.
화엄사상은 네트워크의 원리를 보여준다. 화엄사상에 바탕을 둔 네트워크적 민중운동 혹은 시민운동의 시작은 매우 중요하다. 네트워크는 개별성과 전체성, 주체성과 개방성, 자유와 평둥, 물질생활과 정신생활, 평형과 비평형, 안정과 변화, 통제와 경쟁, 영성과 공동체적 생활 등을 ‘불연속적 연속'이라는 생물학적 원리에 따라 다양하게 다층적, 다차원적, 복수적으로 통합하는 살아 있는 생명의 산 조직방법이다. 수명적-분산적-네트워크적인 생명의 적극적 가치창조 운동을 먼저 조직하여 널리 확장함으로써 그때 생산되는 강한 항체에 의해 비로소 암치료라는 소극적 ․저항적 차원의 문제해결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네트워크는 생명의 질서나 이치에 가장 합당한 대중적인 생활조직이다. 네트워크는 천차만별의 다양한 개성, 그것도 신령한 생명으로서의 개성을 존중하며, 또한 전체의 유기적 연관을 강력히 요구하는 삶의 가장 삶다운 양식이다. 그것은 한적하면서도 역동적이다. 여기에는 독채나 독점이 서식하지 못한다. 지도자 대신 ‘촉매’로서의 보살이, 조직관리기구 대신 극히 제한된 연락․정보장치가 움직인다. 앨빈 토플러는 정보화 사회에서의 힘은 정보, 곧 지식이라고 했다. 그리고 동구라파의 피플파워에 의한 혁명은 바로 정보에 의한 혁명이라고도 했다.
옳은 말인 듯하다. 그렇다면 통신, 네트워크의 활성화와 함께 나타나는 정신, 단순한 정보, 메시지의 집합이 아니라 ‘시너지적인 창조적 지혜’, 곧 민중 또는 시민 각 개인의 명상체험이나 공동체와 전 네트워크의 다양한 생명운동, 생명체험에서 총체적으로 생성되는 ‘신령한 세계정신’, 그 정신의 자기 치유력 ․집중력 ․창조력과 복합적 정보에 의한 초(超) 통신력, 네트워크에 의한 초(超)연대력, 분산포위력 둥이 사회적 암세포를 극복하는 바로 그 항체가 아니겠는가!
지금은 정보화 시대다. 그러나 생명의 개방적 통신체계에 대한 아직은 희미한 각성의 때다. 이제 곧 ‘창조화시대’가 밀려온다. ‘데이타’에서 ‘아이디어’로, ‘비트’에서 ‘창발량(創發量)’으로, 컴퓨터에서 컨셉터로, 수신 ․발신 ․계산 등의 부분적 두뇌기능에서 두뇌활동의 가장 핵심인 창조적 정신기능이 중요시되는 시대로 나아갈 것이다. 창조적 정신기능이 핵이 되는 탁월한 개방통신의 시대. 지금의 ‘소프트웨어 전쟁’이 그 조짐이다.
도처에서 과학적 방법에 의한 염력(念力)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스타인메츠라는 과학자가 ‘앞으로의 최고의 과학적 발견은 영(훌)에 대한 탐색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영의 과학의 출현은 과학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나, 일본인들이 ‘21세기는 동양정신에 의한 역사상 전혀 새로운 기술문명의 시대’라고 떠드는 것이나 모두 그 조짐이다.
창조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깊고 넓은 미묘한 마음, 곧 신령으로부터 나온다. 신령은 실체나 실재가 아니며 걸림 없는 생명활동의 깊은 묘(妙)다. 신령은 우주적 생명체험이요, 연기의 그물로 진화하는 우주의 마음이다. 신령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삼라만상의 살아 생동하는 생명의 비밀을 꿰뚫어 안다.
뇌생물학 분야에서의 ‘홀로그래피’모델의 원용이나 이른바 ‘위로부터의 기재’이론 등은 앞으로 신령에 대한 과학적 연구 및 활용이 본격화할 것임을 가르쳐주며 융이나 라깡의 무의식 탐구나 초심리학 등도 마찬가지 암시를 주고 있다.
우리 사회는 농업 ․공업 ․정보화 시대의 다차원적 삶을 사는 사회이며, 여기에 창조화 시대가 겹쳐질 전망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가속적(加速的) 중층적(重層的)이다. 이 모든 차원들은 심층의식 속의 신령을 자각한 생명의 창조적 활동에 의해 통합적으로 자기를 변화시키며 새로운 방향으로 고양될 수 있고, 이 활동의 대중적 확장에 의해서 개인의 해방, 참다운 민주화, 근검 ․절약․상호 공경과 영적 생활 동의 새 윤리의 정립, 탁월한 차원에서의 평화적 사회개혁, 생태계 균형의 완전한 회복, 새 문명건설과 결합된 민족의 완전통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적 생활과 민족통일은 아무 관계 없다고 생각해온 것이 이제까지의 통념이다. 이것은 낡았다. 그래서 통일 못 한다. 새 시대의 요구에 응하는 창조력만이 통일을 창조한다. 창조화 시대는 ‘신령화 시대’를 요구하게 된다. 지금은 정보화, 다음은 창조화하는 식으로 끝없이 남을 뒤쫓을 일이 아니다. 그러면 언제나 늦다. 이 겹쳐진 모든 생산시대의 다양한 요구에 총체적으로 대응하는 일은 대중적 명상의 보급, 갖가지 생명운동, 개인 및 집단적 생명체험의 보편화를 통한 민중무의식 속의 창조적 신령의 의식화와 그 충만(바로 그 ‘시너지적’ 항체의 대량생산)으로부터 바로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동북아시아에서 새 문명이 탄생하리라는 예언은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 문명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연기적 생명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보다 심오한 정보화 사회, 보다 탁월한 창조화 사회를 선취(先取)하는 해방과 공생과 무궁창조의 화엄시대의 실현인 것이다. 신령화 시대는 곧 화엄의 시대다. 지금은 인류문명사 전체의 대전환점이며, 화엄시대 실현을 목표로 하는 새 윤리․새 과학․새 문화․새 제도․새 문명의 건설을 통해 인류역사는 광활하고 새로운 우주시대로 확장될 것이다. 통신․네트워크, 창조적 정신의 고양이 일반화되는 새 문명사회는 모든 개인, 모든 공동체, 모든 민족과 모든 생태계와 산천과 바다와 대기의 무기계 일체가 ‘불연속적 연속’의 공생네트워크로 수평적․분산적․개성적 삶을 보장받으면서 동시에 전체로, 네트워크적 연방체계로 연대하며, 인간․생물․무기물 속에 숨어있던 신령이 모두 드러나 다양한 생명의 진리를 나름대로 법문하면서 삼세실유(三世實有)를 자각적으로 스스로 살고 서로서로 미묘한 초(超)-메시지를 주고받는 우주적 생명해방의 대-해탈 사회가 될 것이다.
농업은 생명의 농업으로 부활하고 공업은 유기적 공업․생명의 공업으로 변모하며 정보통신은 신묘한 창조정신의 ‘텔레파시 체계’로 변할 것이다. 과학․기술․제도․문화․생산조직 ․유통구조, 일체 국가기구와 국제조직들은 그 자체가 네트워크로서, 사회정의․인권․노동해방․공생들의 문제를 이미 원천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우주만물의 ‘신령이 드러나도록 지원하며 신령을 공양하는 초(超) 시스템’으로 자기변혁, 자기 고양을 해야 할 것이다.
신령화된 민중의 네트워크는 바로 이러한 창조적 변혁과정에서 저항하는 일체의 암세포적 개인․집단․제도나 경향들을 강한 항체로 극복할 것이며, 또한 그것들을 또 하나의 ‘신령화지원, 공양시스템’으로는 그 자체 신령한 생명으로 전향시킬 것이다. 물론 차원변화에 따른 파국은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말이면서 동시에 개벽이다.
그것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다음이 성(成)으로 이어지는 말법의 정법으로의 지화점(至化點)이다. 중생은 신령한 과학적 학습의 능력으로 이 차원변화의 큰 틈을 신비롭게 넘어설 것이다. 큰 생명의 힘, 미묘한 마음의 힘, 과학화한 신령의 힘이다.
정리해 보자.
우선 개인의 생명체득과 안심입명을 위한 매일매일의 명상, 또는 소집단적 명상으로부터 시작하자. 서로를 신령한 생명으로 공경하며, 각종의 생명공동체, 노동자 자주관리, 생산자공동체, 생명농, 유기농 협업공동체, 의료보건공동체, 소비자공동체, 정보문화공동체, 새로운 과학적 종교공동체, 정치․경제․생활에 관한 각종 지역 공동체 등등 갖가지 단수 또는 복수적 생명공동체를 건설하고 그것을 네트워크로 연결시켜 현안의 민주화 등 모든 삶의 문제들을 적극적 활동으로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해결하면서 새로운 생명의 사회양식을 창조하여 민족통일 사회양식으로 전 민중에 확장하며, 끝없이 다양한 가치창조의 질적 확장 운동으로 일체 저항을 극복 제도를 혁파하며 새 문명사회를 건설해나가는 것. 동체대비, 지구와 천지 삼라만상을 모두 거룩한 부처로서 공경하며 탁월한 생명의 과학으로 환경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것, 민족과 민족, 세계 블록과 블록을 공생적 네트워크로 연방화하며 그리하여 드디어는 대기권 밖, 태양계와 수천억의 은하계 밖 삼십삼천 그 너머 무궁한 세계에로 우주선이 아닌 U.F.O․시스템으로 통신․여행하며 동시에 인간 무의식의 최심층까지도 의식화하고 나아가 전 우주입자를 신령화하는 대생명의 무궁무궁한 질적 확산진화, 화엄세계의 현실적 성취, 몸을 떠나지 않는 대해탈, 이것.
나는 이것이 바로 생명운동이요 이것이 깨달음의 역사화, 우주화요, 보디사트바의 대승운동이며, 이것이 바로 절집 선방에서 수행 중에 깔고 앉은 방석을 허공에 들어 보이는 일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환인가?
결국은 신령이라는 생각, 생명이라는 생각도 환이니 그마저 넘어서야 한다. 과학도 마찬가지. 그러나 그 시작은 생명이라는 가치, 신령이라는 생각에 더 밝게 집착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중생이 생명을 잇고 있고, 인간 이성이 신령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꿈인가?
이제 내 숙제는 끝났다.
성철스님도 만났고 방석도 들어 올렸다. 현응 스님께 대답도 했고 해인지에 글도 전에 못 써준 것 합쳐 곱으로 썼다.
그런데
세계반조라!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산 쪽으로부터 몽둥이가 떨어지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