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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와 다말 이야기
38: 1~30
○ 유다의 아들들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대상11:15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대상2:3
3.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민26:19-20
4.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대상2:3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마22:24, 막12:19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신25:6
10.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레22:13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수15:10, 57, 삼하13:39
○ 유다를 속인 다말
13.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수15:10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창38:21, 잠7:12
15.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 길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 자부인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 오려느냐
17. 유다가 가로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약조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창38:25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창38:14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23. 유다가 가로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내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24.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삿19:2, 요8:5
25.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창38:18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삼상24:17
○ 쌍동이를 낳은 다말
27.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민26:20, 마1:3
30.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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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전후 맥락의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 중에 네째인 유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불륜으로 아기가 태어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는 구속사적인 메세지가 담겨있습니다.
두 가지 큰 메시지가 있는데,
☛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라 할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공동체를 떠나서 제멋대로 살면 화가 임하고, 저주와 고통이 임한다 라는 메시지입니다.
☛ 또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부도덕성과 불신앙으로 인한 실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포기하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큽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죄 때문에 너무나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1장 18절에서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주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를 사해주신 것입니다.
형제들을 떠나는 유다
유다가 큰 실수를 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유다는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위장해서 아버지에게는 거짓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합니다. 아무리 위로해도 아버지는 위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서로 공모해서 은 20을 받고 동생을 판 것에 대해 형제들 사이에서도 불편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이 사건에 대해 침묵하기로 결정한듯이 보여집니다. 그들은 우울해했고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서로를 대하기도 어색했습니다.
유다는 견딜 수가 없어서 가족을 떠났습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들에게서 내려갔다’라는 말은 유다가 독립해서 살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그가 떠나기로 결정한 까닭이 요셉의 사건에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집안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큰형 르우벤은 아버지의 부인을 범했습니다.
또 시므온과 레위는 살인을 했고, 첩의 자녀들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이유들로 형제들은 서로를 존경할 수 없었고,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런 관계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자기형제들을 떠나서 아둘람이라는 이방지역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과 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큰 실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공동체를 떠나면 위기를 맞게 됩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스캔들이 있고, 시기와 질투도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에서조차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절망을 하고 실망을 해서 교회를 떠나는 이가 생겨나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동체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신앙공동체를 떠나면 유다와 같은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복을 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것을 피했습니다. 그는 신앙공동체, 가족공동체,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을 포기하고, 행복하게 따로 살아보고 싶어 이방세계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유다는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한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미련한 선택을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교회공동체를 떠나지 마십시오. 우리는 혼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부족하고 실수가 있고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 공동체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유지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 여인과의 결혼
공동체를 떠난 유다의 두 번 째 실수를 보겠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유다가 신앙공동체를 떠난 일은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사건으로까지 이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실수입니다. 이것이 유다에게 고통과 저주가 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이방인들이 사는 방법과 생활양식대로, 그리고 아내가 이끌어 가는 대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예수 안 믿는 세계가 예수 믿는 세계보다 더 좋다며 예수 믿는 공동체를 떠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굉장히 지혜로운 선택같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의 부인, 리브가를 며느리로 얻는 과정을 기억하십니까? 아브라함은 다른 것은 다 괜찮지만 가나안 여자만큼은 절대로 자신의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조건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향에서 이삭의 아내를 택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어떤 아내를 얻느냐가 그 가정의 영적인 축복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이방여자와 결혼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자신과 세상의 방법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고통과 저주 뿐이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는 아들 엘과 오난 그리고 셀라를 낳았습니다. 그중 큰 아들이 결혼 할 나이가 되어서 다말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얻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큰 아들 엘은 하나님께서 죽여버릴 만큼 하나님 목전에서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는 하나님이 없는 환경에서 세상 방법으로 아이를 양육했고, 그래서 아주 악한 아들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유다는 아이들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자라면서 얻게되는 충고와 제재를 피한 대가로 안전장치를 포기했던 셈입니다. 때문에 그는 결국 아들을 악한 사람으로 키워냈습니다. 이것이 유다의 비극입니다. 세상 것을 모두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녀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전통에 의하면 형이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맞아들여 형의 대를 이어주어야 했습니다. 이런 전통 때문에 아버지 유다는 아들의 죽음이 어떤 영적인 교훈이 있는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세상적인 관습대로 동생 오난을 형수에게 들여보냅니다. 그러나 오난은 형수가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행동합니다.
9, 10절을 보십시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오난이 하는 행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오난도 죽고맙니다. 유다는 두 아들을 잃었버렸고 다말이라는 가엾은 여자가 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버리고 신앙공동체를 떠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더 무서운 재앙이 계속해서 임하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됩니다.
11절 보십시오.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유다는 며느리에게 수절하고 있으면 세 번째 아들 셀라가 자란 후 다시 혼인시켜주겠다고 약속하며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사실 유다는 셀라마저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셀라가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말과 셋째 아들을 결혼시키는 일을 진행시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가 인생을 목표없이 뒤죽박죽으로 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인생에 주어진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문제가 주어질 때마다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적인 방법으로 뚫고 나가야하는데, 세상적인 방법을 취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취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뒤죽박죽된 방식대로 살고맙니다.
다말의 음모
12~19절을 보십시오.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 자부인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유다가 가로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약조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신앙공동체를 떠난 사람은 부도덕한 인생을 살기 쉽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도덕적 기준을 잃어버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다말은 쾌락이나 돈 때문에 시아버지에게 접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말은 며느리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 해야되겠다는 일념 하나밖엔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나이는 들어가는데 시아버지가 셋째 아들을 남편으로 주지 않자 음모를 꾸며서라도 자신의 일념을 달성하고자 합니다.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 관계를 맺은 지 세 달후, 그는 자신의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유다는 격분하며 다말을 당장 끌어내서 죽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정의감이란 대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죄는 다 숨기고 항상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비판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일반적인 마음입니다.
20~23절을 보겠습니다.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유다가 가로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내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당황합니다.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빼앗기고 부끄러움을 당할까봐 입을 막습니다. 그는 이렇게 체면을 차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내면적인 문제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고 우선 사람에게 부끄러움과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합니다.
24~26절을 보십시오.
“석 달 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다말은 지혜로운 여자입니다. 사리가 분별하고 영민하며 대담한 여자인 것 같습니다.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됐을 때 유다는 실패감, 낭패감, 회개 등의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신앙공동체인 가족을 떠나서 자기 혼자 행복하면 족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여러분,
신앙공동체를 떠났다는 것이 이렇게 큰 비극을 몰고 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말씀으로 격려하고, 충고하며, 내가 세상으로 나가려고 할 때 막아주는 그런 일이 필요합니다.
방해와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본능과 욕심과 인간의 생각대로 살면 마귀의 종이 되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유다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며느리가 옳고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며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며느리를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드디어 유다가 회개하고 제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27~30절을 보십시오.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였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이렇게 해서 창세기 38장의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우리는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다와 다말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통하여 약속과 구원과 은혜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 가문에서 메시아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무척이나 신비스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야곱의 열 두 지파 중에서 이 유다지파가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됩니다. 이렇게 불신앙적이고 부도덕한 사람을 하나님은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지파로 만드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보면 다말이 예수님의 족보를 만드는 여자가 되었음을 봅니다. 이렇게 결론은 아주 행복하게 끝이 났습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부도덕하고, 그리고 불신앙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렇게 여러분을 믿음의 조상과 축복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시고, 여러분의 자녀를 통해서 이 축복이 계속되기 원하신다는 것이 성경이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어서 빨리 돌아오십시오. 약속의 자녀로서 여러분들이 인침을 받고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 가지로 결론을 맺고 싶습니다. 첫째 신앙공동체를 떠나지 마십시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교회는 여러분의 생명의 끈입니다.
교회에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시험이 들면 그저 비가 왔다 라고 생각하십시오.
비는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시험은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위기도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놓치지 마십시오.
신앙공동체, 가족공동체는 복의 물줄기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있으면 여러분은 수많은 인생의 역경과 위기를 이겨가게 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어서 여러분을 다시 구원하시고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러분을 들어 쓰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들어 쓰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 멀리 하나님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교회와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로 돌아옵니다. 시험과 고난이 다 지나가게 하시고
주님, 내 몸에 있는 더러운 죄를 다 씻어주시고 허물과 실수를
다 씻어주시고 나를 다시 받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저자| 하용조 목사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