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께서 1971년 음력 7월 15일 50대 후반의 나이로 무더운 여름날에 돌아 가셨다.
누나가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하고 있을 때 였고, 병선 형이 학교에서 주산교육을 하는 선생님, 병문이 형이 베트남 전쟁터에서 비들기부대 용사로 참전 중이었으며, 내가 3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 훈련을 받으며 논산훈련소에서 실습 소대장으로 실습 중에 중대장으로 부터 비보를 듣게 되었다.
운명하시기 전, 어머님께서는 병문이 형이 머나먼 베트남에 가서 전투 중이었기 때문에 많이 보고 싶어 하고 안타깝게 생각을 하였었으며, 나의 경우 국내에서 교육중 이었기 때문에 얼굴이라도 보고 눈을 감으시려고 오랫동안 아픔의 고통을 참으며 기다리시다가 끝내 제 얼굴도 보지 못하고 운명하셨다고 들었다. 이 이야기는 운명하시기 전에 끝까지 옆에서 누님께서 간병하시며 지키고 계셨다가 운명하시고 난 후에 알려 주셔서 들은 이야기 이기도 하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님에 비교하여 장수하시고, 92세의 연세로 음력 9월 9일에 전북 이리의 집에서 누나, 형제들 모두가 결혼하여 각자 살아 갈 기반들을 잡은 것을 확인하며 딸집, 자식들 집에도 방문하여 기반을 잡고 잘 살고 있음을 확인 하시고 운명하셨다.
어머님 기일 과 아버님 기일에 서울에 살고 있는 누나, 병문형, 그리고 내가 병문이 형 차량으로 전주에 살고 있는 병선형 집으로 가는데, 누나가 살고 있는 우장산역 앞에서 만나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는데 형제들을 만나면 마음이 가장 편안하고 내가 가장 막내라서 더욱 편안하고 좋았다.
3시간여 만에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동군산 IC로 나가며 전주 형님께 전화를 하였더니, 익산시에 와 계시다며 동이리역 부근 식당에서 만나기로 하여 갔더니, 거의 동시에 도착을 하였으며 그곳에서 한정식으로 식사를 맛있게 푸짐하게 하였다.
누나는 매형과 부부금실 좋게 살아가고 있으며, 슬하에 영택, 경택, 그리고 향욱이가 결혼하였으며, 영택이가 2008년 6월 9일 GS건설 분양과장으로 재직 중 과로로 사망하여, 엄마인 누나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으나, 경택이는 제주도의 며느리를 만나서 직장에 열심히 다니며 잘 살아 가고 있고, 향욱이는 전남의 신랑을 만나서 단란하게 부모님께 효도 잘 하며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다.
병선이 형은 교육공무원으로 44년동안 서기관으로 2006년 12월 말일자로 정년퇴임 하셨는데, 성실하게 맡은 바 직무를 수행 잘 하시며 혜돈, 혜원, 철환이를 대학까지 교육 및 모두 결혼 시꼈으며, 혜돈이는 경찰 신랑을, 혜원이는 서울의 법학도 신랑을, 철환이는 사회복지사 신부를 만나서 오손 도손 깨가 쏟아지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병선이 형을 따라 둘째형의 아들 준환이가 교육공무원으로 합격하였다.
병문이 형은 미군부대에 문관으로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면서 선영, 선재, 선경, 그리고 준환이를 교육시키고, 서울 도봉동에 집을 짖고,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자식식구들이 많은 가운데 반듯하게 자라서 결혼들을 모두 하여 생활전선에서 능력들을 발휘하여 4형제가 돈을 한마음으로 거출하여 2008년 여름에 제주도에 단체여행을 다녀오는 등 키우고 가르칠 때에는 가장 힘들었지만, 자식들을 결혼 모두 시키고 난 후에는 자식들의 효도를 가장 많이 받는 것 같아서 부럽다. 막내인 준환이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 교사며느리까지 맞이하여, 추석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에 “공무원이 되도록 늘 격려해 주시고 도와 주셔서 고맙다”는 뜻으로 옷 선물을 준비하여 성묘갈 때에 드리고 왔다고 하는 자랑스러운 조카와 조카며느리이다. 앞으로 더욱 잘 되어서 장씨 가문을 위하여 빛내주기를 바란다.
나의 가족은 재혁이 와 미영이가 있는데, 재혁이는 신촌세브란스 병원 간호사와 2004년 11월 13일 결혼하여 손녀 와 손자를 연년생으로 낳았으며, 아들과 며느리가 동시에 출근하기 때문에, 아들이 출근하며 방배동 나의 집에 손녀, 손자를 내려놓고 출근하면, 집사람이 어린이 집에 손녀를 셔틀버스 편으로 등교 시키고, 손자는 나의 집에서 집사람이 돌보다가 저녁에 아들 과 며느리가 퇴근하며 다시 데려가는 형태로 모두가 조금은 힘들고, 피곤할 정도로 손녀, 손자를 위하여 수고들이 많다. 미영이는 아직 미혼이지만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여야 할 누나 와 형제들의 2세 중 유일한 미혼 여성이다.
식사 후에 전주형님 집에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삼례 고모님이 오신다. 아버지의 막내 여동생이신데 70대 후반이시다. 고모부는 오래전 여자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을 하셨다. 아버지가 장남이셨고, 형제들은 대전 부근의 진잠 고모가 계셨었고, 서울 미아리 부근에 사셨던 고모, 고향 목천동 옆집에 사셨던 고모, 목상리에 사셨던 작은 아버지, 그리고 막내인 삼례고모가 계시며, 유일한 생존자이시다.
70대 후반이신 고모님께서 기일이면, 잊지 않고 찾아 주시는 마음이 정말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된다.
순서가 조금 바뀌었지만, 어머님의 형제분들도 이제는 지경면 석하리에 살고 계시는 막내 이모님만 생존해 계신다.
이모님들은 첫째가 지경이모, 얼굴 뵌적이 없는 또 다른 이모님 한분 계시고, 김제이모, 석화리 이모, 딸만 5자매인 딸 부자집에서 둘째로 어머님이 때어 나셨던 것 같다. 옛날에 군산에서 가까운 차상리라는 곳에서 아주 잘 사는 딸부자집 이었다고 전해 들었다.
금년 중순에 김제에 살고 계시던 이모님은 돌아 가셨다고 한다. 김제 이모님께서도 생전에 나에게 잘 대하여 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제 이모님 딸 박경원이가 전주에 가는 동안 얼굴이나 한번 보자며 전화를 자주 걸어온다.
이모 딸은 나와 같은 학년으로 나이는 나와 비슷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학창시절에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그러한지 친근감이 간다. 지연도착으로 다음기회에 얼굴이나 한번 보아야 겠다.
다음날 어머님의 동생이며 생존자이신 석화리 이모님을 누나의 제안으로 찾아가 보았다. 석화리 라는 마을의 노인정에 갔더니, 백발노인이 된 할머님께서 하얀 옷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고 깔끔하게 빗은 상태로 계시다가 우리가 찾는다는 말에 눈물바람으로 반기신다. 누나도 포옹한 상태로 역시 눈물바람을 하시며 “자주 찾아 뵙지 못해서 죄송하다”며 눈물을 쏟는다. 나 역시 기억나는 것은 이모님께서 지지리도 어렵고 못살던 그 옛날에 용돈으로 고사리 같은 나의 어린 손에 돈을 꼬옥 쥐어 주셨던 고마웠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고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누나도 그러한 고마운 생각이 나시는 것 같았다. 그 지역의 가장 큰 식당에 가서 누나가 우리형제들 까지 포함하여 이모님이 좋아하신다는 삼계탕을 대접하였다.
누나가 큰아들 영택이를 잃고 너무 슬퍼하는 것 같다. 영택이 어머니로 당연히 슬퍼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며, 이미 고인이 된 영택의 가족들을 위하여, 사망시 GS건설측과 합의 되었던 대로 근로복지 공단으로부터 산재보상 과 GS건설측 위로보상 등이 순조롭게 마무리 되어 누나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