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2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아름다운 사람과의 동행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한 것이 참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어떤 놀이를 하고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면서 떠들고 재미있게 노는 것을 잘하지 못합니다. 특히 술을 잘 먹지 못하고 노래도 부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스톱을 치거나 트럼프를 치고 마작을 하는 등 재미있는 놀이에 아주 캄캄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울려 노래방에 가면 언제나 구경만 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 분위기를 깨기도 합니다. 특히 노래를 부를 때 음정 박자가 잘 맞지 않아서 듣는 사람이 괴롭기도 할 것이지만, 노래를 선곡할 때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해서 난감해 합니다. 그 흔하디흔한 인기 있는 유행가 가사를 하나도 외우는 것이 없어서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요즘은 친구들과 놀 때 나를 끼워줘서 구경이라도 할 수 있게 해서 그나마 기분이 참 좋습니다.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서 고스톱을 칠 때 옆에서 구경만 하는데 고스톱을 잘 치는 선수들은 고스톱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가 고스톱 칠 때 무조건 자신들이 먹을 것만 생각하고 판세를 읽을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잘 치는 사람에게 아주 크게 내주게 되거나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서 전체적인 균형과 견제를 통해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그 미묘한 재미를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스톱을 치거나 술을 먹어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잘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본성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돈을 잃거나 울분을 털어 놓다보면 그 사람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이 느닷없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자신의 수양이나 예의범절이나 다른 여러 가지 학습에 의해서 표출하고 표현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을 익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를 내거나 술에 취해서 그런 예의범절이나 수양으로 감춰진 것들이 무너지는 때에 그 본성을 드러내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고스톱을 잘 치는 사람들이나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 또 춤을 잘 추는 사람을 몹시 부러워합니다. 그들은 분위기를 잘 이끌고 인간관계를 잘 맺으면서 환경을 잘 조화롭게 만들면서 전혀 어색하지 않게 하는 어울리는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심보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어운. 여호인동행, 여무로중행, 수불습의, 시시유윤. 여무식인동행, 여측중좌, 수불오의, 시시문취.” (家語云. 與好人同行, 如霧露中行, 雖不濕衣, 時時有潤. 與無識人同行, 如厠中坐, 雖不汚衣, 時時聞臭.)이니라.
이 말은 <좋은 사람과 동행하는 것은 안개 속에 다니는 것과 같으니 옷이 곧 젖지는 않으나 점점 축축해지느니라. 무식한 사람과 동행하는 것은 뒷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으니 옷이 더러워지지는 않으나 점점 냄새가 배느니라.>
이처럼 나는 분위기를 파악하지도 못하는 무식한이 되어 살고 있는지, 또는 영악한 기회주의자가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인과 같이 우리가 산다는 것은 성인들의 성덕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젖어 성덕을 간직하게 될 것이며, 악인들과 같이 산다면 우리가 악행으로 더렵혀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생각이나 말과 행실이 악인들을 닮게 될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친구들의 거친 말을 쉽게 배우고 인터넷을 통해서 이상한 말을 자꾸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우리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의 말과 행실이나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변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식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단호하게 당신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도저히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분명하게 당신의 신분을 밝히십니다. 당신이 구세주이시며,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며, 성조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던 분이라고 당신의 신원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믿지 못하더라도 하시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은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안개 속을 걷더라도 주님의 사랑에 젖어서 주님의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을 가져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아주 엉뚱하게도 유다인들의 역할이 참으로 오묘하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공격하면서 심지어는 돌로 예수님을 쳐서 죽이려고 하는 그들의 행동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실이 더욱 더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조목조목 따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질문에 일일이 응답하시고 답변을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더 쉽게 깨달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생동감 넘치게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그런 철저한 메시아관이나 예수님을 배척하는 말과 행동이 없이 무조건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었다면 사람들은 사리분별을 잘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성령으로 주님이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메시아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식한 유다인들처럼 예수님을 향해서 돌을 던지고, 붙잡아서 해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