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남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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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돼 주권을 상실한 날입니다. 그로부터 꼭 100년 되는 날이 내일입니다.
지난 100년간, 우리는 광복과 분단, 전쟁을 지나 국제사회의 어엿한 일원으로 성장했지만 통일이라는 과업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8월 마지막주 특파원현장보고, 국권침탈 100년을 맞아 일본과 러시아 독일 이집트에서 관련 소식 준비했습니다.
사할린은 일제 강점기의 비극이 대를 이어 이어지는 땅입니다.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탄광에서 일하다 광복을 맞았지만 돌아오지 못한 한인들의 한이 서린 곳이죠...
네, 그런데 또 안타까운 것은 1990년부터 사할인 한인들을 귀국시키는 정책이 마련됐지만 그 대상자가 제한돼 있어 귀국을 포기하거나 이산 가족이 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는 겁니다.
대를 이어 고통을 겪는 사할린 한인들을 김명섭 특파원이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사할린 남쪽에 위치한 브이코프 탄광, 과거 일본 강점기에 사할린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미쓰비시 탄광이 있었습니다.
지난 1938년부터 2천 명의 한인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광부로 일했습니다. 탄광 징용자의 아들로 태어난 김부대 할아버지는 평생을 이 탄광에서 보냈습니다.
미쓰비시 막장의 작업 환경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한인 징용자들 가운데는 굶주림을 못 이겨 광업소에서 배급한 도시락을 일찍 먹었다가 구타당해 죽는 일도 벌어졌다고 할아버지는 증언합니다.
<인터뷰>김부대(사할린 징용자 아들/1943년 생):"일본 사람들이 (밥) 보여달라고 하죠. 도시락에 밥 없으면 두드려 맞고 왜 먹었는지 (추궁당했습니다)."
징용자들이 번 돈은 고스란히 일본 은행으로 보내졌는데 일본이 패전국이 되면서 한푼도 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인터뷰>김부대(사할린 징용자 아들):"전체 저축통장을 일본으로 다 보냈죠. 통장에 저축했지만 못받고 다 돌아가셨습니다."
2차대전에 패한 일본인들은 서둘러 사할린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탄광에 끌려온 한국 징용자들은 광복을 맞았지만 사할린 땅이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할 수 없이 탄광 노동자의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경상북도가 고향인 올해 87살의 김윤댁 할아버지는 지난 1943년 미쯔이 탄광으로 끌려와 아직 탄광촌 근처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터뷰>김윤덕(사할린 징용자/1923년 생):"소련이 일본 사람들부터 먼저 보냈습니다. 처음엔 한국 사람 먼저 보낸다고 했는데 (일본 사람들만) 모두 가고.."
실의에 빠진 한인들은 술에 의지해 세월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인터뷰>김윤덕(사할린 징용자):"조선 간다고 했다가 못가서 병 얻어 죽은 사람 많아요"
사할린 남단 코르사코프 시내의 공동묘지엔 한국식 봉분이 쉽게 눈에 띕니다. 비석마다 한글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탄광과 벌목장, 철도 공사판 등에서 일하다 사할린에 남았던 한인 징용자들 4만여 명 가운데 상당수가 사할린 땅에 묻혀 있습니다.
광복 후 사할린 징용자 가족들이 모인 곳은 남단의 코르사코프 항구, 고향으로 돌아갈 배편을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항구 부근에서 한국에 갈 날만을 기다리며 애태우던 대부분의 한국 징용 노동자들은 끝내 조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인터뷰>오정대(사할린 징용2세대/1947년생):"자기 민족(일본인)은 다 데리고 가고 조선 사람들은 안태우고...궁금하고 속상해 울고 많이 돌아가셨습니다. 한국도 못 가보고"
남은 한인들에게 국적은 없었습니다. 사할린에서 숱한 어려움 끝에 장치 설비업체를 운영하며 자수성가한 오정대 할아버지, 광복 후 그동안 무려 5차례나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일본비국민증으로부터 시작해 소련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비공민증으로 바뀌었고, 한때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북한 공민증까지 의무적으로 받아야 했습니다. 불과 20여킬로미터 떨어진 이웃 도시를 가기 위해서도 통행 허가서를 얻어야 했습니다. 소련이 무너지고 난 뒤에야 러시아 국민으로서 겨우 대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족을 한국에 두고 온 상당수의 징용자는 혼자 살면서 더 큰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녹취>오정대:"여기 아저씨 혼자 살았고...혼자 살았고.. (혼자 사시던 분들이 많이 돌아가셨네요?) 그렇죠. 술 때문에. 혼자서 속타지, 궁금하지.."
코르사코프에 함께 살던 한인들이 모였습니다. 지난 90년부터 시작된 영주귀국 사업으로 한국으로 떠났다가 남은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사할린을 방문했습니다. 과거 바다를 보며 함께 고향을 그리던 사람들이 모였던 코르사코프 항구 언덕엔 고국으로 향하는 조각배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서 있습니다. 영주귀국 사업으로 한국 국적을 회복한 징용 1세대는 지금까지 모두 3천7백여 명입니다. 그 대상은 징용자와 그 배우자, 지난 1945년 광복 이전에 태어난 후손들입니다. 이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온 징용 1세대들은 자식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인터뷰>한문형(징용자/34년생):"우리를 모시고 간 건 좋은데 우리를 또 이산가족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한국 들어가 살고 있지만 또 생각해 보십죠. 자식들 다 여기있지... 손자들도 다 여기 있지."
징용 왔다 고국을 그리던 아버지를 지난 90년에 한국에 보내드린 뒤 20년째 떨어져 사는 아들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인터뷰>김강용(사할린 징용 2세대/1956년 생):"(제가)아버지 옆에 있어야죠. 한국이 고향이잖아요. 저는 여기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또 갈라졌습니다.아버지는 거기 있고 저는 여기 있고."
오 할아버지는 불과 2년 차이로 영주귀국자 대상에서 제외된 데 대해 아쉬움이 많습니다.
<인터뷰>오정대(징용 2세대/1947년 생):"왜 누나 형님들은 다 가시고 난 여기 남아 있어야 해요? 어머니 한 배에서 나왔잖아요. 2세 남을 사람도 많지만 가려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과 사할린에 떨어져 살던 가족이 1년 만에 다시 모였습니다. 러시아에서 살 수밖에 없는 아들 내외와 손녀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한문형 할아버지 내외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인터뷰>한귀환/사할린 징용 2세대(한문형 할아버지 아들)
"이곳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핏줄은 한국입니다. 러시아뿐 아니라 한국에도 살고 싶습니다."
현재 사할린섬에 사는 한국 동포는 징용 1세 6백여 명과 후손 등 3만여 명에 이릅니다. 영구귀국자들에게는 일부 생활비 지원이 있지만 사할린에 남은 징용자들에게는 아무런 지원이 없는 실정입니다. 일본은 2차대전 종전 때 사할린에 잔류한 일본인뿐만 아니라 그 자녀와 자녀의 배우자들까지 모두 일본 국적 회복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나오토 일본 총리가 국권침탈 백 년 담화를 통해 사할린 한인 지원사업을 성실히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사할린 한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기 위해선 전향적인 정책 전환이 요구됩니다.
<인터뷰>강성문(대한적십자사 복지사업과장):"우리가 갖고 있는 제한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한을 유연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고 일본도 마찬가지고.."
강제 징용된 한인들의 한이 맺혀있는 사할린, 이산의 아픔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사의 피해자로 남은 사할린 한인들을 위해 고국이 해야 할 일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입력시간 2010.08.29 (09:19) 김명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