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좆같아요!>
‘가버나움’은 대다수에게 낯설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지명이다.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작은 성읍으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예수는 중풍병자를 치유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와 같은 기적과 설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이 땅이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6세기에 실제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변했다.
영화 <가버나움>은 2천년이 지난 오늘의 가버나움을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다. 현재는 레바논 지역이다. 중동지역은 전쟁과 분규의 도가니다. 시리아, 이라크, 에티오피아 등에서 몰려온 전쟁난민들로 들끓는다. 레바논 역시 내전으로 민중들의 삶이 망가진 상태다. 오늘의 가버나움은 전쟁과 빈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자들의 땅이다.
열두어 살쯤(!) 되는 ‘자인’ 역시 이 땅에 유배된 아이들 중 하나다. 부모와 살지만 부모도 그도 자인의 나이를 정확히 모르며, 생일도 모른다. 영화의 대사를 인용하면, “케쳡도 만든 날짜와 유통기한이 있는데” 자인은 그런 게 없는 아니다. 자인만 그런 게 아니다. 그는 그곳 아이들을 대표할 뿐이다.
가버나움의 삶은 고달프다. 십대초반 자인의 삶은 더 고달프다. 자기보다 어린 여동생이 빈곤 때문에 강제로 시집(!)간 후 임신 후 하혈로 죽는다. 그것도 병원 문 앞에서 죽었다. 그녀 역시 제조날짜가 확인되지 않는 유령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출생이 신고 되지 않아 살아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들이다. 죽으나 사나 차이가 없다.
강자들의 삶은 선이 굵고 전형적이어서 스토리로 풀어내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밑바닥 인생들의 삶은 하찮은(?) 일로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 하찮은 사건들은 그들의 삶을 짓누른다. 강자들이라면 전화 한통과 봉투 한 개로 간단히 처리되었을 것들이었다. 굳이 스포일러가 되지 않으려고 하지 않지만 자인의 그 고단하고 절망적인 삶을 내가 여기에 요약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냥 직접 보시는 게 낫다.
차라리 이 꼬마가 법정에서 판사에게 던진 말들로 줄거리를 대신하는 게 나을는지 모르겠다.
“나도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은 그걸 원하지 않아요. 우리를 짓밟을 뿐이죠.”
“뱃속의 아이도 나처럼 될 겁니다. 부모님이 아이를 더 이상 낳지 못하게 해 주세요”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인생이 좆같아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 이리저리 채이고 밟히며 좆같은 인생을 사는 민초들이 이
땅에도 수없이 많다. 그들에게 이 땅은 또 다른 가버나움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실화지만 다큐멘터리영화와 영 거리가 멀다. 스토리, 연기, 주제, 영상 모든 게 훌륭하게 처리된 최고급 예술영화다. 2018년도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이 그냥 주어진 게 아니다.
영화가 끝났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곧바로 일어나 나가버리지 않았다. 엔딩음악이 거의 종료될 까지 모두 앉아 있는 영화는 거의 처음이다. 좋은 영화가 주는 깊은 감동과 여운 때문인 건 틀림없지만 좋은 관객들이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있어 행복했다.
저주받은 땅, 가버나움에도 구원의 손길은 뻗쳤다. 자인과 아이들은 좋은 곳으로 간다. 그렇잖아도 짓눌려 있는 우리 마음을 더 답답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니 지레 부담 갖거나 손사래칠 필요는 없다. 실제 얘기도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이 땅의 가버나움 민초들도 ‘좆같은 삶’에서 벗어날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도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있겠다. 이런 말해서 미안하지만, <가버나움> 이 영화 좋지만 정말 재밌기도 하다!
한성안(영산대교수, 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