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을 쑤다 / 최순옥
"와봐라. 다 됐다. 진짜 됐다."
남편이 또다시 큰 소리로 불렀다. 출판을 앞둔 책의 마지막 교정을 보고 있던 나는 마지못해 천천히 일어섰다. 정말 사납게 들끓던 묵 죽이 한결 누긋해진 채 꽈리 같은 공기주머니를 터트리며 푸 푸~우 된 한숨을 토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 더 저어야 할 거 같은데." "푸푸 할 때까지 저으면 된다 했잖아." 인내심이 바닥이 났는지 서툰 주걱질을 참아내던 남편이 횡 부엌을 나가버린다.
단 솥에 눌은 죽이 탈 것 같아 얼른 주걱을 들었다. 부글거리는 묵 솥을 보니 어릴 적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푸욱 뜸 때까지 매매 저어야 한다.' 나물무침 하나도 남다르던 엄마표 먹거리의 비결은 '팍팍 무치고', '매매 치대고', '오래 젓는', 시간과 노력을 더 들이는 것이었다. 뭉글거리며 툭툭 끊어지는 시판 묵을 대할 때마다 엄마의 묵이 떠올랐다. 하늘하늘하면서도 탱글탱글한 엄마표 묵은 떨어뜨려도 가볍게 떨다 제 형태를 찾지, 절대 뭉개지지 않았다. 탄력 넘치는 묵을 칼로 자르면 참기름을 바른 듯 매끈매끈 자르르 윤기가 흘렀다. 내게 묵은 촉감으로 먹는 음식이었다. '매~매' 저어야지. 뭉근하게 불을 낮추었지만 뜨거운 액체가 손에 튈 때마다 펄쩍 뛰게 한다. 곰솥 반이 넘는 양에다 되직하게 차진 죽을 젓는 일은 힘들었다. “됐다니까 그러네.” 마누라의 아픈 어깨가 걱정스러운지 어느새 되돌아온 남편이 주걱을 빼앗는다.
밤새 휘몰아치던 태풍이 동해로 빠져나갔다. 간밤의 광풍이 믿기지 않을 만큼 천지가 고요하고 화창했다. 새로 뽑은 차 길들이게 여념이 없던 우리는 일찍 집을 나섰다. 창녕군 남지읍에 있는 남지개비리길을 걸어볼 참이었다. 낙동강을 끼고 도는 벼랑길이다. 빗기 가신 햇살 속에서 가을 강은 유유자적하고 산야는 눈부시리만큼 산뜻했다. 산발치 진입로는 거센 비바람에 꺾인 나뭇가지들로 어지러웠는데 사이사이에 도토리들이 떨어져 있었다. 길옆 상수리나무의 도토리들은 아직 푸른 빛이 짱짱한데 빛 좋은 꼭대기의 올 익은 것들이 지난밤의 거센 비바람에 서둘러 투구를 벗은 듯했다.
비탈진 산기슭은 참나무로 불리는 도토리나무의 군락지였다.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와 갈참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들로 벼랑길은 온통 도토리 전시장을 열었다. 동글동글하거나 타원형이거나 갸름하거나, 모양은 조금씩 달라도 반질반질 윤기 도는 햇도토리들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앙증맞고 탐스러웠다. 저절로 손이 갔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엄마는 도토리로 묵을 쒔다. 늦가을 우리 집 최고의 별미였던 도토리묵, 그 매끄러운 감촉이 입안에서 느껴졌다. 톡톡 꿀밤을 떨구던 키 큰 상수리나무와 염소를 매어두던 밭머리 떡갈나무도 아른아른 떠올랐다. 낙동강 둘레길 걷기가 도토리 줍기로 바뀌고 말았다.
퇴직을 앞두고 남편이 달라졌다. 자연 함께 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젊었을 때와는 달리 힘 부치는 집안일을 알아서 돕는다. 이제 통 무 썰기는 그의 전담이다. 동향 출신인 우리는 먹거리에 대한 공감대가 넓다. 제사상의 청주 얘기를 하다 아침을 맞은 적도 있다. 남편은 입에 착착 감기던 장모님 표 청주의 비법이 사라진 것을 몹시 애석해한다. 우리 형제들을 비롯해 이제 집에서 청주를 빚을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국의 먹거리들이 야금야금 우리 식탁을 잠식하는 사이 전통 먹거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 딸들을 출가시키고 나니 전통음식을 전수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다. 건강식으로 이름표를 바꿔 단 도토리묵 또한 퇴출의 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봄 고추장 담그기에 성공했듯이 주워온 도토리로 엄마표 묵 만들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유튜브가 엄마를 대신하는 시대다. 딸들이 유튜브 영상으로 요리를 배우는 것처럼 나도 달인들의 영상을 따라 해볼 참이었다. 막상 도토리를 갈아주는 방앗간이 없었다. 먼 변두리 재래시장에서 겨우 한 곳을 찾았더니 분쇄하는 데만 8천 원이라 했다. "3천 원이면 한 모를 살 수 있구만. 묵이 거기 거기지." 떨떠름한 남편의 말처럼 ‘엄마표 묵의 부활’이란 목표가 없었다면 수고와 투자비 대비 답이 안 나오는 일이었다. 영상은 자습서처럼 요약정리가 잘돼 도전 의지를 북돋웠다. 껍질 째 간 도토리의 떫은맛을 우려내는 몇 번의 물 갈기, 자루에 담아 치대며 녹말 물 걸러내기, 앙금을 가라앉히는 일 등, 간단명료한 설명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1박 2일의 고투 끝에 마침내 도토리의 정수, 하얀 앙금과 마주했다. 허기진 조상들의 배를 채워주던 고마운 녹말을 사금을 바라보듯 한참을 들여다봤다. 앙금 가루와 물은 1:6 또는 1:7이 적당하다는데 물에 가라앉은 상태라 대충 감으로 물 대중했다. 마지막 관문이자 가장 중요한 젓는 일은 남편이 맡았다. 알아서 한다며 내 일이나 하라고 큰소리치던 남편이 30분을 넘기자 힘들어했다. 전통음식은 정성이 맛을 좌우한다. 하지만 시간과 힘이 너무 많이 들어 이제 공장 기계가 찍어내듯 만든다. 경제성에 맞춰 속성으로 제조되는 먹거리들이 정성으로 빚어낸 어머니들의 손맛을 어찌 낼 수 있으랴. 40분이 넘었다며 남편이 묵 솥을 베란다로 옮겨 버린다. '좀 더 젓지'란 말을 삼키며 사각 통에 묵 죽을 부어 식힌다. 몇 집 나눌 만큼 양은 많다.
마침내 사각형의 도토리묵이 모양을 드러냈다. 뭉클거리는 감촉이 이미 떨어트려 시험해 볼 형세가 아니다. 엄마처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칼로 잘라본다. 아니다, 탄력도 결도. 밀도가 덜 촘촘하다. 덜 끓였거나 열이 골고루 퍼지는 짬, 뜸이 덜 든 것 같다. 그 긴 시간과 수고를 들였는데 10분만 더 저을걸. "먹을 만 하구만" 양념장 맛으로 겨우 먹을 만은 하지만 시판 묵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래도 남편은 막걸리를 따르며 분위기를 잡는다. 하긴 음식이 어디 맛으로만 먹던가.
"단번에 엄마의 수십 년 경험과 지혜를 따를 수는 없지. 내년에도 도토리는 열릴 테니까 다시 시도해 봅시다." 아무래도 내 묵 만들기 도전은 수년이 지나도 쉬 끝나지 않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