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15/200319]한옥집 툇마루 예찬
고향집 본채를 고치면서 꼭 만들고 싶었던 게 ‘마루’였다. 특히 툇마루에 필feel이 꽂힌 건은 한옥집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부속시설이라는 오랜 믿음 때문이었다. 유제(이웃) 사람들이 마실(나들이)을 올 때면 어른들이 툇마루에 앉아 소통하던 장면들이 맨먼저 떠오른다. 또한 거렁뱅이 동냥아치들도 많았던 소싯적에 많이 본 풍경이지만, 할머니는 그들을 물리치지 않고 툇마루에서 맞이하여, 개다리소반에 반찬 한두 가지로 끼니도 챙겨주었다. 말하자면 툇마루는 ‘집으로 올라가는 첫 단계’인 셈인데,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아주 쓸모 있는 마루가 어느 사이엔가 농촌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마루 위 실겅(선반)에는 맛있는 군입거리들이 담긴 대나무궤짝도 있었다. 정월 대보름날 동산에 둥실 떠오르는 달을 마루에 앉아 온식구들이 바라보면서 한 해의 풍요와 식구들의 소원을 빌기도 했고, 아버지 친구들이 찾아오시면 농주를 기울이기도 했던 마루를, 기어코 만든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어제는 그 툇마루의 역할을 톡톡히 한 날로 오랫동안 기억이 될 것이다. 뒷산 저수지에 일주일 전에 쳐놓은 새우망을 건져올리니 겨우내 살이 제법 통통히 오른 새우들이 활개를 치고 있어 탄성을 질렀다. 민물새우탕을 먹어본 분들은 아시리라. 그 맛이 얼마나 개운하고 시원하고 깔끔한지. 요즘은 보기조차 힘든, 1급수에만 산다는 민물새우. 그 새우로 젓을 담근 게 토하젓일 것이나, 새우의 종류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지난 가을 임실장에서 민물새우를 파는 할머니, 복지개에 담아 깎아서 파는 데 1만원이라고 했다. 그 시세로 하자면, 오늘 잡은 게 족히 10만원은 되겠다. 말하자면 횡재를 한 것이렷다.
마침맞게 친정에 온 여동생이 큰 무를 설겅설겅 크게 썰고 청양고추도 넣어 매운탕을 끓였다. 어디 그뿐인가. 셰프에 진배없는 동생은 곧바로 뒷밭 언덕에서 쑥을 한 소쿠리 캐와 쑥전(부침개)를 부쳤다. 오후 3시. 자, 그럼. 그 다음에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즉시 동네 곳곳에서 일하는, 조금은 젊은 내 또래 사람들을 콜하기 시작했다. 대봉시 농약을 하다 달려온 동네형님과 친구, 최근 700여평의 대나무밭을 정리하여 맷돌호박 심으려 준비하는 꾀복쟁이 친구와 그의 처남, 지난해 사귄 내 자연공부의 선생님인 ‘속세자연인’ 친구, 그리고 마침 우리집을 지나가는 일가 아저씨와 이웃집 팔순 아줌마. 보기 드문, 맛보기조차 힘든 민물새우탕에 모두 눈을 반짝였다. 모두 모두 ‘툇마루’에 앉혀서 말이다. 한번 맛보더니 탄복을 한다. 거기에 막 부쳐낸 쑥전이라니. 어디에서 이런 고급 안주를 맛볼 것인가.
막걸리와 소줏잔이 오고갈 것은 당연지사. 아아-. 툇마루 만들겠다는 나의 오랜 소원을 이제야 제대로 푼 것이다. 대문을 왜 닫아놓겠는가. 농촌은 대문을 닫아놓으면 안될 일이다. 행인을 불러댄 것도 잘한 일이다. 예전에 들판 논두렁에 앉아 새거리(새참)나 점심을 먹을 때, 모르는 행인들조차 마구마구 극구 불러서 들밥을, 막걸리 한잔을 먹이던 우리 부모 생각을 하니 기분이 점점 업up이 되었다. 이렇게 음식 한 가지라도 남의 입에 넣어주는 것이 바로 적선積善이 아니겠는가. 아니, 적선이라기보다 이 분위기가 너무 오붓하고 재미가 절로 나지 않은가. 물론 매운탕을 끓이고 부침개를 부친 동생의 ‘가상한’ 노오력 덕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모두가 또 ‘봄’을 준비하려 ‘순식간’에 떠나간 툇마루를 나는 걸레로 훔친다. 마루를 닦을 때마다 나는 때때로 제법 경건한 마음을 갖기도 한다. 언젠가 쓴 ‘쇄소응대灑掃應對’라는 단어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집안을 쓸고 닦고, 부모가 부르거나 손님이 오면 즉각즉각 대응하는 일이야말로 ‘실종된’ 가정교육의 핵심이 아니던가. 이제 또 누가 이 툇마루에 앉을 것인가, 즐거운 상상을 한다. 아, 그래. 50년 동안 막역한 친구를 오라고 해야겠다. 이 마루에서 소박한 밥상을 놓고 반주飯酒를 하면 더욱 좋겠지. 상을 물리고 우리는 수담手談(바둑)을 나눌 것이다. ‘말없는 대화’ 속에 우정도 깊어가리라. ‘19로路의 미학美學’을 즐길 생각만 해도 황홀해진다. 아무리 AI(인공지능)가 이세돌와 중국의 쿠제를 이겼다지만, 어찌 기계와 사람이 같을 수 있겠는가. 그 세상은 결코 ‘좋은 세상’ 같지 않다. 나는 오프라인이 좋다. 아날로그가 좋다. 동산에 달이 떠오르면 시조 한 수도 읊조리리라.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떠오르니 그 더욱 좋구나’ 어쩌고하며. 여름날엔 툇마루에서 시원하게 잠도 청할 것이다(그것만은 모기 때문에 곤란하겠다. 좁은 마루에 모기장을 칠 수도 없겠고).
한옥집엔 마루가 ‘필수必須 부속물’이라는 것만 기억해두자. 마루가 있어야 소통이 되고, 교감이 이뤄어진다는 것을. 나는 남향의 사랑채에도 쪽마루를 낼 것이다. 그곳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무수한 인문교양서들을 읽고, 개똥철학이든 뭐든 성찰을 하고 또 성찰을 할 것이다. 마루야, 고맙다. 사람들을 끌어주고, 나를 이렇게 한껏 고양시켜주어서.
첫댓글 옛추억을 헤집는 글에 탄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