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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한국 최초의 의료 선교사
알렌(H. N. Allen)의 일기
1. 알렌의 일기(槪要)를 통하여 살펴 본 그의 생애(略史)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 4. 23 ∼1932. 12. 11.)은 구한말 미국의 선교사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주한 외교관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자명으로 안련(安連).
오하이오주(州) 델라웨어 출생한 그는 1881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신학부를 거쳐 1883년 마이
애미 의과대학(의학박사)을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1883년 5월 17일) 동급생이었던 메신저(Frances
Ann Messenger)와 결혼하였다.
북장로교 외국 선교부 의료선교사로서 중국 상하이(上海, 8월 20일 출발, 10월 11일 도착)에 도착한 그는
그 해 10월 15일 남경에서 의료업을 개업하여 어학 공부를 하였으나 1884년 1월 상해로 돌아왔다.
그 해 알렌은 출산(7월 10일)한 아내를 상해에 남겨 두고 부산을 거쳐(9월 14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는데
이 날이 9월 29일(토) 이었다.
주한 미국공사관 소속 의사로 있으면서,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12.4.)때 부상당한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왕실의사(侍醫) 겸 고종황제의 정치고문이 되었다.
1885년 1월 22일 대리공사였던 포크를 통하여 병원 설치안을 제출, 2월 20일 승인을 받아 갑신정변에서
참살을 당한 홍영식의 집을 수리하여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하였는 데, 4월 9일 개업하였다.
4월 26일 고종은 이 병원을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고, 20여명의 관리와 하인을 배치하였
으며 이 한 해 동안 스크랜톤(감리교)과 헤론(장로교)의 도움으로 1만 여명을 치료하였는다.
장티푸스, 천연두, 이질, 폐결핵, 매독, 나병등의 악질성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1885년 8월 5일 기녀(妓女, Dancing Girl) 5명이 첫 여자 의학생이 되었는 데, 그 이후 동료(언더우드와 헤
론)들과 적대감을 가져가면서 추진된 의학교(조선 왕실 병원 제중원 부속 의학교, Medical and Scientific
School)가 개교한 것은 1886년 3월 29일이었다.
선교사로서 가장 갈등이 심하였던 시기는 1886년 가을에서 1887년 9월까지였다.
헤론과의 관계 악화로 선교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된 알렌은 서울을 떠날 결심도 하게 되지만 선교
본부에서는 거절하게 된다(1886. 10. 10).
그러나 알렌은 오히려 정부로부터는 참판의 벼슬을 가지게 되었고(10월 25일), 술에 빠져있던 포크 공사
가 조선을 떠남으로 알렌은 국왕을 더 가까이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1887년 9월 이후 외교관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887년 참찬관(參贊官)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의 고문으로 도미(渡美)하게 된 알렌
은, 독립국인 대한제국(大韓帝國)에 대한 청(淸)나라의 불법적인 간섭을 미(美) 국무성에 알리고, 1890년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다시 내한하여 7년 동안 외교활동을 하였으나 이 당시의 활동 내용은 <알
렌의 일기>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1897년 9월 13일 주한 미국 공사로 임명 이후 러·일 관계와 관련된 외교적인 기록(1897. 9. 14. - 1898. 7.
27.)과 시베리아를 경유한 세계 일주 여행 기록(1903. 6. 1.- 11. 20.)을 일기로 남겨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일기에서 알렌은 미국을 다녀온 후 친미당(親美黨)으로 독립, 독립 을 외치던 이완용이 친로
(親露) 행위와 친일파(親日派)로의 변신 내용을 기술하면서 결코 한국 정부의 공직을 갖지 말았어야 할
인물로 평가하였다(1897. 10. 14).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일기 중에는 자신의 음주 사실(1885. 8. 5./ 1903. 6.14.)과 흡연 사실(1888. 1. 13)
도 기록하였다.
결국 반일 친노 정책을 역설하던 알렌은 친일·반로정책을 고수하는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정책 마찰로,
외교관인 동시에 선교사로서 음으로 양으로 선교 사업을 돕기도 하였으나 결국 1905년 3월 해임되어, 그
해 6월 9일 귀국하였다(당시 나이 47세).
오하이오주 도레도에서 병원을 개업하였으며, 1932년 12월 11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일기에 나타난 시대적 상황과 그가 본 한국인
<알렌의 조선 체류기에서>
조선은 오늘날 선교 활동을 벌인 나라들 가운데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나라였다.
조선인들은 사실상 자신들만의 종교가 없었다.
유교는 섬기는 신이 없는 도덕 규범일 뿐이었고, 불교는 평판이 나빴다.
게다가 조선인들은 본래 매우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그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인도처럼 종교적 진리를 전파하거나 종교 단체를 조직하는 일을 방해하는 특권 계급이 없었기 때
문에 선교 활동의 길이 활짝 열려 있는 셈이었다.
알렌의 조선 체류기 에 나타난 그의 한국 경험은 신비롭다 못해 흥미로운 것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조선인의 순박한 모습과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 안팎의 실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의사에 눈에 비친 질병과 무지와 빈곤, 외교관의 눈에 비친 혼란과 부패함과 폐쇄성, 선교사의 눈에 비친
미신과 무기력과 나태함….
그러나 그는 긍정적이고 해학적인, 그리고 흥미롭게 당시의 시대상을 경치를 구경하듯 읽을 수 있도록
조선과 조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기에 나타난 당시 상황은 단순히 흥미로운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조선의 상황과 조선인의 생활 모습이 직접 그의 삶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난방시설도 없는 호텔 방에서 구두를 베개삼아 자야 했고, 가족을 데리러 상해로 가는 배에는 거의 모든
남자가 정부(情婦)를 대동(매춘부도 동승)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품행은 충격적이었다(1884. 10. 11).
갑신정변은 알렌이 조선 정부(왕)로부터 신임을 받게 되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민영익의 치료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일기(1884. 12. 5.)에 기록한 그는 대체로 한방 치료를 인정하지 아
니하였으며(85. 1. 11.) 상대방이 의문을 가질 때는 비교적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85. 2. 21.).
특히 조선인들의 비위생적인 모습이나 지도적인 인물에 대한 혹평도 빠뜨리지 않았다.
12명으로 구성된 초대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 일행을 인솔하고 워싱턴을 향하는 배에서 쓰여진 일기 중에
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심한 악평들을 하고 있다(1987. 12. 26).
조선 사절단은 1등석 5장만 가지고 있었지만 나머지 5명은 2,3등 선실에 모여 식사도 같이 하면서 지냈
는 데, 어찌나 더러운지 그들이 풍기는 악취를 참을 수 없었다. …
두 사람의 조선인 강진희는 지분거리기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이상재도 더러운 사람인 데, 이 두 사람은
그들의 객실에서 박공사와 함께 식사했다. …
박공사는 사절단 일행 중 가장 나약하고 바보 천치같은 인물이었다.
조선 정부가 정식으로 임명한 번역관 이채연은 영어 한 마디 할 줄 몰랐다.
참찬관 이완용과 서기관 이하영은 그래도 전반적으로 조선 사절단의 나쁜 인상을 상쇄, 보충해 주고 있
다. …
그들의 몸에서 계속 고리타분한 똥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그들은 선실에서 끊임 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담배 냄새에다 목욕하지 않은 고린 체취, 똥 냄새, 오줌 지린 내, 고약한 냄새가 나는 조선 음식
등이 섞여 온통 선실 안은 악취로 가득했다.
배 위에서 있었던 사건이지만 어쩌면 알렌이 느낀 조선과 조선인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한 것인지도 모른
다.
일기 가운데에는 포크 대리 공사의 집에 도둑이 들었던 일(1885.2. 12.),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싸움
질한 이야기까지 빠뜨리지 않고 있다(1885. 3. 27.).
3. 선교사 알렌과 그의 선교
1) 선교사로서의 알렌
알렌은 외교관이기 이전에 선교사였다.
당시 한국 상황으로 보아 부득이 주한 미국 공사관부의 무급 의사로 근무하였을 뿐 그는 분명히 미국 장
로회가 파송한 의료선교사였다.
갑신정변의 틈바구니 속에서 민영익을 치료하는 것을 계기로 삼아, 당시의 국법으로는 금교(禁敎) 조치
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빈번하게 접촉함으로 선교의 길을 열 수 있는 민첩성을 보였다.
그래서 헤론, 스크랜톤, 앨러스, 호튼 등이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는 자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사의 예리한 현장 감각과 판단력을 지녔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서 조심성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
침이 없다.
떠벌이식 선교는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이다.
당시의 정황으로서 알렌이 가졌던 자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뒤따라 들어오
는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길(입국할 수 있는 길 뿐 아니라)을 열어 주었고, 그가 시작한 광혜원과 제중원
의학교(1886. 3.29.)는 초기 선교사들이 의료 선교와 학원 선교로 선교의 문을 열게 된 시초가 되었던 것
임을 변명할 수 없다.
알렌은 의사이며 선교사였다.
그래서 그는 매일 기도하면서 경건 생활(religious observances, 목회가 아님)에 힘썼고(1884.11.12), 추
수 감사절 예배를 집전하였다(11.27).
그리고 최초의 공식적인 주일 예배가 알렌의 집에서 드려졌다.
참석한 사람은 바로 앞날 도착한 헤론부부와 스크랜튼 부인의 언니, 그리고 알렌과 그 아내였다(1885. 6.
21.).
김판서댁의 아들을 치료하였으나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아주 정성껏 그를 위해 기도했
다. …
내 기도는 응답을 받아 …환자는 차도가 좋아져서 소변도 잘 나온다는 것이다 (1885. 3. 22.).
그는 역시 의사였으나 선교사였다.
밖으로는 의사로서 혹은 외교관으로의 직무에 충실한 그였으나 사실은 먼 앞날을 바라볼 때 그는 선교사
로서의 사역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가 정력을 다함으로 후배 선교사들을 위한 사역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곧 조선
선교를 용이하게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2) 선교사들과의 갈등과 고통
오늘날도 선교지 마다 선교사들끼리 갈등이 없는 곳이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알렌 역시 선교사로서 선교사들과의 불화와 갈등을 통하여 시련을 겪게 된 대표적인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일기를 통하여 살펴본다.
언더우드씨는 아주 빈틈이 없는 사람이고 사무적이고 민첩한 사람인 것 같아 보였다.
이 때문에 그는 오히려 자만에 빠지고 성급한 인간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이 성격으로 장차 우리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1885. 4. 6.)
국왕은 오늘 나에게 말 두 마리를 하사했다.
이 말들은 병원 제중원에서 쓰일 말들인데 나에게 보내진 것이다.
지금 병원 일을 도와주고 있으며 매사에 추악한 방법으로 질투심을 보이고 있는 스크랜턴 박사가 국왕이
내린 말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자기가 가지겠다고 나섰다.(1885. 6. 17.)
우리는 헤론 박사와 아주 놀랄만하고도 짜증이 나는 의견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 병원 일을 도울 필요가 없을 때에는 집에 머물러 있든지 어학공부를 하고 있으라는 등 아주
친절한 말씨로 충고했을 때 언쟁이 발생한 것이다. …
이러한 감정 대립이 헤론의 가장 완고한 행동을 촉발시키고 말았다.
이로 인해 나는 드디어 선교부를 떠나겠다고 사임 의사를 선언하게 되었고, 헤론 부인은 이 기회를 놓칠
세라 내가 선교 사업을 맡을 적임자가 아니라고 비난하면서…선교부 사임을 구실로 이용, 돈벌이를 나서
려 한다고…(1885. 9.1.)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격상 인물평을 했다.
즉, 언더우드는 위선자요 수다장이이며, 헤론은 잘 토라지는 샘꾼이라 평했다.(1886. 3. 29.)
헤론은 연회석상에서 비기독교적 행동을 서슴치 아니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헤론과 나는 헤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886. 9. 5.)
10월 10일의 일기에도 헤론과의 관계로 인하여 선교사들로부터 따돌림 받는 자신의 입장과 헤론 부인의
거짓과 허위 편지 작성, 여가를 즐기는 언더우드, 헤론의 나태함 등을 같은 방법으로 힐난하고 있는 일기
를 썼다.
선교사들간의 관계 뿐 아니라 민영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치료받은 민영익이 자신을 친형으로 모시려한다는 제안과 그의 성격이 급하다는 글을 썼던(1885. 1. 27.)
알렌은 민영익을 어른 애기 로 표현하며, 비겁자,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할 자, 이기적인 인간으로 정부
의 요직을 독차지한 자라는 독설을 퍼붓기도 하였다(1885. 3. 11.).
묄렌도르프나 영국인 허치슨, 파커 공사, 그 외 여러 한국인들도 있으나, 선교 정책으로 인한 갈등 부분
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이 세종(李空)
이세종은 1880년 전라남도 화순군 중촌 등광리에서 삼형제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세인으로부터 도암의 성자로 불리는 이세종은 본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머리가 비상하고 영리했다고 한다. 집에서 부모에게 매 한번 맞지 않고 자라날 만큼 허물이 없었다. 정직하고 충직해서 틈틈이 짚신을 삼아서 형님께 드리고 일 년 품삯을 형님께 양도하였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난리가 나서 다 못살아도 이세종만은 살 것이라고 칭찬했다.
장성해서는 형님들을 가까이 모시고 도와드렸는데 형님들의 가산이 차츰 늘어나 살만큼 되자 그제야 결혼을 생각했다. 나이 30세에 14살의 시골 처녀와 결혼하였다. 살림을 차린 후 지게를 맞추고
“이 지게가 다 닳도록 일해서 그간에 살림을 이루리라”
가난에 한이 맺힌 그는 전답과 집을 마련해 남보란 듯이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주위에 인정을 두지 않고, 자린고비로 살며 악착같이 재산만 그러모았다. 마흔 살이 넘자 그는 어느새 100마지기에 이르는 전답을 지녀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열여섯 살이나 어린 아내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자식을 얻기 위해 무당이 잡아준 터에 산당을 지었다. 산당을 짓던 목수는 기독교 신자였다. 목수는 일하면서 찬송가를 불렀고, 쉬는 시간엔 성경을 보았다. 이를 지켜보던 이 세종은 어느 날 그에게 성경을 빌렸다. 그러나 그는 까막눈이었다. 마을 사랑방에 가 글자를 아는 사람에게 성경 첫줄을 읽어달라고 했다. 창세기 1장 1절이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였다. 그 한 구절을 새기며 개천 산을 오르던 이세종의 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이 펼쳐졌다. 호수와 산과 나무와 풀…. 그 모든 것이 나와 다름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의 형제요, 천지가 바로 우리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춤을 추었다. 펄쩍펄쩍 뛰는 폼이 영락없이 미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직 ‘나’와 ‘내 것’에만 집착해 눈동자를 덮던 안개가 걷혀버려 눈이 훤해진 개안과 개천의 기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 기쁨으로 밤을 밝혀 글을 깨친 그는 성경의 정신을 꿰뚫었다. 고리대금업자처럼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챙겨온 그는 그 자리에서 모든 빚 문서를 태워버렸고, 재산을 팔아 걸인과 빈자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영원히 사는 것’을 알게 된 그에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자식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운 이세종은 그 뒤 빌공(空)자를 써서 스스로를 이공이라고 했다. 그가 철저히 부인한 것은 이름만이 아니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탐할 수 있는 재산욕, 명예욕은 물론 식욕, 색욕, 수면욕도 철저히 극복해 초월했다. 그때부터 아내를 누이로 대했고, 죽는 순간까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 결혼한 몸으로서 인도의 간디보다 앞선 금욕의 선언이었고, 그보다 더욱더 철저히 이를 지켰다.
이공이 개안 후 가장 변한 것은 자연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피는 생명”이라며 일체의 육식을 하지 않았다. 독에 빠진 쥐를 건져주고, 자기를 문 지네를 풀숲에 놓아주었다. 그는 혹여 개미를 밟을까봐 길을 걸을 때도 조심스러워했고, 나무와 풀이 꺾인 것을 보고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런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이공은 말했다. “세상엔 버릴 것이 없지라. 잡초만이 아니라 사람도 그렇지라우. 버린 돌이 집 초석이 되곤 한당께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째서 그것을 모른다요.” 그는 배부르기를 구하지 아니하였다. 그에게는 금식이 더 좋은 식사였다. 성경을 들고 있으면 해가 뜨는지 해가 지는 지도 몰랐다. 밤이나 낮이나 분간이 없었다. 어쩌다 병이 나면 곡기를 끊었다. 병중에는 죽이나 숭늉이나 미음도 먹지 않았다. 평소에는 쑥 범벅이니 콩잎사귀 죽 같은 아주 거친 음식이 주였는데 병중에는 아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병석에서 일어나기까지 금식했다. 아파도 매양 약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죽고 싶다고 하지만 병이 나면 약을 쓰는데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약이다. 의의 약이다. 이 약을 쓰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 썩어도 썩지 않는 생명의 몸으로 부활한다. 몸은 아무 때 썩어도 썩는 것이니 그대로 버려두라.” 이세종은 오래 아프면 “이제 죽을 것이라” 하고 죽음을 기다렸고 회복되면 살려주신 것을 감사했다.
이세종의 가르침은 언제나 성경적이었다.
“남의 것으로 구제하면 남에게 손해 끼치는 일이다.”
“군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검박군자다. 모든 것을 검박하게 사는이요,
둘째는 혈식군자로서 절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기 노력으로써 애써먹는 이요, 셋째는 도덕군자다. 내가 사치한 옷을 입고 다니면 남들이 부러워서 빚을 내서라도 그 흉내를 내려할 것이 뻔한 일이니, 이는 내가 그 피 값을 빨아먹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참 군자는 사치한 옷을 입고 다니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겉보다 속을 아름답게 단장해야 한다. 속이 진실해야 한다.”
“쓸데없이 칭찬하는 자도 마귀요, 칭찬 받는 자도 마귀이다.”
“믿어야 참이 오지, 안 믿으면 거짓이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한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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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종은 죽음이 가까워오자 석 달 동안 곡기를 끊었다. 화학산 골짜기에 찾아온 다섯 명의 제자들이 마른 장작처럼 말라 거지 옷을 입고 있는 그를 둘러메자 그는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고 춤을 추듯 노래하며 눈을 감았다. 큰 재산가였던 그가 죽을 때 남긴 것은 땅 한 평은커녕 옷 한 벌도 없었다. 그의 유산은 거대한 땅덩어리나 재산이 아니라 오직 행동으로만 전도하라 했던 그를 따랐던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성녀 수락기댁, 소록도를 세운 나환자들의 아버지 최흥종 목사, 걸인들의 아버지 강순명 목사 등 수많은 제자들의 ‘삶’ 속에서만 살아서 커다란 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분의 삶을 뒤를 따르는 제자들과 그분의 삶을 돌아보고 연구하며 삶에서 적용해보며 살아가려는 우리들의 신앙 양심이 가장 커다란 유산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의 삶을 돌아보며 나 자신만을 살아왔던 세월들이 너무나 비참하고 쓸데없던 세월임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 정말 먼저 신앙의 본을 보이시고, 길을 알려주신 성인들의 삶을 통해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해야 할 일들을 깨달아 가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복된 길임을 알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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