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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91
3월6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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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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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jBLm-7Xe6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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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괜찮다, 다 괜찮다!>
탕자의 비유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 오늘 우리에게 더없이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무시하고 막나가던 둘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리 개의치 않습니다. 그저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걸로 만사 OK였습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밥먹듯이 일상적으로 소소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그뿐이 아니라 가끔씩 묵직한 죄들도 서슴치 않고 짓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탕자의 비유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복음은 반드시 기쁜 소식으로 전해져야 마땅합니다. 우리 가톨릭 신앙은 지극히 낙관적인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죄인이어도 하느님 눈에는 그저 안쓰럽고 딱해보입니다. 측은해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사랑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존재의 원천이요 근간입니다. 비록 우리가 합당치 않은 존재이지만 언젠가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서 그분께서 주관하시는 천상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 잔치는 영원할 것입니다.
언젠가 착하기만 하지 의지가 약한 한 형제가 마땅히 갈 곳 없다며 취직자리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그 형제를 돼지 치는 농장에 소개시켜드렸습니다. 월급도 그만하면 괜찮고, 시골이라 돈 쓸 일도 없고, 금방 돈 모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웬걸, 사흘 만에 전화가 왔습니다.“신부님, 저 여기서 도저히 일 못하겠어요. 냄새 때문에 돌아버리겠어요. ”제발 조금만 더 견뎌보라는 말에 그 형제는 제게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신부님이 여기 와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일해보고, 그런 말 하라구요!”
그래서 저는 농장을 한번 찾아가봤습니다. 막상 가보니 돼지 치는 농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더군요. 그 형제에게 주로 맡겨진 일은 하루 온 종일 돼지들이 생산해내는 막대한 배설물들을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잠깐 머물렀는데도 강력한 냄새에 금방 정신이 어질어질해졌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작은아들 역시 지니고 있던 막대한 돈을 다 탕진해버리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돼지 치는 농장에 취직했습니다. 작은아들이 돼지 치는 농장에서 주로 한 일 역시 매일 쏟아져나오는 엄청난 양의 배설물들을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도높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도 주어지지 않았을뿐더러, 기본적인 끼니조차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작은아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립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굶어죽겠구나. 정말 염치없고 면목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께 돌아가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작은아들의 몰골은 가관도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씻기나 했겠습니까? 땀 냄새, 돼지 배설물 냄새, 별의 별 냄새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신발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맨발입니다. 머리카락은 산발에다 떡진 머리입니다.
옷은 갈아입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기억 못합니다. 거지 중의 상거지꼴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사람마다 다들 코를 움켜쥐고 멀찌감치 피해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다들 투덜거렸습니다. “저게 사람이냐, 짐승이냐?”
아버지 집 가까이 이르러서는 따가운 눈총들이 더 심했겠지요. “야, 저게 누구냐? 천하에 몹쓸 작은아들 아냐? 꼴좋다! 불효자식 같으니라구! 빈대도 낯짝이 있지. 그러고도 지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구?” 다들 한 목소리로 둘째 아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쌍욕을 해댔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유일하게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왜 그랬냐?’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며 다그치지도 않습니다. ‘돈 얼마 남았냐?’며 호주머니를 뒤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말없이 있는 힘을 다해 작은아들을 자신의 품에 끌어 앉았습니다.
한 손으로는 ‘내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치지 않겠노라!’며 작은아들을 꼭 붙들었습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괜찮다, 다 괜찮다! 너만 살아 돌아왔으면 다 괜찮다!’며 토닥토닥 작은아들의 등을 두드렸습니다. 보십시오. 자비하신 우리 하느님의 얼굴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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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W5uoKnwtD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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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앙 3단계>
오늘 복음은 ‘돌아온 탕자’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대상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시는 것을 보고 투덜거립니다. 그 이유는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는데 아우에게는 암소까지 잡아주는 아버지가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큰아들이 기쁘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의 것이 모두 자신의 것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분명 큰아들과 작은아들에게 공평하게 아버지의 가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아버지께 의무를 다해야만 그 유산이 자신에게 오는 줄 착각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설득할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이 3단계로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바리사이-율법학자적인 사람들로서 그들은 의무를 다해야만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처럼 하지 않는 이들을 비판합니다. 술과 담배도 하지 않고 십일조도 철저히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에서 멀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처럼 열심히 의무를 하지 않는 타 종교들을 비판합니다.
정신의학 전문의사인 이무석 교수의 책에 보면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믿었던 첫째 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자신이 쌍꺼풀이 없는 것이 아버지가 동생을 더 사랑하는 이유라 믿었습니다. 아버지께 잘 보이려고 공부도 잘하고 사회에서도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 잘하려고만 합니다. 이 열등감에 남편도 힘들게 만들고 눈이 작은 것 때문에 남편이 자신을 떠날 것이란 두려움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부모는 조금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녀를 모두 사랑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무언가 잘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교회에 당신 살과 피, 그리고 죄의 용서 권한을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자비를 너무 과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만 보면 된다고 믿고 의무는 게을리하는 단계입니다. 아버지 유산을 받아 흥청망청 사는 단계입니다. 술에 취하고 게으르게 생활합니다. 실제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두었다는 만족감으로 세상에서의 삶을 더 중시하는 신앙인이면서 죄인인 상태가 됩니다.
전에 소개해 드렸던 미자하와 임금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미자하는 임금이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줄 알고 임금의 마차를 마음대로 사용하고 자신이 먹던 복숭아를 임금이 먹으라고 내밀었습니다.
아무리 사랑을 받더라도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녀 사이에 지켜져야 하는 선이 있습니다. 그 선까지 무시하며 회개도 없이 고해성사를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남용하는 상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회개한 탕자의 단계입니다. 무엇이든 다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에 너무 감격하여 자신도 뭐라도 하려고 하는 단계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는 징집되어 가는 아들에게 새벽 5시에 꼭 무릎 꿇고 엄마가 기도하고 있겠다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께 고마우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날도 새벽 동이 터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아, 어머니가 기도할 시간이구나!’
그는 처음으로 어머니처럼 무릎을 꿇어보았습니다. 그때 총성이 울리고 총알이 머리 위로 날아갔습니다. 어머니 기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기도에 나도 반응을 할 때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가 바로 우리가 하느님께 해 드려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가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우리는 이미 하느님 자비를 굳건히 믿는 두 번째 단계에 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 속함으로써 첫 번째 단계는 뛰어넘은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의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으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적어도 그분 앞에서 무릎을 꿇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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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1-3.11-32: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이 두 아들은 두 백성을 의미한다.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이 큰아들, 어리석은 우상숭배를 하는 다른 민족은 작은 아들이다. 율법에 대한 이해가 큰아들과 작은아들로 구분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좇기로 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절)고 한다. 아버지에게서 떠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떠났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쫓겨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음탕한 욕정의 세계에 사는 것은 어둠의 세계에 사는 것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다. 작은아들은 이렇게 아버지를 떠난 삶을 살았다.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식량의 기근이 아니라, 선행과 덕행의 기근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그가 곤궁에 허덕이고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것은, 방탕한 쾌락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릴 것이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15절) 아버지에게 의탁하지 않고 낯선 사람에게 자신을 넘기는 사람은 가혹한 심판자에게 당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 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실감을 하게 된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17절) 그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아들이라는 영예로운 자격을 잃지 않았다. 성령께서는 죄를 지은 이에게서도 떠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21절)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날마다 드리는 기도에서 교회는 작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음을 증언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그렇게 상처의 흔적 하나 남지 않도록 말끔하게 고쳐 준 것이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절)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절) 되찾은 작은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 율법의 백성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안에서 울리는 다윗의 수금 소리와 시편을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수많은 사람이 어울려 춤추는 것을 본다. 그러나 들어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생 즉, 다른 민족 형제들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아들이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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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부모님은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어릴 적 학교에서 사고 치고 걱정을 한가득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님의 생각과 다른 결정을 하여 실망시켰을 때에도 부모님은 그런 저를 지켜봐 주셨습니다. 어쩌면 무엇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부모님은 늘 그러하듯 묵묵히 저를 바라봐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님은 자식을 기다려 주십니다. 자식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도 아들을 그렇게 기다려 줍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요구하는 작은아들에게 아무런 꾸중이나 충고도 하지 않고, 떠나가는 아들을 바라봅니다. 떠나간 아들을 걱정하며 마음속으로 잘 지내기를 바라며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의 끝, 아들이 거지꼴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괘씸한 마음이 아닌 가엾은 마음으로 달려가 안아 줍니다.
더욱이 아버지는 큰아들도 기다려 줍니다. 큰아들은 아우와 달리 아버지를 섬기며 순종하고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자기 몫으로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아 서운해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약속합니다.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큰아들을 이해합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의 차이는 기다림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가, 있지 않은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들들은 기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생각에만 집중하여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고, 기다려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기다립니다. 자비로움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와 맞지 않고 내가 이해할 수도 없지만, 조금만 기다려 보는 지혜를 가질 때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처럼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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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근대사회를 여는 3가지 혁명적인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하늘에 대한 것인데 코페르니쿠스의 ‘천제의 회전에 관하여’입니다. 지구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지구는 아름답지만 외로운 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번째는 땅에 대한 것인데 콜럼버스의 ‘신대륙의 발견’입니다. 유럽이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지구촌의 삶이 가능해졌습니다. 신대륙의 발견은 유럽사회를 변화시켰고, 신대륙의 자원은 유럽 중심의 산업혁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인간에 대한 것인데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입니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은 인체 내부의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질병을 연구하고 치료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직접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질병에 접근하는 접근방법론을 마련했습니다. 의학과 과학의 발전은 질병의 치료와 건강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과학과 이성은 근대와 현대를 거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많은 법칙들이 발견되었고, 기계를 통하여 더 많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과학과 이성만으로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없음을 우리는 2번의 세계대전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문명의 이기는 인류를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로 만드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개발과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은 자원의 고갈과 자연의 파괴라는 희생을 요구하였습니다. 지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별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별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지구는 여전히 우주의 중심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신대륙의 발견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로 가는 존재입니다. 의학과 과학만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근대사회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가 하느님께로 삶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의 기쁨, 찬미 받으소서. 모든 형제들’을 관통하는 교황님의 이야기는 ‘사랑, 연대, 협력’입니다. 교황님은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다섯 가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권위의식과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상처’를 덮으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상처는 치료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대화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지금은 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넷째는 ‘돌을 빵으로’ 만들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질과 자본은 블랙홀이 되어서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물질과 자본으로 쌓은 탑은 제2의 바벨탑이 되어서 언젠가는 무너지게 됩니다.
다섯째는 ‘교회의 전통과 유산’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가정, 말씀이 살아있는 가정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어떤 시련과 고통이 찾아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신앙이 없는 과학과 이성은 목적지를 잃어버린 배와 같습니다. 신앙이 없는 물질과 자본은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할 뿐입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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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주요 인물은 아버지와 두 아들 곧 큰아들과 작은아들입니다. 이 비유는 아버지의 자비를 강조합니다.
아버지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집을 떠난 작은아들을 기다리며, 또 큰아들의 불평을 들어 주고 그를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드러내고 하느님의 특징적인 모습을 요약해서 전하기에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습니다.
이 비유를 읽으며 작은아들의 모습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 봅니다.
죄를 짓고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방종한 생활을 한 작은아들이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발길을 돌리는 모습은,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회개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돌아오는 이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큰아들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 다른 모습입니다. 착실하게 아버지의 명을 따라 살았던 큰아들은 작은아들의 귀환을, 회개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큰아들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공동체를 지키며 열심히 활동하지만 언제나 그 자체가 기쁨이 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무거운 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회개한 이를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큰아들에게는 불평과 불만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는 아버지가 ‘늘 함께 있다.’라고 한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두 아들 가운데 어느 모습에 더 가깝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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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미카 예언자는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해 알리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받아 주시고 그들과 어울리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운 행위를 비판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죄의 용서에 대해 잘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시며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나라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이 크더라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큰아들의 태도입니다. 큰아들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며 의롭게 사는 신앙인을 상징합니다. 작은아들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죄악에 빠져 영적으로 죽은 신앙인을 상징합니다.
큰아들은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자만심을 가져 하느님께 되돌아오는 작은아들의 회개를 시기합니다. 큰아들은 죄인에게 철저한 징벌과 보속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는 의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그들은 이해타산을 앞세워 하느님을 섬기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탕자의 아버지’를 통해 죄인의 회개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작은아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자만심과 시기심에 빠져 죄인을 단죄하는 큰아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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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자기 것을 모두 챙겨 먼 고장으로 떠난 뒤 방종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합니다. 때마침 기근마저 들어 곤궁에 허덕이자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려고 되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아버지만이 자신을 거두어 주실 분임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그런 작은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올 때 아버지는 아직 멀리 있는 그를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가 이야기하듯 죄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용서를 청하자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모든 것을 되돌려 줍니다. 그리고 큰 잔치를 열어 줍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불평을 터트립니다.
종처럼 아버지를 섬긴 자신에게는 잔치를 열어 주지 않으면서, 작은아들에게만 잔치를 열어 주는 모습에 섭섭함을 표현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을 타이르며 돌아온 탕자인 작은아들을 보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가르칩니다.
이 비유 말씀은 작은아들들, 곧 세리들과 죄인들과 음식을 나누시는 예수님께 불평을 터트리던 큰아들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루카 15,1-2 참조)
그런데 오늘 복음은 그 큰아들이 아버지 말씀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큰아들과 같은 이들은 죄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음에 빠트리고 말 것입니다. 자신의 불만을 아버지에게 터트리며 그분을 죽음에 빠트린 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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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죽어서 눕힌 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아버지께 가는 길이기에 그토록 아름답습니다. 그것도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와 가리옷 유다가 다 같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반하고서 울음으로 통탄해 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돌아와 구원의 길을 가고 유다는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파멸의 길을 간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었듯이(창세 3,21) 아버지로부터 ‘옷과 반지와 신발’로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며,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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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도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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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15,21)
<탕자의 비유!>
집을 나갔던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많아 의기양양하게 살던 때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완전히 알거지가 되었을 때에 돌아옵니다. 완전한 바닥체험, 곧 십자가 체험을 하고서야 아버지가 생각났고, 아버지의 품이 그리워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이 마음을 구체적으로 실행합니다.
아버지는 알거지가 되어 돌아온 작은아들을 조건 없이 품어 안아주십니다.
바로 이 아버지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 아버지이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계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복음인 탕자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복음 중에 복음', '기쁜소식 중에 기쁜소식'입니다.
저는 이런 하느님 아버지가 너무 좋습니다. 저는 이런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작은아들'일 수 있고, 아들을 조건 없이 품어 안아주신 '아버지'일 수 있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투덜거리는 '큰 아들'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모습인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작은아들의 모습인가? 조건 없이 너를 품어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인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투덜거리는 큰 아들인가?
한번 각자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분,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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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와 너>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나와 너>
나의 것에
눈길이 머물면
나의 것만이
아니라
너의 것에도
눈길이 갈밖에
나의 것
너의 것
이러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면
나나 너는
있을 수 있을까
나나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나와 너를
이을 수 있을까
나의 것
사라져야
너의 것
사라지고
나와 너만
오롯이 남아
갈림 없이
하나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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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여름이 되면 수영할 일이 많았습니다. 여름 신앙학교, 복사단 캠프 등에서 꼭 수영해야 하는 계곡이나 수영장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제가 전혀 수영을 못한다는 것이었지요. 수영할 줄 모르니 물에 빠져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고, 그래서 물 자체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계곡이나 수영장에 가서 즐거울 수가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초등학생 때 잘 아는 선생님이 여름 휴가 때, 물에 빠져 돌아가시는 일을 겪고 나서는 (그 장례미사 때 복사를 섰었습니다) 더 물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성인이 된 지금도 가지고 있을까요?
지금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처럼 일부러 물 있는 곳을 피하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인이 되면서 수영을 배웠고, 지금은 남 못지않게 수영을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물에 대한 두려움이 이제는 물에 대한 즐거움을 바뀌었습니다.
두려움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두려운 생각과 이를 회피하려는 행동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없애는 유일한 무기는 나의 행동뿐입니다. 두려움이 있다면 이를 위한 나의 행동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행동을 우리는 ‘용기’라고 부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죄인이 회개하여 새 삶을 얻는 것을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이를 위해 되찾은 아들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보면, 아들의 자격이 당연히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만 봐도 충분합니다.
아버지가 생존해 계심에도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챙겼다는 것,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 거기에 이스라엘 사람이면서도 부정한 동물로 여겨졌던 돼지를 치고 있었다는 것(부정한 삶을 살고 있다는 뜻) 등은 아들의 자격을 유지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고 싶은 것은 어떤 죄를 지었는가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이런 죄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결과는 해피엔딩이었습니다. 아들이 믿고 있었던 사랑과 자비로 아들은 용서를 받고 즐거운 잔치를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복음 끝에 나오는 큰아들의 억울함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믿음과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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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되는 생각을 하십시오>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내용을 봤습니다.
당신이 동료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풀기 어려운 문제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당신이 “우리에게 도전해 볼 만한 과제가 주어진 것 같아.”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재미있고 신나는 일거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많은 시각을 갖게 됩니다.
수백 번 넘게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까를 고민하면서 여러 시각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어떻게 바라보든 자신에게 유익하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문제 자체를 바라보며 걱정하기보다, 도전해 볼 만한 과제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힘이 될 것이며, 우리의 삶 자체가 바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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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버지 사랑을 기억하라>
저는 램블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 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녀를 가슴에 묻습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 나의 허물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하시며 품어주시기에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분에게 우리는 항상 소중한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의 집 처지가 밖에 보다도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구지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단죄하기 전에 풍성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품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나 집안에 붙어있던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 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큰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구원은 율법의 준수나 인간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종처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종처럼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희망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죄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외면하는 이는 없습니다. 내가 떠나갈 뿐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 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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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평생과제>
-회개와 자비행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닮는 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새벽 성무일도시 계속된 시편136장1-26절 후렴입니다. 오늘 복음과 그대로 일치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신명기 32장11절 다음 구절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잘 드러냅니다.
“독수리가 제 새끼를 보호하듯이, 당신은 두 날개를 펴시어 그를 품어주시고, 주님의 날개로 그를 인도하시었도다."
입으로 짓는 악업을 불가에서는 구업口業이라 합니다. 참으로 입의 말로 짓는 죄는 얼마나 크고도 많은지요. 칫솔로 입을 닦을 때마다 ‘마음의 입’도 닦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어제는 수녀원에서 오전 내내 수녀님들에게 고백성사를 드렸고 오후 귀원해서는 수도형제들과 함께 매월 첫주 금요일에 있는 고백성사를 봤습니다.
새삼 회개하고 새롭게 살기를 다짐하는 평생성사인 고백성사와 성체성사인 미사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데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성사인지 깨닫습니다. 수녀원에서 고백성사때마다 가장 연로한 노수녀님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신부님, 강복만 주십시오.”
“고백성사는 안보고요?”
“저는 이 수녀원에서 90세로 가장 나이가 많습니다 지금도 매일 성경필사를 합니다. 죄지은 것이 생각안나요. 그냥 강복만 주세요.”
“좋습니다. 감사하며 기쁘게 사세요.”
아마 자비하신 아버지도 그렇게 대답하시리라 봅니다. 하여 고백성사때 마다 늘 강복만 받는 노수녀님입니다. 어제는 고백성사를 받은 후 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찾아 봤습니다.
“신부님, 모자는 거기 있는데요?”
“아뇨, 모자가 아니라 신부님께 드릴 만한 것이 없나 해서 찾아 봤어요.”
“신부님, 얼굴만 보는 것도 선물입니다.”
고백신부님의 청담淸談 또한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3월 기도지향중 마지막 대목도 생각납니다. 고백성사를 지칭하는 대목같습니다.
“하느님께 그의 교회에 자비하신 사제들을 보내주십사 기도합시다. ‘고문자(torturers)’들이 아닌 자비하신 사제들을!”
우리의 평생과제는 끊임없는 회개와 자비행을 통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께 우리를 대변하여 기도합니다.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당신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십니다. 당신께서 저희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바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은 아버지를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만납니다. ‘하느님의 깨끗하게 하는 진노(God,s cleansing wrath)’란 교황님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우리의 평생과제와 하느님의 평생소원이 일치를 이루는데 바로 하느님의 평생소원은 다음 성구에서 잘 드러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바로 오늘 주님은 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읽을 때 마다 새로운 감동으로 와닿은, 늘 샘솟는 영감을 주는 ‘순복음(pure Gospel)’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이보다 잘 드러내는 복음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예수님이 없었다면 어디서 이런 복음을 만날 수 있을런지요!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특징을, 자비하신 아버지의 리더십을 묵상해 봤습니다.
1.자비하신 하느님은 자녀들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고 끝까지 믿어주는 분이십니다. 걱정과 우려가 많았겠지만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작은 아들이 원하는 대로 가산을 분배해 주십니다.
2.자비하신 하느님은 동구밖 문밖에 서서 당신 자녀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는 날마다 눈물의 기도로 작은 아들의 귀환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잊어도 부모는 자식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늙어가면서 부모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합니다. 이런 사랑의 기도가 통했던 듯 합니다. 빈털터리 거지가 되자 제정신이 든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회상하며 회개합니다. 아들의 회개를 촉발시킨 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추억이었음을 봅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3.자비하신 하느님은 회개한 자녀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십니다. 결코 과거를 추궁하여 캐고 따지는 일이 없으며 오직 현재 회개한 자녀를 기뻐할 뿐입니다. 다음 돌아온 작은 아들의 귀환의 축하잔치가 하느님의 기쁨을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예수님이 아니곤 누가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런지요! 작은 아들이 상징하는 바 복음의 세리와 죄인들이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작은 아들같은 우리의 회개를 축하하여 날마다 미사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추락한 품위에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서 고귀한 품위를 회복한 작은 아들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미사은총이 우리를 끊임없는 회개로 하느님 자녀다운 품위의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대조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큰 아들이 상징하는 바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물론 우리일 수도 있습니다. 외관상 아버지의 ‘자녀다운 삶’인줄 알았는데 ‘종같은 삶’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아버지의 자비를 거의 몰랐던 큰 아들입니다. 몸은 가까이 있었지만 마음은 멀리 있었던 듯, 생각없이 영혼없이 살아던 듯 싶습니다. 바로 다음 큰 아들의 격분激憤한 반응에서 그의 내면이 그대로 폭로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이런 큰 아들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얼마나 격렬한 항의와 분노인지 자기 동생이라 하지 않고 당신의 저 아들이라 합니다. 정말 작은 아들은 물론 큰 아들 역시 회개의 대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회개가 어려운 이들은 이런 자칭 의롭다 생각하는 종교인들입니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도 있듯이 자기도 모르는 중에 죄를 짓고 세속화되어 살아가는 종교인들의 회개가 정말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4.자비하신 하느님은 결코 조건반사적 감정적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내면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 무조건 집니다. 화는 자기를 파괴하는 폭풍과 같다는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듯이 당신 자녀 이기는 하느님은 없습니다. 또 하느님은 절대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이 하느님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편애가 아니라 그 아들에 대한 적절한 처방의 사랑일뿐입니다. 다음 큰 아들에 대한 하소연같기도한 아버지의 깊고 큰 사랑과 조용한 설득이 잔잔한 감동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큰 아들의 응답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회개로 응답하여 동생의 귀환축하잔치에 참여했을지, 그것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며 독자들인 우리는 과연 누구인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오늘 복음은 말 그대로 우리의 내면을 비춰주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과연 나는 작은 아들입니까 큰 아들입니까? 혹은 작은 아들이면서 큰 아들입니까? 혹은 자비하신 아버지를 가장 닮은 예수님 같은 아들입니까? 새삼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가장 닮아 일치를 이룬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새삼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비의 여정은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함으로 날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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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의 허술함을 봅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세리들, 죄인들을 환대하고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못마땅해 투덜거립니다. "또"라는 표현에는 예수님을 향해 누적된 분노가 담겨 있지요. 그들은 한두 번으로 끝나는 실수가 아니라 고의성이 다분해 보이는 예수님의 범법(?)에 적의를 보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루카 15,11)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깁니다. 책임과 의무를 잘 지키며 모범적으로 살아온 큰 아들과 방탕하고 즉흥적인 둘째 아들이 대조를 이루지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5,20)
하느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비유 속 아버지는 나약해 보입니다. 사랑 때문에 나약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서 유산을 앞당겨 받고는 흥청망청 써버린 둘째 아들에게 화 한 번 낼 줄 모르고, 동생을 환대한다고 날을 세우는 큰 아들에게도 성낼 줄 모르시는 바보지요. 둘째 아들의 몰락한 처지에 연민을, 큰 아들의 완고한 마음에도 연민을 갖는 분이십니다.
모처럼 자신들을 포용하는 분을 만나 예수님 곁으로 모여드는 세리들과 죄인들에서 둘째 아들이 보인다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영락없는 큰 아들 모습입니다. 그들에 대한 아버지(하느님)와 예수님의 대응은 어떨 모습일까요?
"먹고 즐기자."(루카 15,23)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아버지에게서 나온 이 말들에서 참 헤픈 하느님의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먹보요 술꾼"인 예수님의 모습도 비치지요
단지 우리가 워낙 비유를 자주 접해서 의식을 못할 뿐, 당시 상황으로 보면 아버지의 이 반응은 그야말로 어이없는 반전일 겁니다. 둘째 아들의 괘씸한 행태로 보아 예상할 수 없었던 대응이니까요. 혹 둘째 아들의 놀기 좋아하고 분별 없는 한량 기질이 아버지의 이 부분을 극대화한 유전자에서 유래하지 않았나 살짝 분심이 들기도 하네요.
제1독서에서는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뒷받침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들려 줍니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미카 7,19)
하느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계명을 준수하며 바르게 사는 이들만이 아니라 율법의 경계 밖에서 허덕이며 자포자기하는 이들에게까지 다시 당신 품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고 싶어하시는 분이시지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중심적으로 오만히 살아온 이들이 한계를 맞닥뜨릴 때 잠시 멈추고 돌아서는 기색이라도 얼핏 보일라치면 먼저 달려나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절도 없고 헤픈 분이십니다. 그분은 작은 아들 같은 이들에게뿐만 아니라 큰 아들 같은 이들에게도 언제나 오매불망 열려 있는 바보 같이 허술한 분이십니다.
사순 제3주일을 준비하며, 아버지께서 초대하시는 기쁨에 마음을 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버지께서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고 축제를 명령하시니, 용서받는 기쁨, 용서하는 기쁨, 용서로 하나된 이들을 환대하는 기쁨 안에서 먹고 즐기며,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마음껏 기뻐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저도 오늘 특별히 멀리서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기쁜 날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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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고통의 체험은 나비의 변형과도 같습니다.
나비는 애벌레 상태로 있을 때 가장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미숙해서 날개도 없고 그저 지렁이와 별반 차이도 없습니다. 애벌레가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나비는 번데기에서 풀려나 멋진 미모를 드러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기가 체험하는 모든 고통이나 상처로 인해 동일한 변화를 거칩니다. 팬토스의 눈물로 그리스도의 수난 및 죽음과 하나가 될 때, 그의 고통은 영혼안에서 매우 놀라운 효과를 발휘합니다. 영혼의 정화가 완성되면 전적으로 알려진 인격은 참으로 아름다우며 그리스도와 같이 됩니다.
-희생 제물의 내적 기쁨, 「고통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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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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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3yl68AOufc&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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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 20)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변화의
첫걸음이다.
변화는
사랑이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사랑은
사랑으로
이어진다.
사랑의
기쁨은
함께하는
일상의
기쁨이다.
일상의 기쁨을
되찾는 것이
잔치이다.
함께하는
사랑으로
우리는
새로워진다.
아버지
하느님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다.
제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사랑이 없는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고
회개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빠져버린 삶은
언제나 외롭고
비참하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해 주신 사랑의
은총이었다.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뜨겁고
아프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
넘어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가장 귀한 것이
하느님 안에
사는
이 순간임을
다시
깨닫게 한다.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삶의 새로운
변화이다.
일상의 자리가
변화의 자리이며
은총의 자리이다.
우리에게로
달려오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은
다시 빛을
발하며
사랑의 가치를
살게된다.
큰 아들
작은 아들
모두는 다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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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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