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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ⅩⅢ
- 일제강점기 유학계의 친일협력과 친일한시 -
차 례
* 발간사 ·································································································································· 4
* 해제 : 일제강점기 친일유림들의 문필활동과 협력활동 ··············································· 15
Ⅰ. 경학원
1. 일본국왕 및 고위관료 송축문 ····················································································· 33
1) 「즉위대례식헌송문(卽位大禮式獻頌文)」(1915) 33
박제순(朴齊純), 이용직(李容稙), 박제빈(朴齊斌), 이인직(李人稙), 박치상(朴稚祥), 여규형(呂圭亨), 황돈수(黃敦秀),
한창우(韓昌愚), 성낙현(成樂賢), 김동진(金東振), 정봉현(鄭鳳鉉), 박승동(朴昇東), 오헌영(吳憲泳), 정봉시(鄭鳳時),
김광현(金光鉉), 양봉제(梁鳳濟), 박장홍(朴長鴻), 이학재(李鶴在)
2) 「입태자례헌송문(立太子禮獻頌文)」(1916) 56
김윤식(金允植), 이용직(李容稙), 박제빈(朴齊斌), 이인직(李人稙), 박치상(朴稚祥), 여규형(呂圭亨), 황돈수(黃敦秀),
한창우(韓昌愚), 성낙현(成樂賢), 김동진(金東振), 정봉현(鄭鳳鉉), 박승동(朴昇東), 정준민(鄭準民), 오헌영(吳憲泳),
김광현(金光鉉), 양봉제(梁鳳濟), 정봉시(鄭鳳時), 박장홍(朴長鴻), 이학재(李鶴在)
2. '성전성시집(聖戰誠詩集)'(1937) ················································································ 70
◈ 서(序)
유진찬(兪鎭贊), 나일봉(羅一鳳), 안인식(安寅植), 권순구(權純九), 심선택(沈璿澤), 윤상호(尹相浩), 이강원(李康元),
이상호(李尙鎬), 황석환(黃錫煥), 오봉영(吳鳳泳), 김성렬(金聖烈), 지완수(池琓洙), 송시헌(宋始憲), 엄달환(嚴達煥),
위대원(魏大源), 공성학(孔聖學), 강석규(姜錫圭), 박래양(朴來陽), 나석기(羅錫璂), 민영은(閔泳殷), 이종백(李鍾白),
김훈경(金勛卿), 한창동(韓昌東), 유하준(兪夏濬), 박초양(朴初陽), 정철영
(鄭喆永)
◈ 경기도
수원 신현수(申鉉壽), 김한경(金漢經), 김준기(金駿基), 김종철(金鍾喆), 윤각(尹珏), 장두진(張斗鎭), 권영일(權寧一),
왕정식(王廷植)
안성 유창준(兪昌濬)
양평 홍순복(洪淳復), 장기원(張基元), 윤상룡(尹相龍)
가평 정철규(鄭喆奎), 한태석(韓台錫)
진위 이춘규(李春奎), 서용수(徐龍洙), 홍인표(洪寅杓)
◈ 충청북도
괴산 지현규(池顯䂓)
제천 엄윤섭(嚴允燮), 엄기훈(嚴基薰)
진천 김만희(金萬熙)
청주 유만형(柳萬馨)
충주 정두연(鄭斗淵), 김태진(金泰鎭)
옥천 김규욱(金奎昱), 금학주(琴鶴柱)
청주 신경식(申經植), 송달헌(宋達憲), 이용구(李容求), 오충식(吳忠植), 오한식(吳翰植)
◈ 충청남도
부여 이기범(李箕範), 이문범(李文範), 김희은(金熙殷)
대전 박창화(朴昌和), 성두식(成斗植)
부여 전기숭(田基菘)
서산 박규철(朴奎喆), 임봉순(任鳳淳), 이현상(李鉉商), 이기옥(李起鈺), 이희홍(李熙鴻), 김태수(金台洙)
홍성 이중렬(李仲烈)
대덕 송헌숙(宋憲淑)
홍성 이장로(李莊魯)
청양 이병엽(李秉曄), 이경우(李卿雨), 이현(李炫), 이제녕(李齊寧)
예산 윤석홍(尹錫洪), 송종면(宋鍾冕), 구연창(具然彰)
서산 이찬(李燦), 윤상철(尹相喆), 박용원(朴容元)
◈ 전라북도
부안 임양호(林讓鎬), 김형철(金炯哲), 노승훈(盧承勛), 백낙준(白樂俊), 채동식(蔡東式), 백남종(白南鍾),
장시형(張時亨), 김병규(金炳奎), 임낙정(林洛珵), 조상준(曺相準), 정위영(鄭煒永), 김동식(金東軾),조희용(曺喜鎔),
김종섭(金鍾燮), 김인술(金仁述), 박기석(朴基錫), 이석로(李錫魯), 김석철(金錫喆),김봉일(金奉日), 김수철(金壽喆),
최일홍(崔一洪), 김옥철(金玉喆), 민찬식(閔燦植), 김낙관(金洛觀),김상인(金相印), 김선중(金善仲), 최재홍(崔在洪),
이중인(李重仁), 박찬우(朴贊雨), 장현갑(張鉉甲),이인성(李麟成), 윤성룡(尹成龍), 이형호(李炯鎬), 이명선(李明璇),
박경석(朴京碩), 김영환(金永煥),정경태(鄭坰兌), 정경환(鄭坰煥), 김형수(金炯洙), 이창우(李彰雨), 김상기(金相基)
익산 이태응(李台應), 소진덕(蘇鎭德), 이철응(李哲應), 임노일(林魯一), 장지한(張志漢), 유기철(柳基哲),
이동섭(李東燮), 이종구(李鍾龜), 김상권(金尙權), 김용규(金瑢圭), 김용규(金容圭), 윤주영(尹周永),김용철(金容喆)
◈ 전라남도
제주 양성하(梁聖厦), 김병주(金秉柱), 김문수(金文洙), 오인성(吳仁聖), 고성주(高性柱), 김병희(金柄熙),
오인수(吳仁壽), 오유완(吳維完), 오행종(吳行鍾), 오대규(吳大奎), 강위기(姜渭耆), 오승천(吳承千),김권수(金權洙),
한병옥(韓柄玉), 오복아(吳福兒), 김상률(金商律), 강윤선(姜閏善), 고항수(高恒秀),김도오(金道五), 김봉관(金奉琯)
무안 송정기(宋正奇)
◈ 경상북도
의성 임묵순(任黙淳), 김호우(金浩宇), 김위윤(金渭允), 김진종(金振鍾), 권재중(權在重), 권영세(權寧世),이경구(李經九)
선산 장지순(張志珣)
상주 이상묵(李相黙), 조규연(趙珪衍), 박남휘(朴南徽), 강훈(姜壎)
청도 김원곤(金元坤), 박병준(朴秉濬), 김우곤(金禹坤), 김용주(金龍珠)
영주 우경량(禹慶亮), 송상석(宋相㙽)
군위 박채식(朴採植), 박만찬(朴晩璨), 김웅(金熊), 김작(金焯), 권전근(權詮斤), 김용우(金龍祐), 임성재(任聖宰)
경산 강문찬(姜文贊), 정우주(鄭佑柱), 최세봉(崔世鳳)
청도 이종옥(李鍾玉), 김시윤(金時潤), 박하인(朴夏寅), 김진효(金鎭孝), 이종상(李鍾塽)
◈ 경상남도
부산 구주회(具珠會), 허종녕(許宗寧), 강형민(姜炯敏), 서문숙(徐文琡), 홍병익(洪昞翊), 김영두(金榮斗),성중호(成重鎬), 오창식(吳昌植)
밀양 김용제(金瑢濟), 이제환(李齊桓)
창녕 성진영(成璡永), 김태윤(金兌潤), 조기승(曺奇承), 하한덕(河漢德), 장낙두(張樂斗), 이덕주(李德周),배종학(裵鍾學), 신동식(辛東植)
남해 박준인(朴準寅), 이시봉(李時鳳), 정원표(鄭元杓), 최춘승(崔春升), 하희섭(河熺燮)
울산 김찬희(金璨熙), 김병호(金炳浩), 신세호(辛世浩), 김병석(金秉錫), 김봉오(金鳳梧), 정치호(鄭致浩),서대규(徐大圭), 박충호(朴忠鎬), 서병연(徐秉淵)
◈ 황해도
평산 민영근(閔泳根)
연백 최중윤(崔重潤), 송창현(宋昌鉉), 박정기(朴鼎基), 박규원(朴圭元), 조종건(趙鍾建), 송석만(宋錫萬)
곡산 김영보(金永溥), 서광훈(徐光勳), 박희삼(朴希三)
서흥 유창호(柳昌浩)
수안 정관영(鄭觀榮), 김재원(金載元), 이긍환(李肯煥), 김동흥(金東興), 이창섭(李昌燮)
◈ 평안남도
평양 최정환(崔晶煥), 박기석(朴箕錫), 선우상(鮮于塽), 김항규(金恒圭), 장봉한(張鳳翰), 박성휴(朴性烋),
김제횡(金濟鐄), 한용건(韓用健), 오태옥(吳泰玉), 김용석(金庸錫), 김윤기(金潤起), 전덕룡(田德龍),송재수(宋載秀),
황석규(黃錫圭), 최운섭(崔雲涉)
강동 김근수(金根秀), 김성숙(金聲淑), 홍대수(洪大修), 이규영(李奎濚)
중화 한상규(韓相圭), 소하주(蘇夏疇)
강서 김유탁(金有鐸), 김영수(金英洙), 최용관(崔用觀)
양덕 김대붕(金大鵬), 이재교(李在校), 김해현(金海鉉), 한병선(韓秉善), 최인돈(崔仁敦)
강서 김보건(金輔鍵)
평양 노득주(盧得柱), 선우인여(鮮于仁汝)
대동 황득삼(黃得三)
◈ 평안북도
정주 최중절(崔重節), 김석하(金錫夏), 이정방(李正芳)
자성 박희병(朴禧炳)
영변 김유용(金有用)
정주 이경주(李瓊柱), 김명직(金命稷), 이창훈(李昌塤), 정종하(鄭宗夏), 백원제(白元濟), 이경주(李瓊柱),
조은석(趙殷錫), 석영주(石榮柱), 박회근(朴晦根), 이경주(李瓊柱), 김명직(金命稷), 김창훈(金昌塤),정종하(鄭宗夏),
백경제(白景濟), 탁희열(卓僖烈), 홍순택(洪淳澤), 백세욱(白世煜), 안병흡(安秉洽),조은석(趙殷錫), 백창욱(白昌煜),
정학룡(鄭學龍), 백낙하(白樂夏), 백낙부(白樂富), 정학선(鄭學善),엄창섭(嚴昌燮), 엄기승(嚴基昇), 방명훈(方明勳),
김원묵(金元黙), 박회근(朴晦根), 석창호(石昌瑚),석창연(石昌璉), 안봉빈(安鳳彬), 최구락(崔龜洛), 김종은(金鍾殷),
김의희(金宜熙), 김상린(金祥獜),탁준모(卓濬謨), 김상은(金相殷), 김돈하(金暾河), 김현하(金現河), 김정목(金鼎穆)
운산 이만규(李萬奎), 양석환(梁錫煥), 이관현(李觀鉉), 김관구(金錧九)
강계 김우화(金友和), 계지영(桂芝泳), 김건식(金健植), 김기하(金基河), 김숙현(金淑鉉), 박창림(朴昌林),
유종규(劉鍾奎), 김기종(金基宗), 신홍욱(申鴻旭), 최영민(崔泳敏), 전석진(田錫珍), 김익로(金益老),김창수(金昌洙),
김화현(金華鉉), 유인규(劉璘奎), 김병희(金秉熙), 전준원(田俊元), 한영기(韓榮琦),김태욱(金泰郁), 이재형(李宰炯),
임인흡(林麟洽), 김창환(金昌煥), 김종락(金宗洛), 조창하(趙昌河)
정주 이태진(李泰鎭)
◈ 강원도
영월 엄달환(嚴達煥), 한민교(韓民敎), 황윤현(黃胤鉉), 고범규(高範圭), 엄하현(嚴厦鉉)
철원 박기양(朴璂陽), 이병훈(李炳勛), 안도환(安道煥), 김현규(金顯奎), 정재규(鄭在奎), 이범수(李凡秀),이종남(李鍾楠), 김필제(金駜濟), 허근(許根), 김용휘(金溶徽), 김경서(金敬瑞)
고성 한준석(韓準錫), 김영목(金泳穆)
◈ 함경남도
풍산 한호련(韓皜鍊), 신홍식(申弘湜), 김만성(金萬聲), 하중청(河重淸), 유준흥(柳俊興), 주태원(朱泰源),이낙수(李樂洙), 이규하(李奎河)
홍원 김기협(金基協), 박임수(朴林洙), 한준석(韓準錫)
풍산 이종환(李鍾奐)
◈ 함경북도
무산 정종석(鄭宗錫), 오상필(吳相弼), 김동희(金東暿), 김흥제(金興濟), 허언(許土彦), 한주승(韓周承), 한진만(韓鎭萬)
종성 김용호(金容鎬), 우창명(禹昌命), 장영수(張永洙), 김주민(金周敏), 한석붕(韓錫朋), 장추섭(張樞燮),이보순(李輔舜), 이상욱(李商煜)
경성 석호련(石鎬鍊), 여종하(呂鍾夏), 정기남(鄭基南)
3. '경학원잡지' 게재 친일논설 사례 ··········································································· 190
1) 김대우(金大羽) 190
(1) 지나사변에 대하여 190
(2) 전라남도유도연합회 결성식, 도참여관 훈화요지 194
2) 김완진(金完鎭) 196
(1) 이 시대의 유교 196
(2) 유가의 자위책 201
(3) 유시(儒是) 206
(4) 백곡(百穀)을 씨 뿌리고 오교(五敎)를 편다 211
3) 박상준(朴相駿) 216
(1) 대동아전쟁과 국체본의의 투철(권두언) 216
4) 박제빈(朴齊斌) 217
(1) 강사시찰견문소기(講士視察見聞所記) 217
5) 심선택(沈璿澤) 233
(1) 군자시중(君子時中) 233
6) 안인식(安寅植) 237
(1) 동아의 건설과 유도정신 237
7) 이경식(李敬植) 246
(1) 징병제 실시를 맞이하며 246
(2) 반도학도에 대한 육군특별지원병제 실시에 관하여 247
8) 이대영(李大榮) 248
(1) 유자(儒者)의 지위와 의무 248
9) 정만조(鄭萬朝) 252
(1) 구학과 신학 252
10) 정봉시(鄭鳳時) 253
(1) 오늘날 우리의 급선무 253
4. 경학원의 활동, 기타 ································································································· 260
1) 경학원 유림 및 강사 관계 자료(1915~1921) 260
(1) 강사 주의사항 260
(2) 의견서, 유림지도에 관한 건 261
(3) 경학원 강사 채용의 건 263
2) 경회루에서 미나미 총독의 초대연 266
3) 미나미 지로(南次郞), 명륜전문학교 기사 268
4) 박상준, 회장 훈사(訓辭) 요지 268
5) 마자키 나가토시(眞崎長年) 학무국장 인사 요지 270
6) 지방시국강연회 개최 요강 271
7) 하야시 시게키(林茂樹), 우리의 진군보 271
8) 스즈카와(鈴川壽男), 시국과 유도(10월 15일 경학원 추계석전에서) 274
9) 시라카미(白神壽吉), 벚꽃과 일본정신(4월 15일 경학원 춘계석전에서) 277
Ⅱ. 조선유도연합회
1. 일본 고위관료 송축문 ································································································ 285
1) '봉전남총독각하(奉餞南總督閣下)'(1942) 285
박상준(朴澤相駿), 한상룡(韓相龍), 유진찬(兪鎭贊), 이대영(駒城大榮), 이경식(李敬植), 윤병오(尹城炳皓),
안인식(安寅植), 김성진(金誠鎭), 이명세(春山明世), 윤치오(伊東致旿), 심형진(沈衡鎭), 박제봉(竹城濟鳳),
이원보(李家源甫), 최호연(崔浩然), 주병건(朱柄乾), 장행원(張本行遠), 최두연(崔斗淵, 山本權一郞),
이승근(牧山承瑾), 남석우(南錫祐), 조순원(趙洵元), 민건식(閔原健植), 윤병철(尹秉哲), 대산춘강(大山春岡),
광촌술부(廣村述夫), 서하영채(西河瑛采), 정낙붕(東村樂鵬), 이근옥(李根沃), 김윤구(金倫求), 김양한(金亮
漢), 이범주(李範柱), 임노일(林魯一), 유장영(柳長榮), 황석규(黃家錫圭), 이태윤(李家泰潤), 수원익제(水原翼齊)
2) '봉전대야총재각하(奉餞大野總裁閣下)'(1942) 297
박상준(朴澤相駿), 한상룡(韓相龍), 유진찬(兪鎭贊), 이대영(駒城大榮), 이경식(李敬植), 윤치오(尹致旿),
윤병오(尹城炳皓), 김성진(金誠鎭), 이명세(春山明世), 안인식(安寅植), 심형진(沈衡鎭), 장행원(張本行遠),
이승근(牧山承瑾), 대산춘강(大山春岡), 서하영채(西河瑛采), 덕촌응렬(德村應烈), 덕산재화(德山在和),
민영의(閔泳義), 김양한(金亮漢), 대산청의(大山淸毅), 광촌술부(廣村述夫), 공성학(孔聖學), 죽성제봉(竹城濟鳳),
조순원(趙洵元), 공성초(檜原聖初), 남석우(南錫祐), 정낙붕(東村樂鵬), 윤병철(尹秉哲), 민건식(閔原健植),
이근옥(李根沃), 윤정현(尹定鉉), 나일봉(羅一鳳), 이경구(木子鏡龜), 추산의식(秋山義植), 수원익제(水原翼齊)
2. '축징병제실시(祝徵兵制實施)'(1943) ······································································ 309
박상준(朴澤相駿), 이대영(駒城大榮), 이경식(李敬植), 김성진(金誠鎭), 윤병오(尹城炳皓), 이명세(春山明世),
정인서(鄭寅書), 홍산은식(洪山殷植), 심형진(沈衡鎭), 조순원(趙洵元), 조남준(趙南駿), 조기택(趙基澤),
송산중렬(松山仲烈), 정석모(楓川碩謨), 금산춘정(金山椿政), 장행원(張本行遠), 풍천명익(豊川明益),
월금형진(月金亨鎭), 김정호(金正浩), 송강세규(松岡世奎), 남상익(南相翊), 양회철(梁會喆), 허정(許鼎),
동촌중희(東村中熙), 박시양(朴始陽), 국본세훈(國本世薰), 서하영채(西河瑛采), 윤병철(尹秉哲), 이승근(李承瑾),
대산춘강(大山春岡), 송산영태(松山永泰)
3. '유도(儒道)' 게재 친일논설 사례 ············································································ 321
1) 석진형(石鎭衡) 321
(1) 시대와 유교 321
2) 이명세(春山明世) 327
(1) 동아공영권과 유교의 역할 327
(2) 정기가(正氣歌)의 해설 330
3) 박상준(朴相駿) 335
(1) 적개심의 앙양(권두언) 33
4. 조선유도연합회의 활동, 기타 ··················································································· 338
1) '유도(儒道)'의 본회기사 및 지방기사 발췌(1942~1944) 338
(1) '유도' 1호, 본회기사 338
(2) '유도' 3호, 본회기사·지방기사 339
(3) '유도' 4호, 본회기사·지방기사 340
(4) '유도' 5호, 본회기사·지방기사 343
(5) '유도' 6호, 지방기사 346
(6) '유도' 7호, 본회기사·지방기사 347
2) '조선유림성지순배기(朝鮮儒林聖地巡拜記)'(1943) 348
3) 우노 데쓰진(宇野哲人), 유교와 일본정신(계속) 445
4) 타까다 신지(高田眞治), 대동아전쟁과 유가(儒家)의 길(전회 계속) 449
Ⅲ. 신문·잡지 게재 친일시문
1. 문명기(文明琦) ············································································································ 459
1) 만주절(滿洲節) 459
2) 부여신궁 참가 근로봉사 소감 459
3) 축 징병제도 발표 460
4) 필승 격시사율(檄詩四律) 한 편 460
5) 명치절 송사 460
2. 박영철(朴榮喆) ············································································································ 461
1) '다산시고(多山詩稿)'(1939) 발췌 461
3. 심형진(沈衡鎭) ··········································································································· 489
1) 축 징병제실시 489
2) 축 싱가폴 함락 489
3) 감사황군 490
4) 도(悼) 야마모토 원수 490
4. 장지연(張志淵) ············································································································ 491
1) 병합 후의 조선민족(사설) 491
2) 조선풍속의 변천 491
3) 본사의 시회 발기 492
4) 만필쇄어(漫筆瑣語) 중 이천오백년제, 신무천황제, 신구학 492
5) 송제만필(9) 493
6) 만록(漫錄) -지리관계(5) 494
7) 낙성 중건에 대한 축사 494
8) 대정육년시사(大正六年詩史) 494
9) 화근의 영절(사설) 495
10) 환영 하세가와 총독 496
5. 정병조(鄭丙朝) ··········································································································· 496
1) '녹어산관집(漉魚山館集)'(1941) 발췌 496
6. 한준석(韓準錫) ··········································································································· 502
1) 환영 하세가와 총독 각하 502
2) 봉도(奉悼) 다이쇼(大正)천황 502
3) 축 동민(同民) 503
4) 조춘술회(早春述懷) 503
5) 축사이토전권귀조(祝齋藤全權歸朝) 504
6) 봉답(奉答) 고수노자(皐水老子) 504
7) '삼노우모시선(三老寓慕詩選)'(1937) 발췌 504
7. '경남일보' 게재 친일시문(1909~1913) ··································································· 514
1) 이등공조화상보(伊藤公遭禍詳報) 514
2) 황상폐하우례은전(皇上陛下優禮恩典) 516
3) 관찰사의 면유민인(面諭民人)(1~3) 517
4) 경절휴업(慶節休業) 519
5) 천장절 축하의식 520
6) 축 천장절 520
7) 천장절 축하 성황 520
8. 기타 ······························································································································ 521
1) '대동사문회보' 창간문 521
2)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 일본정신과 유교 525
3) 다카하시, 왕도유도에서 황도유도에로 540
4) 안인식(安寅植), 황도유학의 본령(本領) 550
* 찾아보기 ·························································································································· 557
해제 : 일제강점기 친일유림들의 문필활동과 협력활동
정욱재(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1. 서론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는 식민통치의 안정화를 위해 무엇보다 유림에 주목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하는 과정에서 투철한 항일의식을 지닌 유림의 투쟁으로 곤욕을 치렀으며, 지방에 있는 유림의 위상과 영향력 역시 소홀히 여길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사회의 전통적인 엘리트였던 유림의 항일의지를 제압하는 동시에 안정된 식민지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유림에 대한 대책이 매우 중요했다.
일제는 당시 유명무실하던 성균관(成均館)을 폐지하고 1911년 6월 15일에 총 17조의 경학원규정(經學院規程, 조선총독부령 제73호)을 공포하여 경학원을 설립하였다.1)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은 일제강점기 동안 유림에 대한 일제의 정책을 수행하던 중심기관이었다.2)
일제는 경학원을 중심으로 조선의 유림을 회유하고 통제하였는데, 조선의 유림 중 일부는 경학원과 일제가 조장하여 결성된 각종 친일유림단체에 참여하였다.3) 그들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그들의 협력행위는 크게 친일적인 문필작업과 강연활동으로 나타났다.
또한 그들이 신봉하는 유학도 일본의 영향으로 인해 조선의 전통 유학과 다른 성격으로 변질되었으며, 전시체제기
1) 「경학원규정」, '조선총독부관보', 1911년 6월 15일.
2) 경학원의 조직, 성격, 인적구성과 역할 등에 관한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이명화, 「朝鮮總督府의 儒敎政策(1910~1920年代)」,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 1993 ;
정규영, 「조선총독부의조선유교지배」, '학생생활연구' 4, 1996 ;
柳美那, 「植民地時期朝鮮における經學院 : 儒敎敎化機關と儒敎イデオロギーの再編」, '朝鮮史硏究會論文集' 42, 2004 ; 柳美那, 「植民地時期朝鮮における明倫學院 : ‘儒敎振興’をめぐる植民地權力と儒敎勢力の相克」, '史滴' 26, 2004 ;
류미나, 「식민지권력에의 ‘협력’과 좌절-經學院과 향교 및 문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韓國文化' 26, 2005 ;
류미나, 「전시체제기 조선총독부의 유림정책」, '역사와 현실' 63호, 2007 ;
정일균,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학원」, '사회와 역사' 통권 제76집, 2007 ; 정욱재, 「1910~1920年代 經學院의 人的 構成과 役割」, '정신문화연구' 제30권 제1호, 2007 ;
정욱재, 「日帝 協力 儒林의 儒敎認識-1910~1920년대 경학원 관계자를 중심으로」, '한국사학사학보' 16, 2007 ;
정욱재, 「한말·일제하 유림 연구-일제협력유림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3) 일제강점기 친일유림의 활동에 대해서는 정욱재, 「한말·일제하 유림 연구-일제협력유림을 중심으로」 참조.
발행연월일 편찬 겸 발행인 署 또는 籤
1호 1913년 12월 5일 李人稙朴齊純
2호 1914년 3월 25일 〃〃
3호 1914년 6월 25일 〃〃
4호 1914년 9월 25일 〃〃
5호 1914년 12월 25일 〃〃
6호 1915년 3월 25일 〃〃
7호 1915년 6월 25일 〃〃
8호 1915년 9월 25일 〃〃
9호 1915년 12월 25일 〃〃
10호 1916년 3월 25일 〃〃
11호 1916년 6월 25일 〃〃
12호 1916년 12월 25일 朴稚祥金允植
13호 1917년 3월 25일 〃〃
14호 1917년 7월 25일 〃〃
15호 1917년 10월 15일 〃〃
16호 1918년 3월 25일 鄭崙秀〃
17호 1918년 7월 25일 〃〃
에 들어서면 일본화된 유학, 즉 ‘황도유학(皇道儒學)’이 대두하게 된다. 특히 1939년에 결성된 조선유도연합회에 참여한 유림은 ‘황도유학’을 열렬히 주창하며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이 자료집은 바로 그들의 친일협력행위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자료집의 사료들은 모두 경학원에서 발간한 기관지 '경학원잡지(經學院雜誌)'와 '성전성시집(聖戰誠詩集)', 조선
유도연합회에서 발행한 기관지 '유도(儒道)'를 비롯하여 각종 시문집, 그리고 신문·잡지에 게재된 친일시문, 개인이 발간한 시문집 등에서 선별하여 수록된 것이다. 여기서는 이 자료집에 수록된 자료들의 성격을 개괄하고, 이어서 수록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유림의 친일협력행위에 대하여 각 사례들을 하나씩 들어서 살펴보려 한다.
2. 수록 자료의 범위와 성격
이 책에 실린 자료는 주로 경학원과 조선유도연합회에서 간행된 자료와 신문, 잡지에 실린 글들을중심으로 수록하였다. 경학원의 기관지 '경학원잡지'는 경학원의 주요 사업 중의 하나이며, 경학원의 사성이 '경학원잡지'의 간행을 주관하였다. 일제강점기 '경학원잡지' 발행 연원일과 편찬 겸 발행인은 다음과 같다.
<표 1> '경학원잡지'의 발행 연월일과 편찬 겸 발행인4)
4) 이 표는 정욱재의 논문에 게재된 것을 인용하였다(정욱재, 「한말·일제하 유림 연구-일제협력유림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66~67쪽), 이후에 대한 본문은 이 논문을 주로 인용하였다.
18호 1918년 9월 25일 〃〃
19호 1918년 12월 25일 〃〃
20호 1920년 3월 25일 〃〃
21호 1921년 3월 10일 〃〃
22호 1922년 3월 10일 李大榮朴箕陽
23호 1922년 12월 25일 〃〃
24호 1923년 12월 25일 〃〃
25호 1924년 12월 25일 〃〃
26호 1925년 12월 25일 〃〃
27호 1926년 12월 25일 〃〃
28호 1927년 12월 25일 〃〃
29호 1928년 12월 25일 〃〃
30호 1929년 12월 25일 〃鄭萬朝
31호 1930년 8월 1일 〃〃
32호 1930년 12월 27일 〃〃
33호 1931년 12월 25일 〃〃
34호 1932년 3월 31일 〃〃
35호 1932년 12월 25일 〃〃
36호 1933년 12월 25일 〃〃
37호 1934년 10월 25일 〃〃
38호 1935년 3월 30일 〃〃
39호 1935년 10월 5일 〃〃
40호 1936년 8월 25일 羅一鳳〃
41호 1937년 7월 25일 〃鄭鳳時
42호 1937년 12월 25일 〃〃
43호 1938년 12월 25일 〃尹德榮
44호 1939년 10월 5일 尹炳晧〃
45호 1940년 12월 25일 〃〃2
46호 1941년 12월 25일 〃朴相駿
47호 1943년 1월 25일 〃〃
48호 1944년 4월 10일 金璜鎭〃
'경학원잡지'는 1913년 12월 1호부터 1944년 4월 48호까지 간행되었으며, 경학원 사성 중에 한 명은 반드시 편찬 겸 발행인이 되었다.
'경학원잡지'는 계간지를 표방하였으나 정작 1년에 4회 나온 경우는세 번(1914, 1915, 1918년)에 불과하였다.
3회 나온 경우는 2번이고(1916, 1917년) 나머지는 1년에 1~2회 간행되었다.
1919년은 3·1운동의 여파와 당시 대제학 김윤식, 부제학 이용직의 연명 독립청원서 발송사건으로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경학원잡지' 표지에는 반드시 당시 대제학이 ‘○○署’ 또는 ‘○○籤’이라는 일종의 서명을 하였다.
'경학원잡지'는 900~1,000부가 발행되었으며, 실린 글들은 유교 자체에 대한 학술적 내용보다는 유교를 이용하여 일제의 통치를 합리화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실린 김완진(金完鎭), 심선택(沈璿澤), 이대영(李大榮) 등의 글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유교 비판, 조선총독부의 농업과공업 정책 변화의 성과, 일본인 위인의 소개, 위생에 관한 제반 상황 등 총독부의 지배정책으로 이루어진 각종 산업의 성공 사례와 더불어 총독부 지배정책에 협력을 요구하는 내용,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의 강연 등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 밖에 경학원 직원과 강사들의 일본 ‘천황’이나 ‘황태자’ 칭송문,일제의 지배정책 찬양, 조선인의 일본 동화를 촉구하는 글 등이 실려 있다.
이렇게 '경학원잡지'는 사실상 조선의 유림에게 일제의 식민정책을 홍보하고 회유·포섭하여 일제의 충량한 신민으로 변화시키려는 수단이었다.
또한 '경학원잡지'는 조선유도연합회 기관지인 '유도'와 더불어 당시 친일유림의 행위를 명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그들의 당시 활동과 지녔던 생각 등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참고해야 할 1차 자료이다.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친일유림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시문을 작성하여 책으로 간행하였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여기에 수록된 '성전성시집'이다.
그리고 전시체제기에 일제는 조선 유림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조선유도연합회를 만들었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으로 경학원과 친일유림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경학원 직원은 모두 조선유도연합회의 주요 간부가 되어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시국강연을 주도하였고 ‘황도유학’을 주창하였다.
‘황도유학’은 일본국왕이 정점에 있는 신도(神道)와 유교가 결합되어 충효일치의 일본화된 유교이다.
‘황도유학’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여 조선 유림에게 자발적으로 인적·물적 자원을 바치라고 요구하였다.
조선유도연합회의 이런 활동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는 자료가 기관지 '유도'이다.
그리고 조선유도 연합회의 결성과정과 당시 간부명단을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경학원잡지' 제45호이다.
이 자료들을 살펴보면 전시체제기 조선유도연합회의 조직 과정, 활동, 참여 인물 등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유도'는
1942년 1호가 창간되어 1944년 7호까지 발간되었는데, 게재된 내용은 '경학원잡지'에 실렸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유도'의 필자는 친일유림과 일본인 관료, 식민주의 관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유도연합회의 이데올로기인 ‘황도유학’에 대한 글과 유교를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글 등을 작성하여 게재하였다.
여기에 실린 이명세(李明世), 박상준(朴相駿) 등의 글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유도'에실린 ‘본회기사(本會記事)’와 ‘지방기사’는 조선유도연합회의 활동을 잘 보여주는 기록인데, 역시 이 자
료집에 그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조선유도연합회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을 칭송하는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 자료집에 일부 수록된 '봉전남총독각하(奉餞南總督閣下)ꡕ(1942), '봉전대야총재각하(奉餞大野總裁閣下)'(1942), '축징병제실시(祝徵兵制實施)'(1943) 등이 대표적이다.
친일유림 중 일부는 지속적으로 신문·잡지에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시문을 발표하였다.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을 실은 문집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영철(朴榮喆), 정병조(鄭丙朝), 한준석(韓準錫) 등으로 이 자료집에 간행된 문집의 일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 이 자료집에는 장지연(張志淵)이 '매일신보'에 게재한 친일적인 성격의 글 중 일부가 수록되어있다.
그리고 그가 '경남일보' 주필을 지냈을 때 집중적으로 나온 친일시문들 중 일부도 포함되었다.
'경남일보'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 경남 진주에서 창간되어 일제 강제병합 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함께 발행 허가된 유일한 지방일간지였다. 장지연이 1909년부터 1913년 사이에 주필을 지내는 동안 '경남일보'는 처음에는 실업장려와 민지개발을 표명했으나, 의병진압에 대한 관찰사와 일본군 수비대의 동정을 게재하는 등 일본 통감정치에 부응한 모습을 보였다. 병합 후 1910년 10월 11일자에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하여 정간된 후 같은 달 25일 다시 재발행되면서 신문의 논조가 노골적인 친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즉 일본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마다 제호에 일장기를 게재하고 특집호를 발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하는 보도내용으로 신문을 꾸미기 시작했다. 특히 신문사 차원에서 주도한 대표적인 친일행사는 장지연이 주필을 맡고 있던 동안 이루어졌다.
1911년 11월 3일 천장절을 경축하기 위해 신문을 하루 휴간하고 진주의 중심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수정봉 정상에서 천가지의 등화로 ‘축천장절(祝天長節)’이란 네 글자를 밝히며 대대적으로 경축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후 장지연이 건강상의 이유로 주필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주했고, '경남일보'는 1915년 경영난으로 폐간되었다.
3. 유학계의 친일협력행위
1) 일본국왕 및 고위관료에 대한 칭송
경학원과 조선유도연합회 같은 관변단체에 참여한 친일유림은 스스로를 일본국왕, 즉 ‘천황’의 ‘신민’으로 자처하며 일제에게 충성을 다짐하였다. 그런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중 하나가 1915년11월 10일에 그들이 제진(製進)한 다이쇼천황(大正天皇)의 즉위대례식헌송문(卽位大禮式獻頌文)이다.5)
여기서는 하나의 예로 박치상의 시문을 들어보자.
저기 멀리 서경 쪽을 바라다보니 瞻彼西京
만년 동안 전해져 온 황도로구나 萬歲皇都
나라 처음 세워 통서 전하였거니 刱業垂統
소호 전욱에 요순 같은 분들이었네 昊頊唐虞
이에 지금 이르러선 아름답거니 式至今休
밝게 빛날 운세 다시 열리었다네 熙運再啓
성인께서 황제 자리 나아가시매 聖人卽阼
성대하고 성대한 예 거행했다네 載行縟禮
이에 우리 다시금 또 중흥되어서 嗣我中興
하락에다 그 융성함 비길 만하네 河洛比隆
지극한 그 다스림에 다 속했거니 咸囿至治
5) 「卽位大禮式獻頌文」, '經學院雜誌' 제9호, 1915, 1~21쪽. 경학원 대제학, 부제학, 사성, 강사 순으로 당시 활동하였던 경학원 관계자 18명이 헌송문을 지었는데, 순서는 다음과 같다. 경학원 대제학 朴齊純, 부제학 李容稙, 朴齊斌,
사성 李人稙, 朴稚祥, 강사 呂圭亨, 黃敦秀, 韓昌愚, 成樂賢, 金東振, 鄭鳳鉉, 朴昇東, 吳憲泳,鄭鳳時, 金光鉉, 梁鳳濟,
朴長鴻, 李鶴在이다.
전대보다 이루는 공 더 훌륭하리 將多前功
청도 쳐서 정벌을 한 전쟁에서는 靑島之役
의 성했고 인도 또한 지극하였네 義盛仁至
덕과 업적 천고에도 드문 것이니 德業曠千
풍교 이제 온 사방에 퍼질 것이리 風敎訖四
전각 주위 만세소리 울려 퍼지면 繞殿嵩呼
백관들이 모두 서로 화답을 하리 百工相和
산을 넘고 바다 건너 폐백을 들고 梯航玉帛
모두들 다 바다 동쪽 향해 가누나 咸趨海左
화육하여 주는 은혜 고루 입은 건 均蒙化育
바로 우리 땅의 창생들이네 鰈域蒼生
이에 아주 짧은 시를 공손히 지어 恭述短篇
하찮은 신 정성 여기 부치옵니다 庶寓微誠
박치상은 각종 전거와 극존의 용어를 사용하며 시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일본국왕을 성인과 동일시하여 그의 은덕을 칭송하였고 일본이 행한 전쟁을 인의로운 행위로 여겼으며, 조선인은 일본국왕의 은혜를 고루 입는 신민으로 인식하였다. 이렇게 박치상은 일본국왕과 일본제국을 충효를 바칠 대상으로,
조선인은 그들의 충량한 신민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뒤에 쇼와천황(昭和天皇)이 될 일본 태자에게도 역시 똑같은 내용을 담은 글[입태자예헌송문(立太子禮獻頌文)]을 바치고 있다.6)
친일유림은 일본국왕과 태자뿐만 아니라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을 칭송하는 글도 많이 남겼다.
조선유도연합회가 간행한 '봉전남총독각하(奉餞南總督閣下)'(1942)와 '봉전대야총재각하(奉餞大野總裁閣下)'
(1942)는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와 정무총감 오노(大野綠一郞)가 일본으로 돌아가자 그들에 대한 ‘칭송시’를 모아서 편집한 책이다.
하나의 예로 심형진의 시를 들어보자.
대장께서는 백악당(白堊堂)에서 고상히 기거하시며 大將高居白堊堂
은혜와 위엄 두 가지로 전국을 진무(鎭撫)하셨네 幷濟恩威鎭全彊
칠년간의 치적, 천년은 갈 거라고 七年治積可千世
찬양하는 소리 사방이 한결같네 一口譽聲同四方
떠나신 길 바라보며 님께 다다르지 못하기에 瞻望行塵嗟不及
남기고 가신 자취 흠모하는 맘은 잊을 수 없으리라 慕思遺跡愛難忘
동아시아 다난(多難)한 때를 만나 正當東亞多端日
6) '經學院雜誌' 제12호, 1916, 10~11쪽. 1916년 11월 3일에 당시 경학원 간부와 강사 총 19명은 일본 태자(뒤에
쇼와천황)를 세우는 예식에 헌송문(立太子禮獻頌文)을 지어 조선총독부에 헌상하였다.
게재된 순서는 다음과 같다.
경학원 대제학 金允植, 부제학 李容稙, 朴齊斌, 사성 李人稙, 朴稚祥, 강사 呂圭亨, 黃敦秀, 韓昌愚,成樂賢, 金東振,
鄭鳳鉉, 朴昇東, 吳憲泳, 鄭準民, 吳憲泳, 金光鉉, 梁鳳濟, 鄭鳳時, 朴長鴻, 李鶴在이다.
우리나라 건강하게 보호하는 데 힘쓰셨다네7) 須爲邦家保健康
조선 7대 총독 미나미는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으며 철저하게 민족말살,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던 장본인이었다.
그가 재임한 기간은 조선인에게는 엄청난 시련기였다.
1938년에 지원병제도를 시행하고 1939년에 창씨개명제도를 만들어 징병제를 준비하였으며, 국민징용령을 적용하여 많
은 조선인을 강제연행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국민총동원체제를 편성했고,조선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였다.
이렇게 악독한 식민정책을 펼친 사람을 친일유림은 그가 조선에서 많은 ‘선정(善政)’과 ‘업적’을 세운 인물로 칭송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자신들을 체화시켰으며, 그런 인식과 태도를 그들의 시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친일유림 중 일부는 친일적인 시문을 모아서 출간까지 하였다.
한준석의 사례를 들어보자.
나는 조선총독들을 두루 겪으면서 지우(知遇)를 받았다. 그런데 일생동안 향하여 경모하는 분들이 있으니 노암(魯庵, 寺內正毅), 고수(皐水, 齊藤實), 풍산(豊山, 南次郞) 세 분(三老)이다.
그런 까닭에 평소 세 분에게 바친 시가 약간 있어서 근래에 수집하여 한 권을 만들었다.
제목을‘삼노우모시선(三老寓慕詩選)’이라 하여 열람에 편리하도록 하였으니 또한 사모하는 마음의 바탕이 된다.
대개 세 분(三老)은 모두 우리 제국의 거성이며 또한 동양의 위인이시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魯, 皐 두 분은 이미 고인이 되셨다. 완성된 책을 쓰다듬으며 돌아가신 분에 대한 감상을 어떻게 다할 수 없어 여기에 적는다.8)
한준석은 1937년에 조선총독을 흠모하는 마음을 담은 시들을 모아 '삼노우모시선(三老寓慕詩選)'이라는 제목의 책을 간행하였다. 그가 흠모하였다고 밝힌 조선총독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미나미 지로(南次郞)로 모두 조선의 식민통치에서 오랫동안 악명을 날린 사람들이었다.
한준석 외에 정병조, 박영철 등도 이런 심경을 나타낸 시들을 지었다. 그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일본인화된 제국의 신민이며, 그들이 지은 시문들은 그런 인식과 태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2) 일제의 침략전쟁과 징병제 실시를 찬양
일제가 1937년 7월 7일 노구교(蘆溝橋)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경학원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 찬양하는 한시를 경학원 관계자를 비롯한 전국 각 도의 유림으로부터 모집하였다.
경학원은 이렇게 모인 한시들을 '성전성시집'이란 제목을 붙여서 1937년 12월 19일에 간행하였다.
당시 경학원대제학 정봉시(鄭鳳時, 1855~1937)가 '성전성시집'의 간행을 주관하였고, 그가 중도에 사망하자 부제학
유진찬(兪鎭贊, 1866~1947)이 이어받아 주관하였으며, 사성 나일봉(羅一鳳, 1871~?)이 편찬 겸 발행인으로 실무를 담당하였다.
7) '奉餞南總督閣下', 조선유도연합회, 1942, 6쪽.
8) 韓準錫, 「三老寓慕詩選自序」, '三老寓慕詩選', 1937, 11쪽.
'성전성시집'의 체재를 살펴보면, 먼저 경학원 부제학 유진찬의 서문이 실려 있고, 이어서 역시 유진찬이 쓴 ‘11월 7일 신궁참배(十一月七日神宮參拜)’라는 제목의 한시가 실려 있다. 다음으로 ‘성전성시’라는 제목 아래 경학원 관계자들의 시가 실려 있고, 이어서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북도,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강원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순으로 지방 유림의 한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각 한시마다 자신의 출신지역과 이름이 기재되었기 때문에 '성전성시집'을 통해 총 399명 유림들의 출신 지역과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지역 유림 한 사람의 시를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과 중국의 전쟁 얼마나 길어지는가 日支事變幾時長
들으니 황군(皇軍)이 낙양(洛陽)을 점령했다네 聞道皇軍占洛陽
소생(小生)은 미처 출정(出征)하지 못하고 小生未及出征役
나라 사랑하는 정성으로 시 한 장을 짓네 愛國丹誠詩一章
제주 오복아(吳福兒)
전라남도에서는 21명의 인사들이 시를 바쳤는데, 20명이 제주 출신이고 1명은 무안 출신이었다.
한시를 바친 각 지역의 인물들은 대체로 지역 유지로 생각되는데, 당시 지역 유림이 지닌 인식 등을 연구할때 이 자료는 상당히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이 '성전성시집'에 실린 시들은 중일전쟁을 성전(聖戰)으로 인식하고 일본군의 승리를 찬양하며 일본제국의 위세와 일본군의 무운이 만방에 떨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각 한시들에 나타난 용어와 전거도 서로 비슷한 것이 매우 많다.
요컨대 '성전성시집'은 친일유림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더구나 경학원 관계자뿐만 아니라 조선의 전 지역에서 올라온 한시들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지방 유림의 동태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일제는 1937년에 일으킨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장되자, 식민지 조선의 장정들을 전장으로 내몰려고 하였다.
결국 일제는 1942년 5월 9일에 1944년부터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한다고 공표하였다.
그러자 친일유림은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그런 마음을 표현한 것이 바로 '축징병제실시(祝徵兵制實施)'라는 책이다.
'축징병제실시'는 조선유도연합회가 1943년에 간행하였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징병제 실시에 관해 전국적으로 한시를 현상 모집하였고, 이에 전국에서 응모하여 당선된 시들과 조선유도연합회 간부가 지은 시들을 합편하여 이 책을 간행한 것이다.
당시 경학원 사성 겸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이자 중추원 참의였던 이경식의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은혜롭게 새로이 반도에 징병제 실시하시니 恩制新徵半島兵
모두들 환호하고 감격해 하네. 歡呼感激一般情
정성과 힘을 다해 마땅히 보답하리니 彈誠全力宜圖報
내 창과 방패를 손질해 그대와 함께 가리라.9) 修我戈矛與子行
당시 조선민중은 일반적으로 중일전쟁을 일제의 야심에 의한 침략전쟁으로 이해하였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조선민족이 피를 흘리게 만드는 징병제 실시에 대해 대단한 불만과 저항심이 있었다.10)
그런데도 이경식은 일반적인 조선민중과 전혀 다른 인식과 행동을 보이고 있다.
이경식의 시는 일제가 징병제를 실시한다고 공포하자 전국이 환호하고 감격한다고 하면서, 조선의 장정들에게 전쟁터에 나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 일본제국의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인 이경식은 이 외에 '경학원잡지'에도 징병제실시를 축하하면서 조선민중에게 충실히 응하라는 글을 게재하였다.11) 이경식이 '경학원잡지'에 게재한 두 편의 글도 모두 이 자료집에 수록되어 있다.
'축징병제실시'에 실린 시들은 이경식의 시와 모두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축징병제실시'는 전시체제기 일제에 협력한 유림의 빗나간 인식과 태도를 잘보여주는 자료이다.
3) 유학의 논리를 이용한 일제의 식민지배를 지지
조선유학의 전통적인 특징은 성리학을 절대시하면서 인간 내면의 심성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다.12) 그
래서 중국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서도 볼 수 없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철학적 논쟁을 낳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같은 유학사상인 양명학이나 실학의 학풍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모습을 보였다.13)
그러나 무엇보다 조선유학의 특징이자 장점으로는‘의리론(義理論)’를 들 수 있다.
조선 유학자의 정신을 대표하는 ‘의리정신’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살펴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선비가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처신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나아가고 물러남의 분별(出處之辨)’ 곧 ‘출처의 의리(出處之義)’이고, 인간의 모든 행위나 사회적 문제에서 동기와 지향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의리와 이욕의 분별(義利之辨)’이며, 국제질서와 문화적 기반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중화와 이적의 분별(華夷之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리정신’은 개인의 생각과 행위에서 나타나는 미세한 문제에서부터 한 사회와 국제 관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중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대해 평가하는 분별기준이자 실천적 행동원리로 작용한다.14)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정치적 지위와 학자적 식견이 높더라도 언행이 일치하지 않거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저버린 경우에는 칭송의대상이 될 수 없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유림이 전국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일제에 저항한 것도 바로 조선유학의 의리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조선유학이 지닌 이런 특징을 없애
9) '祝徵兵制實施', 조선유도연합회, 1943년 1월, 3~4쪽.
10) 변은진, 「日帝의 파시즘 전쟁(1937~45)과 朝鮮民衆의 戰爭觀」, '역사문제연구' 3, 1999, 168쪽.
11) 이경식, 「징병제 실시를 맞이하며」, '經學院雜誌' 제47호, 1943, 24~28쪽 ; 이경식, 「반도학도에 대한 육군특별지원병제 실시에 관하여」, '經學院雜誌' 제48호, 1944, 36~37쪽.
12) 금장태, '유학사상과 유교문화', 한국학술정보, 2001, 48쪽.
13) 조남욱·조윤래, 「일제시대의 韓國儒敎와 儒敎敎育」, '한국민족문화' 16, 2000, 204쪽.
14) 금장태, '한국의 선비와 선비정신',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65쪽.
려는 한편, 유학의 인의충효(仁義忠孝)의 가르침을 교묘히 이용하여 식민지 체제 유지와 사회교화에 활용하려 하였다. 경학원은 유교의 보편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일제의 통치에 필요한 교화와 선전의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친일유림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친일유림은 의리론에 입각한 저항정신을제거하고 유학의 인의충효의 덕목을 강조하거나, ‘시중(時中)’ 또는 ‘시의(時宜)’의 논리를 내세우며 식민지 현실을 인정하고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라고 주장하였다.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같은 일본의 관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이런 주장을 펼쳤다.
당시 유학과 유림이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주범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고, 더구나 근대학문을 익힌 지식인들은 유학을 ‘구학(舊學)’으로 지칭하며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무용한 학문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친일유림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유학을 옹호하며 일제의 식민지배를 용인하는 주장을 펼쳤다.
경학원 사성을 지냈던 김완진(金完鎭)의 말을 들어보자.
생각건대 우리 유교는 실로 도덕(道德)의 본원이 되며, 향교와 경학원은 이에 유림(儒林)의 중심에 있습니다.
부유함에는 역사(歷史)가 있으며, 옹위함에는 대중(大衆)이 있습니다.
참으로 능히 향교와 경학원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서 유시(儒是)를 분명하게 정하고 방향을 제시해 준다음, 성심으로 인도하여 이끌면서 강론을 하여 밝히고, 닦으면서 거행한다면, 풀잎 위로 부는 바람을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날랜 수레가 익숙한 길을 가듯, 길을 가는 것이 절로 배는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륜(彛倫)을 부식하고, 그렇게 하여 세도(世道)를 유지한다면, 사문(斯文)에다가 해와 달을 내걸어 만대토록 영원할 태평시대를 열고, 이 백성들을 도탄에 빠진가운데에서 구제하여 함께 태평스러운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로부터 차례대로 시행될 것으로, 역시 높고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15)
나라는 망하여 일제의 식민지가 된 상황에서 김완진이 말하듯이 유학으로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여 태평시대로 가자는 것은, 일제의 식민지 현실은 인정하고 식민통치에 협조하자는 말과 다름 아니다.
역시 경학원 사성, 부제학을 역임한 이대영(李大榮)도 같은 논지의 주장을 펴고 있다.
현재 세대의 등급이 낮아져서 말세의 풍속이 부박해진 탓에 이륜(彛倫)과 도덕(道德)이 점차없어지게 되었으며, 미풍(美風)과 양속(良俗)이 그로 인하여 무너지게 되어 어느 사이에 금수(禽獸)와 같이 되었습니다. ……(중략)…… 그런즉 우리 모든 유자로써 자처하는 자들이 태연스럽게 강 건너 불을 보듯이 하면서 그들을 인도해 이끌어줄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유자의 지위에 있어서 어떻겠으며, 유자의 의무에 있어서 어떻겠습니까? ……(중략)…… 백성들을 이끄는 방도가 어찌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깨우쳐 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사방에 푯대를 바르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마땅히 행해야할 도인 것입니다.
성인의 도는 윤리를 밝히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백성들이 등을 돌려서 윤리를 밝게 알지 못할 것이 걱정된다면,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우애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있는 도를 극진히 하면 됩니다.
그리고 성인의 도는 인의(仁義)일 뿐입니다. 우리 백성들이 도를 반대로 하
15) 김완진, 「儒是」, '經學院雜誌' 제27호, 1926, 64쪽.
여 덕을 어그러뜨릴까 걱정된다면,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끼어서 먼저 세상에 임하는 도를다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노성(老成)한 분들이 고집스럽고 꽉 막혀서 되돌리기가 어려운 것이걱정된다면, 나에게 있는 시중(時中)의 도를 다하면 됩니다.
그리고 신진(新進)의 사람들이 학업을 하는 것을 싫어하여 피하는 것이 걱정 된다면, 나에게 있는 자식을 가르치는 방도를 다하면됩니다.16)
이대영이 주장한 요점은 윤리와 도덕이 타락한 현실을 지적하고 성인의 도인 ‘인의’를 밝혀서 윤리를회복하는 것이 유학자의 의무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시중(時中)’의 도를 다하라고 이대영은 말한다.
이 자료집에 실린 정봉시, 정만조의 글도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일제의 식민지배를 용인하는 바탕 위에서 유학의 가르침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시중은 실천하기가 매우 어려운 유교의 가르침이다.
유교에서는 오직 성인 공자(孔子)만이 시중을 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17)
모든 상황 속에서 시중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義)를 따르기 위함이요,18) 때에 따라 변역(變易)하는 것도 도(道)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19) 만일 조선의 유학자가 조선유교의 특성인 의리론(義理論)의 관점에서 망국의 현실에 대해 시중을 한다면,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이 거론한 ‘처변삼사(處變三事)’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즉 유인석처럼 멸망한 사직을 회복하기위하여 ‘거의소청(擧義掃淸)’하거나, 아니면 전우(田愚)처럼 ‘거지수구(去之守舊)’를 행하거나, 또는 송병선(宋秉璿)처럼 ‘자정치명(自靖致命)’을 선택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친일유림이 설명하는 ‘시중’은 의나 도의 기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망국의 현실, 즉 대한제국에서 일본제국으로 시대가 변했으니 시대에 따르라는 현실 순응의 태도를 유교의 ‘시중’을 끌
어다가 합리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친일유림은 유교의 도는 중국과 조선이 아니라 일본에 찬연히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였다.
지나(支那)는 유교의 발원지입니다.
그런데 청(淸) 황실이 전복되고 중화민국이 조직된 오늘날에 미쳐서는 의논이 셋으로 갈렸습니다.
수구파와 반대파와 혁명파가 그것입니다.
수구파라는것은 옛날을 그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반대파라는 것은 공화국의 정체(政體)를 띠면서 '춘추'의의리를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혁신파라는 것은 때에 따라서 절충하여 처지가 바뀌어도 어긋남이없는 자들입니다.
분열됨이 이와 같아서 서로 통일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 있어서는, 학계의 영수(領袖)와 학사와 박사 등의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쳐 우리 유도
를 힘써 진흥시켜서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크나큰 교화를 우러러 찬양하고, 과격하고 조리가 없는 이상한 사상을 미리 막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경학원의 직원과 각도의 유림들이 한 무리가 되어 동경 사문회(斯文會)가 주최하는‘공자가 죽은 뒤 2,400주년을 맞이하여 공자를 추모해 올리는 기념 제사(孔子歿後二千四百年追遠紀念祭)’에 가서 참여하여 祭典의 성대한 모습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도쿄제국대학(東
16) 이대영, 「儒者之地位及義務」, '經學院雜誌' 제26호, 1925, 51~52쪽.
17) '孟子', 萬章下. “孟子曰 伯夷 聖之淸者也 伊尹 聖之任者也 柳下惠 聖之和者也 孔子 聖之時者也.”
18) '論語', 里仁.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19) '周易', 易傳序. “易 變易也 隨時變易以從道也.”
京帝國大學) 강당 안에서 이노우에(井上博士) 박사의 강연을 들었는데, 그의 고매한 식견과 명쾌한 논변은 환히 통달하였고 드넓었습니다.
이에 비로소 우리 유학의 도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또한 우리들이 평소에 능히 글을 읽으면서도 제대로 연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깊이 탄식하였습니다.20)
김완진의 언급에서 볼 수 있듯이, 보수유림이 자부하던 ‘화하일맥(華夏一脈)’이 이제 조선이 아닌 일본에 남아있을 뿐 아니라 더욱 발전시켰다고 보았다.
이는 항일 성향의 보수유림이 가졌던 저항의식의 기반을 분쇄하는 것이다.
친일유림은 동아시아에서 일본만이 근대 문명과 유교를 동시에 발전시킨 나라로 여겼다.
그래서 자신들은 경전을 읽었지만 일본의 학자들보다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탄식하였다.
친일유림에게 ‘문명’과 ‘도’를 발전시킨 일본은 보수유림처럼 이적시(夷狄視)하는 원수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배워야 하고 받들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 ‘문명’과 ‘도’를 찬란하게 발전시킨 일본이 ‘문명’과 ‘도’가 떨어진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것은, 사회진화론뿐만 아니라 유교의 논리 안에서도정당한 것이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조선유학의 특징이자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의 기반이었던 실천적인의리론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친일유림에 의해 조선유학은 성격이 변질되어 일본국왕과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과 복종 이념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순응시키는 논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39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될 ‘황도유학’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4) 일제의 충량한 황민(皇民)이 되라는 ‘황도유학(皇道儒學)’을 주장
일본 식민주의 관학자 다카하시 도루(高橋亨)가 1939년 「왕도유교(王道儒道)에서 황도유도(皇道儒道)로」라는 글을 '조선(朝鮮)'에 게재한 후부터21) 식민지 조선에서 ‘황도유학론’은 본격적으로 공론화되었다.
이 자료집에도 다카하시가 주장한 이 글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다카하시는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제 조선에서 유교단체가 그 결속을 새롭게 하여 일어나서, 종래에 이곳의 지도계급 인사들의 자각 아래에 동아신질서 건립의 대업에 하나의 역할을 하겠다는 정신운동이 구체화하는 때를 맞이하였다.
이에 조금이라도 일본유도의 제일의체(第一義諦)를 밝혀서 이 운동이 목표해야 할곳에 대하여 사견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22)
다카하시가 언급한 조선에서 새롭게 결속되어 일어난 유교단체는 바로 조선유도연합회를 가리킨다.
그는 조선유도연합회가 결성되자 그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이 글을 작성한 것이다.
즉
20) 김완진, 「時代之儒敎」, '經學院雜誌' 24호, 1923, 83~88쪽.
21) 高橋亨, 「王道儒道より皇道儒道へ」, '朝鮮' 제295호, 1939년 12월호.
22) 위의 글, 10쪽.
그는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을 ‘동아신질서 건립의 대업’이라 하면서 조선의 ‘지도계급 인사’인 유림에게 ‘하나의 역할’을 적절히 하도록 하기 위해 일본유학의 진정한 의미를 논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다카하시는 ‘왕도(王道)’와 ‘황도(皇道)’의 용어를 가지고 중국유학과 일본유학의 특징을 논하였다.
즉 공자의 정치사상의 이상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인정하는 것으로 한(漢)민족의 국가조직의 근본 즉 국체(國體)에서 온 것이지만, 일본은 세계 유일의 특별국가로서 만국(萬國)에 비교할 수 없는 국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자의 정치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23)
다카하시가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일본의 국체는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제’였다.
다카하시가 주장한 ‘황도유학’은 일본의 신국사상, 즉 신도(神道)와 유교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일본화된 유교를 의미하며 그 정점에 ‘천황’이 있었다.
그러므로 ‘황도유학’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는 이론이었다.
그가 조선유도연합회의 결성에 발맞추어 조선의 유림에게 ‘황도유학’을 강조한 이유는 다음 말에서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최근에 와서 지나(支那) 정치당국의 좁은 소견으로 극동의 형세에 파천황(破天荒)의 변화가생겨 만주제국이 우리나라의 원조로 세우지고, 왕도국가를 표방하며, 이어서 우리나라 광고(曠古)의 대사업인 지나사변(支那事變)이 돌발하여, 유형무형의 국력 총동원을 하게 하였으며, 당당하게 이 사태에 직면해서 이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 국가 몇 백 년의 대계(大計)를 확립해야할 중대한 시기를 만났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은 일본에 부속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 지리적인 위치가 중요한 것과 그 물적 인적 자원이 풍부함으로써 이러한 비상시에 일본에게는 자진해서 빛나는 한 역할을 담당하는 화려한 사태에 서게 된 것이다. 이때를 맞이하여 조선의 유교단체가 경향을 통틀어 총동원해서 일치단결 이러한 운동에 참가하게 된 것은 참으로시의 적절한 것이다.
동시에 옛날부터 있었던 지나와 조선의 유교와 일본유교가 그 정치사상의근본 요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내선의 식자들이 잘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24)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경험의 연구를 통해 앞으로 다가올 전쟁은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고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도 없는 총력전이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내지(內地)’ 즉 일본 내의 인적·물적 자원뿐만 아니라 반드시 ‘외지(外地)’ 즉 조선 같은 식민지의 인적·물적 자원도 동원해야만 했다.
다카하시가 주창한 황도유학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민중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자진하여 인적·물적 자원을 바치도록 하는 정신과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황도유학’의 목적이었다.
즉 ‘황도유학’은 조선의 자원과 민중을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 등장한 어용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이 자료집에 실린 일본인들의 글들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조선인 친일유림들도 이러한 다카하시의 주장에 동조하여 적극적으로 ‘황도유학’을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안인식(安寅植), 이명세(李明世) 등이었다.
우선 안인식의 주장을 살펴보자.
23) 위의 글, 19~20쪽.
24) 위의 글, 17쪽.
황도유학이란 우리나라 고유의 황도정신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동양도덕의 근원인 유교도덕의 진수를 융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국체를 명확하게 하고, 인도(人道)를 올바르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다시 이것을 상세하게 설명하면, 국체를 중심으로 인륜의 길을올바르게 할 수 있으며, 또 인륜의 길이 올바르게 되는데 따라서 국체는 더욱 익명(益明)하게 되는 까닭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국체와 인도와는 서로 순환작용을 하고, 서로 떨어질 수 없는관계를 갖는 것과 함께, 양자가 완전히 융합순화(融合醇化)되어 최고 지선(至善)의 국민도덕의기준이 되는 것이다.25)
안인식은 자신이 진정 일본제국의 신민이란 인식을 바탕으로 ‘황도유학’을 설명하고 있는데, 다카하시의 논리보다 더욱 세련되게 논하고 있다.
안인식은 일제가 일으킨 전쟁을 긍정하고 일본에 의한 동아신질서 건설을 주장하며 그에 부합하는 유도정신, 즉 ‘황도유학’을 열렬히 주장하였다.
동아 신질서 건설을 말하기 전에, 먼저 동아의 과거현상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따라서세계대세부터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세계 6대주 중에서 최근 2백년간은 유럽인의 침략시대였다.
유럽인의 과학지식과 기계문명의 발달에 따라 각종의 음흉한 수단과 교묘한 수단으로써 전세계 침략을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우월감은 항상 큰 소리 치기를, 전 세계의 3분의 1은 열등민족이 차지하고 있는 바, 자연자원은 사장(死藏)되고 있으며 이것을 개발 이용하고 있지 않는 자들이다.
우리와 같은 우월한 민족이 이러한 열등 민족을 굴복시키고 세상의 이익을 공개적으로 균등 향유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말하면서 엄청나게 심하게 굴어, 세계는 우월민족의세습재산을 하여금 우등인이 열등인을 배척하여 이익을 탈취하는 것은 인류가 금수를 쫓아내는것과 같은 것이라고 폭언을 하는 자마저 있는 것이다. ……(중략)…… 그래서 지나사변은 참으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성전인 동시에 동양인의 흥망사활의 분기점인 것을 깊이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때문에 지나사변의 목적은 전쟁에 있지 않고 건설에 있으며, 과거에 모든 불합리하고 부자연한 현 시국을 타파하고, 장차 평화와 행복을 가져와야 할 정연하고 질서 있는 체제를 건설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인 것이다. 이것은 소위 동아 신질서 건설의 표어가 만들어진 사연으로, 이 간단한 7자 안에는 1억 국민의 열성을 표방하고 전 동아를 위하여 공헌하지 않
을 수 없는 원대한 이상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26)
안인식은 ‘황도유학’을 일제의 침략전쟁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설명은 이명세의 주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들 미영(米英)민족의 소위 문명의 기조를 만든 사상은 개인주의, 유물주의 공리주의로서 민중의 모든 생활, 활동은 모두 개인의 이기적이고 향락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상이 극도로 발달한 결과, 소위 국가정치라는 것도 양육강식을 정당시
하고, 따라서 세계도처의 저급문화의 약소민족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노예로 간주하여, 착취무역
25) 安寅植, 「皇道儒學の本領」, '조선' 제347호, 1944, 26쪽. 이 글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 '유도' 1호(「皇道儒學」,
1942, 29~36쪽)와 '유도' 2호(「皇道儒學(2)」, 1942, 34~43쪽)에 게재되어 있다.
26) 안인식, 「동아의 건설과 유도정신」, '經學院雜誌' 제45호, 1940, 76~91쪽.
의 경쟁을 더욱 더 격렬화시켜서 ……(중략)…… 만주사변·지나사변 이번 대동아전쟁도 그들의 죄악을 성토하고 응징하기 위한 전쟁인 것이다.27)
이명세는 일제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으킨 전쟁들을 미국·영국의 죄악을 성토하고 응징하기 위한 의전(義戰)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명세는 일제가 저지른 태평양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일 뿐만 아니라‘동양을 위한 숭고한 전쟁’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그들의 개인주의·유물주의·공리주의는 그 뿌리에서 우리의 황도정신과는 서로 맞지 않아서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포악무도한 행동을 그대로 좌시할 때에는 동아인들의 동아는 그들의 식민지화가 될 우려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는 동아의 맹주인 입장에서 또한 도의국(道義國)인 정신으로 동아인을 대신하여 대동아전쟁의 정의로운 깃발을 올려 동아신질서의 건설을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28)
이명세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호도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명세는 일제가 벌인 침략 전쟁을 전세계가 동양의 약소민족의 생존을 위한 전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주장을 거침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명세가 ‘황도유학’을 주장하는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유학의 진흥은 대내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정교상(政敎上) 필요불가결한 중대한 문제일 뿐만아니라, 대외적으로는 동아공영권 확립을 하는데 여러 약소민족을 지도하며 보호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사항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중략)…… 마지막으로 우리 반도는 조선유도연합회 결성 이래, 관민이 일치하여 황도유학의 진흥에 착실히 힘을 쏟아 온 것은 흔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나, 유림이라는 사람은 먼저 우리 국체의 존경과 현대의 중대 시국을 인식하고, 종래부터 습득해 온 유교정신을, 황도정신에 합치시켜서 황국신민으로서의 길을 실천궁행함으로써, 국가적인 대사업에 공헌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마지 않는 바인 것이다.29)
이명세는 조선의 유림에게 조선시대에 이룩한 난숙한 경지의 성리학을 버리고 일본화된 유교, ‘황도유학’을 수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그의 담론은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일본천황’과 ‘일본제국’을 위하여 일제의 인적·물적 수탈에 자발적으로 헌신하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황도유학’은 높은수준의 학문을 지닌 조선유림에 대한 ‘황민화(皇民化)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안인식·이명세 등은 유림을 ‘어육(魚肉)’의 시대에 강제로 밀어 넣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룩한 조선의 유학사상을 완전히 훼손시켰다.
27) 春山明世, 「東亞共榮圈と儒敎の役割」, '유도' 1호, 1942, 38쪽.
28) 위의 글, 38쪽.
29) 위의 글, 41쪽.
4. 결론
지금까지 이 책에 수록된 내용 중 일부를 중심으로 자료의 성격과 여기에서 보이는 유학계의 친일협력행위를 살펴보았다.
또한 이 해제에서 다루지 못하였지만, 박제빈이 쓴 ‘강사시찰견문소기’와 조선유도연합회에서 간행한 '조선유림성지순배기'는 1910년대와 1940년대에 조선유림이 일본을 견문한 내용을 수록한 기록으로 당시 유림의 일본 인식 등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자료이다.
아직 학계에 제대로 소개되어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 자료집의 발간으로 많은 관심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비록 이 자료집이 유학계의 친일협력을 보여주는 자료를 모두 수록하지는 못하였지만, 여기에 실린 자료들을 통해 일제강점기 유학계의 친일협력의 실태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두드러진 활약을 한 보수유림 학파들의 형성과 전개,학파의 핵심 인물들의 사상과 활동 등에 대한 연구는 일일이 밝히지 못할 정도로 많은 연구성과를 내고 있다.
특히 화서학파를 비롯한 보수유림의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에 대한 연구가 매우 많다.30)
그러나 일제강점기 유림과 유학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파리장서운동과 김창숙 등 항일유림에 대한 연구성과가 있을 뿐이다.31)
유학사상사의 관점에서 볼 때, 친일유림의 활동과 사상은 지우고 싶은 한국 유교의 굴절된 모습이지만, 회피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담고 있는 어두운 부분이다.
이러한 그들의 활동에 대해 당시 다른 유림은 비판적 인식을 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유림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것과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일제에 협력하였던 유림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필요하다.
친일유림의 활동은 조선민중에게 더욱 유교와 유림에 대한 환멸을 불러 일으켰으며, 가뜩이나 위축될 대로 위축된 유교는 사실상 재기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친일유림이 주장한 ‘황도유학’은 전 시대에 이룩한 높은 수준의 유학사상의 단절을 초래하여 한국유학사상의 발전적 흐름을 끊은 악영향을 남겼다.
그리고 해방 후 친일유림에 대한 역사적 청산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여파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따라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이 자료집은 학계의 연구에 일정한 자극과 충분한 기여를 하리라 생각한다.
* 해제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나 일부 내용은 본 위원회의 취지와 다를 수 있음.
30) 한말 의병운동에 관한 연구사 정리와 한말 의병운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연구에 대해서는 오영섭, '고종황제와 한말의병', 선인, 2007 참조.
31) 파리장서운동과 김창숙에 대한 연구사 정리에 대해서는 서동일, 「1919년 巴里長書運動의 전개와 역사적 성격」,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참조.
Ⅰ. 경학원
1. 일본국왕 및 고위관료 송축문
1) 「즉위대례식헌송문(卽位大禮式獻頌文)」(1915)1)
1915년 11월 10일은 우리 천황폐하(天皇陛下)께서 보조(寶祚)에 빛나게 임어하는 예식을 거행하는 날이었는데, 일진(日辰)이 길하고 좋아서 성대한 의식을 순조롭게 마쳤다.
그러니 중외(中外)의 신민(臣民)들이 어찌 경축하는 마음을 금할 수 있겠는가. 본 경학원(經學院)은 직임이 현관(賢關)2)을 맡고 있는바, 송축하는 정성이 더욱 간절하다. 이에 공경스레 송축을 바치는 글을 지어서 별도로 한 책을 만들어 백 번 절하고서 바치고자 삼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삼가 생각건대, 직접 거룩한 시대를 만나 성대한 의식을 올리는 것을 보게 되었는바, 하늘을 바라보고 성인을 우러르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립니다.
적이 생각건대, 위로 삼황 오제(三皇五帝)3)가 문적(文籍)에 실려진 이래로부터 황제의 자리에 등극(登極)하여 여러 신하들의 조회(朝會)를 받을 경우, 아래로 여항(閭巷)에 사는 필부나 바닷가와 산골짜기에 사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마에 손을 얹고 기뻐 손뼉을 치면서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송축(頌祝)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서책(書冊)에 분명하게 실려 있어 없었던 시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전성(全盛)하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삼가 지난날의 역사책을 살펴보건대,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아 위구(委裘)4)하에 따라 그 우뚝하고 뛰어난 모습을 우러름에 있어서는, 주(周) 나라 소공(召公)5)과 같이 거룩하고 어진 분도 근본을 단정히 하고 시초를 바르게 하면서 공경하고 근신하라고 경계시키고 고하였습니다.
또 혹 진저(震邸)6)에 있을 때부터 효인(孝仁)과 예의(禮義)로서 천하에 소문이 나 모두들 목을 길게 빼고서 사랑하여
떠받들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처음에 칙서(勅書)가 선포되기도 전에도 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풍채(風采)를 바라보기를 생각하고 덕화(德化)를 보기를 생각하였습니다.
1) 「즉위대례식헌송문」은 일본 다이쇼천황의 즉위대례식 때 ‘바친’ 송축문으로, 이 중 박제순의 글은 기존에 발간된 사료집Ⅱ권 Ⅳ장에서 한일합병기념 축하시문으로 이미 출간된 바 있다.
이번에 이 책에 전문을 수록하면서, 전체 체제상 다시 한번 포함시켰음을 밝혀둔다.
2) 현관(賢關) : 현자(賢者)가 되기 위해 통과하는 관문(關門)이라는 뜻으로, 흔히 성균관(成均館)을 가리키는말로 쓰인다.
3) 삼황 오제(三皇五帝) : 삼황(三皇)은 고대 중국의 전설상에 나오는 세 황제로, 일반적으로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를 가리키고, 오제(五帝)는 옛날 중국의 상고 시대에 있었다고 하는 다섯 제왕을 가리키는데, 그 설이 일정하지는 않으나 대개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을 가리킨다.
4) 위구(委裘) : 천황이 나이가 어려서 천황의 옷을 입을 수가 없으므로 천황의 자리를 거짓으로 설치한 다음,죽은 천황이 입던 옷을 천황의 자리에 놓아두고 조회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전하여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는 것을 말한다.
5) 소공(召公) : 주(周) 나라 때의 명신(名臣)으로, 선왕(宣王)의 명을 받아 사방의 오랑캐를 평정하였으며, 성왕(成王) 때에는 성왕의 삼촌이자 신하로서 성왕을 보좌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었다.
6) 진저(震邸) : 잠저(潛邸)와 같은 말로, 임금의 뒤를 이를 사람이 임금이 되기 전에 거처하고 있는 집을 말한다.
생각건대 우리 천황폐하(天皇陛下)께서는, 만대(萬代) 동안 한 계통으로 이어온 황가(皇家)의 종통(宗統)으로서 끝이 없이 큰 역복(曆服)7)을 이어, 자신을 공손하게 낮추면서 남면(南面)8)을 하여 명당(明堂)9)에서 다스림을 베푼 지가 지금까지 네 번이나 한서(寒暑)가 바뀌어졌습니다. 이에 성스럽고 이에 신명하며 이에 무예롭고 이에 문예로워, 백관들이 직무를 잘 수행하고 백성들이 모두 생업을 즐기고있습니다.
그 깊은 어짊과 후한 은택은 어느 먼 곳이고 닿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이르러 하늘의 위엄이 혁연히 노하여 육사(六師)10)가 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청도(靑島)11)를 함락시키고 개선가(凱旋歌)를 부르면서 돌아왔는바, 동양(東洋) 전체가 천하에서 높아지게 되었으니, 아름답기도 하고 성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오직 양암(諒陰)12)으로 인해 거상(居喪)하는 중에 있었던 탓에 아직까지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금년에 이르러서 보귀(寶龜)가 길함을 점침에 따라 큰 전례를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늘의 문이 열려져 구중궁궐이 개방되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사방 사람들이 와서 축하를 하였습니다.
무릇 우리 천황폐하의 신하가 되고 백성이 된 자들은 모두 4년 전부터 화육(化育)시켜 주고 생성(生成)시켜 주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만세 삼창을 부르면서 손뼉을 치고 춤을 추는 정성을 어찌 옛날에 공경하고 근신하라고 경계하고 고해 주는 것이나 풍채를 바라보기를 생각하고 덕화를보기를 생각하는 것이 비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은 말하기를, ‘오늘날의 예식은 실로삼황 오제가 문적에 실려 있는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보기 드물게 경사스러운 의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이어서 축하를 바친 나머지에 간략하게 몇 마디 말을 서술하여 화봉인(華封人)의 축하13)하는 마음을 부칩니다.
1915년 11월 10일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중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大提學) 정사위(正四位) 훈일등(勳一等) 자작(子爵) 신(臣) 박제순(朴齊純)은 지어서 올립니다.
7) 역복(曆服) : 역수(曆數)와 오복(五服)으로, ꡔ서경ꡕ 주서(周書) 대고(大誥)에 이르기를, “크게 생각건대 나 유충한 사람이 끝이 없이 큰 역복을 이었다.(洪惟我幼沖 嗣無疆大曆服)” 하였다.
8) 남면(南面) :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순(舜)은 몸을 공경히 하여 남면(南面)하는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였다.
9) 명당(明堂) : 제왕이 정교(政敎)를 펴는 궁전으로, 정전(正殿)을 말한다.
10) 육사(六師) : 천자가 거느리는 군대를 말한다. 천자는 6군을 거느리고 큰 나라는 3군을 거느리고 작은 나라는 2군을 거느리고, 아주 작은 나라는 1군을 거느린다.
11) 청도(靑島) : 중국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대정(大正) 3년(1914)에 구주(歐洲)의 열강들이 이곳으로 침입해 오자 일본(日本)이 군사를 보내어 싸워 이겨 일본의 차지가 되었다.
12) 양암(凉闇) : 임금이 부모의 상을 당하여 정무를 보지 않으면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정무(政務)를 신하들에게 맡기고서 이렇게 지냈다.
13) 화봉인(華封人)의 축하 : 장수하고 부귀하며 자녀를 많이 두기를 축원하는 것을 말한다. 화봉인 화지(華地)에 봉해 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요(堯) 임금 당시에 화봉인이 요 임금에게 수(壽)와 부(富)와 다남(多男)의 세 가지로 축하하자, 요 임금이 “수(壽)하면 욕(辱)이 많고, 부(富)하면 일이 많고, 다남(多男)하면 두려움이많다.” 하면서 사양하였다.
'莊子' 天地.
◇
하늘을 이어 등극한 지 사 년이나 지났거니 繼天立極四經年
전례 행함 늦어진 건 사고 있어 그런 거네 典禮追行事故緣
이 년 동안 양암하여 상복 제도 다 마치고 兩載諒陰常制畢
소춘14) 때의 길한 달에 크게 예식 베풀었네 小春吉月縟儀宣
전에 이미 학가15) 적에 어진 소문 퍼졌는데 昔從鶴駕仁聲遠
이제 용루16) 임어하여 보위 전해 받았다네 今御龍樓寶位傳
신성한 분 서로 이어 황가 법도 중해졌고 神聖相承家法重
정사 계책 안 바꾸어 효성의 맘 온전했네 政謨不改孝心全
폐하 생각 당우17) 치적 이룰 마음 도탑거니 宸衷自篤唐虞治
조정 계책 어느 누가 관갈18) 같이 안 어질랴 廟算誰非管葛賢
병갑에다 배와 수레 동아에서 으뜸이라 兵甲舟車冠東亞
가려주고 덮어주어 조선 땅에 임하였네 帲幪燾覆莅朝鮮
신하들은 아뢰어서 중요한 일 인준 받고 重要認准臣隣奏
예식 맡은 관원들은 분주하게 회동하네 奔走會同禮式員
경필19)을 막 마치이자 바로 쌍봉 내려오고 警蹕纔移雙鳳下
기마 군사 호위 속에 육룡20) 수레 나아가네 騎軍擁護六龍前
해를 가린 많은 깃발 여염집에 내 걸렸고 旌旗蔽日閭閻揭
구름 같은 수레와 말 도로 가득 메웠다네 車馬如雲道路塡
폐하께서 동경 가니 뭔 멀음이 있겠는가 帝出東京何遠有
백성들은 서궐 보며 모두들 다 기뻐하네 民瞻西闕擧欣然
위의 있는 관면21)들은 해 어기는 일이 없고 濟蹌冠冕無違日
장대하게 펼친 장막 하늘 온통 가리웠네 壯大幄帷可掩天
넓고 넓은 대로에선 화포 소리 일어나고 闊路通衢花砲起
14) 소춘(小春) : 음력으로 시월이나 십일월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11월을 가리킨다.
15) 학가(鶴駕) : 태자(太子)가 타는 수레로, 전하여 태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열선전(列仙傳)' 왕자교(王子喬)에 이르기를, “왕자교는 바로 주(周) 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인데, 일찍이 흰 학을 타고 가 후씨산(緱氏山)에 머물렀다.” 하였다. 이를 인해서 후대에는 태자의 거가(車駕)를 학가라고 하게 되었다.
16) 용루(龍樓) : 궁중의 누각으로, 전하여 대궐을 가리킨다.
17) 당우(唐虞) : 제요(帝堯) 도당씨(陶唐氏)와 제순(帝舜) 유우씨(有虞氏)의 합칭으로, 요순(堯舜) 시대를 가리킨다.
18) 관갈(管葛) : 전국시대 제(齊) 나라의 명상(名相)으로 환공(桓公)을 도와 패업(覇業)을 이룬 관중(管仲)과 삼국 시대 촉(蜀)나라의 명상인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19) 경필(警蹕) : 임금이 출입할 때 도중에 행인(行人)을 오가지 못하도록 경계시키는 것을 말한다.
20) 육룡(六龍) : 임금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옛날에 임금이 타는 수레는 말 여섯 마리가 끌었으므로, 말을 용(龍)이라고 칭하여 육룡이라고 하는 것이다.
21) 관면(冠冕) : 관은 머리에 쓰는 모자의 총칭이고, 면은 대부(大夫) 이상이 쓰는 예관(禮冠)인데, 흔히 높은관직의 조정 신하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천 대문의 만 집에선 전등 불빛 연이었네 千門萬戶電燈連
금빛 글씨 옥첩으로 훈공 적어 송축하고 金泥玉牒勳功頌
비단 끈에 은 도장은 기념하여 걸려있네 錦組銀章紀念懸
무기 걷고 문치 닦음 삼대 시대 같거니와22) 偃武修文三代共
숭유하며 도 높여서 오륜 행실 앞세우네 崇儒重道五倫先
궁중에서 잔치 열어 빠짐 없이 다 부르매 宮中賜讌遺無一
전 위의 꽃 꽂은 사람 천 명도 더 넘는구나 殿上簪花計以千
좋은 계책 사직 안정 되는 데서 말미암아 良策專由安社稷
옛 신하들 임천에서 늙어가지 않게 했네 舊臣不使老林泉
구중 궁궐 봄빛 깊은 속에 술잔 주고받고 九重春滿旅酬酌
만세 소리 드높아라 뭇 사람들 축하하네 萬歲聲高群賀筵
야인들은 지닌 의용 마치 맹호 같거니와 義勇野人猶虎猛
문졸들은 승평 누려 쪼그린 채 조는구나 昇平門卒作羊眠
빼난 선비 다 불러와 모두 등용하였으며 多招彦士如茅拔
황제 위엄 멀리 떨쳐 문득 개선하는구나 遠震皇威輒凱旋
반열 나가 성대한 일 바라다 볼 길 없기에 無路參班瞻盛擧
장수하길 축원하는 시편 지어 바치누나 祝君難老獻詩篇
1915년 11월 10일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경학원 부제학 정사위(正四位) 자작(子爵) 신 이용직(李容稙)은 지어서 올립니다.
◇
삼가 생각건대, 중정(中正)한 도(道)를 세워 일정한 법도를 세움에 가르침은 크게 드러나고 공렬은크게 계승하였으며,2
3) 천지(天地)의 원기(元氣)를 근본으로 삼고 정도에 입각하여 다스림을 펴매 그 자에 나아가 그에 따른 예를 행하였습니다. 이에 교화(敎化)는 가까운 데서부터 멀리까지 미치어 가 선조들의 옛 법을 명하여서 새롭게 하였습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천황폐하께서는, 큰 보배를 물려받아 하늘의 밝은 명을 이었으며, 거듭하여 밝히어서 교령(敎令)을 엄하게 하셨습니다. 거룩한 분으로서 거룩한 분을 이어서 만대 동안 한 계통으로 전하는 데에 응하였고, 비록 아름답지마는 아름답게 여기지 않으면서 하루에도 만 가지 일을 처리하는 것을생각하셨습니다.
펴고 굽히면서 늦추고 당기는 방도를 베풂에 위엄은 먼 나라까지 복종시켰고, 접역(鰈
22) 무기……같거니와 : 주(周) 나라 무왕이 상(尙) 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와 풍(豊) 땅에 이른 다음 무(武)를 쉬고문(文)을 닦기 위해 군마(軍馬)를 화산(華山)의 남쪽으로 돌려보내고 소를 도림(桃林)의 들판에 방목하였다.
'書經' 武成.
23) 가르침은……계승하였으며 : 주(周) 나라 목왕(穆王)이 군아(君牙)를 대사도(大司徒)로 삼고서 준 고명(誥命)에 이르기를, “아, 크게 드러났도다, 문왕의 가르침이여. 또한 크게 계승하였도다, 무왕의 공렬이여.(嗚呼 丕顯哉 文王謨 丕承哉 武王烈)” 하였다.
域)24)에서 품어주고 감싸주는 은혜를 폄에 어짊은 새로 붙은 나라에 흡족하였습니다.
이에 구오(九五)의 상서로운 운(運)25)에 크게 응하여, 삼천 가지의 성대한 의식(儀式)26)을 모두 거행하였습니다.
명당(明堂)27)에서 궁궐의 문을 열으니 왼쪽의 문짝과 오른쪽의 문짝이었으며, 하국(下國)에서 옥백(玉帛)을 바치매 남금(南金)28)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열 줄의 교서(敎書)29)를 내려 멀리 수레바퀴와 문자를 같이 하는 나라30)에까지 선포하였거니, 사방에서 모두들 우러러보매 바로 해와 달이 내려다 비추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머리털이 나고 이가 난 무리들은 모두가 춤을 추고 발을 구르면서 기뻐하고자 하는 정성이 간절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재주는 사장(詞匠)의 자리를 맡기에 부족한데, 직임은 현관(賢關)에 매여 있습니다.
은하수에 뗏목을 띄워 와서31) 외람되이 숭호(嵩呼)를 삼창(三唱)하는 반열(班列)32)에 끼었음에, 옥함(玉函)에서 붓을 꺼내들고 황하(黃河)가 한 번 맑아지기를 축원하는 말33)을 바칩니다.
1915년 11월 10일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贊議) 경학원 부제학(副提學) 정오위(正五位) 신 박제빈(朴齊斌)은 지어서 올립니다.
◇
삼가 생각건대, 황가(皇家)가 한 계통으로 서로 전하매 이에 문덕(文德)을 크게 펼치었고, 성인께서 큰 보배로 삼는 것을 위(位)라고 하는바34) 이에 예의(禮儀)를 잘 닦았습니다. 그러니 임어(臨御)하는 날에 진하(進賀)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공경히 생각건대 천황폐하께서는, 자태는 상성(上聖)들보다 빼어나고, 덕(德)은 동궁(東宮)에서 흘러
24) 접역(鰈域) : 가자미가 생산되는 지역이란 뜻으로, 우리나라의 별칭(別稱)이다.
'이아의소(爾雅義疏)'에 이르기를, “동방에 비목어(比木魚)가 있는데, 두 마리가 나란히 가지 않으면 앞으로 가지 못한다.” 하였다.
25) 구오(九五)의……운(運) : '주역' 건괘(乾卦) 구오효(九五爻)의 효사(爻辭)에 “구오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음에 대인을 봄이 이롭다.”고 한 데에서 나온 말로, 천자의 자리를 뜻한다.
26) 삼천 가지의……의식(儀式) : 즉위하는 데 따른 많은 의식절차를 말한다.
'예기' “경례(經禮)가 삼백 가지이고 곡례(曲禮)가 삼천 가지인데, 그 근본을 따져보면 성경 한 가지일 뿐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하였다.
27) 명당(明堂) : 제왕이 정교(政敎)를 펴는 궁전으로, 정전(正殿)을 말한다.
28) 남금(南金) : 남방에서 생산되는 질이 아주 좋은 금(金)으로, 흔히 아주 진귀한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29) 열 줄의 교서(敎書) : 황제가 내리는 칙서(勅書)를 가리킨다.
30) 수레바퀴와……나라 : 수레는 같은 크기의 바퀴를 달고 문자는 같은 모양의 글자를 쓴다는 뜻으로, 한 문화권으로 통일되는 것을 뜻한다.
31) 은하수에……와서 : 사신(使臣)이 되었다는 뜻으로, 즉위식을 축하하러 사신이 되어 왔음을 뜻한다.
옛날에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장건(張騫)으로 하여금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고 하는 데에서 유래된 말이다.
32) 숭호(嵩呼)를……반열(班列) : 만세 삼창을 부르는 반열을 말한다.
숭호는 천자를 위하여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옛날에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친히 숭산(嵩山) 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신민(臣民)이 만세 삼창을한 데에서 유래된 말이다.
33) 황하(黃河)가……말 : 성인이 태어나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라는 말이다. 황하의 물은 본디 탁하여서 맑을 때가 없으나, 1천 년마다 한 차례씩 맑아지는데, 이는 성인(聖人)이 태어나 태평성대를 이룰 조짐이라고 한다.
34) 성인(聖人)께서……하는바 :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이르기를, “천지의 큰 덕을 생(生)이라고 하고, 성인의 큰 보배를 위(位)라고 한다.(天地之大德曰生 聖人之大寶曰位)” 하였다.
전해졌습니다.
크게 드러나고 크게 이으매 사해(四海) 사람들이 성효(聖孝)를 표준으로 삼았고, 잘 계승하고 잘 조술하매 동양(東洋)이 그에 힘입어 평화를 누리었습니다. 이에 길한 달을 맞이하여 면복(冕服)35)을 새로 입게 되었는바, 이에 좋은 날짜를 가려 성대한 전례를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은(殷) 나라 고종(高宗)의 양암(諒陰)36)을 본받아서 삼 년 동안 말을 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였고, 주(周) 나라 임금의 향명(嚮明)37)을 뒤쫓아서 사방에서 와서 축하하는 다스림을 베푸시었습니다.
정사를 펼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北極星)이 북쪽에 있는 것과 같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공손하게 자신을 낮추어서 남면(南面)을 하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종적은 현관(賢關)에 머물러 있으나, 마음은 천궐(天闕)을 향해 가 있습니다.
매번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여 기우는 정성38)을 품고 있으면서도 비록 조정 반열에 나아가 끼일 수는 없으나, 멀리 봉래(蓬萊)의 오색 구름39)을 바라보매 스스로 축원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1915년 11월 10일에 조선총독부 경학원 사성(司成) 신(臣) 이인직(李人稙)은 지어서 올립니다.
◇
저기 멀리 서경 쪽을 바라다보니 瞻彼西京
만년 동안 전해져 온 황도로구나 萬歲皇都
나라 처음 세워 통서 전하였거니 刱業垂統
호욱에다 당우 같은 분들이었네40) 昊頊唐虞
이에 지금 이르러선 아름답거니 式至今休
밝게 빛날 운세 다시 열리었다네 熙運再啓
성인께서 황제 자리 나아가시매 聖人卽阼
성대하고 성대한 예 거행했다네 載行縟禮
이에 우리 다시금 또 중흥되어서 嗣我中興
하락41)에다 그 융성함 비길 만하네 河洛比隆
35) 면복(冕服) : 황제가 종묘나 사직에 제사지낼 때와 정조(正朝), 동지(冬至), 수책(受冊), 납비(納妃) 등의 의식을 올릴 때 작용하는 대례복(大禮服)으로, 면류관(冕旒冠)과 곤복(袞服)으로 차림을 한다.
36) 양암(諒陰) : 황제가 상중(喪中)에 있는 것을 뜻한다.
37) 향명(嚮明) : 하늘이 장차 밝아짐을 뜻하는 말로,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이르기를, “성인은 남면을 하여천하를 다스리거니와, 밝아지는 곳을 향해 다스린다.(聖人 南面而聽天下 嚮明而治)” 하였다.
38) 해바라기가……정성 : 임금을 향하여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충정(衷情)을 말한다. 해바라기는 항상 해를 향
해 피므로, 이를 인하여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정성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는데,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진사왕식전(陳思王植傳)에 이르기를, “해바라기가 꽃잎을 해를 향하여 기울이는 것과 같으니, 태양이 비록 해바라기를 위하여 빛을 돌리지는 않으나,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것은 정성인 것입니다.”하였다.
39) 봉래(蓬萊)의 오색 구름 : 일본의 황궐(皇闕)이 있는 곳을 뜻한다. 봉래는 동해 바다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인데, 여기서는 일본을 뜻하는 말로 쓰이었다. 또 임금이 머물고 있는 대궐의 위에는 항상 오색 구름이 떠 있다고 한다.
40) 호욱(昊頊)에다……분들이었네 : 호욱(昊頊)은 오제(五帝)가운데 한 사람인 소호(少昊)와 전욱(顓頊)을 가리키고, 당우(唐虞)는 역시 오제 가운데 한 사람인 제요(帝堯) 도당씨(陶唐氏)와 제순(帝舜) 유우씨(有虞氏)를가리킨다.
지극한 그 다스림에 다 속했거니 咸囿至治
전대보다 이루는 공 더 훌륭하리 將多前功
청도 쳐서 정벌을 한 전쟁에서는42) 靑島之役
의 성했고 인도 또한 지극하였네 義盛仁至
덕과 업적 천고에도 드문 것이니 德業曠千
풍교 이제 온 사방에 퍼질 것이리 風敎訖四
전각 주위 숭호43) 소리 울려 퍼지면 繞殿嵩呼
백관들이 모두 서로 화답을 하리 百工相和
산을 넘고 바다 건너 폐백을 들고 梯航玉帛
모두들 다 바다 동쪽 향해 가누나 咸趨海左
화육하여 주는 은혜 고루 입은 건 均蒙化育
바로 우리 접역44) 땅의 창생들이네 鰈域蒼生
이에 아주 짧은 시를 공손히 지어 恭述短篇
하찮은 신 정성 여기 부치옵니다 庶寓微誠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사성(司成) 신 박치상(朴稚祥)은 지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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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땅에 좋은 기운 울울하게 서렸거니 西京佳氣鬱嵯峨
서른 여섯 봉에다가 두 줄기의 강물이네 三十六峰二條河
자신궁45)의 궁궐들이 하늘 속에 솟았거니 紫宸宮殿天中起
열성들의 지난 자취 구름처럼 스쳐갔네 列聖往蹟虛雲過
지금까지 스무 번의 육십 갑자 돌았거니 迄今卄週六十甲
한 계통이 만대 이어 어진 풍교 흡족하네 萬代一系仁風洽
성인께서 즉위하여 성대한 예 올렸거니 聖人阼卽備縟儀
의장대의 검패46) 소리 어좌 주위 에워싸네 衛仗劍珮環寶榻
선제께서 용비하여 동쪽에다 솥 정함에47) 先帝龍飛東定鼎
41) 하락(河洛) :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가리킨다. 하도는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고 하는 그림으로 '주역' 팔괘의 근원이 된 것이고, 낙서는 하우씨(夏禹氏)가 치수(治水)할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고 하는 글로서 '서경'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근원이 된 것이다.
42) 청도(靑島)……전쟁에서는 : 대정(大正) 3년에 중국의 청도에서 있었던 전쟁을 말한다.
43) 숭호(嵩呼) : 황제를 위하여 만세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
44) 접역(鰈域) :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45) 자신궁(紫宸宮) : 황제가 조정 백관과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정전(正殿)의 이름으로, 전하여 황제가 사는궁궐을 말한다.
46) 검패(劍佩) : 의장대가 차고 있는 보검(寶劍)과 패옥(佩玉)을 뜻한다. 검패(劍珮)라고도 한다.
47) 선제(先帝)께서……정함에 : 수도(首都)를 동쪽으로 옮겼다는 끗이다. 선제는 명치(明治)천황을 가리키며, 용
진저에 덕 흘러들어 모두 목을 빼고 봤네 震邸毓德齊延頸
끊임없을 사복48) 이어 사 년여가 되었으니 無疆嗣服四載餘
삼황 오제 같은 정치 어느 누가 나란하랴 三五休治孰比竝
의로운 기 붉은 해가 물 건너에 보이거니 義旗紅旭隔水見
청주 다시 탈환하여 적현에다 붙이었네49) 奪還靑洲付赤縣
바다 파도 굽이치며 동해 향해 몰려오고 海波萬折湊東瀛
파진악의 노래 소리 음지연서 퍼지누나50) 破陣樂歌飮至宴
뭇 관원들 나아가매 우레 소리 전 감싸고 百寮蹌趨繞殿雷
옥백 잡은 사신들은 모두 동쪽 향해 가네 玉帛梯航盡東來
북두 국자 술을 뜨고 남산수를 축원하니51) 㪺將北斗祝南山
팔방으로 난 성문을 활짝 열어 제치었네 閶門八闥洞然開
근역52) 땅의 창생 모두 새 교화를 향하기에 槿域蒼生新嚮化
은하수에 뗏목 띄워 축하하는 맘 올리네 星漢浮槎騰鷰賀
노산 지은 우위우로 작은 정성 바치면서53) 魯山于蔿效寸誠
경운가54)로 백관들이 화답한 데 비기누나 敢擬卿雲百工和
비(龍飛)는 새로 제왕의 위에 오른 것을 말하며, 솥을 정하였다는 것은 수도를 새로 정한 것을 뜻한다.
48) 사복(嗣服) : 왕위를 계승하여 보위(寶位)에 오르는 것을 뜻한다.
49) 청주(靑洲)……붙이었네 : 청주는 청도(靑島)를 가리키고, 적현(赤縣)은 중국을 뜻한다. '사기(史記)' 맹자전(孟子傳)에 “추연(鄒衍)이 중국을 일러 적현 신주(赤縣神州)라 했다.” 하였다.
50) 파진악(破陣樂)의……퍼지누나 : 파진악은 당 태종(唐太宗) 때 만들어진 악무(樂舞)인 칠덕무(七德舞)를 말한다.
본래의 이름은 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인데 태종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유무주(劉武周)를 쳐부순 공을 기리기 위하여 군중(軍中)에서 만든 악곡(樂曲)이다. 음지연(飮至宴)은 정벌에서 돌아와 종묘(宗廟)에 승리를 고하고서 베푸는 잔치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5년조에 이르기를, “음지(飮至)는 종묘에 이른 것을 고하고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告至于廟而飮酒)” 하였다.
51) 북두(北斗)……축원하니 : 술잔을 올리면서 장수(長壽)하기를 축원한다는 뜻이다. 북두칠성(北斗七星)의 모양이 마치 술을 뜨는 국자와 같이 생겼으므로 흔히 국자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남산수(南山壽)는 남산처럼 오래도록 장수(長壽)하라는 것으로, '시경'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이르기를, “달의 초승달과 같으며, 해의 떠오름과 같으며, 남산의 장수함과 같아서, 이지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송백의 무성함과 같아 그대를계승하지 않음이 없도다.(如月之恆 如日之升 如南山之壽 不騫不崩 如松栢之茂 無不爾或承)” 하였다.
52) 근역(槿域) : 우리나라의 별칭이다.
53) 노산(魯山)……바치면서 : 노산은 당(唐) 나라 때 노산령(魯山令)을 지내면서 많은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원덕수(元德秀)를 가리키며, 우위우(于蔿于)는 그가 지은 노래 이름이다.
당 현종(唐玄宗)이 일찍이 동도(東都)에 있을 때 오봉루(五鳳樓) 아래에서 신하들과 잔치를 베풀면서 인근에 사는 수령들로 하여금 각자 음악(音樂)을 가지고 와 올리게 하였다. 이에 다른 수령들은 모두 많은 인원의 악공(樂工)들에게 비단 옷을 입혀 가지고 데리고 와 화려한 음악을 올리었는데, 원덕수는 악공 몇 명을 데리고 와 자신이 지은 우위우라는 노래
를 올렸다. 그러자 현종이 감탄하면서 “이 노래는 현인(賢人)의 말이다.” 하였으며, 이어 재상에게 명해 화려한 음악을 올린 하내 태수(河內太守)를 파직하게 하였으므로 원덕수의 이름이 크게 드러나게 되었다. '新唐書' 卓行列傳 元德秀.
54) 경운가(卿雲歌) :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선위(禪位)하려고 할 때 백관들과 함께 불렀다고 하는 노래인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구름이 찬란함이여, 옆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도다. 해와 달이 빛나고 빛남이여, 아침이 가면 다시 아침이 오는도다.(卿雲爛兮 糺縵縵兮 日月光華 旦復旦兮)” 하였다.
1915년 11월 10일에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유 경학원 강사(講士) 정칠위(正七位) 신(臣) 여규형(呂圭亨)은 지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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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1월 10일은 바로 사황제 폐하(嗣皇帝陛下)께서 즉위하는 대례식(大禮式)을 거행하는 날입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거룩하고 신명하며 문예롭고 무예로우며, 총명하고 밝으며 슬기롭고 지혜로우십니다. 그리하여 황하(黃河)가 천 년에 한 번 맑아지는 운55)에 응해, 구오(九五)의 보위(寶位)56)에 바르게 임하시었습니다. 그 동안에 은종(殷宗)이 삼 년 동안 양암한 것57)을 이미 마쳤으니, 우제(虞帝)가 상일(上日)에 한 것58)을 뒤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뚝한 공과 성대한 덕은 삼황(三皇)59)을 사황(四皇)이 되게 할 수가 있고, 굉대한 업적과 문채로운 문장은 이의(二儀)
60)가 삼의(三儀)로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道)는 공검(恭儉)함을 체 받았으며,마음은 성현(聖賢)들에게서 노닐었습니다. 그리하여 대통(大統)을 잘 이어서 여지(輿地)에서 뭇 사람들의 마음을 합하였고, 홍운(鴻運)61)을 밝게 조술(祖述)하여 학궁(學宮)에서 성인을 높이 받들었습니다.
순박하였던 옛날의 아름다운 풍속을 모두 회복시키었고, 말세 세상의 누추한 풍습을 완전히 다 씻어내었는바, 찬란하게 아주 잘 갖추어졌으며, 아름답고도 또한 성대하기도 합니다.
삼가 일찍이 보건대, 주(周) 나라가 쇠하여 도(道)가 폐해진 이후로 급급하게 사도(斯道)로써 세교(世敎)를 유지되게 한 것이 오늘날과 같이 성대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오백 년 만에 다시 부흥시키기를 억조 창생들이 모두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은 외람스럽게도 천박한 견해를 가진 일개 서생으로서 현재 강원(講院)의 직임을 맡고 있습니다.
태학(太學)의 현관(賢關)에서는 옥을 쪼는 영역(領域)에 나아가지를 못하였고, 원관(圓冠)과 구리(句履)62)를 착용함에 실로 선비들의 반열에 끼어있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승평(昇平)의 시대를 즐겁게목도하였는바, 이는 천 년 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것입니다. 이에 들은 바를 높이 받들고 아는 바를직접 실천해 교육하는 데에서 저버리지 않을 것을 구하였고, 그 의(誼)를 바로 하고 그 도(道)를 밝히어
55) 황하(黃河)가……운 : 성인이 나와 태평성대를 이룰 운을 말한다.
56) 구오(九五)의 보위(寶位) :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것을 말한다.
57) 은종(殷宗)이……것 : 은 나라 고종(高宗)이 삼 년 동안 상제(喪制)를 지킨 것을 말한다. 주) 참조.
58) 우제(虞帝)가……것 : 순(舜) 임금이 요(堯) 임금의 제위(帝位)를 이어받은 것을 말한다. 우제는 순 임금을
가리키고 상일(上日)은 정월초하루를 가리킨다.
'서경' 순전(舜典)에 이르기를, “정월초하루에 종(終)을 문조에서 받으셨다.(正月上日 受終于文祖)”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상일(上日)은 초하루이다.
수종(受終)은 요(堯) 임금이 제위(帝位)의 일을 마쳐서 순 임금이 받은 것이다. 문조(文祖)는 요 임금의 조상의사당이다.” 하였다.
59) 삼황(三皇) : 고대 중국의 전설상에 나오는 세 황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를 가리키며, 일설(一說)에는 포희씨(包犠氏), 여왜씨(女媧氏), 신농씨(神農氏.). 또 일설에는 천황씨(天皇氏),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를 말하기도 한다.
60) 이의(二儀) : 천지(天地)를 가리키기도 하고 일월(日月)을 가리키기도 한다.
61) 홍운(鴻運) : 홍운(洪運)과 같은 말로 하늘의 뜻, 천명(天命)을 의미한다.
62) 원관(圓冠)과 구리(句履) : 원관은 둥그런 모양새의 갓이고, 구리는 신발의 끝 부분에 장식이 달린 신발인데,
모두 유생(儒生)들이 착용하는 것이다.
서 정치 교화에 보답하기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경축하면서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하겠기에, 삼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시를 올립니다.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동방에서 뜨는 해는 東方之日
새벽녘에 빛 비추네 載昕其陽
즐거운 저 군자께선 樂只君子
만수무강 누리소서 萬壽無疆 흥(興)이다
동방에서 뜨는 해는 東方之日
때맞추어 하늘 도네 載曮其時
즐거운 저 군자께선 樂只君子
만수무강 누리소서 萬壽無期 흥이다
동방에서 뜨는 해는 東方之日
저녁나절 빛 비추네 載晛其景
즐거운 저 군자께선 樂只君子
만수무강 누리소서 萬壽無競 흥이다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강사 신 황돈수(黃敦秀)는 지어서 올립니다.
◇
크나큰 기업(基業)을 열어 제도를 정하고 다스림을 이룩하매 삼대(三代) 때부터 여기에서 성하였으며, 크나큰 명에 응해 신성한 분들이 서로 이으매 만대(萬代)토록 태평함을 열었습니다.
이에 해가 바야흐로 중천에 떠 있는 것과 같아서 하늘의 아래가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천황폐하께서는, 용처럼 날아올라 크나큰 운에 응하여, 후손들을 위해 남겨주신 계책을 잘 이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백대토록 전해온 종황(琮璜)63)이 돌아갈 곳이 있으매 슬기로운 자질이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었고, 사해(四海)에서 부르는 구가(謳歌) 소리가 모두 속하매 아름다운 소문이 나라 안에 일찌감치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크나큰 호칭을 높이 게양하는 것은 참으로 큰 덕이 있는 자가 반드시 얻는 것입니다.
이에 아름답고 흡족한 다스림을 넓히었고, 이에 유정유일(惟精惟一)64)의 전함을 드리웠습니다.
건곤(乾坤)이 더욱 높아지매 천년 만에 한 번 맑아지는 운이 이르는 데에 크게 응하였으며, 일월(日
63) 종황(琮璜) : 종(琮)과 황(璜)으로, 모두 묘당(廟堂)에 있는 옥으로 만든 그릇이다.
64) 유정유일(惟精惟一) :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전해 주었다고 하는 심법(心法)으로,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이르기를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만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하였다.
月)이 서로 이어서 비춤에 억만년토록 영원할 아름다움을 모두 송축하고 있습니다. 문왕(文王)의 덕스러움과 순수함은 양양하게 많은 복을 받았으며, 대요(大堯)의 신명하고 거룩함은 탕탕하여 무어라 이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름답게도 크게 드러나고 크게 이어받음에 이제 명철함을 명하고 길함을 명하였습니다.
삼가 교화(敎化)의 다스림이 날로 새로워지고 크나큰 복이 시냇물처럼 이르기를 바랍니다.
하늘의높음과 땅의 두터움을 어찌 그림으로 그려서 능히 다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달은 둥글어지고 해는 떠오르니 오직 복을 받음이 끝이 없기만을 송축 드립니다.65)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강사 신(臣) 한창우(韓昌愚)는 지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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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만들고 스승을 만듦에 한 성(姓)의 통서(統緖)를 크게 이었고, 그 이름을 얻고 그 복을 얻으매 만민들이 구가(謳歌)하는 소리를 시원스레 들었습니다. 이에 하루 동안 예를 행하매, 사방에서 바람처럼 동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천황 폐하께서는, 가만히 있어도 다스려지는 도가 있는 임금이십니다.
이에 문예롭고 무예로우며 이에 거룩하고 신령하여 마침 삼천 년 만에 다시 회복되는 운세를 당하였고, 너로 하여금
창성하게 하며 너로 하여금 장수하게 하매 참으로 억만년토록 끝이 없을 아름다움이 되었습니다.
지난 임자년(1912)에 보위(寶位)에 처음으로 등극하시어 명(命)이 구주(九州)와 사해(四海)에 온전히 부합하였고, 을묘년(1915)에 이르러서 성대한 의식을 크게 거행하여 공이 실로 오제(五帝)와 삼황(三皇)을 겸하였습니다.
방록(邦籙)은 비록 옛 것이지만 새롭게 되었고, 덕업(德業)은 가까운 데로부터 먼 곳까지 미쳤습니다.
대정(大正)의 보력(寶曆)을 특별히 게양하여 팔연(八埏)66)에 나라를 빛내었고, 신무(神武)67)의 정통(正統)을 빛나게 이어서 만대에다 천명(天命)을 기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미나리를 바치고자하는 소원68)에서 다함께 언덕처럼 유구하기를 축원 드리는 것이며, 이 때문에 온 천하 사람들이 폐백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에서 강한(江漢)이 조종(祖宗)하는 데69)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에 축하하는 날을 당하여 더욱더 호배(虎拜)70)를 올리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남극성(南極星)71)
65) 달은……드립니다 : '시경' 소아(小雅) 천보에 나오는 시를 인용한 것으로, 흥성하여 발전하기를 축원하는
말이다.
66) 팔연(八埏) : 땅의 팔방(八方)의 끝으로, 천하(天下)를 가리킨다.
67) 신무(神武) : 제1대의 일본 천황(天皇)을 가리킨다.
68) 미나리를……소원 : 보잘 것 없는 것이나마 바치고자 하는 소원으로, 흔히 윗사람에게 물품이나 말을 올릴때 겸사(謙辭)로 쓰는 말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미나리를 먹어보고 맛있다고 여겨 부자에게 이를 바쳤는데, 부자가 먹어보고는 맛이 쓰고 배가 아프다고 하면서 그 사람을 원망하였으므로 그 사람이 몹시 무안해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楊朱.
69) 강한(江漢)이……데 : 중국의 양자강(揚子江)이나 한수(漢水) 등의 모든 물이 결국은 동쪽에 있는 바다로 향하여 들어간다는 데에서 온 말로, 모든 속국(屬國)들이 대국(大國)을 우러러 섬기는 것을 뜻한다.
70) 호배(虎拜) : 신하가 황제를 배알하면서 절하는 것을 말한다. 호(虎)는 주(周) 나라 선왕(宣王) 때의 신하인소목공(召穆公)의 이름이다.
71) 남극성(南極星) :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별로, 노인성(老人星), 또는 수성(壽星)이라고도 한다.
의 상서로운 빛이 빛나매 온 세상에서 축수(祝壽)를 올리고, 동궁(東宮)의 효로써 다스림이 더욱 도타워서 백료(百僚)들에게 곡연(曲宴)을 베풀었습니다.
삼가 다스림의 교화가 날로 융성해져서 크나큰 복이 시냇물처럼 이르기를 바랍니다. 온 천하가 왕토(王土)가 아님이 없으매 억조창생들의 정성에 실로 잘 들어맞으며, 백성들 중 현명한 자들이 모두 황제의 신하이매 황하가 일천 년 만에 한 번 맑아지는 운세가 있기를 모두들 송축 드립니다.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강사 신(臣) 성낙현(成樂賢)은 지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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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께서 즉위하여 자신궁에 나아가매 天皇卽位紫宸宮
조야에선 환성 속에 태평 오길 송축하네 朝野歡聲頌泰通
통일을 한 신위 보니 군국 형세 장대하고 一統神威軍國壯
만년 전한 보록72) 보니 황제 계책 웅대하네 萬年寶籙帝圖雄
조정 신하 패옥 차고 해를 향해 달려가고 廷臣劍佩趨紅旭
연로에는 생가 소리 울려 창공 퍼지누나 輦路笙歌出碧穹
이로부터 대양에선 함께 교화 입을 거로 從此大洋同被化
거룩하고 밝음 본디 동쪽 서쪽 한계 없네 聖明原不限西東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강사 신 김동진(金東振)은 지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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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皇天)이 중국(中國)의 백성들을 부탁함에 오직 덕을 씀에 부지런히 하라고 하였고,73) 성인(聖人)이 대보(大寶)의 자리에 거함에 사람으로써 지키라고 하였습니다.74) 이에 삼무(三無)75)를 받들어서 문득 구유(九有)76)를 어루만지게 하였습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천황폐하께서는, 청궁(靑宮)77)에서 상서로움을 기르다가, 황옥(黃屋)78)에서 존귀하
72) 보록(寶籙) : 하늘에서 봉황(鳳凰)이 날아와 황제(黃帝)와 제요(帝堯)에게 주었다고 하는 도록(圖籙)으로, 흔히 천명(天命)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73) 황천(皇天)이……하였고 : '서경' 주서(周書) 재재(梓材)에 이르기를, “황천이 이미 중국의 백성과 그 강토를 성왕에게 맡겨 주셨으니, 이제 왕께서는 밝은 덕을 쓰시어 혼미한 백성들을 기쁘게 하고 위로하여 천명을받으신 선왕을 기쁘게 하소서.(皇天 旣付中國民 越厥疆土于先王 肆王 惟德 用 和懌先後迷民 用懌先王受命)”하였다.
74) 성인(聖人)이……하였습니다 : '주역' 계사(繫辭)에 이르기를, “천지의 큰 덕을 생(生)이라고 하고, 성인의 큰 보배를 위(位)라고 한다. 무엇으로써 지위를 지키는가? 사람이며, 무엇으로써 사람을 모으는가? 재물이다.
(天地之大德曰生 聖人之大寶曰位 何以守位 曰仁 何以聚人 曰財)” 하였다.
75) 삼무(三無) : 소리가 없는 음악과 형체가 없는 예(禮)와 복(服)이 없는 상(喪)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소리가 없는 음악, 형체가 없는 예, 복이 없는 상, 이것을 일러 삼무(三無)라고 한다.” 하였다. '禮記' 孔子閑居.
76) 구유(九有) : 구주(九州)와 같은 말로, 천하를 말한다. '시경' 상송(商頌) 현조(玄鳥)에 이르기를, “바야흐로 그 임금에게 명하여 문득 구유를 차지하게 하였다.(方命厥后 奄有九有)” 하였다.
77) 청궁(靑宮) : 태자궁(太子宮)으로, 동궁(東宮)과 같은 말이다. 오행설(五行說)에 있어서 청색은 사계절로는 봄
게 임하셨습니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바른 사람들이라서 가르침이 이미 자선(資善)79)에서 부지런하였고,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천하에 소문이 나서 자리가 승화(承華)80)에 오르는 것이 마땅하였습니다.
이에 황하(黃河)가 한 번 맑아지는 것을 송축하여 출진(出震)의 운세81)에 응하였고, 밝음을 이어서 사방을 비춤에 이미 작리(作离)의 아름다움82)이 징험 되었습니다.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는 데 대한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였으매, 궤석(几席)에 기대어서 내린 밝은명83)을 더욱더 사모합니다. 하늘에서 줄 만하여 주었으매 한(漢) 나라 문제(文帝)의 대횡(大橫)84)에 부합하였고,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매 주(周) 나라 성왕(成王)의 소비(小毖)85)에 힘쓰셨습니다.
우(禹) 임금의 옛 복(服)을 이으매 만대의 공을 이루기를 기약하였고,86) 국 속에서 요 임금이 보임에 삼 년 동안 정사를 변경하지 않았습니다.87)
이에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든 만물이 영원토록 힘입어 밝게 소생되었고, 산천이나 귀신이 모두 기뻐하면서 떠받들고 있습니다. 구가(謳歌) 소리가 임금에게 돌아가매 하(夏) 나라 황실의 융성함을 만난것이 기쁘며, 수부(壽富)하고 다남(多男)하매 화봉(華封)의 축원(祝願)88)을 바치고자 합니다.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강사 신(臣) 정봉현(鄭鳳鉉)은 지어서 올립니다.
에 해당되며, 방위로는 동쪽에 해당되므로, 춘궁(春宮)이라고도 칭하고 동궁(東宮)이라고도 칭한다.
78) 황옥(黃屋) : 제왕(帝王)이 사는 궁궐을 뜻한다.
79) 자선(資善) : 송(宋) 나라 때 황태자(皇太子)가 학문을 닦던 곳이다.
80) 승화(承華) : 태자궁의 궁문(宮門) 이름이다.
81) 출진(出震)의 운세 :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는 운을 말한다.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이르기를, “상제께서 진(震)에서 나와 손(巽)에 깨끗하다.(帝出乎震 齊乎巽)” 하였다.
82) 작리(作离)의 아름다움 : 황제가 밝은 덕을 이어 받아서 천하를 다스리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주역' 이괘(離卦)의 상(象)에 이르기를, “밝음이 둘인 것이 이(離)가 되니, 대인(大人)이 보고서 밝음을 이어 받아서 사
방을 비춘다.(明兩 作離 大人 以 繼明 照于四方)” 하였다.
83) 궤석(几席)에……명(命) : 황제가 죽음에 임하여 내리는 마지막 유명(遺命)을 말한다.
'서경' 고명(顧命)에 이르기를, “위대한 군주께서 옥궤(玉几)에 기대어 마지막 명령을 말씀하사, 너에게 명하여 가르침을 잇게 하였다.(皇后憑玉几 道揚末命 命汝嗣訓)” 하였다.
84) 대횡(大橫) : 거북을 가지고 치는 점괘에 큰 가로무늬가 나타나는 것으로, 이는 황제가 등극할 조짐이라고 한다.
한(漢) 나라 효문제(孝文帝)가 거북점을 치니 이러한 점괘가 나타나 황제에 등극하였다.
85) 소비(小毖) : '시경' 주송(周頌)의 편명(篇名)인데, 흔히 임금이 스스로 징계되어서 신하들에게 도와주기를 요구하는 뜻으로 쓰이었다. 주(周) 나라 성왕(成王)이 충신들에게 자신을 도와주어서 환난(患難)을 구제해달라고 하였다.
86) 우(禹) 임금의……기약하였고 : 천하를 다스리는 공을 이루기를 기약한다는 뜻이다. 복(服)은 왕기(王畿) 이외의 강토(疆土)로, 후대에는 중국 구주(九州)의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었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이르기를, “만방을 표정하여 우 임금의 옛날 복(服)을 잇게 하셨다.(表正萬邦 纘禹舊服)” 하였다.
87) 국 속에서……않았습니다 : 전대의 황제를 우러러 사모하여 그가 행한 정사를 바꾸지 않았다는 뜻이다.
옛날에 요(堯) 임금이 죽자 순(舜) 임금이 삼 년 동안을 우러러 사모하였는데, 앉아 있을 때면 요 임금의 모습이담벼락에 나타나고, 밥을 먹을 때면 국그릇에 나타났다고 한다.
88) 화봉(華封)의 축원(祝願) : 장수하고 부귀하며 자녀를 많이 두기를 축원하는 것을 말한다.
화봉은 화지(華地)에 봉해 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요(堯) 임금 당시에 화봉인이 요 임금에게 수(壽)와 부(富)와 다남(多男)의 세 가지로 축하하자, 요 임금이 “수(壽)하면 욕(辱)이 많고, 부(富)하면 일이 많고, 다남(多男)하면 두려움이많다.” 하면서 사양하였다.
'장자' 天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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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궁의 궁전 안에 상서로운 빛 엉기어 紫宸宮殿瑞光凝
좋은 점괘 드러나서 황제 자리 등극했네 顯筴揚徽寶座登
빛이 나는 병풍에는 해와 달이 걸려 있고 晃曜罘罳懸日月
추창하는 검패 소리 속에 장수 축원하네 趨蹌劍佩祝崗陵
사년 동안 현풍89) 속에 흠뻑 젖어 떠받들고 四年愛戴玄風浴
만대토록 대력 이음 기쁘게들 바라보네 萬世欣瞻大曆承
산골짝과 물가 사는 함령90) 모두 교화됨에 陬澨含靈齊嚮化
부상91) 땅의 하늘 멀리 바다 파도 깨끗하네 搏桑天遠海波澄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강사 신(臣) 박승동(朴昇東)은 지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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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땅에 애연하게 보록92) 내려 왔거니와 扶桑藹以寶籙
상서로운 해 떠올라 다시금 또 빛나누나 瑞日出而重光
일천 년의 세월 지난 지난날의 도성에서 一千年之舊都
십일월의 어느 날에 명 새롭게 되었다네 十一月之新命
황상께서 옛 복을 다 이은 것이 아름다워93) 黃裳穆其纘服
만국에서 모두들 다 우러르는 때로구나 際萬國之咸仰
문물 모습 찬란하게 빛나 아름답거니와 猗文物之章章
거룩하고 신령한 분 대 이은 걸 축하하네 賀聖神之承承
선황께서 황제 자리 즉위하신 뒤로부터 自先皇之陟元
대개 밝은 자질로써 뒤를 이어 밝히셨네 蓋以明而繼明
태평한 운 응하여서 모두 통합시켰거니 膺運泰而統合
황제 자리 즉위하여 교화 다시 열었다네 首出震而開化
떠받드는 데서 무위 다스림94)이 보이거니 無爲象於願戴
온 천하가 잘 다스려지지 아니 하겠는가 不知天下治歟
89) 현풍(玄風) : 황제가 펼치는 청정(淸靜)하고 무위(無爲)한 교화(敎化)를 말한다.
90) 함령(含靈) : 영성(靈性)을 가진 존재인 인간(人間)을 말한다.
91) 부상(扶桑) :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나무 이름으로, 해가 뜨는 곳, 즉 일본을 가리킨다.
92) 보록(寶籙) : 천명(天命)을 뜻한다. 주) 참조.
93) 황상(黃裳)께서……아름다워 : 황상은 '주역' 곤괘(坤卦) 육오효(六五爻)의 효사(爻辭)에 “황상처럼 하면 크게 선하여 길하리라.(黃裳 元吉)” 한 데에서 나온 말로, 흔히 태자(太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복(服)은왕기(王畿) 이외의 오복(五服)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다스림이 미치는 전 지역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94) 무위(無爲) 다스림 :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 다스리는 것으로, 무위이화(無爲而化)와 같은 말인데, 흔히 제왕(帝王)의 인정(仁政)이나 덕화(德化)를 표현하는 말로 쓰인다.
하늘에서 동방 돌봐 선대를 잘 잇게 하매 天眷東而克肖
황제께서 신하들과 백성이라 말하셨네 皇帝若曰臣庶
중주 지역 평정하여 이에 밝아졌거니와 平中洲而越明
외방에다 조서 내려 크게 어루만져줬네 詔外服而殷頫
문명 이룰 시기 마침 적당한 때 당했기에 文明會而適當
예관에게 명해 널리 예법 채집하게 했네 命禮官使博採
하늘의 명 을묘년이 되는 해에 폈거니와 天其申於歲卯
즉위하는 데서 제도 일신하게 되었다네 一新制於卽位
거룩하고 신령스런 적통으로 뒤이으매 嗣聖神之嫡統
저칠에서 왕업 이룬 분의 영묘이시라네95) 溯沮柒之靈苗
구가 소리 사해에서 함께 노래 부르면서 謳歌同於四海
모두들 다 우리 임금 아들이라 말하누나 曰吾君之子也
별들 빨리 모여들어 북극성을 향하거니96) 星弁會而拱極
예의 모습 훌륭하여 정말 크게 볼 만하네 大可觀夫禮儀
구여 노래 부르면서 뿔 술잔을 쳐들고는97) 歌九如而兕稱
만년 가길 축원하며 호배98)의 절 올리누나 祝萬年而虎拜
저녁 햇빛 비치어서 이슬방울 떨어지자 窮日照而露墯
집집마다 모두들 다 대정 책력 거는구나 大正曆於家家
햇빛 길게 비치어서 성수를 더 늘리거니 陽線長以聖壽
천억 년에 이르도록 끝이 없을 것이로다 至千億而無疆
펄럭이는 깃발 보니 붉은 해가 나부끼매 觀乎旗而颺紅
큰 말로 술 뜨고서는 장수하길 기원하네99) 酌以斗而祈黃
95) 저칠(沮柒)에서……영묘(靈苗)이시라네 : 저칠은 중국에 있는 저수(沮水)와 칠수(柒水)로, 흔히 왕업이 처음
일어난 곳을 가리킨다.
'시경' 대아(大雅) 면편(緜篇)에 이르기를, “면면한 오이 넝쿨이여, 백성이 처음 산것이, 저수와 칠수의 강가로부터였네.(緜緜瓜瓞 民之初生 自土沮漆)” 하였는데, 이 시는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일어남이 본디 태왕(大王)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말한 시이다. 영묘(靈苗)는 신성한 분의 후예를 뜻한다.
96) 별들……향하거니 : 별은 각국에서 오는 사신들을 뜻하고, 북극성은 일본 천황을 상징한다.
97) 구여(九如) 노래……쳐들고는 : 구여 노래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편(天保篇)에 나오는 아홉 가지의축복으로, 곧 여산(如山), 여부(如阜), 여강(如岡), 여릉(如陵), 여천방지(如川方至), 여월항(如月恒), 여일승(如日升), 여남산수(如南山壽), 여송백무(如松柏茂)를 말한다. 뿔 술잔을 쳐든다는 것은 술잔을 올리면서 축원하는 것으로, '시경' 빈풍(豳風) 칠월편(七月篇)에 “저 뿔로 만든 술잔을 드니, 만수무강하리로다.(稱彼兕觥賜 萬壽無疆)” 한 데에서 온 말이다.
98) 호배(虎拜) : 대신(大臣)이 천자를 배알하여 절하는 것을 말한다. 호는 주(周) 나라 선왕(宣王) 때 소목공(召穆公)의 이름이다.
99) 큰 말로……기원하네 : '시경' 대아 행위(行葦)에 이르기를, “증손이 주인이니, 술과 단술이 맛있도다.
큰 말로 술을 떠서 장수하길 기원하도다.(曾孫維主 酒醴維醹 酌以大斗 以祈黃耈)” 하였다.
양양하게 복의 바다 물결 쏟아 붓거니와 洋洋注以福海
백천의 물 흘러흘러 동쪽 향해 조회하네 沛百川而朝東
황제께서 자리하여 위에 앉아 있거니와 位乎乾而在上
펼친 교화 해가 중천 떠 있는 것 같으리라 化如日而方中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강사 신 오헌영(吳憲泳)은 지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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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생각건대, 명이 오래된 나라에서 새롭게 되매 법도를 잡아서 운수에 응하였고, 지위는 큰 덕이있는 분이 반드시 얻는 법이매 황제 자리에 올라 남면(南面)을 하셨습니다. 이에 황제 자리에 즉위하여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대개 듣건대, 면절(綿蕝)100)로 예법을 익힘에 황제가 귀한 줄을 안 것은 한고조(漢高祖)가 처음 등극한 때이고, 도서(圖書)와 공물(貢物)을 상고하여 뭇 신하들의 조회를 받은 것은 당(唐) 나라의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실로 제왕가(帝王家)의 바뀔 수 없는 법전인 것이며, 또한 역시 조종조(祖宗朝)에서이미 시행한 규례입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천황폐하께서는, 아름다운 명성이 일찌감치 오주(五洲)101)에 퍼졌고, 슬기로운 덕이 오래 동안 이극(貳極)102)에서 드러났습니다. 군국(軍國)의 일을 감무(監撫)하는 일이 중한 바여서 원량(元良)103)이 곧게 되고, 구가(謳歌)하고 조근(朝覲)하는 것이 모두 돌아가매 우리 임금이 아들이 되셨습니다.
황가(皇家)의 적통(嫡統)이매 백 스물 두 분의 성신(聖神)이 서로 이은 것이 아름답고, 온 천하에 살아가고 있는 육천만 명의 신민들이 모두들 떠받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거룩한 효성으로 거상(居喪)하고 있는 날을 당하였으므로, 전례(典禮)가 이에 상제를 마치는 시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삼 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 능히 은(殷) 나라 고종(高宗)의 침묵을 뒤따랐고, 하루라도 자리를 비워둘 수가 없으매 어찌 순(舜) 임금이 황제의 자리를 공손히 받는 것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이에 길한 날짜를 택하여 크나큰 예를 거행하였습니다.
삼대(三代) 시대가 성대한 때이기에 의문(儀文)은 고금(古今)의 제도를 참작하여 시행하였고, 사해(四海) 사람들이 모두 회동함에 기쁨은 중외(中外)에 넘쳐흐릅니다. 육비(六飛)104)를 타고서 황제자리에 임어하매 비유하자면 북극성(北極星)이 북쪽에 있는 것만 같고, 팔창(八窓)105)을 확 열고서 밝은 곳으로 향하매 자신을 공손히 하여 남면(南面)을 하였습니다.
수레와 의복의 제도가 성대하여 처음 즉위하
100) 면절(綿蕝) : 면체(綿蕞)와 같은 말로, 야외(野外)에서 예(禮)를 익힐 때, 새끼를 둘러 조정(朝廷)의 표시를하고 띠풀을 묶어서 줄지어 눌어 놓아 관작(官爵)의 고하를 표시하던 것인데, 후대에는 조정의 예법을 제정하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었다. 한 고조(漢高祖) 때 숙손통(叔孫通)이 제자 1백여 인과 더불어 야외에서 이렇게 하여 예를 제정하였다. '史記' 叔孫通傳.
101) 오주(五洲) : 오대주(五大洲)와 같은 말로, 지구(地球) 전체를 가리킨다.
102) 이극(貳極) : 황태자의 자리를 가리킨다.
103) 원량(元良) : 황태자를 가리킨다.
104) 육비(六飛) : 육룡(六龍)과 같은 말로, 임금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주) 참조.
105) 팔창(八窓) : 팔방(八方)으로 낸 창문을 말한다.
는 때의 아름다움을 꾸미고, 단(壇)과 마당이 훤히 열렸으매 만방의 사람들이 기뻐하며 바라보았습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들은 많으매 사방(四方)에서 복종하기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황하수가 맑고 바닷물이 고요하매 동양(東洋)이 저절로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성대하게 되었습니다. 신은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송축하는 시를 바칩니다.
그 시는다음과 같습니다.
아름답다 우리 황제 집안에서는 猗與皇家
명 다지길 크게 하고 치밀히 했네106) 宥密基命
만대 동안 한 계통을 이어와서는 萬世一系
일백하고 스물 두 분 성인 있었네 百卄二聖
맨 처음에 신무부터 시작하여서 肇自神武
우리 선제 폐하까지 이르렀다네 至于先帝
황제 자리 이을 후사 태어나시매 篤生嗣皇
거룩하고 또한 슬기 지니시었네 且聖且睿
소해107)에서 덕스러움 길러 오신 지 毓德小海
삼십 하고 몇 년 세월 더 흘렀다네 卅有餘年
순서 따라 황제 법통 전해 받은 건 繼序承統
적장자에 어진 자질 있어서였네 以嫡以賢
백관들이 자신들의 직책 총괄해 百官總己
삼 년 동안 도만 오직 생각하였네 三年思道
이에 예의 맡은 종백에게 명하여 爰命宗伯
전례 두루 상고하여 보게 하였네 典禮是考
거울 손에 잡고 또한 도서 받았고 握鏡受圖
옥 울리며 나아가서 단 설치했네 鳴玉設壇
강물 빛은 상서로운 징조 바치고 河色呈符
산의 소리 또한 함께 기뻐하누나 山聲供歡
업적 크게 드리우고 공을 빛내어 業垂功光
태산 반석 같은 기반 만들 것이리 盤泰爲基
천한 신은 절을 하고 송축시 지어 臣拜作頌
만년토록 장구하길 기원합니다 於萬年斯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강사 신 정봉시(鄭鳳時)는 지어서 올립니다.
106) 명 다지길……했네 : '시경' 주송(周頌) 호천유성장(昊天有成章)에 이르기를, “성왕께서 감히 편안히 계시지 못하고서, 밤낮으로 명 다지길 크게 하고 치밀하게 하였네.(成王不敢康 夙夜基命宥密)” 하였다.
107) 소해(少海) : 태자(太子)를 가리킨다. 천자(天子)를 대해(大海)에다 비유하므로 태자를 소해라고 칭하는 것이다.
◇
황제께서 역복108) 이어 정성 힘껏 펴거니와 於皇曆服棐忱宣
나는 용이 구천 임함 우러르며 바라보네 仰覩飛龍御九天
인정 펴자 뭇 별들이 북극성을 바라보고 仁政衆星歸北極
큰 은혜의 남은 은택 서쪽까지 입혀지네 洪恩餘澤被西沿
삼천계109)의 뭇 사람들 모두 함께 떠받들어 輿情共戴三千界
숭호110) 하며 일제히 다 억만년을 소리치네 嵩祝齊呼萬億年
길이 먼 곳 사람들이 황제의 덕 입게 하매 長使遠人蒙帝力
승평 속의 연월을 다 편한 잠에 부치누나 昇平烟月付安眠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강사 신 김광현(金光鉉)은 지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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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크며 위대하다 저 건원이여 大哉乾元
만물이 다 의지하여 시작 되도다111) 萬物資始
진방에서 나와서는 우뚝하여서 首出于震
밝은 곳을 향하여서 다스림 펴네 嚮明之治
빛나고도 빛난 우리 황제께서는 於赫我皇
만대토록 기강 잡아 통솔하리라 萬世統紀
그 밝음은 해와 달과 나란할 거고 明幷日月
그 덕은 또 하늘 땅과 합해지리라 德合天地
진저112)에서 머무시던 그 시절부터 自在震邸
목을 길게 빼고 모두 기대하였네 延頸戴已
크고도 큰 황가 기업 이어받아서 嗣承丕基
온 천하를 굽어보며 임어하셨네 臨御寰區
미처 의식 거행을 할 겨를도 없이 縟儀未遑
양암113) 속에 삼 년 세월 보내시었네 亮陰三秋
능히 선대 잘 잇고서 능히 조술해 克纘克述
108) 역복(曆服) : 역수(曆數)와 오복(五服)을 말한다.
109) 삼천계(三千界) : 불교(佛敎)에서 쓰는 용어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말하는데, 전 세계를 뜻하는말로 쓰인다.
110) 숭호(嵩呼) : 황제를 위하여 만세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
111) 크고……되도다 :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이르기를, “위대하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의지하여 시작하니, 이에 하늘을 통합하였도다.(大哉 乾元 萬物 資始 乃統天)” 하였다.
112) 진저(震邸) : 동궁(東宮)과 같은 말이다.
113) 양암(諒陰) : 황제가 상중(喪中)에 있는 것을 뜻한다.
세덕 이어 짝이 되길 구하시었네114) 世德作求
무예롭고 이에 또한 문예로우며 乃武乃文
관대하고 이에 또한 어지시었네 以寬以仁
밝은지라 후세에서 잘 계승하여 昭玆來許
하늘이나 사람에게 잘 순응했네 應天順人
세차로는 을묘년이 되는 올해에 維歲乙卯
성대할사 의식 크게 거행하였네 誕擧盛典
선인의 뜻 따라 효가 오게 했으매 遹追來孝
아아 어찌 드러나지 아니했으랴 於乎不顯
온 사해의 안이나 밖 어느 곳이고 薄海內外
분주하게 와서 명에 복종하누나 奔走服命
광주리에 현황115) 담아 폐백 올리며 篚厥玄黃
함께 경사 축하함을 그치지 않네 極不同慶
하늘에서 잘 돌보며 보우하여서 天其保佑
더해지지 않는 것이 없게 하리라 以莫不增
산과 같고 또한 언덕과도 같으며 如山如阜
보름달로 되는 달과 뜨는 해 같네116) 月恒日升
바람과 비 순조롭게 때맞춰 내려 風調雨順
여러 차례 풍년이 들 상서 얻었네 屢獲豊瑞
온 동방이 태산 반석 되게 한 거는 環東磐泰
어느 누가 우리에게 내려 준 건가 伊誰之賜
나라 위엄 떨쳐져서 빛이 나거니 國威國光
먼 곳까지 미치지가 않는 곳 없네 無遠不曁
멀리에서 봉래117) 있는 곳 바라보니 遙瞻蓬萊
오색 구름 서려 상서 바치는구나 五雲呈祥
송축 시를 지어 화봉 축하118) 바치며 祝華獻頌
만수무강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萬壽无疆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강사 정팔위(正八位) 신 양봉제(梁鳳濟)는 지어서 올립니다.
114) 세덕(世德)……구하시었네 : 선조들이 이룬 업적을 이어 받아 그에 필적할 업적을 이루고자 하였다는 뜻이다. '서경' 주서(周書) 강고(康誥)에 이르기를, “나는 이 은 나라 선철왕들의 덕으로써 백성들을 편안히 다스려 그 분들의 짝이 될 것이다.(我 時其惟殷先哲王德 用康乂民 作求)” 하였다.
115) 현황(玄黃) : 채색을 넣어서 짠 직물(織物)로, 흔히 폐백으로 바치는 물품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116) 산과……같네 : 장수(長壽)하기를 축원하는 말이다.
117) 봉래(蓬萊) : 전설상에 나오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로, 여기서는 일본을 뜻하는 말로 쓰이었다.
118) 화봉(華封) 축하 : 장수하고 부귀하고 다남(多男)하기를 축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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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궁에 나아가서 황제 자리 등극하여 穆紫宸兮履極
보책에다 고하는 걸 욕의라고 하는구나 鞠寶冊曰縟儀
겹욕 땅에 국도 정함 희씨가 점 친 것이고119) 鼎定鄏而姬卜
태산 숫돌 같아지란 거는 한의 맹서이네120) 泰若礪而漢誓
모두 선장121) 받들고서 절을 하고 조아리며 攀仙仗兮拜稽
자신궁에 나아가서 천황 폐하 뵙는구나 覿天皇于紫宮
온 나라의 백성들은 식 올리는 것을 보고 攈民國之示儀
황제 도성 근처에선 넓은 경사 불러오네 籲帝畿之廣慶
천하에서 으뜸인 곳 경도라고 말하거니 甲天下曰京都
오랜 옛날 신무께서 터전 닦은 곳이라네 粤神武之肇基
칠십이 대 동안 서로 주고받아 전하였고 七十二之世紀
이천 오백 년 동안의 오랜 역수 누리었네 一千五之曆數
부사산이 대동 지역 높이 솟아 우뚝하매 富山峙於大東
거기에서 나라 세운 정화122) 엿볼 수가 있네 俔立國之精華
대정 폐하 황제 자리 등극함에 미치어서 逮大正之繼極
아름답게 중외에다 반포하여 보이었네 穆頒示於中外
풍운 타고 올라서는 건시함을 어거하고123) 御風雲之乾始
해와 달이 밝게 내려 비추어서 아름답네 麗日月之離照
백관들을 거느리고 숭호 삼창 소리치니 帥百官而呼嵩
삼황 자리 올라가고 오제보다 뛰어나리 穆登三而軼五
지난날에 양암하며 침묵 속에 지내어서 曩恭黙于凉闇
예 행하려 하였으나 그럴 겨를 없었다네 禮欲行而靡暇
옥궤에서 마지막의 명 들어서 받들었고124) 攀末命於玉几
119) 겹욕(郟鄏)……것이고 : 겹욕은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의 서쪽에 있는 지명인데, 주(周) 나라 성왕(成王)이 이곳에다 국도(國都)를 정하였다. 희씨(姬氏)는 주(周) 나라의 국성(國姓)으로, 전하여 주 나라를뜻하는 말로 쓰인다.
120) 태산(泰山)……맹서이네 :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 공신(功臣)들을 나누어 봉작(封爵)하면서
“황하(黃河)가 작아져서 옷의 띠 같이 되고, 태산(泰山)이 평탄하여 숫돌 같이 되더라도 그 지위를 영구히보전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121) 선장(仙仗) : 황제의 의장(儀仗)을 말한다.
122) 정화(精華) : 사물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나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부분을 말한다.
123) 풍운(風雲)……어거하고 : 황제가 되어서 만물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풍운은 '주역' 건괘(乾卦)의 “구름은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雲從龍 風從虎)”고 한 데에서 나온 말로, 서로 뜻이 맞는 사람끼리어울린다는 뜻이고, 건시(乾始)는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위대하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의지하여 시작하니, 이에 하늘을 통합하였도다.(大哉 乾元 萬物 資始 乃統天)” 한 데에서 온 말로, 하늘이 만물의 시초가 됨을 뜻하는 말이다.
금구125)에서 열강들과 맞서 싸워 대항했네 抗列强於金甌
옛날 전적 상고하여 공경스레 살펴보니 稽古典而穆頫
때가 정말 성대한 예 올리어도 괜찮았네 時則可以飾禮
철권126)에다 위대한 공 기록하여 보관하고 藏鐵券之偉勳
보록127)에다 아름다운 휘호 올려 적었다네 署寶錄之徽號
예에 있어 큰 건 황제 등극하는 것이거니 禮之大而陟元
황제께서 너희들은 솔비128) 하라 하시었네 帝曰咨汝率俾
태평 성대 기반이 될 옛날 강역이거니와 基平代之舊域
기원 새로 정하여서 새 제사를 올렸다네 號紀元之新祀
대악 소리 퍼져가자 모든 이들 춤을 추고 渢大樂兮都踊
하루 사이 사방에서 모든 이들 다 듣누나 一日聞於四方
같은 수레 문자 쓰며 광주리에 공물 담아 拊車書而貢篚
각기 다른 옥백에다 토산물을 올리누나 區玉帛而執壤
붉은 구름 한 무더기 두 손으로 떠받들자 紅雲捧以一朶
황제께서 목목하게 그 가운데 임어하네 皇穆穆而御中
남산 같이 장수하란 송축가를 헌상하고 南山壽而獻頌
북두 국자 술을 떠서 축하하는 맘 바치네 北斗酌而登賀
제루씨129)가 큰 음악을 울리라고 소리치자 宣大音於鞮鞻
시원스레 뭇 음악들 앞다투어 울려지네 沛騰遻而競趨
일만 나라 의관들이 모여들어 절 올리매 拜萬國之衣冠
일원으로 통일 되는 문명의 때 만났다네 會一元之文明
산룡130) 환히 빛이 나는 곤룡포를 입고서는 山龍煌而袞茀
아름다운 천명 맞아 다시금 또 신명하네 迓天休之申命
산을 넘고 바다 건너 사해에서 모여들어 航梯湊於四海
옥백으로 폐백 삼아 만 구역서 바치누나 玉帛執於萬區
124) 옥궤(玉几)에……받들었고 : 돌아가신 황제가 죽기 직전에 내린 유조(遺詔)를 받들었다는 뜻이다.
'서경' 고명(顧命)에 이르기를, “왕이 물로 손을 씻고 얼굴을 씻자 부축하는 자가 면복(冕服)을 입히니, 왕이 옥궤(玉几)에 기대었다.(王 乃洮頮水 相 被冕服 憑玉几)” 하였다.
125) 금구(金甌) : 금으로 만든 그릇처럼 강토(疆土)가 단단한 것을 뜻하는데, 전하여 강토나 국토를 가리키는말로 쓰인다.
126) 철권(鐵券) : 임금이 공신(功臣)들에게 내리는 철로 만든 패(牌)이다.
127) 보록(寶祿) : 황실의 계보를 적어놓은 기록을 말한다.
128) 솔비(率俾) : 순종하여 따른다는 뜻으로, '서경' 주서(周書) 무성(武成)에 이르기를, “나 소자가 이미 어진사람을 얻어 감히 상제를 공경히 받들어서 어지러운 꾀를 막으니, 화하(華夏)와 만맥(蠻貊)이 모두 따르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予小子旣獲仁人 敢祗承上帝 以遏亂略 華夏蠻貊 罔不率俾)” 하였다.
129) 제루씨(鞮鞻氏) : '주례' 춘관(春官)에 나오는 관원으로, 사이(四夷)의 음악과 그 노래를 관장한다.
130) 산룡(山龍) : 옛날에 곤룡포나 혹은 깃발 위에 수놓은 산 모양과 용 모양의 문양을 말한다.
천민으로 삼아 모두 잘 살게들 하여 주매 戶天民兮家髦
진신들이 모여들어 기뻐하며 즐기누나 簇紳襟而于于
구름 속에 봉황 대궐 활짝 열려 드러나매 雲裏開於鳳闕
해 아래서 용루 나가 황제 자리 임어하네 日下御於龍樓
저 한강물 바라보매 목욕하는 우물 같아 瞻彼水兮浴井
시원스레 퍼진 덕교 양양하게 넘쳐나네 沛德敎之洋洋
총독에게 명해 경사 확장하게 하였거니 命總督而擴張
이 나라의 문풍 이제 떨쳐지게 되었구나 振玆方之文風
경학원을 설립하여 힘쓰라고 권면코자 設經院而勸勉
강사들을 두고서는 순회하게 하였다네 置講士而巡回
이에 신은 두 손 모아 절하고서 꿇어앉아 臣拜手而跪敷
거듭하여 이 시에다 흠모하는 정 부치네 重寓慕於斯賦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강사 신 박장홍(朴長鴻)은 지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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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토록 나라의 명 영원한 거는 萬年永命
임어 처음 하는 데서 기반한다네 基於初服
만기 업무 처리하는 공 이루는 건 萬機功化
한 덕을 잘 지키는 데 근원한다네 源於一德
아득히 먼 아주 오랜 그 옛날부터 從古以來
아주 밝고 밝은 임금 계시었다네 明君哲辟
여기에서 단서 처음 만들어지매 於斯造端
그 법 따라 쓰지 않은 분이 없었네 無不用極
생각건대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惟我皇帝
천부적인 덕성 타고 나시었다네 以天德性
그런데다 슬기로운 성학 익혀서 加以睿學
계속하여 밝히면서 공경히 했네 緝熙於敬
가까이론 선왕 남긴 법도 따르고 近法先王
멀리로는 전대 선인 조술하셨네 遠述前聖
안으로는 성인 심법 전해 받았고 內傳心法
밖으로는 시정에 다 통달하셨네 外達時政
임금의 덕 능히 잘도 지키어서는 克君之德
잠저 계실 때에부터 기르셨다네 在邸而養
어질다는 명성 일찍 두드러져서 仁聲著聞
사방에서 모두들 다 우러렀다네 四方咸仰
크고 작은 신하들에 이르기까지 逮大小臣
알밀131) 하여 마치 상을 당한 듯했네 遏密如喪
모두들 다 우리 임금이라 했거니 皆曰吾君
뒤를 이을 만한 어진 장자 있었네 有嗣賢長
황제 자리 이어받아 오름에 미쳐 及夫繼極
중외 사는 모든 이들 기뻐하였네 中外抃忻
성대하고 성대한 예 이에 거행해 縟禮斯擧
화봉인의 축하 서로 다퉈 올리네 華祝爭譔
천하 만국 온 나라의 의관들 모여 萬國衣冠
몰려와서 모습 뵙길 상상하였네 輻湊想見
온 사해의 모든 나라 도적을 거둬132) 四海圖籍
꽁꽁 묶어 두어 길이 안정시켰네 囊括永奠
황제께서 그런데도 되레 목목해 帝猶穆穆
문치의 덕 더더욱 더 닦으시었네 文德益修
넓고 넓게 베풀어서 두루 구제해 博施之濟
위로 요순 두 임금과 덕을 짝했네 堯舜上侔
살리기를 좋아하는 어진 그 마음 好生之心
저 하늘과 더불어서 함께 흐르네 與天同流
오직 그 덕 한결같이 굳게 잡아서 惟一其德
처음처럼 끝까지 잘 하시었다네 愼終如始
그리하여 우리 해동 나라로 하여금 期使海隅
순종하여 안 따르는 이 없게 했네 罔不率俾
은택 아래 목욕하여 푹 젖어들고 沐浴澤下
교화 속에 고무되어 춤을 추누나 鼓舞化裏
마음으로 백복 받길 축원하였고 心祝百祿
입으로는 만년 가라 소리 치누나 口呼萬祀
나라 기틀 단단하여 공고해 짐은 邦國之固
구하지를 않더라도 절로 이르리 不求自至
봉강 또한 넓혀져서 크게 되는 건 封疆之大
131) 알밀(遏密) : 임금이 죽어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요(堯)임금이 돌아가시니 백성이 부모를 잃은듯이 여겨 3년 동안 사해(四海)에서 팔음(八音)을 알밀하였는데, '서경' 순전(舜典)의 전(傳)에 이르기를,“알(遏)은 끊는 것이고, 밀(密)은 고요한 것이다.” 하였는바, 음악을 일체 연주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132) 온 사해의……거둬 : 천하의 여러 나라들을 합병시켰다는 뜻이다. 도적(圖籍)은 지도(地圖)와 호적(戶籍)을말한다. 한 고조(漢高祖)가 진(秦)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인 함양(咸陽)에 입성하였을 때 한 고조의 신하인소하(蕭何)가 진 나라 승상부(丞相府)로 달려가서 율령(律令)과 도적(圖籍)를 수습하여 보관하였다.
병혁은 또 닦여져서 예리해지리 兵革之利
그리하여 동아시아 모든 세계가 東亞世界
대지 위에 우뚝하게 솟아오르리 屹干大地
하수 띠가 되고 산이 숫돌 됨이나 河帶山礪
쇠로 만든 성이나 또 깊은 해자도 池湯城金
오래감이 되기에는 부족할 거고 不足爲遠
깊은 것이 되기에는 부족하리라 不足爲深
이와 같이 크나큰 복 받게 되는 건 如是厖祿
실로 지금 여기에서 기반하리라 實基於今
이와 같이 크고도 큰 아름다움은 如是鴻休
실로 임금 한 마음서 근본한다네 實本於心
엎드려서 생각건대 황제께서는 伏惟皇帝
안으로다 자신에게 돌이켜 보리 內省于躬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서 咸以罔缺
무궁하게 영원토록 전할 것이리 傳之無窮
바다 한쪽 구석 사는 미천한 신은 海隅賤臣
사사로운 정 맘속에 간절하다네 私切寸衷
이에 백 번 절하고서 축원 올리니 百拜獻祝
황제께서 들어주길 바라옵니다 冀格宸聰
1915년 11월 10일에 경학원 강사 신 이학재(李鶴在)는 지어서 올립니다.
<출전 : 「卽位大禮式獻頌文」, '經學院雜誌' 제9호, 1915년 1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