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3강-1 (2013. 10. 28.)
陳少卿 季任(二)
서장공부 오늘은 진 소경에게 답하는 두 번째 편지, 67쪽입니다.
우리가 한 시간을 법문을 하든지, 강의를 하든지, 또는 한 편의의 편지를 쓰더라도 대혜스님의 이 서장을 모델로 삼아서 그 형식을 우리가 취해서한다면, ‘정말 성의 있고 또 자기의 어떤 실력 이상의 표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서장을 보면서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불교역사가 2600여년의 세월이 지났는데요. 물론 개인적으로 공부를 많이 하고, 깨달음도 아주 높고 그래서 소견도 아주 뛰어난 그런 이들이 물론 많겠지요.
그러나 당신들의 법문을 통해서나 아니면 저서를 통해서나 이러한 것을 통해서 자기가 표현한 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 여기에 그 스님의 그런 어떤 지혜의 깊이와 또 지식의 폭과 이러한 것들을 후임들이 가늠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우리가 달리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없잖아요.
예를 들어서 육조 혜능스님 같은 이들을 우리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입장에서 출가했다.’ 이렇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후대에, 출가한 이후에 경전을 많이 봐서 육조스님의 육조단경이라든지, 그 외에 금강경을 해설한, 육조스님의 금강경을 해설 같은 것. 이런 것을 보면 경전을 상당히 많이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아, 육조스님은 출가할 때는 무식 했지만 출가이후에 글도 공부하고,
경전도 많이 보신 그런 분이다.’ 라는 그런 평가를 우리가 하듯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두들 포교 일선에 계시지만, 한 시간의 강의나 그 어떤 법문을 위해서, 그 날의 주제에 따라서 내가 평소에 알고 있는 내 소신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그리고 또 시대적인 어떤 상황을 얼마나 접목시킬 것인가? 이런 것을 먼저 계획하고, 그 다음에는 거기에 보조적으로 보다 더 아주 훌륭히 빛낼 수 있는 그런 고인들, 경전의 말씀이라든지, 조사스님의 말씀이라든지 이런 것을, 거기에 아주 적절히 오늘의 법문에 아주 알맞은 그러한 내용들을 빨리 섭렵을해서 거기다 사이사이에 필요한 만치, 삽입을 시키면 그 법문이 아주 빛나고, 격이 높아지는 것이지요.
**저는 누구 못지않게 다른 스님들의 법문을 많이 듣습니다.
TV를 통해서도 듣고, 라디오를 통해서도 듣고, 그 다음에 요즘은 CD라든지 녹음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얼마나 잘 되었습니까? 또 유 튜브에 들어가면요? 법문이 아주 많이 올려져있습니다. 어디든지 그냥 핸드폰 하나만 가지고도 법문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참고 할 만 한 꺼리가 아주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들어보면 자기 소신만가지고 한 시간 계속 떠드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남의 소리만가지고 떠드는 사람도 있고, 아주 각양각색입니다. 배울 점이 참 많습니다. 자기 소신만가지고 떠드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소신이 확고하기 때문에 들을 만하고, 또 인용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인용을 하면 그 사람의 생각보다는 보다 더 훌륭한 분들의 생각을 여기다 삽입시키기 때문에 거기도 또한 배울 점이 아주 많고 그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늘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을 열어놓고 준비를 많이 하는 겁니다.
제가 처음 통도사 강주로 갔을 때, 강의를 처음 맡아서 하면서,
‘이왕에 강의 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강의를 잘 할 것인가?’ 고민을 상당히 많이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서점에 수시로 가서, 강의에 관계되는 책들을 막 사서 그냥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 것은 대개 서울 장안에서 유명한 강사들. 또는 일류 대학에서 이름난 교수들의 명 강의, 주로 이런데 대한 책들이었습니다. 법문에 대한 것은 별로 없어요. 주로 그런데 대한, 대학에서 강의를 잘한다고 소문난 그런 사람들의 어떤 강의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읽어보니까 결론은 딱 하나로 표현하면 “준비뿐이다.ㆍ무조건 준비를 많이 하라.” 이 겁니다.
“준비를 많이 하라.” 그래 저는 한 시간 강의를 위해서는 열 시간이상 준비 하는 것을 그 때부터 원칙으로 세웠습니다. 열 시간이상 준비를 해서 그것 한 시간 동안 강의, 다 써 먹을 수 있나요? 그렇지요. 10분의 1도 못써 먹지요. 저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니까 10분의 1 못써 먹어요.
그렇지만 100이라고 하는 숫자를 가지고 열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강의를 하는 것하고, 열을 준비해서 열을 강의하는 것하고 이것은 듣는 사람에게 천지차이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가 준비한 것이 다 딸리고, 밑천도 다 딸리고 자기 소견도 다 딸리고 그러면 그냥 청중들이 그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100을 준비를 했는데, 내가 하~~ 준비를 많이 했는데 시간은 한정되어있다. 그래서 10분의 1도 밖에 이야기 못한다.
그러면 강의가 아주 풍부해지고 깊이가 있어지고 그래요.
제가 늘 대혜스님은 이 세상에서, 부처님 이후의 많은 조사스님들의 글을 봤지만, 대혜스님의 그 깨달음은 참~~ 아주 투철하고 그래서 지견이 뛰어나고, 거기에다가 불교에 대한 학식이 수많은 어록과 경전을 다 섭렵하고,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전부 외우고 있어요.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야~~ 참 천하에 이런 선지식이 있어야 되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늘 해오는 분이 대혜스님입니다. 그래서 뭐 선지식 중에서는 어쩌면 ‘제일가는 선지식이 아닐까?’ 그런 정도로 평소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대혜스님이 상대로 한 사람들 수준이 보통이 아닌 겁니다. 당시 송나라 때 최고 지식인들. 중국천하에서 최고 지식인들을 상대로 한 그런 법문이기 때문에 이것은 더 빛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서장을 조금, 그저 100분의 1 맛을 볼까말까 한 이런 기회지만, 사실 서장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또 입에 익숙할 정도로 읽고, 거기에 대한 대혜스님께서 인용한 내용들을 체크를 해가면서 내 공부로 그것을 소화시킨다고 하면, ‘서장같이 참~ 좋은 불교공부의 교재가 또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특히 이것이 선불교 교재로서는 더 이상 덮을 것이 없는 그런 아주ㆍ아주 위대한 교과서입니다.
그러니까 보조 지눌스님 같은 이들은 평생 도반으로 옆에다 모시고 공부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 그 때부터 우리나라에 교과서로, 보조스님이 定慧結社(정혜결사)를 하면서 대중들을 많이 모아가지고 가르쳤잖아요. 그러면서 誡初心學人文(계초심학인문)이 淸規(청규)가 되고, 그 다음에 공부에 직접 나아가서 하나의 간화선 법에 대한 공부를 이 서장을 교과서로 써서 오늘 날까지 이른 것입니다. 역사가 그렇게 깊은 겁니다.
그만치 ‘오랜 세월을 두고 봐도 그 끝을 우리가 다 파악 할 수 없는 정도의 어떤 깊이 있는 교과서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 특히 이 편지에 보면, 짧은 한 페이지의 글 속에 당신이 이 편지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제에 적절한 그런 선사스님들의 법문을 인용했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아주 빛나서 그래서 제가 서두에 중언부언 하게 된 것입니다.
示諭호대 自得山野의 向來書之後로 每遇鬧中嚲避不得處하야
常自點檢호대 而未有着力工夫라하니
只遮嚲避不得處便是工夫了也라 若更着力點檢則又却遠矣리라
示諭(시유)호대, 示諭 = 깨우쳐줌을 보이되,
諭 = 편지, 당신 상대의 편지입니다. 그것을 나에게 보여줬다.
‘편지를 받으니,’ 뜻은 그런 뜻이지요.
自得山野(자득산야)의 向來書之後(향래서지후)로,
山野. 이것은 대혜스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지난 날 向.
보내온 편지를 얻음으로부터 그 후로, 이런 말입니다.
自得 = 얻음으로부터 그 후로, 그러니까 ‘내 편지를 받고나서 부터’
每遇(매우), 매양 만났다. 무엇을 만났는가 하니,
鬧中嚲避不得處(요중타피부득처)하야,
시끄러운 가운데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그런 곳을 만나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잠자야지요. 식사해야지요. 화장실 가야지요. 옷 갈아입어야지요. 세수해야지요. 목욕해야지요. 최소한의 인간관계가 또 있어야지요.
이것이 嚲避不得處입니다.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겁니다. 대중처소에 있으면 더 그렇지요. 대중처소에서는 공양시간이 있고 울력시간이 있고 예불시간이 있고, 이것이 전부 嚲避不得處입니다.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상생활입니다.공무를 보는 사람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요. 그런 데서
常自點檢(상자점검)호대, 항상 스스로 점검해요.
예를 들어서 식사하면서, 아니면 화장실에 가면서, 이 분이 ‘내가 공부가 되는가?’ 하는 것을 점검해 본겁니다.
而未有着力工夫(이미유착력공부)라하니,
여기까지는 상대방의 편지를 인용한 것이지요.
未有 = 있지 못했다. 着力工夫가 있지 못했다. 힘을 붙인 공부.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그런 공부. 제대로 공부가 안 됐다 이 말입니다. 밥 먹고ㆍ옷 입고ㆍ대화하고ㆍ화장실가고ㆍ목욕하고 하는 이런 피할 수 없는 그런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이것이 화두가 되나? 안 되나?’ 사실은 점검해 봤다는 것이지요. 공부하는 사람이 그것 필요합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내 기도가, 우리가 밥 먹고ㆍ옷 입고ㆍ화장실가고 하는 이런 순간에 공부가 되는가?’ 스스로 한 번 점검해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도대체 제대로 순조롭지 못하더라.” 라고 이렇게 편지를 왔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가지고, 일상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그런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공부인으로써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이 편지에서 이 문제를가지고 여기서 대혜스님이 오늘 법문하시는 겁니다.
只遮嚲避不得處(지자타피부득처)가,
다만 이 피할 수 없는 것, 없는 것들이, 없는 곳. 그것이
便是工夫了也(변시공부료야)라, 곧 그것이 공부다.
이 보다 더 고준한 법문은 없습니다. 최상의 법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그것이 곧 공부다. 工夫了也라 그랬습니다. 공부해 마친 것이다. 바로공부다. 그것이 공부다. 아니, 밥 먹고ㆍ옷 입고ㆍ졸리면 자고하는 것이, 그것이 최상의 공부다. 최고급 공부다. 이 말입니다.
단순하게 표현은 그렇게 하지만 거기에 문제가 많습니다.
若更着力點檢則(약경착력점검즉),
만약 다시 거기에다가 힘을 붙여서 점검해본다. 식사하면서 ‘야 이거 내가 공부가 되는가?’ 라고 이렇게 한 번 마음을 써서 점검해본다면
又却遠矣(우각원의)리라. 또한 도리어 멀다.
공부하고는 멀다 이 말입니다. 사실은 벌써 거리가 10만 8천리나 미끄러진 겁니다. 밥 먹을 때 열심히 밥 잘 먹으면, 망상 없이 철저히 밥만 잘 먹으면 그것이 공부입니다. 그런데 ‘공부가 되는가?ㆍ안 되는가?’ 밥 먹으면서 ‘어디, 내 화두가 되나?ㆍ안 되나?’ 이것은 벌써 본심하고는 거리가 많이 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아마 이해하시리라고 믿습니다.
又却遠矣라. 그러면서 당신의 이런 고준한 안목을, 이러한 소견을 이해 못하면 곤란하잖아요.
‘아, 밥 먹고ㆍ옷 입고ㆍ졸리면 자고, 그것이 공부라니’ 얼른 들으면 문제 있잖아요. 그런데 아니다. 나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한번 들어보라. 하면서
昔에 魏府老華嚴이 云佛法이 在日用處와 行住坐臥處와
喫茶喫飯處와 語言相問處와 所作所爲處라하니 擧心動念하면
又却不是也리라 正當嚲避不得處하야 切忌起心動念하야
作點檢想이어다
昔(석)에
魏府老華嚴(위부노화엄)이,
魏府 = 地名. 老華嚴 = 평소에 화엄경을 좋아한다고 해서 老華嚴이라는 별명을 가진 분입니다. 27번 주에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27 주: 老華嚴은 卽懷洞禪師니 五季時魏府人이라
初弘華嚴之敎라가 晩叅興化存獎하야 得敎外別傳之旨라.
以其初講華嚴故로 衆稱老華嚴也.)
云, 말씀하시기를,
佛法이 在日用處(재일용처)와 行住坐臥處(행주좌와처)와
喫茶喫飯處(끽다끽반처)와 語言相問處(어언상문처)와
所作所爲處(소작소위처)라하니, 여기까지가 인용문이지요.
佛法이, 깨달음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在日用處, 일상생활 속에 行住坐臥하고,
喫茶喫飯處와,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곳과
語言相問處와, 대화하고,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과
所作所爲處라하니, 행위 하는 모든 것을
所作所爲處, 거기에 있다. = 在. 거기에 불법이 있다. 라고 했으니, 거기다가 만약 그렇게 그것만 하지, 거기다
擧心動念(거심동념)하면,
‘이것이 이렇게 하는 것이 공부인가? 아닌가? 화두가 되는가? 안 되는가?’ 이런 마음이 들어서, 생각을 움직이면
又却不是也(우각불시야)리라. 또한 도리어 옳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밥 먹으면서 숱한 망상 다 하지요? 잠자면서도 하~~ 이리 뒤 척 저리 뒤 척, 온갖 번뇌 망상 때문에 제대로 잠을 못자지요.
화장실에 가서 까지도 온갖 생각 다하지요. 그렇습니다.
正當嚲避不得處(정당타피부득처)하야,
嚲避不得處를 당해서, 바로 嚲避不得處,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당해서
切忌起心動念(절기기심동념)하야,
간절히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여서
作點檢想(작점검상)이어다. 點檢想을, 점검해 보는 생각을 짓지 말지어다. 지음을 꺼릴지어다. 꺼릴 忌자를 “짓지 말라.”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냥 그대로 하라. 이 겁니다. 옷 입으면 옷 열심히 입고, 딴 생각하면 옷 바로 못 입습니다. 또 식사할 때도 식사만 충실히, 그 식사하는데 마음을 담아서 하지, 다른 생각이 거기에 끼어들면 그것이 도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지요. 點檢想을 짓지 말지어다.
이렇게 인용하고 사이에 당신이 해설하고, 또 인용합니다.
祖師云分別不生하면 虛明自照라하며
又龐居士云 日用事無別이라 唯吾自偶諧로다
頭頭非取捨요 處處勿張乖니라 朱紫를 誰爲號오
丘山이 絶點埃로다 神通並妙用이여 運水及搬柴라하며
↑3강-1
↓3강-2
又先聖云但有心分別計較면 自心見量者實皆是夢이라하시니
切記取嚲避不得時에 不得作擬心이니 不擬心時에 一切現成하리라
亦不用理會利하며 亦不用理會鈍이니 總不干他利鈍之事며
亦不干他靜亂之事라 正當嚲避不得時하야 忽然打失布袋하면
不覺에 拊掌大笑矣리니 記取記取어다
祖師云分別不生(조사운분별불생)하면 虛明自照(허명자조)라하며,
이것이 3조 승찬대사의 신심명이지요. 우리가 반드시 외워야 할 것이 신심명, 그 다음에 증도가. 그 유명한 두 가지 선시는 조금 길지만 그것은 외워야 됩니다. 옛날에 선방에서도 도량석을 하는데, 대개 보면 신심명을 가지고 도량석을 하거나, 증도가를 가지고 도량석을 하거나 그렇습니다. 선방분위기는 그래요. 무식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도 신심명ㆍ증도가는 다 외울 수 있는 사람들이 수좌입니다. 이것이 신심명의 한 구절인데요.
分別不生하면 虛明自照라.
분별하는 마음이 生하지 아니하면, 나지 아니하면 虛明自照라.
텅 비어서, 밝게 비추어서 스스로 비춘다. 虛明自照 = 비고 밝고 그런 상태에서 自照한다. 말하자면 고요한 겨울 밤 달이 환하게 비추고, 눈은 하얗게 내렸는데 달까지 환하게 비추는 그러한 상태. 그것은 눈이 내렸다고 하는 것은 경계가 밝다는 뜻이고, 달이 비춘다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이 또한 밝다. 경계도 사라져야 되고, 내 마음에 망상도 없어져야 됩니다.
그것이 虛明自照상태입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말하자면 경계가 복잡하거나, 아니면 내 마음이 복잡하거나 그러면 대개 우리는 경계에 끄달리기 일쑤지요. 그런데 경계는 조용한데, 선방에 딱 앉아 있는데 내 마음이 망상이 부글부글 끓으면 그것도 또한 정상적인 공부가 아닌 것이지요.
分別不生하면 虛明自照라. 이런 표현을 했고,
그 두 분 스님의 말씀만 가지고는 ‘못 믿겠지? 내 또 하나 인용을 하겠다.’ 하면서 방거사이야기입니다. 이 방 거사는 너무나도 참 유명한 분이지요. 이 분은 석두스님을 참례해서 여래선을 깨달았느니 29번 주에는 그런 소리를 했는데요. 석두스님에게서 깨달은 분입니다. 이 방 거사는 유명하지요.
(29 주:龐居士-初叅石頭하야 悟如來禪故로 作此頌也니
四句-皆如來禪旨也.)
又龐居士云(우방거사운)
日用事無別(일용사무별)이라. 일상사가 다른 것이 없다.
우리가 밥 먹고ㆍ옷 입고ㆍ잠자고 하는 이 일이 日用事지요.
日用事가 별 것이 없음이라.
唯吾自偶諧(유오자우해)로다. 그랬습니다.
오직 내 스스로 偶諧한다. 만나서 짝할 뿐이다. 그 말입니다.
만나서 짝할 뿐이다. 偶諧라는 偶 = 對坐(대좌). 諧 = 和合(화합).
그저 내가 그야말로 흔히 도인들이 표현하듯이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그런 표현들 많이 하잖아요. 그렇습니다.
頭頭非取捨(두두비취사)요 處處勿張乖(처처물장괴)니라.
낱낱이 취할 것도 아니고 버릴 것이 아니요, 取捨가 아니요.
處處勿張乖니라. 곳곳에 펴고 어기고, 이것도 상대되는 표현인데요.
張자는 나하고 맞아서 내 마음이 펴는 것이고, 乖자는 어기는 것입니다.
편다.ㆍ어긴다. 할 것이 없다. 곳곳에 접을 것도 없고 펼 것도 없습니다.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朱紫(주자)를 誰爲號(수위호)오?
朱와 紫는 벼슬하는 사람들의 옷 색깔을 말하는 것인데요.
벼슬을 누가 높느니, 낮느니 그런 표현을 했던가? 우리 史的(사적) 같은데 보면, 그 품계에 따라서 2품이냐 3품이냐 1품이냐에 따라서 옷 색깔이 다 다릅니다. 또 허리띠도 다르고 서는 자리도 다르고요. 저~ 기 경복궁에 가면 품석이 있지요. 품을 매기는 돌을 전부 세워놨습니다. 품에 따라서, 예를 들어서 요즘 같으면 장관급, 그 다음에 차관급, 국장급, 그 다음에 부장급, 과장급, 계장급, 이런 식으로 품계가 쭉~~ 있습니다.
朱ㆍ紫하는 것은 벼슬하는 사람들의 옷 색깔입니다. 누가 “높다.ㆍ낮다.” 그렇게 말했느냐?
丘山(구산)이 絶點埃(절점애)로다.
그것도 사람일 뿐이다. 큰스님ㆍ작은 스님 이것도, 행자니 사미니 비구니 종사니 대종사니 하는 것도, 우리가 이름을 매겨서 그렇지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아무 차별이 없는 겁니다. 그 자리에 그냥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朱紫를 誰爲號오? 누가 이름 했던가?
丘山이 絶點埃로다. 丘는 언덕이고 山은 언덕보다 조금 높은 것이 산이지요. 그 산도 결국은 한 점의 티끌에 불과하다. 點에서 끊어졌다. 한 점의 먼지에서 끊어졌다. 한 점의 먼지에 불과하다. 글대로는 이런 뜻입니다.
참~ 이것, 아주 유명한 좋은 게송입니다. 방 거사 게송... 이런 내용들이 우리가 공부에 조금만 관심 있어도, 여기에 100퍼센트 계합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기분이 좋지요. 이런 게송들, 한 번 읊조려보고ㆍ한 번 써보고ㆍ다시 한 번 새겨 보고ㆍ음미해보고... 그 다음에 제가 아주 잘 이용 하는 글인데...
神通並妙用(신통병묘용)이여 運水及搬柴(운수급반시)라하며,
그렇게 했습니다. 神通妙用이라는 것이 뭐냐?
運水及搬柴라. 運水, 물 길어오고 땔나무 운반해 오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수도꼭지 트는 것이고, 가스레인지 불 켜는 일이다. 그런 간단한 일. 일상사. 그것이 神通妙用이다 말입니다. 무슨 마술사들이 눈속임 하듯이 마술부리는 그것이 神通妙用이 아니다 말입니다. 참~ 아주 이것이 말하자면 예를 들어서 물을 길어오고 가스 불, 불 켜고 땔나무 져 오고하는 그런 일들이, 그냥 물만 길어오고 땔나무해오는 정도가 아니거든요. 사실은 거기에 다 있다고요. 무엇이 들어서 물을 길어옵니까? 무엇이 수도꼭지를 트느냐고요? 무엇이 가스 불을 붙일 줄 아느냐고요?
우리가 단순하게 보면 참 단순한 것 같지만 그냥 단순한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그 동작 하나에 다 있습니다. 온 우주가요. 온 우주가 동원해서 물 길어오고 나무 짐 지고 오는 겁니다. 그것이 그냥이 아니라고요.
그러면 그것이 신통묘용이지 달리 더 이상 어떤 신통묘용이 있느냐?
그래서 마술 같은 것, 그것은 다... 그런 신통도 우리불교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지요. 아~ 신통이 난 스님이 있었다고, 그래서 신라 때만 하더라도 양지스님 같은 이들은 주장자에다가 걸망을 걸어요. 걸어서 하늘로 날려요. 날리면 당신이 보내고자하는 신도 집에 가서 주장자가 공중에 떠서 왔다 갔다 해요. 그러면 스님이 뭘 담아서 보내라고 하는 줄 알고는, 거기다 쌀을 담는다든지 소금을 담는다든지 해서 걸망에다 담아주면 주장자가 휙 날아가서 양지스님 불사 하는데 장육사지요. 장육사에 도착했다 하는 삼국유사 같은데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신통도 우리불교사에 이야기는 간혹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냥 이야기일 뿐이라고요. 그런 기이 한 것 좋아하면 그것은 불법 하고는 거리가 먼 겁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잖아요. 목련존자 같은 이들은 신통제일 목련존자 라고 돼 있잖아요. 그런데 외도들에게 맞아 죽었거든요. 아주 기상천외한 신통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 왜 외도에게 맞아 죽느냐고요. 부처님은 신통 못 부리게 했거든요.
공부를 하다보면 그런 신통은 간혹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안 생기는 것이 정상인데, 어쩌다 보면 정신통일이 되고 하다 보면 그런 신통도 부수적으로 생길수가 있다 이 겁니다.
그 부수적으로 생길 수 있는 것이지, 불교공부는 신통을 목적으로 하는 공부는 아닌 겁니다. 불교공부는 그런 신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은 신통 못 부리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련존자가 외도에게 맞아 죽었다하는... 말하자면 그런 인과에 순종 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정상적인 불법이다. 맞아 죽어야할 상황 같으면 맞아 죽는 것이, 그것이 불법의 이치에 맞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아주 빛나는 겁니다. 神通並妙用이여 運水及搬柴라.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일들. 그것이 곧 공부다.
便是工夫了也라. 그랬습니다.
只遮嚲避不得處가 便是工夫了也라. 그것이 곧 공부다.
거기에 대한 증거로써,
魏府老華嚴이 佛法은 在日用處와 行住坐臥處와 喫茶喫飯處
語言相問處 所作所爲處에 있다. 이런 표현을 했고,
그 다음에 3조 승찬대사도
分別不生하면 虛明自照라. 똑 같은 소리고요.
그 다음에 방 거사
日用事無別이라 唯吾自偶諧니 그래서
神通妙用이여 運水及搬柴라.
|
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