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희숙 중부산가정폭력상담소장은 모친의 죽음 10년 만에 ‘어머니는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라고 받아들이며 우울증에서 벗어났다. 어머니에게도 4남매를 키우면서 분명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믿음이었고 그것은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
‘부처님,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요….’
갓난아기를 들쳐 엎고 아장아장 걷는 큰 딸아이의 한 손을 잡은 채 어머니의 집으로 향하던 길은 끝이 없었다. 태어나기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얼굴도 보지 못했다. 큰 오빠와 두 언니까지 4남매를 키우며 모진 인생을 살아 온 어머니.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빌린 돈으로 음식점을 차렸다가 부도를 낸 둘째 언니의 빚 독촉 화살까지 받아냈다. 막내딸에게 자식 키우는 데 쓰라며 용돈 한 줌 주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 날, 어머니는 잠들었다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쏟아지는 눈물은 닦고 닦아도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그렇게 끝나버린 어머니의 인생이 너무나도 슬펐다. 탈 많던 가정의 버팀목 어머니 33년전 잠든 채 그대로 눈감아 통곡 같던 세월 견뎌가며 생활 어머니의 행복 알자 고통 소멸
미룡사 인연으로 상담사 선택 내담자 고통 그대로 받아 절망 행복 순간 일깨우며 갈등 치유 이희숙(61, 보덕심) 복지법인 새샘복지재단 중부산가정폭력상담소 소장은 33년 전 그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27살 젊은 주부가 만난 어머니의 죽음은 안 그래도 절망 같던 삶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내몰리는 심정이었다. 불심 깊던 어머니의 재를 지내며 도량의 풍경소리, 목탁소리, 천수경의 읊조림까지 모두 어머니 없는 세상의 통곡 같았다. 살아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집을 팔아 둘째 언니의 돈을 대신 갚고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 큰언니의 도움으로 주산학원을 시작해 생계를 유지했다. 학창시절 집안의 형편상 상업고를 나왔지만 유난히 공부를 잘했고 학생회장을 지낼 만큼 리더십도 강했던 그였다. 조카 친구 10명으로 시작한 학원은 100명까지 확대됐다. 남편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학원을 도우면서 조금씩 빚도 갚아 나갔다. 아이들도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 하지만 우울함은 좀처럼 떨칠 수가 없었다. 가끔 절에 갈 때면 어머니를 보내던 그날처럼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10년을 지낸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친구와 함께 미룡사를 찾았습니다. 삼배를 하고 부처님을 향해 앉았는데 울컥 하는 겁니다. 그냥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토해내는 눈물이었어요. 3일 내내 눈물을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그 순간 문득 ‘어머니는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어머니에게도 4남매를 키우면서 분명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모친이 떠난 지 10년 만에 이 소장은 비로소 어머니를 잃은 우울함에서 벗어났다. 불쌍하고 안타깝기만 했던 어머니를 행복한 한 사람의 여인으로 마음 깊이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그 후로 그의 삶은 활력을 더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있어도 행복한 순간을 먼저 떠올렸다. 과감하게 학원도 접고 작은 팬시용품을 운영하던 1999년, 미룡사 주지 정각 스님이 1980년대 자비의 전화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같은 건물에 영도구 가정폭력상담소를 마련했고 회계 담당 직원을 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슨 용기가 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스님을 찾아가 다짜고짜 저를 써달라고 요청했으니까요. ‘상담소’라는 단어에 마냥 마음이 끌렸고 무엇보다 회계는 자신 있는 분야였습니다. 뒤늦게 취업에 뛰어들었고 스님께서는 그런 저를 응원해 주셨습니다.” | | | ▲ 직원들이 자주 바뀌는 상담소 현실에서 6년간 직원 2명이 가족처럼 함께 지낸다. |
이 소장은 나이가 많은 회계직원이라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오히려 깔끔한 업무 처리와 사무실 직원 사이의 존중감 덕분에 일의 효율은 더 높아졌고 능력을 인정받아 법인 회계와 당시 법인에서 운영하던 복지관 회계까지 맡았다. 낮에는 일, 밤에는 사이버대학을 다녀며 당당히 사회복지사 자격도 취득했다.
그렇게 줄곧 회계에만 매달리던 그에게 2005년 또다시 변화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상담소 상담 직원을 구한다는 소식이었다. “나처럼 힘든 삶을 살아 온 누군가를 돕는 일이 운명처럼 느껴졌다”는 그는 상담사라는 새로운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상담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절망감이 상담 초기 보란 듯이 찾아왔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통찰하지 못하면 상담자가 그 고통을 그대로 받게 됩니다. 낮에 상담한 상황이 꿈에 나타나 괴롭히는 것은 예사였어요. 내가 써 준 상담 기록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이후 더 나쁜 상황에 내몰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온 몸을 짓눌렀습니다. 그 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사이버대학의 상담심리학과를 다시 등록했어요. 다행히 이러한 고통들은 상담 초기의 증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실무와 공부를 병행하면서 어려움을 풀어갔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도움은 도반들이었습니다.” 미룡사 시절부터 알게 된 봉사모임 자비원의 활동은 그가 상담을 하며 겪는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풀어내는 힐링이 됐다. 특히 봉사단체 미소원을 이끄는 장유정 이사장과 교사출신 최은이 보살, 상담소 가족이 된 이은희 보살은 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격려했다. 도반들과 함께 대한불교교사대학을 졸업하고 미룡사 어린이법회 지도교사로 활동한 것도 큰 기쁨 중 하나였다. 이제 그는 법당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대신 부처님을 보며 미소를 먼저 지었다. | | | ▲ 상담은 “이혼 서류 도장”보다 “위기 가정 재결합”에 더 집중된다. |
이때부터 이 소장의 상담은 “이혼 서류 도장”보다 “위기 가정 재결합”에 더 집중됐다. 상담소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중앙동으로 이전됐고 명칭도 중부산가정폭력상담소로 개칭된 후 2008년 그는 소장으로 발령받았다. 이후 부산에서 정부보조금을 받아 무료로 운영되는 가정폭력 상담소 8곳 중 한 곳으로 가정폭력 상담은 물론 가해자 교정·치료 프로그램, 부부갈등 치유·회복 프로그램, 청소년 집단 상담 등에 탁월함을 발휘했다. 상담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직원들이 자주 바뀌는 상담소들의 현실에서 6년간 직원 2명이 가족 같이 지낸 비결도 화합에 비중을 둔 상담소 운영 덕분이다. 무엇보다 그를 포함한 직원 모두 봉사단체 미소원의 회원으로 법회 참석은 물론 부산 구치소와 소년원에서 재소자 상담으로 재능기부를 펼친다. 이 소장은 지난해 대구지방교정청 표장도 받았다. “가정 폭력의 근원을 찾아가 보면 결국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상담은 그 마음으로 돌아가는 시간인 것 같아요. 그래서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울 때는 실컷 울고 말하고 싶을 때는 말로 풀어내면서 자신의 행복 키워드를 찾도록 이끌어 줍니다. 누구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으니까요.” | | | ▲ 그를 포함한 직원 모두 미소원 회원으로 법회 참석은 물론 재소자 상담으로 재능기부를 펼친다. |
동서대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올해 경성대 교육학 박사 과정에 입학한 만학도인 그는 수필가로도 등단해 꾸준히 글을 써오고 있다. 도반 장유정 이사장이 이끄는 사단법인 미소원의 사회복지법인 승격도 스스로에게 세운 목표다. “남은 인생도 한 결 같이 인연 닿는 사람들의 행복을 찾아주고 싶다”는 이 소장은 오늘도 명상으로 하루를 마감하며 부처님과 만날 것이다.
‘부처님, 저 오늘 하루도 참 행복하게 보냈지요?’ 상담문의 051)462-71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