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9o83TInsk_E?si=CZj0OaCGdQ-M-RAL
비운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를 추억하며 - '자클린의 눈물-오펜바흐Offenbach 첼로cello
( '자클린의 눈물'은 Offenbach의 미발표 작품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00년이 지나 독일의 첼리스트 토마스 베르너가 발굴 돼
'자클린의 눈물'로 이름 붙여 연주되다가 비운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가 사망하자 그녀를 기리기 위해 'Jacqueline's Tears'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20세기 중반 영국 음악계의 자존심이라고 불리우는 그녀. 클래식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모를리가 없을 텐데요.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인, 1945년 영국에서 태어난 최고의 여성 첼리스트이자 천재적인 음악가 ‘자클린 뒤 프레’가 바로 그녀입니다. 영화처럼 비극적이고 파란 만장한 일들은 정말 TV 속에서나 일어날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녀에게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났는지, 하늘도 시기한 비운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유럽 음악계를 제패한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
5살의 어린 나이에 런던 첼로스쿨에 입학하면서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한 자클린 뒤프레는 신동이라 불리며 남다른 천재성을 나타내었고 20세에 이르러 그녀는 유럽 음악계를 제패하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녀가 연주하는 첼로는 첼로 현을 끊을 듯 박력이 넘치면서도 첼로의 음색을 가장 잘 표현하는 애절하고 감성적인 느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녀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연주한 영상이 있어 소개드리립니다. 앳된 모습의 아름다운 자클린 뒤 프레가 역동적으로 연주하는 멘델스존의 <무언가>, 그라나도스의 <고예스카스> 간주곡, 생상의 <알레그로 아파시오나토> 세 곡을 들어보세요!
바렌보임과의 행복했던 시절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였지만 그 당시 신예 지휘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던 한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만남은 자클린 뒤 프레의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뛰어난 음악성과 표현력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자클린 뒤 프레는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유대교로 개종하면서까지 다니엘 바렌보임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만난 지 6개월만에 이스라엘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두 음악가의 결혼소식은 당대 최고의 이슈가 되었고 음악가들의 러브스토리 1순위에 꼽히는 ‘슈만과 클라라’에 비유되며 재능 있는 두 음악가의 만남이라는 찬사와 함께 세기의 주목을 끌기 충분했지요. 실제로 결혼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연주를 다니기도 하고, 따로 연주를 하기도 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해나갔고, 레퍼토리를 넓히며 음악성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녀의 환한 웃음을 더욱 자주 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때였고요.
병마와 싸우면서도 첼로를 놓지 않은 그녀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열정이 지나쳤던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은 도저히 여자의 몸으로는 소화해낼 수 없는 스케쥴로 자클린 뒤 프레를 강압적으로 몰아부쳤고, 이를 묵묵히 감당해내며 혹사당하던 그녀는 결국, 온 몸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가는 다발성 경화증 (Multiple Sclerosis)에 걸리게 됩니다.
악보가 잘 보이지 않으며, 자주 쓰러지기도 했던 자클린 뒤 프레. 병이 점점 악화되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고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연주를 끝까지 놓지 않았는데요. 그녀의 이런 상황을 모르던 음악 평론가들은 그녀가 인기와 명성이 높아지더니 거만해져 연주도 대충한다며 악평을 하기도 했지요. 이런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꿋꿋하게 참아내며 끝까지 첼로를 놓지 않은 그녀였지만, 결국에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음악 생활을 중단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 자클린 뒤 프레는, 언니에게 종종 자신이 나중에 온 몸이 마비되어 음악을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요. 본인은 이렇게 될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 당시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눈물이 글썽여지지만, 아마도 그녀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병보다는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고 믿었던 남편의 배신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세기적인 불운의 사랑
점점 온몸이 굳어져 가는 그녀를 곁에서 간호하며 위로해주어도 모자랄 상황에, 다니엘 바렌보임은 더 이상 연주를 하지 못하는 부인을 떠나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피아니스트였던 엘레나 바쉬키로바와 동거를 하며 두 아이까지 낳았는데요. 이런 사실을 전혀 알리지도 않고 오히려 자클린 뒤 프레에게 이혼을 요구하였으니, 자클린 뒤 프레의 외로움과 절망감은 그녀를 더욱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갔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의 무관심 속에서 결국 자클린 뒤 프레는 42세의 매우 젊은 나이에 쓸쓸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녀가 죽고 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동거하던 엘레나 바쉬키로바와 재혼을 하였고 자클린 뒤 프레의 무덤조차 한 번도 찾아가보지 않았다고 하니 매우 씁쓸하기도 합니다. 한 때 너무나 사랑하며 서로의 음악성에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최고의 호흡을 맞춘 두 사람.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세기적인 불운의 사랑으로 손꼽히는 두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두 사람이 함께했던 그 때만큼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지피고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함께 연주한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들려드릴게요. 자클린 뒤 프레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이 곡의 전 악장을 모두 암기하였다고 하는데요. 그녀의 신들린 듯한 격정적인 연주를 볼 수 있는 엘가의 첼로협주곡은 반드시 들어보아야 할 명반에 꼽히지요! 다니엘 바렌보임과 함께하던 그녀의 행복한 시절 연주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열정적으로 엘가의 첼로협주곡 전곡을 연주하는 그녀를 볼 수 있는 상당히 귀중한 영상입니다.
https://youtu.be/OPhkZW_jwc0?si=wziHubcdBFP5yi8t
Jacqueline du Pre & Daniel Barenboim - Elgar Cello Concerto
꼭 한 번은 들어야 할 자클린 뒤 프레의 연주곡
끝으로, 자클린 뒤 프레의 첼로 연주곡을 논하며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곡 하나가 있는데, 바로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곡입니다. 본래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제목은 작곡가 오펜바흐가 붙인 것은 아니고 베르너 토머스라는 음악가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오펜바흐의 작품을 발굴해내었고, 비운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를 추모하며 이 곡에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붙여 그녀에게 헌정한 것이지요.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 자클린 뒤 프레의 일생을 돌아보며 이 곡을 들으니 애절하고 비장한 선율이 더욱 그녀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곡은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첼리스트 ‘장 한나’와 뛰어난 피아니스트 ‘Sergio Tiempo’의 연주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같은 삶을 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자클린 뒤 프레를 생각하며 들어보시면 더욱 좋을 것 같네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자클린 뒤 프레'의 이야기. 누구에게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불운이 그녀에게는 왜 그토록 따라다니기만 했는지. 비록 비운의 삶을 살다 힘겹게 생을 마감하기는 했지만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자클린 뒤 프레는 우리 기억속에 아름답게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20세기 중반 영국 음악계의 자존심을 높여준 장본인. 영화의 주인공 같은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자클린 뒤 프레는 1945년 옥스퍼드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뒤 프레라는 프랑스식 성은 그녀의 아버지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서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영국에서 터전을 닦아온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자 저명한 교사로 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키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5세 생일 직전 뒤 프레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첼로 소리를 듣고 첼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5세에 그녀는 허버트 워렌의 런던 첼로 스쿨에서 수학했고 이후 1955년부터 1961년에는 길드홀 음악학교에서 저명한 첼리스트인 윌리엄 플리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천재성을 보인 그녀는 이후 대가급 연주자들을 찾아다니며 배움의 길을 닦아나갔다. 1960년에는 스위스에서 파블로 카잘스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여 실내악의 중요성과 더불어 거장으로서의 관점을 배우게 되었고, 1962년에는 파리에서 토르틀리에의 가르침을, 1966년에는 러시아에서 로스트로포비치의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로스트로포비치는 뒤 프레의 재능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내가 이룬 업적과 동등한, 아니 그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젊은 세대의 유일한 첼리스트”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렇듯 거장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그녀였지만, 뒤 프레는 항상 자신의 스승은 프리스라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1956년 수지아 어워드(귀에미나 수지아는 포루투갈 태생의 저명한 여류 첼리스트로서 영국 첼로계의 대모로 존경받는다)를 수상한 그녀는 1961년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 1672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를 들고 데뷔 리사이틀을 가졌다. 협주곡 데뷔는 1962년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루돌프 슈바르츠가 지휘하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했고, 이후 1963년 말콤 서전트가 이끄는 프롬 연주회에서도 엘가 협주곡을 연주하여 청중들로부터 엘가 협주곡에 있어서 뒤 프레의 전설이 시작되었다는 평을 받았다. 1965년에는 EMI에서 지휘자 존 바비롤리 와 함께 이 협주곡을 레코딩하여 일약 스타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불과 20세의 나이로 클래식계에서 손꼽히는 결정반이라는 명예를 만들어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제 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작곡을 시작하여 1919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뒤 프레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페르소나와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곡가의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와 삶에 대한 무상감을 반영하고 있는데, 특히 1920년 부인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작곡을 할 수 없었던 만큼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대작으로 남게 되었다. 1919년 10월 초연된 이후 파블로 카잘스와 폴 토르틀리에, 앙드레 나바라를 비롯하여 베아트리체 해리슨, 앤쏘니 피니와 같은 영국 출신의 연주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대중적으로 환호를 받기는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초연된 지 40여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이 [E단조 협주곡]은 자클린 뒤 프레라는 연주자에 의해 비로소 그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작품을 그저 연주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작품과 정신적인 일체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녀는 피아니스트 스테판 코바세비치와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를 비롯한 다양한 듀오 작품을 녹음했는데, 이 당시부터 1712년산 ‘다비도프’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를 사용하며 특유의 묵직한 음색과 강렬한 표현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예후디 메뉴힌을 비롯하여 이자크 펄만, 주빈 메타, 핀커스 주커만 등과 같은 젊은 연주가들과도 교류하며 친구 이상의 음악적 활동을 이루며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이자 음악의 뮤즈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특히 1969년 뒤 프레가 자신의 친구들화 함께 촬영한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 영상물은 오페라 [라 보엠]에 등장하는 젊은 보헤미안들에 비견할 만한 유쾌하고도 진지한 음악적 놀이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운명적 만남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미국에서 데뷔 무대를 갖은 뒤 프레는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1966년 12월 31일 처음 바렌보임을 만난 뒤 프레는 이내 사랑에 빠졌고, 이 두 명의 젊은 천재 음악가는 이듬해인 1967년 6월 15일 웨스턴 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세기의 결혼식을 위한 팡파레가 울려퍼진 뒤 두 명의 축복받은 음악가들은 뜨거운 사랑만큼이나 정력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바로크와 고전, 낭만, 현대에 이르는 많은 실내악 및 협주곡 레파토리를 섭렵한 뒤 프레는, 자신의 부군과 함께, 혹은 다른 거장들과 함께 레코딩 스튜디오 및 연주회장을 종횡무진 누볐다 특히 1970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바렌보임의 지휘로 이루어진 엘가의 [첼로 협주곡] 실황 레코딩은 뒤프레와 바렌보임의 음악적 교감이 최고도로 무르익은 모습을 들려준다 뒤 프레는 이 때 바비롤리와의 연주 때보다 더 성숙해진 음악성과 신들린 듯한 명인기를 보여주었다
하늘이 그녀에게 너무 과도한 재능을 준 탓일까. 뒤 프레의 음악적 역량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올 당시인 1971년 7월 뒤 프레는 조금씩 아픈 증세를 호소하며 연주에 집중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리허설에서 피로감에 쓰러지거나, 활을 놓치는 일이 많아졌다. 심지어는 시력조차 떨어졌다. 그럴수록 완벽주의자였던 바렌보임은 정신력 문제를 거론하며 그녀를 더욱 혹독하게 몰아 붙였다. 바렌보임으로서는 그녀의 연주력이 쇠락해 간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나를 미치게 한다”던 호의적인 비평가들조차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그녀의 일관성 없고 조리없는 연주는 “정말 우리를 미치게 한다”는 악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발성 경화증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뒤 프레와 남편 바렌보임.
당시 피아니스트인 라두 루푸의 부인인 라이자 윌슨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녀 혼자서 외출하는 일이 잦았어요 쇼핑을 하거나 들판을 거닐거나 했죠 그러다가 넘어지면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답니다 그러나 늦게 돌아온 데 대해 남편이 화를 내면 ‘쇼핑하다 보니 입고 싶은 옷이 많았어요’라고 거짓말로 둘러대곤 했어요...” 결국 그녀는 길거리에서 쓰러진 뒤에야 병원에서 제대로 된 검사를 받고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병명을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이제 투병이라는 가혹한 터널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자신의 육체에 대한 고통보다 음악에 대한 열정에 훨씬 더 컸던 그녀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주회와 레코딩을 계속 강행했다. 그러나 연주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근육과 신경이 피로해짐에 따라 그녀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결국 1973년 2월 주빈 메타가 이끄는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끝으로 영국에서의 공식적인 연주회를 마감했다. 이후 그녀의 최후의 연주회는 며칠 뒤 뉴욕에서 열렸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과 주커만의 연주로 브람스의 [2중 협주곡]을 연주한 것이 그것이다. 당시 뒤 프레는 활을 잡는 것과 운지를 하는 것 모두 대단히 힘들어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그녀의 데뷔와 마지막 연주회를 함께 한 작품으로서, 일종의 뒤 프레에게 있어서는 페르소나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미국 연주회 직후 은퇴를 한 뒤 프레는 후학을 양성하면서까지 첼로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975년 이후로는 척수신경에 손상을 입으면서 몸을 가누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안면신경 손상으로 얼굴을 움직이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이렇게 그녀는 서서히 살아있는 박제(剝製)가 되어갔지만 간신히 수프를 목으로 흘려 넘기며 자신이 녹음했던 음악들을 들었다. 그것만이 그녀가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뒤 프레의 건강은 점진적으로 악화되었고 결국 1987년 10월 런던에서 눈을 감았다.그녀는 많은 양의 음반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몇몇 녹음을 통해서 음악이라는 바다를 향한 뒤 프레의 열정이 아직까지도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약력
Dvorak Cello Concerto in B minor op.104 자클린 뒤 프레, 세르주 첼리비다케 지휘, 스웨덴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