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을 전후로 해서 홈쇼핑 관련일을 할 때 일이다.
상품설명을 함에 있어 쇼핑 호스트와 게스트가 출연하는 데 호스트는 방송사에서
배정을 하고 게스트는 상품판매회사에서 선정하여 호스트와 게스트가 함께 출연한다.
당시 나는 모 회사(홈쇼핑 관련업)에서 프리랜서로 일할 때였는데,상품 하나를
론칭할 떄 마다 유능한 게스트를 뽑는 위치에 있었다.당시만 해도 IMF 여파로 인해
아직 그 후유증이 남아 직장잡기가 쉽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려
인심이 흉흉하던 때였던 듯 싶다.
게스트 한명 모집에 보통 십수명의 화려한 프로필의 여성지원자들이 한껏 자태를
뽐낸 사진과 함께 사무실 펙스를 통해 내 자리로 날아든다.그 가운데 추리고 추려
대여섯명을 면접과 실제 오디션을 통해 최종 한명을 선발한다.
홈쇼핑 채녈을 보면 알겠지만 일단 시청자의 눈길을 끌어야 한다.
그러자니 당연히 미모가 돋보여야 함은 물론이다.
당시 출연료로 1회당 보통 이십만원(연예인은 열배 이상) 정도 책정해서 준 기억이다.
기실 그만한 보수의 일자리는 쉽지 않다.
여성 출연자 게스트 후보들은 나와 면접하는 자리에서 그 애절한 표정이 지금도
애릿한 감정으로 남아있다.그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여성 후보자가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시간강사로 뛰는 여자였다.
우리 직원들은 '여자가 너무 튀는 상'이라 하여 서류전형에서 컷트시켰는 데 나는
그 여자의 이력서를 보는 순간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를
떠올렸고 또 이 소설이 유고작이 된 전혜린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녀 전혜린은 친일파 부친 슬하에서 경기 여중고와 서울법대를 나온 재원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와 72년도인가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생을 마감한다.
슬프게도 이것이 우리나라 번역문학의 현주소다.독문학을 전공한 이가 번역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History repeats itself(역사는 되풀이된다)로 잘 알려진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라는 방대한 저서는 우리나라 역사학자가 번역하여야 옳다.
그렇지 못한 현실속에서 하인리히 뵐의 이 작품 역시 독문학자가 아닌 법학을 전공한 이가
번역하는 현실,더우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세부사항에 들어가 보면 시사영어사에서
영역한 글을 다시 우리말로 재해석하고 있다.그래서 난 게으른 문학도라 하는 것이다.
번역문학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못난 이웃 일본이다.
변변치 못한 문자를 가진 나라다 보니 번역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그에 반해 인류역사상 최고의 문자인 한글을 지닌 우리나라는 원어 못지 않게 얼마든지
더 훌륭하게 번역해낼 수 있음에도 그렇지 못하니 참으로 분통이 터질 일이다.
아무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한겨레 신문에서는 이 작품을 보고 '폐허 속 희망을 본 하인리히 뵐'이란 평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53년 작)는 전후 독일문학의 양심으로 불리운 하인리히 뵐의
대표작으로 전후의 먼지에 내몰려 침묵하는 가난한 부부 이야기다.
당시 공정하지 못한 주택배정 문제를 소재로 삼고있는데 남자 주인공 프레드 보그너는
단칸방에서 부인 캐테 보그너와 아이 셋이서 살고 있다.찌든 삶에 진저리를 느끼며 여러달
집을 나와 방황하며 틈틈이 모은 돈을 집에 부쳐준다.부인 캐터 보그너 역시 열심히
일하지만 늘 가난에 시달린다.그러면서 가끔 캐터 보그너는 이리저리 돈을 융통하여
남편과 만나 싸구려 호텔방이나마 하루를 유숙하고... 이런 가운데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더이상 탈출구가 없어보이는 이런 삶에 종지부를 찍고자 부인은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남편 프레드는 어느날 길거리에서 어떤 여자의 모습을 보고 심장이 멎는 듯한 감동과
흥분을 느끼며 뒤쫓아 가서 보니 놀랍게도 그 여자는 아내 캐테였던 것이다.
"15년간 결혼생활을 해온 내 아내는 여전히 내게 낯선 동시에 또 무척 낯익게 생각되었다"
라고 프레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서 주인공의 마지막 멘트는 물론 극적인 반전이고 작가는 또 이를 기막히게
잘 구사하여 모든 것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양심조차 발디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독일의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그에 반해 우리의 현실은 어땠는가.
물론 소설과 현실이 같을 수는 없겠으나,우리는 IMF를 겪으면서 너무도 많은 가정이
무너졌고 그런 가운데 많은 수의 부녀자들이 도우미의 길로 접어드는 신풍속도를
그려내는 결과를 빚게 된다.훌륭한 작가란 그럴 때 빛을 발한다.
하인리히 뵐이 그런 작가인 것이다.
우리는 외국의 것일 망정 늘 더 새롭고 아름답게 발전시켜온 저력있는 민족이다.
이 소설이 던져주는 화두를 잘 음미하여 더욱 굳건하고 안온한 가족이기를 바래는
마음으로 이 글 올림의 에필로그에 가늠하고자 한다.
*어느 학인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조주스님께 물었다.
조주스님께서 庭前栢樹子(정전백수자.뜰앞의 잣나무)라 답했다.
이 말씀이 화두로 유래한 배경입니다.
그런데 선종의 유명한 벽암록에 송(頌.칭송하는 글)을 붙인 운문종의 설두스님이
공부하러 다닐 때 어느 절에서 한 도반과 정전백수자 화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문득 보니 심부름하는 행자가 빙긋 웃는 것이 아닌가.
손님이 간 후 불러물었다.
"이놈아 스님네들 법담하는 데 웃긴 왜 웃어?"
"히히, 눈 멀었습니다.정전백수자는 그런 것이 아니니,제 말 들어보십시요"
白兎橫身堂古路
백 토 횡 신 당 고 로 흰 토끼가 몸을 비켜 옛 길을 가니
蒼鷹一見便生擒
창 응 일 견 편 생 금 눈 푸른 매가 언듯 보고 토끼를 낚아가네
後來獵犬無靈性
후 래 엽 견 무 영 성 뒤쫓아온 사냥개는 이것을 모르고
空向古椿下處尋
공 향 고 춘 하 처 심 공연히 나무만 안고 빙빙 도는도다
*이 화두에 대한 행자의 詩는 일종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토끼에 있지 잣나무가 아니라는 게지요.
그래서 마음 눈 뜬 매는 토끼를 잡아가 버리고 멍텅구리 개는 잣나무라고 하니
나무만 안고 빙빙 돌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정전백수자다 할 때 그 뜻을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는 것이니 나무밑에 가서
천년 만년 돌아봐야 그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화두란 마음의 눈을 뜨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은 성철 스님 법어집 1집 제 7권 '자기를 바라봅시다'에서 발취하여 가져왔습니다.
첫댓글 어머나,,이방에계시네요,,,
잘보고 갑니다 ~ ㅎ
정말 역사는 돌도 돌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