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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 : 이사 50,4-7
제2독서 : 필리 2,6-11
복 음 : 마태 26,14-27,66
마태오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수난 성지 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은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이제 코로나 19가 거의 종식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 우리 내면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약한 인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깊이 바라보게 됩니다.
이 기회로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되면서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흔들었던 사건을 기념하기 때문에 성지주일이라고 하는 한편,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긴 수난기를 듣기 때문에 수난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이 두 가지 사건을 함께 묶어서 수난 성지 주일이라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무엇 하러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까?
한마디로 죽으시러 들어오신 것입니다.
아이로닉하게 죽으심, 그것을 통해 우리 인류의 구세주,
보다 구체적으로는 나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죽으심으로서 빠스카,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구약의 빠스카의 신비를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시는 신약의 빠스카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환성을 지릅니다.
나뭇가지를 손에 들거나 길에 뿌리면서 또는 겉옷을 벗어 길에 깔면서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후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이스라엘의 임금님, 높은 데서 호산나.”
나뭇가지나 겉옷을 벗어 길에 까는 행위는 바로 왕에게 드리는 경의의 표시였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했습니까? 그들은 기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기적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기적을 보면서
이 사람이 자기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메시아, 구세주가 아닐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기대에서 예수님을 환호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다윗 왕 시대처럼
이스라엘을 위대한 민족으로 정치적인 해방을 이루고
다시 한번 만방에 위세를 떨치는 그런 강대국이 되게 하는
임금으로서의 구세주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그런 분이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백마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터벅터벅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겸손하신 그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진정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저는 한편, 나귀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 나귀의 역할을 헤아려 봅니다.
저는 나귀의 이미지에서 사제의 모습, 사제의 역할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등에 업고 사는 사람들이지요.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다니는,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때로 환호합니다. 누구를 보고 환호합니까?
물론 예수님, 주님을 보고 주님께 환호를 드립니다.
그런데, 나귀인 사제가 착각을 합니다.
자기를 보고 환호하는 줄 알고 입이 벌어집니다.
히이잉하고 웃고 좋아서 헬렐레하기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찬란한 착각입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지요?
신자들이 사제에게 극진하게 대하고 존경을 드립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등에 태우고 있는 분, 주님 때문이지요.
주님을 환영하고 그분께 환호를 드리고 때로는 환성을 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제는 나귀인 자기에게 환호하는 줄로 알고,
아니, 자기가 잘나서 신자들이 자기를 대우해 주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때로는 자기는 한낱 나귀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가 주님이 된 것처럼 잘못 알고
환호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착각을 합니다.
슬프도다. 찬란한 착각이여! 오호, 통재라!
신부들만 착각합니까?
아닙니다. 신자들도 착각을 합니다.
신부는 다만 주님을 등에 태워드리는 존재라는 것을 잊고
신부가 주님처럼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신부가 모든 것을 다 해 주기를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사제에게 바라는 것이 있고
사제는 마땅히 신자들의 요구에 어느 정도 부응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주님이지 사제가 아닙니다.
사제는 다만 주님을 우리에게로 모셔다드리는 존재, 즉 나귀에 불과합니다.
나귀인 사제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면 그것 또한 착각입니다.
많은 경우에 보면, 나귀인 사제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다가
자기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발로 차지요. 나귀이니까 발로 차여도 할 말은 없지요.
사실 발로 차기만 하면 다행이지요.
그런데 바로 오늘 우리가 수난기에서 들은 것, 그대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칩니다.
그 외침에 사제는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불과 하루 전에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라고
환호하던 그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놀랍니까? 그 모습이 가증스럽게 느껴집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바라보면서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그 군중의 모습이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에게 그가 나에게 잘해 준다고 생각하거나
나에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온갖 칭찬을 늘어놓고 좋은 소리를 합니다.
하지만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거나 아니면 나에게 서운하게 대했다고 생각했거나
조금이라고 손실을 끼쳤다고 생각하여 미워하고 가차 없이 등을 돌리거나
심지어는 욕을 해댄 적이 있다면, 나도 바로 그 군중들의 하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수난기의 클라이맥스는 어느 대목입니까?
그것이 바로 수난기의 정점을 이루는 부분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께 부르짖으시는 모습은 참으로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백인대장이 외칩니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절규를 들으시고 예수님을 죽지 않게 하셨습니까?
그 잔을 거두어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방식,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의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십니다.
당신의 방법대로, 당신의 시간표대로, 당신의 더 깊고 오묘한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원의를 들어주십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죽음에 두지 않으시고 부활시키신 분이십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대해 드려야 하며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듯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은 그분이 주시는 영광에 참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제 뇌졸증은 다만 참으로 하느님이 누구신지 배우는 과정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 십자가와 죽으심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삶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일 년 중 가장 거룩한 시기 성주간을 거룩하게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난달, 서울로 강의 갔을 때 깜짝 놀랄만한 체험을 했습니다.
전철을 탔는데 마침 빈자리가 있어서 얼른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편하게 가겠구나. 오늘 정말로 운이 좋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읽으려고 넣어둔 책을 꺼내 읽고 있었지요.
한참을 읽다가 잠시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이 자리에는 아주 젊은 긴 생머리의 여자가 앉아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 보게 된 분은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였습니다.
피곤해서 잠시 졸았던 것이 아닙니다.
책이 재미있어서 계속 깨어있었고, 또 혹시라도 내려야 할 지나칠까 봐
계속 전철역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옆자리의 사람이 바뀐 것을 몰랐습니다. 혹시 이 자매님이 변신한 것일까요?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책에 신경 쓰고, 전철역 확인에만 신경 쓰다 보니
불과 몇 센티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사람의 변화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신경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그 무관심은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우리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성당에 가서 미사 참석하면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만 있는 사람이 과연 늘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을까요?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시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세상 것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옆에 계신 주님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현존을 느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주님이십니다.
그렇기에 계속 주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의 한 주간을
교회는 ‘성주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교회의 전례 주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이 주간의 시작인 오늘,
우리는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합니다.
이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호산나’를 외치면서 열렬히 환호합니다.
그러나 이 반응이 계속되었을까요?
불과 며칠 뒤, 사람들의 반응은 180도 바뀌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참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예수님께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만 예수님을 보려고 했기 때문에,
구원자가 아닌 없애야 할 흉악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과연 집중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 안에서만 제대로 주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성지주일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수난주일입니다.
제1독서의 '야훼의 종의 셋째 노래'는 수난 주일의 특성을 드러내는 반면,
제2독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성지주일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영하는 상징적 행위로 성지가지를 들고
성당에 들어와, 동시에 예수님의 수난사를 듣습니다.
오늘 전례는 기쁨과 슬픔이 혼합되어 교차됩니다.
한편으로는 “호산나”를 환호하는 기쁨이 차오르고,
또 한편으로는 수난과 죽음으로 치닫는 비탄이 흐릅니다.
환영의 행렬은 곧바로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뀌고,
손을 흔들던 환호의 성지 가지는 등을 내리치는 채찍으로 바뀝니다.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이들은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가고,
나귀 등위에 타셨던 분은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왕으로 성안으로 모셔진 그분은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에 따른 우리 주님의 수난기입니다.
이 수난사는 “다윗의 자손 호산나”라고 외치는 군중의 환호로부터 시작되어,
바로 그 군중들이 외치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배신과 욕설로 마무리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의 배신은 예수님을 더욱더 처참하게 만듭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하루밤 사이에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가리옷 유다는 은전 서른 냥에 스승을 팔아넘겨 버리고,
다른 제자들이 스승이 붙잡힐 때는 옷마저 벗어 던져버리며 달아나 버립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노리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그리고 대제관은
서로 결탁하여 온갖 음모를 꾸미고, 예수님을 심문하고 박해하며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예수님은 외적으로는 군중과 모든 적대세력들로부터 위협당하고,
내적으로는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의 공동체가 와해 되는
절대 극명의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은 26장 마지막 장면인 베드로의 배반 장면(26,69-75)만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는 추궁이 거듭될수록 격한 반응을 보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부인하다가(70절), 다음에는 맹세까지 하고(72절),
급기야는 거짓이면 천벌까지 받겠다고 극구 부인합니다(74절).
결국 그는 단지 예수님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인 “맹세하지 말라”(마태 5,33-37)는 가르침도 따르지 않습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맹세하라고 다그치는
대사제의 추궁에도 맹세하지 않고 담대하셨는데 말입니다(26,63-64).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눈에서 비닐이 벗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구원의 카이로스의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라는 그의 무지와 불신에 광명이 비추어진 것입니다.
‘닭 울음’은 어리석음에 갇힌 그의 영혼을 깨웠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뚫고, 영혼의 귀를 뚫고 내리는 청천벽력의 뇌성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그의 불신과 의혹,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셔버렸습니다.
그의 울음은 단지 죄에 대한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 거짓과 비겁함에 대한 울음도,
혹은 스승을 배신한 불효나 불충에 대한 울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75절) 하는 성령의 ‘죽비’요 ‘할’이었습니다.
닫힌 가슴을 헤치고 들어오는 주님 말씀의 광채요 섬광이었습니다.
죄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깨우치는 빛이었습니다.
먼저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 말입니다.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먼저 베푸신 사랑 말입니다.
비록 의혹과 불신에 휩싸여 배신했어도 바로 그러한 그를 끝까지 믿고 희망하신,
그분의 먼저 베풀어진 사랑 말입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채질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하시며,
결코 희망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명을 주시는 그 사랑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먼저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찬란한 울음을 울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배신은 당신 사랑에 대한 거절 때문이지만,
실상 드러난 것은 당신의 크신 사랑이었습니다.
그토록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 때문에 고통받으시고,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그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통 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상처받더라도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베풀어진 사랑을 관상하며 기쁨의 거룩한 울음을 울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더더더더~ 사랑하십니다.
저의 사랑이 부족하고 변덕스러워도 당신은 그러한 저를 끝까지 사랑하시니,
주님 사랑 받들게 하소서.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더더더~ 저를 믿으십니다.
저의 믿음 약하고 미진하여도 당신은 저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당신께 대한 저의 믿음이 아니라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으로 제가 구원되오니,
주님께 의탁하게 하소서.
주님 희망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더더더더~ 희망하십니다.
저의 희망이 그릇되고 빗나가도 제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고 기다리오니,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제가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응답의 장소요 공간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주님!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게 하소서.
생각을 움켜잡기보다, 생각에 붙잡히기보다, 생각을 바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조정당하게 하소서.
저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보다는 바다를 보여 주면 된다.”
배 만드는 법은 수단입니다. 바다는 배를 만들게 하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바다를 보면서 꿈을 가진 젊은이들은 바다를 건너기 위한 배를 만들기 마련입니다.
수단은 해야 할 일이지만 목적은 가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율법과 계명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집니다.
갇힌 이들이 해방되고, 묶인 이들이 풀려나고, 눈먼 이들은 보게 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떠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이 치유됩니다. 죽었던 이들도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을 보고 제자들은 그물도 버렸고, 배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곧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바다를 보여 주셨던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주셨던 예수님께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이 이름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예수님 수난의 길에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입니다.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았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곧 말라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유혹이 다가오자 쉽게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곧 냉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심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체면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마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았습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은 뿌리는 내리지만, 가시에 찔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서 제자가 되었지만, 고난의 시간이 다가오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 푸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던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안다면 천벌이라도 받겠다며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5처에 나오는 키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예수님은 첫 번째 넘어지셨습니다.
그 길에서 성모님을 만났습니다.
성모님은 말없이 예수님 수난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키레네 사람 시몬은 길을 가고 있었는데
로마의 군인이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도록 하였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아무런 불평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간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당한 이의 이웃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은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입니다.
교회의 전승에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던 하혈하던 여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십자가의 길에 끝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자캐오의 부인이라고도 합니다.
자캐오의 부인은 예수님을 만난 남편 자캐오가 변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십자가의 길 6처에서 베로니카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나의 신앙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유다와 베드로의 삶이었다면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과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의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너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라고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네.
하느님은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네.”
우리는 진정으로 “호산나!”라고 외치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정말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울 때
‘나를 위해 사는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누군가를 찾게 됩니다.
그분이 구원자이시고 그분을 향해 외치는 소리가 “호산나!”입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만약 아직도 ‘나’로 살아가는 것이 견딜만하다면 어떻게 호산나가 나올 수 있을까요?
영화 ‘마더’(2009)에서는 장애를 지니고 살인 누명을 쓴
아들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어머니가 나옵니다.
그 어머니는 아이에게 농약이 든 박카스를 마시게 해서
아이가 그렇게 된 데 대한 매우 큰 죄책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깨 너머로 배운 침술로 돈을 벌고 아들을 위해 그 돈을 씁니다.
어머니는 감옥에 갇힌 아들의 누명을 벗기려
아들의 유일한 친구도 의심하고 여러 사람에게 좋지 못한 일을 행합니다.
마치 침을 꽂으면 아픈 것처럼 타인을 아프게 하는 모기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자기 아들이 살인을 저지른 범인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이를 위해 어머니는 살인까지 불사합니다.
여기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사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일까요?
어머니는 사실 아들을 위해 산다는 핑계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때의 죄책감을 갚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의 값을 치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는 방식입니다.
우리 안에 ‘뱀’이 한 마리씩 있습니다. ‘자아’(ego)라고 합니다.
에덴 동산의 뱀이 하와를 자기를 위해 살게 만든 것처럼
자아는 자녀 사랑까지도 이기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덤 안에 우리 자신을 가둡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에게 그 죄책감을 없애줄 분뿐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시듯
그분만이 우리를 자아의 무덤에서 불러내실 수 있으십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 갔습니다.
그런데 새총을 거지고 놀다가 할머니가 키우시는 오리 한 마리를 죽게 했습니다.
아이는 오리를 장작 깊숙한 곳에 숨겼습니다.
저녁에 할머니가 그 아이의 여동생을 보고 설거지를 함께 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여동생은 오빠가 할 것이라 말합니다.
오빠는 자신이 왜 해야 하느냐며 따집니다.
이때 동생은 오빠의 귀에 대고 “오리를 기억해!”라고 속삭입니다. 동생이 봤던 것입니다.
여동생은 며칠 동안 모든 심부름을 “오리를 기억해!”라는 말로 오빠에게 시킵니다.
오빠는 이제 자유롭지 못하고 여동생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할머니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합니다.
“지금 나를 구하소서. 호산나!”
할머니는 “나도 다 알고 있었어.
네가 언제까지 동생에게 노예 생활하는지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제 아이는 여동생이 아닌 자신을 용서해 준 할머니를 위해 살게 됩니다.
이것이 여동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죄를 없다고 하시려고 아드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면 됩니다.
아버지를 위해 살면 됩니다.
하지만 오리를 죽인 값에 대한 피해는 할머니가 지는 것처럼,
우리 죄에 대한 피해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지십니다.
우리가 그 값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면 결국 죄를 용서받고도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녀들이 부모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먹고
자신도 부모와 같은 인간임을 믿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야 얻게 됩니다.
한 부자가 죽을병이 들어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들에게
모든 유산을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 손으로 한 달 동안 일해서
돈을 벌어오면 유산을 물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친구들에게 돈을 꾸어
한 달 뒤에 자신이 번 돈이라고 거짓말하며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난롯불에 집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벌어오라고 합니다.
아들은 이번에도 빌린 돈을 가져다드립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또 그것을 불에 던집니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아들은 안 되겠다 싶어 정말 고생 고생하며 돈을 법니다.
처음 일을 해 본 것이라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아버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 돈을 난롯불에 던졌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이건 제 피와 같은 돈이에요!”라며
난로에 손을 집어넣고 불타고 있는 돈을 꺼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손에 화상까지 입습니다.
이것을 보고서야 아버지는
“이제 유산을 물려주어도 되겠다!”라고 하며 아들을 안아주었습니다.
아들은 그만큼 소중한 것을 자신에게 물려주시는 아버지를 위해 살기로 결심합니다.
우선은 그리스도께 “호산나!”라고 외쳐야 합니다.
나 자신의 노예생활로부터 구원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우리를 해방하러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값을 묵상해야 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고마운 사람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그분께 대한 감사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삶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나아감이 참다운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성체의 모양으로 우리 안에 입성하시는 그리스도께
겉옷을 벗어 깔 수 있는 감사의 마음으로 성취됩니다.
매일 미사가 진정한 구원의 예루살렘 입성이 되게 합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지주일: 가해: 예수님의 수난
이제 성주간이 시작된다.
전통적으로 이 주간을 “성대주간”(Hebdomada major)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 주간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죽음이 소멸되며, 저주가 사라지고 악마의 노예살이가 종식되어
그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찾게 된다.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하늘의 문이 열리며 인간들과 천사들이 하나로 일치된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평화롭게 하신다.”
(In Genesis Homil. 30 in PG 29,273-274)라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말한다.
이러한 위대한 일들 때문에 이 주간이 ‘승리’의 장면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공경하여 기념하는
‘팔마 가지’의 축성과 행렬로 시작되지만,
이것이 또한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압박하는 음모로 바뀔 것이다.
오늘의 전례는 ‘무죄한 이’를 거슬려 자행되는
이유 없는 폭력으로 꾸며지는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승리’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리신다.
즉 십자가 위에 승리의 ‘팔마 가지’를 높이 매다신다.
이러한 이유로 독서들은 ‘주님의 수난’을 감격적인 뜨거운 사랑으로 되새기고 있다.
매일미사 말씀 보기
제1독서: 이사 50,4-7: 고통받는 야훼의 종
제1독서는 ‘야훼의 종’의 셋째 노래의 일부만을 전해주고 있는데
여기서 야훼의 종은 굴욕적인 모욕을 당하고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굳은 신뢰심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 50,6-7).
제2독서: 필립 2,6-11: 십자가 위에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주 강하게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참담한 ‘모욕’의 여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능욕’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신성을 ‘비우시고’,
‘벗어버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를 낮추시는 마지막 단계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받아들이신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타난다(6-8절).
그러나 바오로는 이 그리스도의 참담한 능욕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고
놀라운 부활의 영광을 통하여 ‘영광의 주님’으로 들여 높여지시는 것까지 내다본다.(9-11절)
복음: 마태 26,14-27,66: 마태오의 수난기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를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개념은 ‘자유’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 ‘자유’로써 죽음을 맞으신다는 것이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이끌어 가신다.
당신이 원하셨다면, 피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칼로 대사제의 종의 귀를 쳤을 때 예수께서는,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라고 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이 ‘뜻’ 때문에 자진하여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의 손에 당신 자신을 맡기신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39절).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42절)
그리고는 세 번째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잠이든 제자들에게 깨어있지 못하느냐고 하시며,
“이제 때가 가까웠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26,45-46)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때’에 맞춰져 있음을 본다.
그 ‘때’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될 ‘때’이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이 외에도 예수께서 현실에 이끌려 가시지 않고
자유롭게 다스리심을 알 수 있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26,24), 또는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26,55-56).
이것은 모두 아버지의 뜻에 ‘완전한 순명’(필립 2,8 참조)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죽지 않을 수 있지만 친구를 위해서 죽는 무한한 사랑에서 나온다.
이러한 사랑의 표지로 나타나는 마태오 복음이다.
또한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에는 그렇기 때문에도
예수님을 ‘죽을죄인’(26,66)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그분의 ‘무죄하심’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고(27,19),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책임을 회피하고, 군중은 책임을 자기들이 지겠다고 한다(27,24-25).
이렇게 무죄한 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함으로써
그 잘못에 대한 선언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자신들에게 스스로 하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길을 달리함으로써 더 이상 하느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자리를 교회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백인대장의 고백이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27,54).
여기서는 또한 인간들의 잘못이 역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빌라도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사형장에 내몰고 있지 않은가?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조차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깨닫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을 단죄하고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30은전에 팔았고, 베드로는 큰소리를 치고도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쳤다.
유다처럼 돈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마저도 팔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목을 맨 절망적 행위는(27,5)
지나치게 자신의 목적에만 눈이 어두웠던 행위의 반작용이다.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은 아직도 용기가 부족하다.
빌라도의 모습은 진리나 정의보다 자신의 안이함을 추구하는 양다리를 걸친 자들이며,
많은 형제들의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서 맥을 놓고 있는 사람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분과 더불어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 하는”(26,40) 사람들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 수난사는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그 비극적 사건의 장본인들이 우리이기 때문에
수난사의 주역들이 무대 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 자신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 어떠한 자세로 있으며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수난의 비극을 재현하고 있을 수도 있고,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성대주간을 지내면서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간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살아가자.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마태 26,14─27.66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생명은 생명을 위해 죽음을 만들어 냈다.'는 말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생물학자가
인간 세포에 관해 관찰하고 연구하다가
세포를 두고 한 말입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이러한 법칙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죽지 않으면 생명으로 살아갈 수 없는가 봅니다.
오늘 저는 잘 살고, 잘 죽고 싶습니다.
저의 십자가를 끌어안아 보렵니다.
[출처] 마태 26,14─27.66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