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동의 위치는 요택이라는 대습지를 기준으로 할 때 후보 지역은 2곳 뿐입니다.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이 진행된 군사적 전략 분석을 통해 두 지역의 지형적 비교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위 그림은 현 칭왕다오시 내에 요동이 위치해 있다고 하였을 경우를 추정한 그림입니다.
* A 는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이 진행된 곳입니다. 요수 공방전이 벌어졌고, 이후 요동성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수나라의 공격 전략은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합니다. 지리적으로 요동성 남쪽은 요택이 펼쳐져 있어서 자연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고, 북쪽은 산악지대에 신성에서 방어하면 공략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고구려의 방어 전략도 A 지점에 집중하여 구축했을 것입니다.
* 수나라의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이후 당나라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합니다. 구당서를 보면 영주도독 장검이 기본 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참고로 장검이 막리지를 상대한 시점은 개모성을 함락한 이후이고, 건안성을 공격한 시점은 전쟁 초기가 아닌 주필산 전투가 끝난 후라고 생각합니다. 당나라 군이 안시성을 공략할 때 건안성에서 온 고구려군을 장검이 상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舊唐書
遷營州都督,兼護東夷校尉。太宗將征遼東,遣儉率蕃兵先行抄掠。儉軍至遼西,為遼水汛漲,久而未渡,太宗以為畏懦,召還。儉詣洛陽謁見,麵陳利害,因說水草好惡,山川險易,太宗甚悅,仍拜行軍總管,兼領諸蕃騎卒,為六軍前鋒。時有獲高麗候者,稱莫離支將至遼東,詔儉率兵自新城路邀擊之,莫離支竟不敢出。儉因進兵渡遼,趨建安城,賊徒大潰,斬首數千級。
영주도독으로 옮기고, 호동위교위를 겸했다. 태종이 장차 요동을 정벌하고자 하여, 번병을 이끌고 먼저 가서 초략하도록 했다. 장검의 군대가 요서에 이르러, 요수의 물이 신창(불어나 넘침)한 것으로, 오래도록 건너지 못하자, 태종이 그가 외나(겁내고 나약함)하다고 여기고, 불러들여 돌아오게 했다. 장검이 낙양으로 가서 알현하고, 대면하여 이해를 진술하며, 이어서 물과 초목의 좋고 나쁨과, 산천의 험함과 쉬움을 설명했더니, 태종이 심히 기뻐하고, 이어서 행군총관에 배수시켰으며, 여러 번의 기졸(기병)들을 겸하여 영솔하게 했고, 6군의 전봉(선봉)이 되도록 했다. 이때 고려의 후인 자를 금획한 것이 있었는데, 막리지가 장차 요동에 이를 것이라 일컬어, 조서로 장검에게 병력을 이끌고 신성쪽 길로부터 그를 요격하도록 하자, 막리지가 끝내 감히 나오지 못했다. 장검이 이어서 진병하여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달려가자, 적도가 크게 무너졌고, 참수한 것이 수천 급이었다
* 당나라의 전략은 수나라의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세적의 6만 대병은 마치 A 루트로 나오는 것처럼 속인 후 현도성과 개모성이 연결되는 B 루트를 공략한 것입니다. 이때 C 루트를 통해 소수의 병력을 보내 신성의 고구려군도 교란합니다. 현도성과 개모성이 당나라 수중에 떨어지자 신성과 요동성의 연결이 끊기게 됩니다.
이세적의 군대가 유성(柳城)을 출발하여 형세를 과시하며 마치 회원진(懷遠鎭)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고는, 군사를 몰래 북쪽 양쪽에 담이 있는 길로 몰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길로 나왔다. 여름 4월에 [이]세적이 통정(通定)으로부터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다. 우리 성읍들은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지켰다. 부대총관(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자,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이 기병 10여 명을 이끌고 곧바로 성문으로 압박해 오니, 성 안에서는 놀라 소란해져서 감히 나가는 자가 없었다
* 그리고 당 태종의 본부군이 요택으로 우회해서 요동성에 도착합니다. 이는 고구려의 방어선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는 전략입니다. 신성에서 보낸 보병과 국내성에서 보낸 기병 4만이 요동성을 구원하러 오지만 요동성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입니다. 당나라는 12일 동안 요동성을 공략하여 마침내 요동성을 함락시킵니다. (참고로 F 는 실위산과 실위수가 있고. 물길이 험하다는 특징이 있어, 옛 요동군 험독현으로 추정합니다)
* 당나라의 다음 행보는 백암성입니다. 백암성의 위치를 추정한 후 지도를 보니 그곳에 흰백자를 쓰는 백운산이 있더군요. 하얀 돌산인지 확인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당나라 군이 백암성의 서북과 서남에 위치하니 백암성도 고립이 되어 버립니다. 손대암이 항복했던 이유를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세적이 백암성(白巖城) 서남방으로 진공하고 황제가 그 서북쪽에 이르니,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이 몰래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성에 이르러 칼과 도끼를 내던지는 것을 신표로 삼고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당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 “정녕 항복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고 말하였다. [손]대음이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으로 올라온 것으로 여기고 모두 그를 따랐다.
* 당나라가 만리장성을 넘어 전진합니다. E 지역에서 주필산 전투가 펼쳐집니다. 많은 분들이 고구려는 대패를 당하지 않았다고 주장을 하시지만 저는 다르게 해석합니다. 당나라군은 점령한 성에 병력을 분산 배치시켰어도 주필산 전투에 고구려 군 이상의 병력을 운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욕살 2명이 항복을 했다면 피해는 상당했을 것입니다. 다만 36,800명을 포로로 잡아 대부분 풀어줬다는 내용은 현실성이 떨어지므로, 고구려 군의 피해는 1만명(노획한 명광개 숫자)에서 3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3500명의 포로가 발생하여 이중 3300명을 죽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 북쪽에 안시성이 있고 남쪽에는 건안성이 위치해 있으며, 안시성을 지나쳐 건안성을 공격하면 양도가 끊긴다고 합니다. 건안성의 위치는 다소 유동적이지만 안시성의 위치는 옛 진번 지역에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E 지역에서 북쪽 길로 가면 안시성이 나오고, 상대적으로 남쪽에 해당하는 동쪽길로 가면 건안성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당나라 군이 건안성으로 진격을 한다고 가정하고 그림을 보시면 양도에 대한 내용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建安下 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城有所不攻者也
건안을 취하면 안시성은 내 배안에 있는 것과 같으니 병법에서 소위 말하는 굳이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 성인 것이다.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이에 대답하니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다.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을 지나쳐 건안성을 공격할 경우 만약 고구려가 우리의 양도를 막고 뒤를 쫓으면 어떡하냐?
* 안시성 공략에 실패한 당 태종은 겨울이 시작되자 퇴각을 합니다. 이세적이 4만의 군사로 고구려의 추격을 막으며 왔던 길로 그대로 돌아갑니다. 고구려 군의 추격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지만 문제는 요택을 통과하면서 추위 때문에 상당한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은 당나라의 승리입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여 점령한 10개 성 7만명을 데리고 퇴각을 합니다. 이후의 고구려-당 전쟁 기록에서 요동성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요동성이 있던 지역을 다시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 위 그림은 요령성에 요동성이 위치한 경우입니다. 이 그림을 들여다 보면 전략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습니다.
억지로 짜 맞춰도 주필산 전투부터는 공격과 수비의 전술이 읽혀지지가 않습니다. 요택은 전략 차원에서 선택한 루트인데 과연 그 효과가 있다고 보기가 의문이 듭니다. 강폭이 100미터나 되는 큰 강을 세개나 넘어야 하고, 퇴각도 의문 투성입니다. 안시성이 북쪽에 있고 건안성이 남쪽에 있다고 한다면.... 삼국사기의 내용대로 전개가 되질 않습니다. 어렵네요.
첫댓글 잘 읽고갑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대 전쟁의 일반적인 특징 중 하나가 점령 지역 사람들을 자국 영토내로 이송시키는 것입니다. 유민의 개념과 노예의 개념으로 정리가 가능합니다. 유민의 개념일 때는 자신의 백성으로 인식하는 경우이고, 노예의 개념일 경우 에는 전쟁비용을 감당하는 수단이 됩니다. 요동성 지역이 인구 체인지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공지였을 것으로 생각하며 군사적 활동만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게시판에서 고당전쟁에 관하여 과거에 정말 무수히 많은 글들을 통해 토론이 있었습니다. 또다시 반론을 하기 보다는 카론님께서 직접 이전 글들을 찾아보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네. 그 내용들을 지금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의 역사이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만 모든 이야기들이 매끄럽게 전개되지 않아서 혼란이 왔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나름 기준점이라고 판단되는 요동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각 시대별로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 내용은 당 태종 시대 때의 요동이 과연 어느쪽이었을까 군사적 측면을 고려하여 추측해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