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서는 신화라는 개념을 성화에 비교하여서 말씀하시고 있군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가운데서 성화로써의 신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입장에서 언급되었지만 아타나시우스는 그러한 삼위일체라는 것을 전제로 한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화라는 말을 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삼위하나님을 부정하는 가운데서의 신화라는 개념의 성화를 말하고 있는 현대신학자들의 임의적 해석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 신학계에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그러한 말을 쓸 때에 좀 분별하여 쓰심이 옳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인물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하나의 키워드를 생각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이 사상이해에 상당히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지나친 도식화가 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님도 저에 아타나시우스=삼위일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나는 그 아타나시우스의 실재론으로서의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보편의식에 대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오히려 님이 말하는 '성화로써의 신화'라는 개념은 그러한 삼위일체의 신적 보편 안에서 이루어지고 규정되어지는 것이라는 점이 상식적으로나 또는 역사적으로나 그 아타나시우스의 인식이라고 함을 바르게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때 당시 삼위에 대한 논란은 실재론에 대한 다툼이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때나 11~12세기에 있었던 정치적 권한을 위한 실제논쟁으로 일관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중세에 대한 사상을 접하면서 보편에 대한 인식의 결여는 용어에 대한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두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이 현대신학자들의 장난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아타나시우스가 님이 의도한 것으로 보이는 '성화로써의 신화'를 말함에 있어서 전제되어지고 그것을 감싸고 있고 기준이 되어지는 것은 삼위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가 성화로써의 신화를 말함을 말함에 삼위일체와 상관없는 그러한 그것이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한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고 표현상 이해되어지는 현대적 사상의 이입을 분별없이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용어사용과 논리와 보편이라는 개념에 좀더 유의하여야 하실 것으로 봅니다.
더욱 신화를 말하고 있는 사이트에 대하여서는 출처에 대한 것을 대신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신화의 창시자라는 개념으로 신론에 대한 재고라고 함이 결핍되어진 가운데서 그 합리성을 달아보아야 한다는 점에 신앙의 사실을 말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에 출처의 실제적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님이 아타나시우스가 말하는 신화를 말할 때에 그러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 님이 보았던 객관적으로 수긍할 만한 이정표로서의 구절을 인용하고 보편적인 출처를 말씀하심이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책을 말할 때에는 그 제목과 저자와 출판과 페이지도 준비해서 객관적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함도 좀더 대화의 기본으로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용어라고 함이 오해되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하여서 수긍하면서도 그러한 오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미리 생각하지 못하셨다는 것은 용어의 신학적 인식의 보편성이라고 함과 그 방향성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시지 않았다는 것과 '신화'라는 용어는 삼위하나님을 전제로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신앙의 정체성의 관한 문제라고 함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 님의 신앙적 핀잔은 받으셔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고 봅니다.
님께서 여러가지 방향과 합리성의 여러 방향성에 대하여 열린 가운데서의 보편을 말하시지만, 진정한 보편의 사실은 삼위하나님 안에서 합당한 당위성을 얻을 때에 상대적이면서도 그 보편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의 '성화로써의 신화'로써 언급한 님의 '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셔서 그가 '신화의 창시자'라고 함에 있어서는 문맥상 구색을 가출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도 신적인 보편성에 따른 신앙에서는 그 표현상 부적절함은 더 나아가서 옳지 않음은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물론 아닙니다. 문맥상의 결함에서 나온 오해인듯 합니다.
번호: 6135 글쓴이: 인권의 왕도
조회: 23 날짜: 2005/02/24 22:12
이명신님> 첫 번째 질문 님께서는 아타나시우스를 신화의 창시자라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럼 아타나시우스가 삼위일체를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신화라는 이야기인가요..(각주1)
>> 질문 고맙고, 꼭 집어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 아타나시우스에 대해서 아리우스 이단과 싸운 믿음의 교리의 투사로서 생각을 합니다. 니케아 회의(325)와 니케아 - 콘스탄티 노플 공의회(381)에서 아리우스의 성자 피조성을 물리치고, 성자의 신성성을 확고히 하므로서 삼위일체를 확립하는데 기여한 정통 교부로만 말 입니다.
이런 의식속에서 제가 아무런 설명이 없이 “아타나시우스는 신화교리의 창시자이다”라는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주님 앞에서 온유하시고, 경건한 이명신님께서 감정을 내시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니, 괜한 말을 했구나 생각도 들고 그런 감정이 이는 군요.
물론 이명신님의 물음과 같이 삼위일체 = 신화교리로서 말한 것은 아닙니다.
라틴 신학의 아버지이며, 삼위일체 문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터틀리안(155-220,230)의 교리적 문제점과 배교에 대해서만 말하려다 보니, 미처 아타나시우스의 신화교리에 대해 살피지 않게 되었던 것이 오해를 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지식 참조를 위해서 한마디 하면 일반 사람들을 위해서 말하면 삼위일체를 만든 사람들은 아타나시우스도 터틀리안도 아닌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 대 바실리우스(330-79, Basilius)와 그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35,40-394) 그리고 바실리우스의 친구 나찌안쥬스의 그레고리우스(?329-90?)라는 것 입니다.
한 본질/본체/실체(우시아)의 세 존재/위격/개체(휘포스타시스)라는 문구를 제안한 이들이 위의 갑바도기아의 세교부들이고,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와 성부와 성자의 본질은 같다'(homoousios/호모우시우스) 성부와 성자의 본질은 다르다(아노우시우/anomoios)로서 싸웠던 것이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이 같다라는 현재의 삼위일체의 대한 생각은 없었다는 것 입니다.
니케아 회의(325) 전후는 성부와 성자가 본질이 같은가 다른가, 이것이 첨예한 대립의 문제였지 성령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 이것은 아리우스가(250-336) 화해할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길을 걷다가 죽고,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295~373]도 죽은후에 콘스탄티 노플 공의회가 381년에 개최가 되면서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들의 제안에 의해서 채택이 된 것이라는 것, 그전에 물론 아타나시우스와 교분이 있었고, 이에 대한 교감은 있었으나, 아타나시우스만의 강조라고 할수 있는 것은 성육신뿐이라고 하고, 삼위일체라는 문구는 갑바도기안의 세교부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는 것,
사실 아타나시우스의 동일본질은 알렉산더가 먼저 말하던 바이고, 처음에 싸우게 된 것도 알렉산더 알렉산드리아 감독과 아리우스와 싸움속에 그의 수행원으로서 니케아 회의에 참석하면서 아타나시우스에게 이어지게 된 것이라는 것, 3년후인가에 알렉산더 감독이 죽어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다는 것 입니다.
먼저 신화(Deification) 교리란 삼위일체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했던 것이고, 믿었던 내용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God became a man that men might become God“라는 것을 말 합니다.
교부들로는 아타나시우스와 클레멘트(150-215), 성 어거스틴(354-440), Justin Martyr(2C), Irenaeus of Lyon(2c), Hippolytus of Rome(3c), Basil(330-379) 등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신격(Godhead/경배의 대상으로서)에서는 아니며,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다'(베드로 후서 1:4절 참조)로 설명 합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이것이 신앙의 최종 목표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교부는 아타나시우스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다룬 책인 'On the Incarnation, 54:3'에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이다(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 라고 말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295-373)
이명신님>두번째 질문 님이 말씀하시는 보편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고대 중세의 사상적 판단이 되는 기준을 말씀해보세요..(각주2)
님께서 삼위하나님에 대한 것을 말한 자를 신화의 창시자라고 말함에 있어서 이단적 시비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제가 님의 입장을 이단적 입장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보편을 말함에 있어서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님의 보편을 알지 못하면 대화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대화를 시작함에 있어서 여기서 부터 님에게 질문함으로 대화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경계의 글에서 말한 보편이란 주님안에서이고 주님을 인정하는가 안하는가를 말한 그 보편을 말하며, 제가 성경안에 있는 99마리의 양보다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니는 주님의 이미지로부터 인권운동을 한다면 이것은 인본주의가 될 수가 없고 신본주의로서 봐야 한다는 조의 말이라는 것 입니다.
신본주의에서 만약에 타종교의 성직자가 자기네 경전에 씌여진 위와 유사한 문구의 힘입어 인권운동을 한다면 이것도 신본주의라고 할수 있다는 것이나, 기독교적 관념에 의거한 신본주의는 될 수가 없다고 한다는 것, 이렇게 신본주의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인데. 위와같은 것은 상대적 입장 즉 기독교를 세상의 종교의 하나로서 보는 가운데 말한 것이고, 독존적 위치에 있어서 그렇게 절대 당위적 선성에 의해서 말한다면 그 또한 가치는 격하 될 것이라는 것 입니다.
신화교리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제가 질문을 해도 될런지요. 이명신님은 신화교리를 위의 싸이트를 참조하신후 개인적으로 어떤 감정과 가치판단을 내리셨는지 그것이 궁금하여, 그것에 대한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느끼기에는 부정적으로 생각 되는데, 저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며,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만...이는 자유 입니다. 답변할 때 토를 달아 주시면 참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