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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3강-3 (2013. 10. 28.)
答 趙待制 道夫
今時學道之士가 往往에 緩處는 却急하고 急處는 却放緩하나
니 龐公이 云一朝에 蛇入布裩襠하면
試問宗師甚時節고하니 昨日事도 今日에 尙有記不得者온
况隔陰事를 豈容無忘失耶아 決欲今生에 打敎撤인댄
不疑佛不疑祖하며 不疑生不疑死하고 須有決定信하며
具決定志하야 念念에 如救頭燃이니 如此做將去하야
打未撤時라사 方始可說根鈍爾이니라
今時學道之士(금시학도지사)가,
요즘 도를 배우는 선비들이 = 學道之士. 이렇게 표현합니다.
往往(왕왕)에 緩處(완처)는 却急(각급)하고
急處는 却放緩(각방완)하나니,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천천히 해도 될 것, 緩자는 느려진 것. 천천히 해도 될 것은 급하게 하고, 도리어 급하게 하고 사실 급하게 해야 할 곳은 또한 놓아서 천천히 하나니, 그 말이지요. 우리도 일상생활에 그런 것이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지요.
龐公이 云(방공운), 방 거사
一朝(일조)에 蛇入布裩襠(사입포곤당)하면,
하루아침에 뱀이 布裩襠에 들어가면,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죽음이 임박하면ㆍ죽음이 다다라 오면’ 그런 말입니다.
試問宗師甚時節(시문종사삼시절)고하니,
시험 삼아 종사에게 묻되, 甚時節 = 무슨 시절인가?
지금 죽음이 다다라 왔을 때, 지금 이것이 무슨 소식이냐? 그렇게 하면
昨日事(작일사)도 今日(금일)에 尙有記不得者(상유기부득자)온,
어제일도 오늘 오히려 기억하지 못하거든, 이 말입니다.
况隔陰事(황격음사)를, 하물며 陰을 격한 일.
그것은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가 죽으면 중간에 몸을 받기까지는 “중음” 그러잖아요. 중음사ㆍ中陰神. 그러잖아요. 그 다음에 그 陰이 말하자면 “중음” 이 중간 생인데요. 다음 생을 받는 그런 과정이 있는데요.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겠느냐 말입니다.
豈容無忘失耶(기용무망실야)아? 어찌 忘失함이 없음을 용납하겠는가?
기억할 수 있겠는가? 이 말입니다. 어제 일도 우리가 사실은 곰곰이 기억해보면, 어제 일뿐만이 아니라 우리나이쯤 되면, 오전에 있었던 일,
‘오전에 내 뭐했지?’ 하면 제대로 기억 안 납니다. 뚜렷한 것 몇 가지만 기억나지, 세세하게 매 시간ㆍ매 시간 기억 잘 안 납니다. 그런데 어제 일을 오늘 기억한다고 하는 것, 이것도 어려운 겁니다. 하물며 전생 일을 기억해 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겁니다.
決欲今生(결욕금생)에 打敎徹(타교철)인댄,
결정코 금생에 쳐서 하여금 사무치게 할진댄, 사무치게 하려면, ‘깨달으려면’ 이 말입니다.
不疑佛不疑祖(불의불불의조)하며,
부처도 의심하지 말고 조사도 의심하지 말며,
不疑生不疑死(불의생불의사)하고,
사는 것도 의심하지 말고 죽는 것도 의심하지 말고, 뭐 부처니ㆍ조사니, 내가 살아야 되느니ㆍ죽으면 어쩔 것이니, 그까짓 것 절대 생각하지 말라 이 겁니다.
須有決定信(수유결정신)하며,
모름지기 결정한 믿음이 있어야 하며,
具決定志(구결정지)하야, 결정한 뜻을 갖추어서
念念(념염)에 如救頭燃(여구두연)이니,
마치 머리에 불을 끄는 것과, 구제하는 것과 같이 할지니,
머리에 불이 붙었다. 스님들은 머리 깎았으니까 불붙을 일이 없지만,
옛날에 상투 틀고 해놓으면요? 머리에 불이 붙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도 한참 탈 때까지 잘 모르는 겁니다. 예컨대 상투 튼 머리에 불이 붙었다하면 그 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공부인은 모름지기 그러한 마음이, 그런 발심이 되어있어야 된다.
생사가 급하고ㆍ생사가 두렵고, 뭐 세속적인 이런저런 인간사 그까짓 것, 생각하고 할 겨를이 없어야 된다.
如此做將去(여차주장거)하야,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가서
打未徹時(타미철시)라사, 쳐서 사무치지 못할 때라도 그 때 가서 如救頭燃, 머리에 불을 끄듯 하는 그런 심정으로 공부를 지어서, 그래도 만약에 깨닫지 못한다면 方始可說根鈍爾(방시가설근둔이)이니라.
바야흐로 비로소 가히 근기가 둔한 것을 말할 지니라. 그 말입니다.
그 쯤 해보고 근기가 둔 하느니ㆍ어쩌느니 하지, 예를 들어서 공부하는 데도, 글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글공부도 지독하게 해보고, 밤낮없이 한 10년쯤 해보고 그래도 안 되거든 그 때야 안 된다고 해야지,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한다. 이것이지요.
若當下에 便自謂호대 我는 根鈍하야 不能今生에 打得徹이라
且種佛種結緣이라하면 乃是不行欲到라 無有是處니라
某每爲信此道者하야 說漸覺得日用二六時中省力處가
便是學佛得力處也라하노니 自家得力處는 他人이 知不得하며
亦拈出與人看不得이니
盧行者가 謂道明上座曰汝若返照自己本來面目하면
密意盡在汝邊이라하니 是也라
若當下(약당하)에 便自謂(변자위)호대,
만약 當下 = 바로 이 순간, 곧 스스로 말하기를,
我는 根鈍(아근둔)하야, 나는 근기가 둔하다.
不能今生(불능금생)에 打得徹(타득철)이라.
능히 금생에 쳐서 사무치지 못한다. 아마 나는 금생에 깨닫지 못 할 거야.
그런데 사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화두참선해서 어떤 성공을 거두는 것은, 서장에서ㆍ또 간화선법에서 원칙적으로 내세운 어떤 마지막 線(선)을 통과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긴 어려운 일입니다.
靜中一如(정중일여)ㆍ動(동)靜一如ㆍ夢(몽)中一如ㆍ
病(병)中一如ㆍ寤寐(오매)一如ㆍ生死(생사)一如까지 투과해서 말하자면 크게 한번 깨닫는 그런 일이 있어야 비로소 간화선 참선은 “일을 마쳤다.” 라고 할 수가 있는 그런 입장을 우리가 간화선공부 라고 한다면, 사실은 그것 제대로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실은 지금 어려운겁니다. 전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요즘 사람들은 아는 것이 너무 많고ㆍ정보가 많고 그래서 산만합니다. 생각이 산만해서 일념이 되기가 어렵고, 무슨
狗子無佛性(구자무불성). 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심이 없으니까ㆍ
의심이 없으니까 眞疑가 頓發(진의돈발)해도, 참다운 의심이 몰록 발한다하더라도 그것이 지속되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참다운 의심이 일어나지 아니한 상태로 억지로ㆍ억지로 의심을 지어가는 그런 식 참선은 이 대혜스님이 설정해놓은 그 깨달음의 경계까지는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다 할 정도로 너무 높이 잡아놨습니다.
이 대혜스님의 간화선이 어떤 마치는, 간화선공부를 해 마치는 어떤 경계는 너무 높이 잡아놓은 겁니다.
我는 根鈍이라. 근기가 둔하다. 금생에 쳐서 사무치지 못한다.
그래서
且種佛種結緣(차종불종결연)이라하면,
또한 佛종자나 심어서, 佛種 = 부처의 종자나 심어서 인연이나 맺는다.
“부처님하고 인연이나 맺어 놓겠다.” 라고 한다면,
乃是不行欲到(내시불행욕도)라.
행하지도 아니하고서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無有是處(무유시처)니라.
옳은 곳이 없느니라. 옳지 않다 이 말입니다.
말인 즉은, 대혜스님 입장에서 또 그 당시 간화선공부에 어떤 입장으로는 이것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 우리, 이 시대의 우리가 간화선공부를 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이 사람은, ‘조대제가 생각했던 것하고 오히려 훨씬 더 가깝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도 합니다. 그렇다면 아예 간화선을 안해야 되겠지요. 하지 말고, 그냥 다른 어떤 신행생활이나 철저히 하고, 포교나 철저히 하고, 기도나 열심히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오히려 옳지요.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은 참~~ 빚지는 겁니다.
시간만 보낸다면 정말 빚만 지는 일입니다.
그 전에 월암스님이 그런 법문을 했다가 수좌들에게 아주 미움을 많이 받았는데요. “방선할 때, 화두를 방석 안에다 집어 넣어놓고 방석 안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나가요. 다시 입선하면 들어와서 방석 밑에 넣어놨던 화두 한 번 꺼내서 그냥 ‘있나? 없나?’ 하고 한 번 살펴보고, 또 해제할 때는 일주문에다 화두 딱~ 걸어놓고 나가 버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한 철 내내 돌아다니고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다가 결제하면서 일주문에 들어오면서 그때야 일주문에 걸어놨던 화두를 들고 선방으로 들어오는 식이다.
“그렇게 해서 도대체 언제 일념이 되겠느냐?” 이 겁니다.
“요즘 수좌들 상황이 그런 것 아니냐?” 이런 법문을 수좌들 모아놓고 저~ 기 교성사에서 했다고요. 강의에서해서 그것이 소문이 나서 되게 밉보이고 그랬습니다. 바른 말은 바른 말이지요. 그런데 그 말이 현실은 현실입니다. 사실이거든요.
해제 중에 열심히 화두 드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뭐 결제 중에도 안 드는데, 노는 시간에 외국여행이나 다니기 바쁘고 한데, 언제 화두 그것 챙길 그런 마음이 있겠습니까? 화두 챙길 마음이 있는 사람이 무슨 여행 다니고 그래요? 사실은 그것이 빤한 사실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것 우리가 뭔가 소득이 있는 일로 한 번 다시 생각해 봐야 됩니다. 소득이 있는 일로... 평생을 우리가 이렇게 시주 밥만 축내고, 그저 편안하게, 그래서 나중에 나이 들어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돼서 불공하라면 불공할 줄 아나? 기도하라면 기도할 줄 아나? 법문하라면 법문할 줄 아나? 절 일은 아무 것도 못하는, 포교도 못하지, 신도단련 못하지 아무 것도 못하는 쓸모없는 이 돼버립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 많잖아요.
절에서 일이 필요해서 맡기면 못하는 겁니다. 평소에 안 했으니까요.
울력 시간만 되면 눈치보고 도망가기 바쁘고 울력 끝나면 들어오고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불사를 한다든지 어떤 행사를 한다든지 할 때, 완전히 멍청이가 되는 겁니다. 아무 할 것도 없는 겁니다. 무슨 案(안)을 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허드렛일을 하나요? 허드렛일도 못하고요. 그런 것은 하기 싫고, 또 그런 것은 천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이 프로는요? 만능이 돼야 됩니다. 참선 가르치게 되면 참선 가르쳐야 되고, 제 지내서 천도한 때가 되면 천도할 줄도 알아야 되고, 불공할 때가 되면 불공도 해야 되고, 법문할 일이 있으면 법문도 해야 되고, 법상에 올라가서 주장자 휘둘릴 일이 있으면 가서 흉내한번 내는 겁니다. 만능이 돼야 된다고요.
그래야 그것이 밥 먹고 사는 정말 프로가 되는 것이지요.
부처님 밥 먹고 살 자격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선방에 오래있으면요?
나이는 많지, 승랍 높지 그리고 눈은 높아져 있지, 익혀놓은 바는 없지 그래 전부 서툴고 하기도 싫고 안 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 사람이 돼버립니다. 참 그 곤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절에 오는 사람들에 대해서 조금도 용납을 못해요. 조금도 용납을 못해...
예를 들어서 스님들이 다니는 화장실에 어떤 신도가, 신도도 아니지요.
관광객이 한 분 지나가다가 잘못 들어갔다 나오면 혼을 내는 겁니다.
또 어떤 이는 절 안에 선방 근처에 들어왔다든지 그래도 혼을 내는 겁니다. 그것 하나 용납을 못하는 겁니다.
그 사람한테 돈 주고 있으라고 해도 있을 사람 아닙니다.
그 사람도 바쁜 사람입니다. 어쩌다가 길 잘못 들어서 선방에 들어왔을 뿐이지, 거기 있으라고 하면 한 시간도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돈 10만원 준다고 해도 한 시간도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그것을 용납 못하고 사정없이 혼내가지고 쫓아내는 겁니다. 다시는 절하고, 불교하고 정나미 떨어져서 쳐다보기도 싫도록 그렇게 만들어서 쫓아 보내는 그런 예들을 많이 봤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사람은 이제 불교니ㆍ스님이니ㆍ절이니 하는 것은 금생에 완전히 담 싼 겁니다. 다시는 절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도록 무안하게 만들어 보내는 것. 이런 교육부터 시켜야 됩니다.
이런 문제들을... 참~~ 그것 문제들이 많습니다.
설사 스님들이 쓰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합시다.
그 사람들이 한 시간을 앉아있을 겁니까? 두 시간을 앉아있을 겁니까?
돈을 몇 100원을 앉아있으라 해도 안 앉아있어요. 그 사람도 바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안 줘서 쫓아 내야할 정도인가요? 그렇게 죽을죄를 지었는가요? 그것 하나 용납 못하는 겁니다. 야~ 참, 신기하지요.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요? 어린이들 와서 무슨 템플스테이를 한다든지ㆍ놀이를 어떻게 한다든지 하고 어린아이들이 철도 없이 막 뛰어다니면 그것 못 봐 주는 겁니다. 절에서 그렇게 하면 되느냐하고, 사정없이 그냥 뭐라고 하고요. 절에 무슨 공사가 있어서 포크레인 소리를 좀 내면 원주 불러서 막 사정없이 호통 치고요. 시끄러워서 공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실은 이런 것부터 우리가 정비해 나가야 할 그런 문제지요.
不行欲到 無有是處니라.
某每爲信此道者(모매위신차도자)하야,
내가 매양 이 도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說漸覺得日用二六時中에 省力處(설점각득일용이륙시중생력처)가,
日用二六時中에 省力處가 = “힘 덜리는 곳이
便是學佛得力處也(변시학불득력처야)라하노니,
불법을 배우는데 있어서 “힘을 얻는 곳이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점점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노니,
自家得力處(자가득력처)는, 자기 자신이 得力한 곳은
他人(타인)이 知不得(지부득)하며, 다른 사람은 몰라요.
亦拈出與人看不得(역념출여인간부득)이니,
또한 그것을 ‘내가 공부 얼마만치 됐다.’ 하는 것을 꺼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려고 해도 보여 줄 수도 없어, 與人看不得입니다. 꺼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도 못해요.
盧行者(노행자)가 謂道明上座曰(위도명상좌왈),
육조스님 행자 때지요? 도명상좌에게 일러 가로되ㆍ도명상좌에게 일러 말하기를
汝若返照自己本來面目(여약반조자기본래면목)하면
密意(밀의)는 盡在汝邊(밀의진재여변)이라하니,
이것이 노행자가 가사하고 발우하고 오조스님께 받아서 도망가잖아요.
그런데 도명상좌가 쫓아왔지요. 쫓아와서 바위 위에다, -이 사람은 본래 장군 출신이고 워낙 힘이 좋고 등치도 우락부락하고 크고 해가지고, 노행자는 별로 그렇지 못한 모양입니다. 나가서 한 번 붙든지 해야 되는데...
겁이 나서 그렇지 못하고 발우 떼하고 가사하고 바위 위에다 떡~ 얹어놓고, 저~ 기 숨어 있는 겁니다. ‘가져가려면 가져가시오.’ 하고 이렇게 했는데... 그런데 그 법력에, 노행자의 법력에 도명상좌도 차마 그 발우 떼를 들지를 못했습니다. “바위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도 표현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것이 어디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인가요?
힘으로? 법 앞에서는 힘 가져가지고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도명상좌도 그 발우 떼를 들고 갈 그런 상황이 아닌 겁니다. 쫓아오긴 쫓아왔지만 상황을 빤히 알면서 감히 어찌 그 신표인 그것을 함부로 간단 말입니까?
아무튼 그래서 못 가져가고 그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하라. 하는 법문 듣고는 깨달았잖아요.
“그 외에 다시 한 마디 일러 주십시오.” 라고, 그러니까 “이것 외에 密意. 비밀한 뜻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육조스님이 그때 하신 말씀입니다
汝若返照自己本來面目하면, 그대가 만약 자기의 本來面目을 반조하면
密意는 盡在汝邊이라. 밀밀한 뜻ㆍ비밀한 뜻은 모두 그대에게 있다.
“그대에게 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뭘 너한테 비밀한 뜻이 있는데, 따로 비밀한 뜻을 뭐하려고 찾느냐?” 라고 한 것이, 그것이 바로 是也(시야)라. 이 뜻이다. 이 말입니다.
密意者는 便是日用得力處也며
得力處는 便是省力處也라 世間塵勞事는 拈一放一이라
無窮無盡커늘 四威儀內에 未嘗相捨는 爲無始時來에
與之結得緣深故也요 般若智慧는 無始時來에 與之結得緣淺故也라
乍聞智識의 說着하고 覺得一似難會하나니 若是無始時來에
塵勞緣이 淺하고 般若緣이 深者인댄 有甚難會處리요
但深處는 放敎淺하고 淺處는 放敎深하며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어다
密意者(밀의자)는, 밀밀한 뜻ㆍ비밀한 뜻이라고 하는 것은
便是日用得力處也(변시일용득력처야)며,
일상에 힘을 얻은, 공부하는 데 힘을 얻은 곳이며,
得力處는 便是省力處也(득력처변시생력처야)라.
힘을 얻은 그 곳이 곧 힘을 더는 곳이다. 힘을 얻으면 힘이 덜리고, 힘이 덜 든다고 하는 것은 힘을 얻은 것이지요.
世間塵勞事(세간진로사)는 拈一放一(념일방일)이라.
세상사라고하는 것은 하나 잡으면 하나놓고, 하나놓으면 하나잡고, 끝도 없잖아요. 여러분 절하나만 운영해도 일이 끝이 없잖아요.
無窮無盡(무궁무진)커늘
四威儀內(사위의내)에, 행주좌와 四威儀內에,
未嘗相捨(미상상사)는, 일찍이 서로 버리지 못하는 것은
爲無始時來(위무시시래)에 與之結得緣이 深故也(여지결득연심고야)요.
그것으로 더불어 맺은 인연이 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중요하게 생각되는 겁니다. 아~ 오늘 공부하는 것 빤히 알면서도 ‘야~, 신도들하고 어디 가야 되는데...’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는 겁니다. 서장공부는 뒷전이고, 신도들하고 같이 안 놀아주면 신도가 절에 안 오고 그러면 수입에 문제가 있고, 이런 것이 착~~~ 그냥 연상이 되는 겁니다. ‘서장, 나중에 공부하기로 하고 신도들 하고 놀아줘야 되겠다.’ 이것이 더불어 맺은 인연이 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이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겁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이... 그것 빤한 것 아닙니까?
그래 저는 어떤 사람들이 “바빠서 공부하러 못 왔다.”
“그래 공부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지?” 이렇게 그냥 딱 사정없이 면박 줘버립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공부가 그렇게 가치 없는 것이냐고... 重處偏墜(중처편추)라고 무거운 것 계산해서, 네 머릿속으로 무거운 것 계산해서 무거운 쪽으로 기울었다는 이야기지, 똑 같은 24시간입니다. 하루 24시간. 석가모니는 무슨 할 일이 없어서 출가했는 줄 아냐고...
심심해서 출가했는 줄 아냐고... 공부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더 무겁기 때문에 처자식 다 버리고 출가한 것 아니냐고... 마찬가지입니다.
법문 들으러 안 온 것은 법문은 심심풀이로 듣고, 그저 친구들하고 노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 아니냐고, 우리 양심적으로 깨놓고 이야기하자고, 솔직하게 사실은 그런 겁니다. 자기 기준으로 그렇게 계산해서, 머리로 계산해서 ‘이것이 더 무겁다.’ 생각해서 하는 것이지요.
與之結得緣이 深故라. 그것하고 맺은 인연이 깊기 때문에 그렇다.
대혜스님 법문 새겨보면요? 참~~ 아주, 속 시원합니다.
般若智慧(반야지혜)는 無始時來(무시시래)에
與之結得緣淺故也(여지결득연천고야)라.
그것으로 더불어 맺은 인연이 얕기 때문이다. 그렇지요.
공부는 자꾸 뒷전으로ㆍ뒷전으로 밀어놓으니까 중요하게 생각이 안 드는 겁니다.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이 안 들어요. 중요하게 생각이 안 든다는 것은 더불어 맺은 인연이 얕아서 그래요. 인연이 깊으면, 공부인연이 깊으면 만사 제쳐놓고, 경제적으로 설사 돈 100만원 손해 보는 한이 있어도 공부하려고하는 것이지요. 100만원 손해보고 공부하면 공부는 천만 원어치 맛을 보는 겁니다. 그만치 거기에 마음을 쏟으니까요. 그런 댓가가 있는 겁니다. 댓가가... 왜 댓가가 없겠습니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빤하지요.
乍聞知識(사문지식)의 說着(설착)하고,
잠깐 선지식이 말씀하는 것을 듣고,
覺得一似難會(각득일사난회)하나니,
一似難會 = ‘야~ 어렵다ㆍ이것 알기 어렵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나니,
若是無始時來(약시무시시래)에, 만약 無始時來에
塵勞緣(진노연)이 淺(천)하고, 세상 塵勞緣이 얕고,
般若緣(반야연)이 深者(심자)인댄, 반야의 인연이 깊을진댄,
有甚難會處(유삼난회처)리요?
무슨 어려운 것이 있으리요? 알기 어려운 곳이 있겠는가?
但深處(단심처)는 放敎淺(방교천)하고,
다만 깊은 곳은 놓아서 하여금 얕게 하고, 세속인연이지요. 세속인연이 깊으니까요. 그것은 얕게해요. 놓아서 하여금 얕게 하고,
淺處는 放敎深하며, 얕은 곳. 반야의 인연이지요.
반야의 인연. 얕은 곳은 놓아서 하여금 깊게 하며,
生處는 放敎熟(방교숙)하고,
선 것, 덜 익은 것은 놓아서 하여금 익게 하고ㆍ익숙하게 하고,
熟處는 放敎生이어다. 익숙한 것은 놓아서 하여금 설게 할 지어다.
이것이 대혜스님이 아주 잘 쓰는 말씀입니다.
淺處는 放敎深하고 深處는 放敎淺하라.
얕은 곳은 깊게 하고 깊은 곳은 얕게 하라. 또
선 것은 익게 하고 익은 것은 설게 하라.
그렇지요. 공부는 설어 있지요. 우리가 공부는 서툴지요.
공부는 참~ 잘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세속 인연은 익숙하잖아요.
안 배워도 아는 겁니다. 욕심내고 이익 차리고 하는 것은 안 배워도 아는 겁니다. 그것은 익숙한 곳입니다. 그래서 대혜스님께서
선 것은 익게 하고 익은 것은 설게 하라. 아주 명 법문입니다.
대혜스님이 아주 자주 하시는 법문인데요. 이 법문이 정말 명 법문입니다. 이것 밖에 달리 없습니다. 수행이란 바로 이 겁니다. 수행이란 이 겁니다. 언제부터 무슨 공부에 익숙하게 해서 태어난 사람 누가 있습니까?
저는 가끔 그런 소리 하지요.
무슨 안중근이 사람 죽이는 것이 익숙해서 죽인 줄 아냐고, 그 사람도 생전 처음 죽이는 겁니다. 그렇지만 죽일 상황이 되니까 사람 죽인다 이 겁니다.
사람 죽이는 것이 익숙하여서 죽이는 안중근이 봤느냐고, 절박한 심정이 되면 한다 말입니다. 절박한 심정이 되면...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서툴지요. 전혀 이것 서툴지요. 그렇지만 ‘하~ 참으로 이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길지 않은 인생, 공부 한번 하다가 죽어야지.’ 하는 그런 절박한 마음을 가지면 아무리 둔하고 서툴고 하더라도 한다. 이 겁니다. 벗어부치고 하면 금방 익숙해지니까요.
纔覺思量塵勞事時에 不用着力排遣하고 只就思量處하야
輕輕撥轉話頭하면 省無限力하고 亦得無限力하리니 請公은
只如此崖將去하고 莫存心等悟하면 忽地自悟去하리라
叅政公이 想되 日日相會리니 除圍碁外에 還曾與說着遮般事否아
若只圍碁코 不曾說着遮般事인댄 只就黑白未分處하야
掀了盤撒了子하고 却問陀호대 索取那一着고하야 若索不得인댄
是眞箇鈍根漢이리라 姑置是事하노라
纔覺思量塵勞事時(재각사량진노사시)에,
思量塵勞하는 일을 纔覺. 겨우 깨달을 때에, 막 깨달을 때에 ‘아, 이것 세속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세속적인 일이다.’ 라고 하는 것을 막 깨달을 때에 不用着力排遣(불용착력배견)하고,
힘써서, 힘을 붙여서 排遣. 버리려고 하지 말고,
只就思量處(지취사량처)하야, 다만 생각하는 곳에 나아가서
輕輕撥轉話頭(경경발전화두)하면,
가뿐 가뿐하게 화두를 들게 되면, 이 말입니다. 그 생각하는 곳에 가뿐 가뿐하게, 세속 일 생각하면서 또 화두하고 이중으로 갈등하는 겁니다.
앉아서 화두 한다고 있다가도 무슨 세속 일이 생각이 나서, 그 생각이 달콤하면 갈등하다가도 세속 생각하는 것으로 쫓아가 버리는 겁니다. 가차 없이 그것을 버리고 화두를 챙겨야 할 텐데, 아 지가 지어놓은 생각도 그것이 달콤하거든요.
옛날에 친구를 만났던 생각이라든지, 뭐 여행가는 생각이라든지 그 생각이 달콤하니까 아~~ 그 화두는 들까말까ㆍ들까말까 하다가 그만 여행가는 생각해 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과단성이 없어서 그렇지요.
只就思量處하야, 사량하는 곳에 나아가서
輕輕撥轉話頭하면, 화두를 굴려보면,
가뿐 가뿐하게 화두를 한번 굴려보면
省無限力(생무한력)하고, 무한한 힘을 덜게 될 것이고,
亦得無限力(역득무한력)하리니, 무한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니,
請公(청공)은, 청컨대 그대는
只如此崖將去(지여차애장거)하고, 다만 이와 같이 밀어붙이고,
莫 存心等悟(막존심등오)하면, 마음을 두어서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며,
等 = 이럴 때는 기다릴 等자입니다. 마음을 두어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며,
깨닫는 생각 좀 하지 말라 말입니다.
화두만 밀어붙이지 거기다 깨닫는 생각하면 그것도 또한 망상입니다.
忽地에 自悟去(홀지자오거)하리라.
홀연히 스스로 깨달아 갈 것이다. 깨닫는 생각하면 그것 또한 망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이 된다.
叅政公(참정공)이 想日日相會(상일일상회)리니,
생각하건대, 참정공하고 매일매일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니, -이 사람은 또 저 앞에서 나왔던 이 참정하고 아마 친구인가 봐요.
除圍碁外(제위기외)에, 이 사람들이 동료들이라서 만나서 아마 바둑을 두나 봅니다. 바둑을 두는 것 밖에
還曾與說着 遮般事否(환증여설착자반사부)아?
또한 일찍이 이 공부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느냐? 그 말입니다.
이야기해 봤느냐? 선방에 있을 때 지대방에 앉아 있어보면요?
공부이야기 한 마디도 안 나와요. 야~ 신기하지요.
큰 방에서는 앉아서 화두 드는데, 지대방에만 나왔다하면 하~ 나는 공부가 잘된다느니ㆍ안 된다느니, 또 화두를 이렇게 의심하면 되는지ㆍ안 되는지 선배에게 묻는다든지, 도대체 공부하는 이야기 한 마디 안 나옵니다. 10년간 도반도 무슨 화두를 드는지 몰라요. 모른다고요. 왜냐? 자기 공부를 스스로 드러내서 이야기를 안 하니까요. 여기도 보세요. “이 사람하고 맨날 만나서 바둑을 둔다는데, 바둑을 두는 것 말고, 이 공부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느냐?” 묻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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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