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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3강-4 (2013. 10. 28.)
答 趙待制 道夫.
答 許司理 壽源 (一)
若只圍碁(약지위기)코, 만약 다만 바둑만 두고
不曾 說着遮般事(불증설착자반사)인댄→자반산댄
일찍이 이 일. 공부하는 일에 이야기를 안 했다면,
只就黑白未分處(지취흑백미분처)하야,
다만 흑백을 나누기 이전 곳에 나아가서, “당신이 흑을 들고 둘까요? 내가 흑을 들고 둘까요?” 이렇게 할 것 아니냐? 그 흑백을 나누기 이전 곳에 나아가서, 掀了盤 撒了子(흔료반살료자)하고,
이것은 중국 옛날바둑은 어쩌면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요.
요즘바둑은 세계 바둑이 다 통일이 되어있지만, 그 전 바둑은 우리나라에도 중국식 바둑이었습니다. 지금 두는 것은 일본식 바둑이거든요. 그것이 통일이 돼버린 겁니다. 그런, “순장바둑” 이라고 해서 서로가 바둑을 여러 개를 놓고 두는 겁니다. 화점, 네 군데 귀와 네 군데 변에 흑백을 적당하게 네 개씩ㆍ네 개씩 미리 놓고 둔다든지, 그렇게 놓고 두는 것을 “순장바둑” 이라고 그래요. 옛날우리나라에선“순장바둑”그랬습니다. 그래놓고
“네가 흑을 들고 둘래? 내가 흑을 들고 둘까?” 가위 바위 보를 한다든지 이렇게 나눠서 했을 거란 말입니다. 그것을 하기 이전에 掀了盤 撒了子하고, 바둑판을 한번 휘저어 버리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위에 얹어놨던 바둑을 다 흩어버리라. 이 말입니다.
掀了盤 撒了子하고
却問陀(각문타)호대, 도리어 저 사람에게 묻되,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순장바둑” 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중국이나 한국이나 옛날에는 순장바둑을 뒀으니까요. 그러면 한 사람이 열 개씩 놨든ㆍ다섯 개씩 놨든 놔 놓고, 내가 흑을 둘 것인지? 상대가 흑을 둘 것인지? ‘아직 나누기 이전이다.’ 이렇게 보면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간단한 이야기지만, 도대체 바둑을 어떻게 두는지? 그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이것 가지고 우리가 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명하는 대로하면 됩니다. 그러면 바둑을 두려고 차려놨지만, 다 흩어버리고, 却問陀호대, 도리어 저 사람에게 묻되,
索取那一着(색취나일착)고하야,
여기에서 뭐 하나를, 어느 것 하나를 취해서 취할 것인가? 흑을 취할 것인가? ㆍ백을 취할 것인가?
若索不得(약색부득)인댄,
만약 그 흑도 백도 찾지를 못한다면,
是眞箇 鈍根漢(시진개둔근한)이리라.
그야말로 이 사람은 둔한 사람일 것이다. 흑백을 못 가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둔한 사람이다.
姑置是事(고치시사)하노라. 이야기를 이쯤하고 그만 두겠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보는 것 같아서, 또 대혜스님 법문 속에도 이런 면이 있어서 그것은 또 재미있는 일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이 사람은 자기가 “나는 둔한 근기라 이 참선 공부해가지고는 안 되니, 복이나 짓고 인연이나 짓고 말겠습니다.” 이런 소리를 해놓으니까 거기에 맞는 내용을 가지고 대혜스님이 법문을 하면서 신심의 문제라든지 둔하고 영리하고 하는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을 이렇게 밝히게 된 것입니다.
答 許司理 壽源(一)
黃面老子가 曰信爲道元功德母라 長養一切諸善法이라하며
又云信能增長智功德하고 信能必到如來地라하시니
欲行千里인댄 一步爲初라 十地菩薩이 斷障證法門도
初從十信而入然後에 登法雲地而成正覺하나니 初歡喜地도
因信而生歡喜故也라 若決定竪起脊梁骨하야
要做世出世間沒量漢인댄 須是箇生鐵鑄就底라사
方了得이어니와 若半明半暗하며 半信半不信인댄
決定了不得하리라
許司理 壽源(허사리 수원).
司理 = 벼슬 이름입니다. 許씨고요. 壽源 = 이름입니다.
黃面老子(황면노자)가 曰信爲道元功德母(왈신위도원공덕모)라
長養一切諸善法(장양일체제선법)이라하며,
又云信能增長智功德(우운신능증장지공덕)하고
信能必到如來地(신능필도여래지)라하시니,
앞에(3강-2) 방금 있었던 내용.
欲行千里(욕행천리)인댄,→천린댄, 천리를 가고자 할진댄
一步爲初(일보위초)라. 한걸음이 처음이 된다.
十地菩薩(십지보살)이 斷障證法門(단장증법문)도,
十地보살이 장애를 끊고 법문을 증득한 것도
初從十信而入然後(초종십신이입연후)에,
처음에는 十信 = 열 가지 믿음으로부터 들어간 연후에, 여기 현수 품이 10신 법문이거든요. 화엄경에는 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등각ㆍ묘각. 이렇게 해서 52위를 보살수행 계위로 설정해 놨는데,
현수 품 신심을 이야기한 信爲道元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하는 이 내용은 10신 법문이라고요. 그래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10신으로부터 들어간 연후에,
登法雲地而成正覺(등법운지이성정각)하나니,
10지중에서도 마지막 제일 10지가, 제 10지가 法雲地입니다.
법운지에 올라서 成正覺. 정각을 이루나니
이 대혜스님이 깨달음을 성취하고 나서 암자에 가가지고 보림 한다고 하면서 계속 화엄경만 보신 겁니다. 그래 이 대혜스님은 화엄경 박사입니다.
선사가 이쯤 돼야 그래도 괜찮은 선사지요. 세상에 밥술께나 먹는 선사치고 무식한 선사, 역사적으로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初歡喜地(초환희지)도 因信而生歡喜故也(인신이생환희고야)라.
10지중에서 歡喜地가 초지. 제 1지고요. 法雲地가 제 10지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인해서 환희를 내는 까닭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또 크게 강조하는 것이지요.
若決定竪起脊梁骨(약결정수기척량골)하야,
만약에 결정코 脊梁骨을 세워서 반듯하게, 脊梁骨 = 척추 뼈.
脊梁骨을 딱~~ 세워서
要做(요주), 정신을 바짝 차려서, 이런 뜻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서,
世出世間沒量漢(세출세간몰량한)인댄,
세상에서나 출세간에서나ㆍ세간에서나 출세간에서나 그 사람의 근기의 양이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짐작할 수 없는 그런 놈이 되고자할 진댄, 그런 놈을 짓고자할 진댄,
아~ 그 사람의 실력ㆍ그 사람의 근기ㆍ그 사람의 뚝심ㆍ그 사람의 신심이 도대체 어디까지가 끝인지 짐작할 수 없는 정도. 야~~ 이것 참, 근사한 표현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자할 진댄, 그쯤 돼야 이 일은 해 마칠 수 있으니까요.
須是箇生鐵鑄就底(수시개생철주취저)라사,
모름지기 생철로, 생철로 부어서 만든 놈이라야
方了得(방료득)이어니와, 바야흐로 마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생철로 만든 놈. 쇠말뚝 같은 사람. 그런 표현들을 선가에서는 합니다.
근기가 아주 뛰어나야 된다는 것이지요.
若半明半暗(약반명반암)하며, 반은 밝고 반은 캄캄해요.
半信半不信(반신반불신)인댄,
반은 믿고 반은 또 안 믿어요. 그럴 진대는
決定了不得(결정요부득)하리라.
결정코 깨달음은 얻지 못할 것이다. 공부 마침을 얻지 못하리니,
此事는 無人情하야 不可傳授니 須是自家省發하야사
始有趣向分이어니와 若取他人口頭辦인댄 永劫에 無有歇時하리니
千萬十二時中에 莫令空過어다
逐日起來應用處에 圓陀陀地함이 與釋迦達磨로 無少異언만은
自是當人이 見不徹透不過하고 全身이 跳在聲色裡하야
却向裏許求出頭하나니 轉沒交涉矣리라
此事는 無人情(무인정)하야,
이 일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이 없어요.
인정ㆍ사정없는 것이 바로 이 공부다 이 겁니다.
不可傳授(불가전수)니, 가히 傳授하지 못함이니.
須是自家省發(수시자가생발)하야사,
모름지기 自家가, 자기 자신이 살펴서 바라야
始有趣向分(시유취향분)이어니와,
비로소 趣向할 分이 있거니와, 공부해 나아갈 分이 있다.
그렇습니다. 뭐 참선공부 아니라도 뭐든지 자기가 하는 겁니다.
남이 대신 해주는 법이 없는 것이지요. 此事는 無人情하야,
말씀이 아주 근사하지요?
若取他人口頭辦(약취타인구두판)인댄,
만약 딴 사람이 口頭로 판단해줌을 취할진댄, 이렇게 설명해주고ㆍ저렇게 설명해주고 설명해주는 것을 취할진댄,
永劫(영겁)에 無有歇時(무유흘시)하리니,
歇時 = 쉴 때가 없으리니, 千萬十二時中(천만십이시중)에,
千萬 = 부디. 十二時中에 = 24시간 가운데
莫令空過(막영공과)어다. 하여금 헛되게 지나지 말지어다.
부디 하루 열 두 때, 잠도 좀 아껴가면서 자고, 부디 열심히ㆍ열심히 정진하라. 그런 말입니다.
逐日起來應用處(축일기래응용처)에,
날마다 일어나서 應用하는 곳에,
應用하는 곳에 = 우리가 일상생활 하는 것입니다.
圓陀陀地(원타타지)함이,
둥글어서 陀陀한 것이, 이것도 형용사인데요. 아주 둥글고 둥근 것이, 그렇게 하면 됩니다. 완전무결한 것이, 그렇지요.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누가 부르면 돌아볼 줄 알고, 추우면 옷 찾아 입을 줄 알고, 더우면 옷 벗을 줄 알고, 얼마나 완전무결합니까? 이것이 圓陀陀地입니다.
사실은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欠少什麽(흠소심마)오? 부족한 것이 뭐냐? 이 말입니다.
임제스님 법문 자주 쓰지요. 네가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피곤하면 잠잘 줄 알면 완전무결한데 거기서 부족한 것이 도대체 뭐냐? 아~ 임제록을 공부해야 됩니다. 임제록... 법문 대단합니다. 圓陀陀地입니다.
완전무결한 것이,
與釋迦達磨(여석가달마)로 無少異(무소이)언만은,
석가ㆍ달마로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彼其丈夫我亦(피기장부아역이)라. 그대도 장부고 나도 또한 그러하다.
석가ㆍ달마가 장부라면, 나도 또한 장부다.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석가도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석가도 추우면 옷 입을 줄 알고, 석가도 피곤하면 잠잘 줄 알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바로 이 앞에 이렇게 보고 듣는 이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무슨 다를 것이 있느냐?
無少異, 조금도 다름이 없건만,
自是當人(자시당인)이 見不徹透不過(견불철투불과)하고,
스스로 = 當人. 공부하는 당사자가 보아서 사무치지 못하고, 뚫어서 통과하지 못하고
全身(전신)이 跳在聲色裡(도재성색리)하야,
온 몸이, 온 몸이 聲色속에, 말소리 듣고 사물 보고 온갖 경계에 그만 거기에 던져두어서, 거기에 끄달리고 산다 이 말입니다. 보고 듣고 하는 거기에 그만 끄달리고 사는 것이지요. ‘聲色속에 뛰어가 있어서’ 하는 그 말이요.
却向裏許求出頭(각향이허구출두)하나니,
도리어 그 속에서, 보고 듣는 그 경계, 그 경계에 끄달리는 것, 거기에서 그만 出頭를 구한다. 벗어남을 구하고자 하나니
轉沒交涉矣(전몰교섭의)리라. 온전히 더욱 더 교섭함이 없을 것이다.
此事는 亦不在久叅知識이 遍歷叢林而後에 了得이니 而今에
有多少在叢林하야 頭白齒黃호대 了不得底하며
又有多少乍入叢林에 一撥便轉하야 千了百當底하니
發心은 有先後어니와 悟心은 無先後니라
昔에 李文和都尉가 叅石門慈照할새
一言下에 承當하야 便千了百當하고 嘗有偈하야 呈慈照云學道는
須是鐵漢이라사 着手心頭便判이니 直取無上菩提인댄
一切是非莫管이라하니 但從脚下崖將去하야 死便休언정
不要念後思前하며 亦不要生煩惱니 煩惱則障道也리라 祝祝하노라
此事는 亦不在久叅知識(역부재구참지식)이
徧歷叢林而後(변력총림이후)에 了得(요득)이니,
이 일이라고 하는 것은, 구 참 선지식ㆍ久叅知識ㆍ구 참 납자, 뭐 선방에 오래있고, 중노릇 오래했다고 해서, 오래해서 총림을 徧歷한후에 了得하는 것이, 깨닫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마치는 것이 아니다.
而今(이금)에 有多少在叢林(유다소재총림)하야,
조금 총림에 있어서, 多少총림에 있어서
頭白齒黃(두백치황)호대, 머리는 허옇게 되고, 이빨은 누렇게 돼요.
了不得底(요부득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그렇게 갔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마치지 못하며,
又有多少乍入叢林(우유다소사입총림)에,
또 어떤 이들은 잠깐총림에 들어와 가지고
一撥便轉(일발편전)하야, 한 철쯤 하더니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 겁니다. 혹은 한 3년 하더니 그만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
一撥이 便轉하야 千了百當底(천요백당저)하는,
천 번이나 깨닫고 백 번이나 깨닫는 사람이 있으니
發心(발심)은 有先後(유선후)어니와, 발심은 선후가 있지만
悟心(오심)은 無先後(무선후)니라. 깨닫는 데는 선후가 없어요.
그렇지요. 오래 있다고 깨닫는 것 절대 아니고, 늦게 절에 왔다고 늦게 깨닫는 것 결코 아니고요.
昔에 李文和都尉(이문화도위)가, 옛날에 이문화 도위라는 이가
叅石門慈照(참석문자조)할새. 石門慈照선사를 참례했을 세.
一句下(일구하)에 承當(승당)하야,
한마디 속에, 말 한 마디에 그만 깨달아 버렸어요. 承當 = 깨달아 버리다.
便千了百當(변천요백당)하고,
깨달음의 경지를 千了百當ㆍ承當. 이런 표현을 잘합니다. 이것이 천 가지나 알고, 백가지나 당한다. 이것이 전부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왜냐? 한번 깨달으면 일체가 다 통하니까요. 그래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嘗有偈(상유게)하야, 일찍이 게송을 두어서
呈慈照云(정자조운), 자조 화상에게 바쳐서 이르되,
學道는 須是鐵漢(학도수시철한)이라사,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쇠로 된 놈이라야
着手心頭便判(착수심두변판)이니,
心頭에 = 마음머리에 着手해서 곧 판단하나니,
直取無上菩提(직취무상보리)인댄,→보린댄,
無上菩提를 바로 취하고할 진댄,
一切是非莫管(일체시비막관)이라하니,
일체시비를 관섭하지 말라. 내 발우 떼에 똥을 싸도 누가 똥 쌌는가?
아무도 시비하지 말고 갖다 씻어버리고 그 발우 떼에 밥 받아먹고, 이쯤 돼야 공부한다. 이 말입니다. ‘어느 놈이 내 발우 떼에 똥을 쌌나?’ 하고 그냥, 똥 싸는 정도도 아니지요. 조금만 피해가 있든지 손해를 끼치든지 하면 그냥 그 시비에 휘말려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총무원장이 두 번하느니 세 번하느니, 도덕적으로 어떤 사람이 하느니ㆍ못하느니, 괜히 나왔다 망신만 하고 들어가지 말고 아예 그런 데에 관심 갖지 말아야지요. 선방은 마지막 보루입니다. 세상이 백 번 무너져도 선방은 까딱 않아야 된다고요. 선방은 까딱 않아야지 그것이 불교의 마지막 보루인데, 마지막 보루 무너지면 불교 끝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마지막 보루가 흔들려서 들락날락 총무원에 가서 막 데모를 하고 단식을 하고, 도대체 그것 뭐하는 짓입니까? 그러면 일반 불자들은 어디에 의지하란 말입니까? 총무원은 그 판이고 선방까지 거기에 휘말려서 거기 가서 단식을 해요?
그까짓 것 총무원장 열 번을 하든지 말든지 그것이 무슨 불교입니까?
그것은 그냥 행정 하는 사람들일뿐입니다.
진짜 불교는 그것이 아니라고요. 불교는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불교는 포교하고 공부하는 불교지, 그 외에는 불교 아닙니다. 다소의 영향은 있겠지요. 어느 정도 영향은 있겠지만 그것은 불교 아닙니다.
전혀 불교 아닙니다. 신도가 거기에 휘말리거나 스님이 거기에 휘말리거나 하는 것은, 그것은 다 세속적인 일에 휘말리는 일이지, 불교에 휘말리는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제 일 수도원이라고 하는 봉암사에서까지 주지니 무슨 수좌니 까지 나와서 거기에, 조계사 마당에 먹물자락을 흔들면서 들락날락하고 단식 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개망신만 하고 들어가 버리고, 그것이 뭐하는 짓입니까?
鐵漢이라사, 모름지기 쇠로 된 놈이라야 비로소 마음에 붙여서 판단할 수가 있다. 우리는 못해도 참~~ 신나잖아요. 하여튼 법문 좋잖아요. 통쾌하잖아요.
一切是非莫管하라. 直取無上菩린댄, 一切是非莫管이라.
일체시비를 관섭하지 말라.
但從脚下崖將去(단종각하애장거)하야,
다만 바로 이 순간부터, 從脚下라는 말이 바로 이 순간부터, 바로 이 순간. 시간적으로 이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밀어붙여서
死便休(사변휴)언정, 죽어야 쉴지언정ㆍ죽어야 곧 쉴지언정
不要念後思前(불요념후사전)하며,
뒤를 생각하거나 앞을 생각하기를 要하지 말며, 앞뒤 생각하지 말라 말입니다. 죽어야 쉬어요. 죽어야... 죽을 때까지 그냥 하는 겁니다.
인생포기 해야 된다니까요.
이 일 한번 시작했다면 인생 완전히 포기해야 됩니다.
그 때부터는 살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길로 들어섰다면 살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사람노릇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인생포기 해도 될까 말까하는 일인데, 다른 세속 일에 기웃기웃 해가지고 뭐가 된단 말입니까? 그것은 그냥 놀이지요. 놀이...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지요. 이 일을 어디 심심풀이로 할 일인가요?
亦不要生煩惱(역불요생번뇌)니,
또한 번뇌를 내지도 말지니 다른 생각하지 말라 말입니다.
煩惱則障道也(번뇌즉장도야)리라. 번뇌를 한다면 도를 장애할 것이다.
祝祝(축축)하노라. 부디 빌고 비노라. 제발 이렇게 좀 달라고 아주...
이 허사리한테 한 법문은 신심의 문제, 그 신심이 투철해야 되고,
千萬十二時中에 莫令空過어다. 하루 중에 한 순간도 함부로 보내지 말라 말입니다. 그래 선요에 고봉스님 같은 이는 3년 동안 한 번도 앉은 적도 없고, 누운 적도 없습니다. 화장실에 화장하려고 앉을 때 앉고, 식사할 때 식당에 잠깐 앉고, 그 나머지 시간은 3년간 철두철미 용맹정진하고, 도량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면서 잠을 쫓고ㆍ잠을 쫓고, 그래서 깨달은 사람 아닙니까? 그 쯤 돼야 됩니다.
선요는 원나라 때, 고봉스님의 공부 행적인데요.
아주 참 철골 같은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무쇠로 된 사람의 표본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경책하는 데는 선요가 아주ㆍ아주 뛰어나고, 이론적으로 이런 지견과 이론을 밑받침하는 데는 서장이 아주 설득력 있는 그런 가르침이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빌고 또 비노라.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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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