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부진한 이유 질문 싫어 미국서 훈련"
스포츠조선은 메이저리그 데뷔 첫 해를 마친 이상훈(29.보스턴)과 이틀간에 걸친 특별인터뷰를 가졌다. 첫 만남은 현지시간 10일 오후 7시(한국시간 11일 오전). 딱 정시에 약속장소인 보스턴 인근 브룩클라인에 있는 한 한국음식점 문앞에서 자신의 검은색 렉서스 지프를 몰고 온 이상훈과 만났다.
메뉴판에 한국 소주가 없자 못내 아쉬워하며 덥힌 사케(일본식 소주)와 제육볶음을 주문했다. 파커가 필요할 정도로 쌀쌀해진 보스턴 지역 날씨와 그런대로 궁합이 맞았다.
-시즌이 끝난지 열흘이 됐는데 뭘하며 지냈는가.
▲보스턴에 친구가 2명 있는데, 주로 그 친구들과 같이 지냈다. 술도 먹구, 시내도 돌아다니고…. 오랜만에 한가하게 보내고 있다.
-기타는 요즘도 치나.
▲`보스턴 IMG(이상훈의 에이전트사)'에 음악을 하는 한국인 친구가 있는데, 같이 밴드를 한다. `시나위' 등 한국의 음악하는 친구들과도 연락은 하고 지낸다.
-가족들이 미국에 오지 않은 이유라도 있는가.
▲어머니가 2년째 건강이 좋지 않다. 친척이 없어 아내(송영주씨)가 간호를 할 수 밖에 없다. 어머니가 미국생활을 불편해하시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이산가족'이 됐다.
-올 겨울 귀국할 계획은 없나.
▲올해는 한국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다. 특별히 여기서 할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한국에 가면 틀림없이 받게 될 `올해 부진한 이유는 뭔가'라는 질문을 듣기 싫어서다. 나는 똑같은 야구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일일이 설명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려니 힘들 것 같은데.
▲두딸(수빈 다빈) 생각이 많이 난다. 둘째(다빈)가 요즘 말을 배우는 중인데 그 속도가 빨라 깜짝 놀랄 정도다. 신기한 장난감을 볼때마다 딸들 생각이 난다. 한번은 전화통화중 `아빠가 장난감 사줄께'라고 했더니 몇개월 지나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 당황한 적이 있다. 아내에게 `내가 사준 걸로 하고 아무거나 하나 사서 주라'고 해서 위기를 넘겼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이상훈은 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일본에 있을때부터 사케를 자주 먹었다"는 말과 함께 3병째를 주문했다. 화제를 야구 이야기로 넘겼다.
-LG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도 나도는데.
▲잠실구장에서 나에게 외치던 관중들의 함성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감정을 미국에 잠시 들렀던 야구관계자에게 표현한 것이 잘못 전해진 것 같다. 메이저리그 30개구단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미국에 있겠다.
-1년간 미국야구를 경험했는데.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 보고 배운 것은 너무 많다. 시설이나 시스템, 계약관계 등은 아직 한국과 직접 비교하기 힘들다. 그러나 야구 하나만 놓고 보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 매긴 올시즌 점수는 어떤가.
▲아주 만족한다. 마이너리그에 있을 때도 행복했다. 구장 좋고, 팬들 많고, 추우면 덕아웃에 커피도 갖다놓고…. 트리플A에도 힘든 타자들이 많아 항상 긴장감을 느꼈다.
-9월 성적은 아주 좋았는데.
▲복귀후 첫 등판(9월4일 홈 시애틀전)에서 내가 그렇게 잘 던질지 몰랐다. `아, 이 친구들도 내 공에 삼진을 먹는구나. 한국이랑 똑같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홈런을 맞긴 했지만 한국에서도 끝내기 홈런, 만루홈런을 맞았다. 내용이 문제지 홈런 자체는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년에는 자신이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대부분 일을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클러비(라커룸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소년)에게 일을 시킬 줄도 알게 됐다. 친하게 지내는 로드 벡과 함께 댄 두켓 단장과 지미 윌리엄스 감독 앞에서 함께 담배를 핀 적도 있다. 선수에게는 그런 정서적인 편안함이 중요한데, 이젠 모든 것이 불편하지 않다. 적응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등판기회가 없어 속도 상했겠는데.
▲클리블랜드와 3일간 5경기를 치른 적이 있다. `두게임 정도는 나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마지막날 더블헤더 1차전이 끝날 때까지 다른 선수들만 불렀다. 2차전을 위해 덕아웃에서 불펜으로 걸어갈 무렵 윌리엄스 감독이 `하이'하고 인사를 했다. 그래서 감독에게 다가가 "경기중에 나를 부를 때는 전화기를 들고서 `F×××ing 쌩 리'라고만 말해라. 나는 언제든 준비가 돼 있다"고 크게 말했다. 직접 전화기까지 들고 말하는 시늉을 했더니 덕아웃에서는 선수들이 배꼽잡고 웃느라 난리가 났다. 결국 더블헤더 2차전에 출전해 1⅔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9월에 고비는 없었나.
▲뉴욕 양키스전에서 데릭 지터를 병살타로 잡은 날(9월11일)이었다. 지터를 병살로 처리하는 순간 왼쪽 허벅지가 갑자기 당겼다. 물론 팀에 보고했다. 보통 몇주간 치료가 필요한 부상이었지만 한동안 테이핑을 석고처럼 하고 다녔는데 클리블랜드전에서 1점을 줬을 때는 그 부상 때문에 직구가 138㎞밖에 나오지 않았다.
-스피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후반기에 더 빨라진 것 같던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 늘 똑같았다. 마이너리그에서는 최고 93마일(약 150㎞)을 여러차례 기록하기도 했다. 평균 89∼90마일(143∼145㎞)정도 나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피드가 아니라 볼끝과 컨트롤이다. 그것은 자신감과 정신력에서만 나온다. 그래서 투수는 마음으로 던진다고 생각한다.
-마이너리그에서는 힘들었을 것 같은데.
▲아까도 말했지만 전혀 힘든 것은 없다. 약간 씁쓸했던 기억은 있다. 한번은 원정길에서 저녁식사가 아주 고급요리로 올라온 적이 있었다. 다 먹고 나니 한 동료가 귀띔을 해줬다. 재활을 위해 잠시 마이너로 내려온 라몬 마르티네스가 구단관계자에게 700달러를 주면서 `선수들 잘 먹이라'고 했다고. 덕분에 잘 먹긴 했지만 순간 기분이 묘했다.
-올 겨울 일정은 어떻게 되나.
▲공은 1월초부터 만질 예정이다. 그동안 푹 쉴 작정이다. 물론 체력훈련은 한다. 펜웨이파크 웨이트룸은 주말을 빼고는 늘 개방돼 있다. 아직 내 짐은 그곳에 있다.
-에이전트사인 IMG와 1년계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재계약할 것이다.
-내년에는 메이저리그의 불펜 핵심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현지 언론에서 보도하고 있는데.
▲리엘 코미에르가 내년에는 `집(캐나다)으로 돌아간다'고 작별 인사를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다른 선수의 움직임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구단이 또다른 왼손투수를 영입할 수도 있다. 내 운동만 열심히 하겠다.
-자신 있다는 말인가
▲내년에는 한국 특파원들이 나를 찾을 일이 많아질 것 같다(웃음).
-앞으로 꿈이 있다면.
▲나는 천재도 아니고 슈퍼스타도 아니다. 내가 겪어본 선수중에 야구를 위해 태어난 `타고난 천재'라면 주니치에서 함께 뛰었던 (이)종범이 정도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냥 `최선을 다하는 선수'정도라고 할까. 마운드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꿈이다. 나는 18.44@(마운드와 홈플레이트간 거리)를 못던질 때까지 마운드에 설 것이다. 사회인야구에서도 뛸 예정이다. 마운드에 서 있는 한 나는 행복하다.
어느덧 식당 문을 닫아야 하는 10시를 넘겼다. 500cc가 채 안될 것 같은 자그마한 술병은 이미 10개 남짓이 쌓인 뒤였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날(12일)로 미루고 약속을 정했고, `야생마'는 아무도 없는 빈 집을 향해 길을 나섰다.
숙취때문인지 약간은 까칠한 얼굴의 이상훈은 12일 브룩클라인 자택앞의 잔디밭에서 기자를 위해 포즈를 취해줬다. "한국에 들어가지 않으면 비자문제 때문에 제3국을 한차례라도 방문을 해야 할텐데"라는 질문에 이상훈은 "이제부터 IMG와 협의해 볼 것"이라고 말하며 기나긴 마라톤 인터뷰를 끝냈다. `야생마'의 그렇게 사연많던 2000시즌을 차분히, 그러나 치밀하게 정리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