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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4강-1 (2013. 11. 11.)
答 許司理 壽源 (二)
오늘은 서장강의 허사리한테 하는 두 번째 편지가 되겠습니다.
허사리에게 답하는 두 번째 편지 74쪽.
又(二)
左右가 具正信立正志하니 此乃成佛作祖基本也라
山野가 因以湛然으로 名公道號니 如水之湛然하야
不動則虛明自照하야 不勞心力하리라
世間出世間法이 不離湛然하야 無纖毫透漏하나니 只以此印으로
於一切處에 印定하면 無是無不是하야 一一解脫이며 一一明妙며
一一實頭라 用時에도 亦湛然하며 不用時에도 亦湛然이리니
祖師云但有心分別計較하면 自心見量者가 悉皆是夢이라하시니
若心識이 寂滅하야 無一動念處면 是名正覺이니
覺旣正則於日用二六時中에 見色聞聲하며 齅香了味하며
覺觸知法하며 行住坐臥와 語黙動靜이 無不湛然호대
亦自不作顚倒想하야 有想無想이 悉皆淸淨하리라 旣得淸淨하면
動時에는 顯湛然之用하고 不動時에는 歸湛然之體하리니
體用이 雖殊나 而湛然則一也라 如析栴檀에 片片皆栴檀이니라
左右(좌우)가 具正信立正志(구정신입정지)하니,
이 분은 그야말로 앞에서도 화엄경의 信爲道元功德母(신위도원공덕모)라고 하는 구절을 인용해서 믿음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었는데요. 여기서도 처음부터 그대는 바른 믿음을 갖추었고, 또한 바른 뜻을 세웠다. 이것 참 중요한 것이지요. 종교는 어느 종교 없이 신앙이 우선이고, 불교에도 신심을 아주 강조를 합니다. 그런데 具正信 = 정말 바른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하지요. 立正志 = 바른 뜻을 세운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뜻입니다. 그래서 이 대혜스님께서 正信을 갖추고 正志를 세웠다.
상대를 보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此乃(차내), 이것이야말로
成佛作祖基本也(성불작조기본야)라. 그랬습니다.
成佛作祖基本. 이것이 굳은 말입니다. 잘 쓰는 말입니다.
成佛作祖基本. 부처를 이루고 조사를 짓는 기본이 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불하는데 있어서는 바른 믿음을 갖춰야 되고, 바른 뜻을 세워야 된다. 그 전에 제가 아주ㆍ아주 오랜 옛날에 그 때 516 일어나던 해인데, 은해사강원에서 한참 신심 있게 공부를 하는데, 어떤 학인이 사석에서
“이상하게 불교는 병 고치는 것도 안 가르쳐 준다.” 고 그런 불평을 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우리는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어떻게 병 고쳐주는 것도 안 가르쳐 준다고 그러면서 불교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더라고요. 그러더니 어느 날, 안 보여요. 그 스님이 배구는 참 잘 했어요.
키도 크고 배구 선수였었는지... 그런 기억이 납니다. 바른 뜻을 갖는다고 하는 것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불교에 몸담고 부처님의 수많은 은혜를 입고 살고, 많은 세월을 보내지만 과연 ‘불법에 대한 바른 뜻을 세웠는가?’ 이런 것을 한 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山野(산야)가 因以湛然(인이담연)으로,
그래서 이 사람이 바른 믿음ㆍ바른 뜻을 다 갖추었기 때문에 湛然이라고 하는 것을, 그로 인해서 湛然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名公道號(명공도호)니,
그대 = 公의 道號를 명명한다. 이 뜻입니다. 道號. 우리는 법호ㆍ법명. 또는 불호. 이런 등등 여러 가지 표현을 하는데요. 당시는 아마 “법호” 라는 말 대신에 “도호” 라고 하는 말을 아마 즐겨 썼나 봅니다. 道號. 이것도 더러 쓰는 말입니다. “도호” 우리가 불명이 있고, 그 다음에 어느 정도 일가를 이루게 되면 법호를 갖게 되잖아요.
근래에 어느 절 총림을 개설하고 방장을 추대하는데, 법호가 없어요.
방장이름에 법호가 없더라고요. ‘야~ 그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나이가 어느 정도 되고, 사실은 승랍이 10년 이상 내지 20년 이상쯤 되면 어디서 건당을 했든, 아니면 전강을 받았든, 법을 받았든 그것상관 없이 그것은 그 인연대로 그러한 인연이 되면 또 호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 전에라도 자호를 스스로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대개 자기 마음에 드는 이름을 받으려면 사실은 자신이 지어야 됩니다. 자신이... 그래 옛날부터 그래요. “자호를 왈 뭐라고 한다. 스스로 내 호를 뭐라고 짓는다.” 자기 호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수 10년 승려생활하고 총림에 방장이 됐는데 호가 없어요.
그리고 큰스님이라고 해서 큰 절에 살아보면 노스님들이 열반을 하십니다. 열반을 하시고 나면 영가 축원도 해야 되고, 영단도 차려야 되고, 또 영결식장도 차리고 해야 되는데 아, 호가 없는 겁니다. 열반하고 나서 그 절에서 회의해가지고 호를 얼렁뚱땅 지어서 붙이고 영결식을 치룬 예가 몇 번 제가 경험을 했습니다. 저도 지어주기도 하고요. 또 그 자리에서 의논해서 짓기도 하고요. 그렇게 돼서는 모양이 아니거든요. 자기 덕이 있고 법력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10년이 넘으면 반드시 스스로 호를 지어서 가지고 있고, 또 건당법사를 모시게 되면 그 호를 인정을 받든지, 인정을 받으면 그것은 더 좋은 일이고, 아니면 마음에 안 들면 새로 지어달라고 할 수도 있고, 무슨 전강을 받든지ㆍ전법을 받든지 하면 자기가 지은 호를 가지고 써도 좋고, 또 직접 호를 하나 청해도 좋고요.
그것이 우리가 무슨 꼭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나이 들면 자격인겁니다. 나이가 자격입니다. 거기엔 나이가, 법랍이 자격입니다. 그렇게 아셔야 됩니다. 최소한 아무리 못해도 30년쯤 되면 이것은 억지라도, 호를 하나 지어서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방에 당호를 걸어 놓는다든지 그렇게 해야 됩니다. 우리가 여기, 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곁들여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일반 불자들도 한두 해 절에 다니면 다 무슨 보살ㆍ무슨 보살해서 불명을 다 갖잖아요. 불명 없는 사람은 불명지어 달라고 주지스님한테 지어 달라고 하고, 또 보살계를 받게 되면 거기서 불명을 얻게도 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보살계를 안 받아도 몇 년 절에 다니면 불명을 받고 싶어 하고, 또 그 절 주지스님은 불명을 지어 줘야 되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모양새를 갖춰가는 일입니다. 무슨 특별히 계란을 깨고 병아리가, 닭이 돼서 나오듯이 하는 그런 어떤 계기가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도 우리가 이런 기회에 눈여겨 둘 일이다. 하는 뜻입니다.
이분 도호를 뭐라고 했는가? 하면
如水之湛然(여수지담연)하야, 湛然으로써 도호를 매겼는데,
거기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은 “명부” 라고해서 이름 옆에는 그 호와 연관되는 글을 한 자도 좋고ㆍ두자도 좋고ㆍ게송 한 구절도 좋고ㆍ넉 자도 좋고ㆍ다섯 자도 좋고, 아니면 열 자도 좋고ㆍ여덟 자도 좋고, 이런 식으로 명부를 옆에다 씁니다. 쓰고 그 앞에 법호를 쓰게 되고 하는 그런 식인데, 이분은 말하자면 그 명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부 자는 글 부 자입니다.
如水之湛然하야, 물이 湛然한 것과 같아서, 이것을 우리 말로하면 이것은 형용사인데, “말쑥하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쑥하다. 맑을 湛자거든요. 그리고 然붙이면 “말쑥하다.” 이렇게 표현해야 옳아요. 물이 말쑥한 것과 같다. 아주 內外明徹(내외명철)이라. 안팎으로 다 깨끗해서 밑에 고기가 노는지 바위가 있는지 모래가 있는지 이런 것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맑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이
不動則(부동즉), 움직이지 아니하면
虛明自照(허명자조)하야, 그랬습니다. 텅 비고,
물이 있어도 깨끗하면 텅 빈 것처럼 보이잖아요. 저~ 밑에, 몇 미터 밑에 있는 고기 노는 것도 환히 보일 수 있잖아요. 그것이 虛明自照입니다.
텅 비고 밝고 스스로 비춰서 不勞心力(불노심력)하리라.
心力을 수고롭히지 아니할 것이다. 마음 쓰지 않고도 우리가 湛然.
“마음이 담연해지면” 그 말이지요. ‘마음이 말쑥해지면ㆍ마음이 깨끗해지면’그런 상태가 될 것이다. 그래서
世間出世間法(세간출세간법)이 不離湛然(불리담연)하야,
그 湛然. 우리가 맑은 부동심ㆍ심체ㆍ본심, 마음이 동하지 아니한 그 자리, 그것을 湛然 이라고 합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일체 세간 법이나 출세간법이 不離湛然이라. 그 湛然한. 마음이 말쑥한 자리를 떠나지 아니해서,
無纖毫透漏(무섬호투루)하나니,
纖毫 = 털끝만치도 거기서 빠져나가는 것이 없을 것이다. 거기서 새어나가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속에 다 갖추어진다.
只以此印(지이차인)으로, 다만 이 도장으로써
於一切處(어일체처)에 印定(인정)하면,
一切處에 = 모든 곳에다가 印定하면, 도장을 찍을 것 같으면
無是無不是(무시무불시)하야,
그 때는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어, 옳지 아니함도 없어요. 無是無不是라.
그래서
一一解脫(일일해탈)이며, 낱낱이 解脫입니다.
어디를 가도 해탈입니다. 사사건건이 전부 解脫입니다.
一一明妙(일일명묘)며,
낱낱이 다 밝고 미묘한 마음작용. 진여해탈, 또 진여의 어떤 밝은 지혜.
一一實頭(일일실두)라. 낱낱이 다 實頭라고 하는 것은 진실한 그 자리. 그 말입니다. 立處皆眞(입처개진)할 때, 모두가 다 진실한 그 자리다. 거짓이 없고 허위가 없다. 하는 그런 뜻이지요. 一一實頭라.
用時(용시)에도 亦湛然(역담연)하며,
우리마음을 쓸 때, 작용할 때, 마음을 작용할 때도 또한 말쑥해요.
不用時에도 亦湛然이리니,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선정에 딱~ 들어있어도 역시 마음은 湛然해요. 깨끗하다. 이것이 “명부” 라고 하면 명부가 되고, 법호를,道號를 지어주고, 거기에 대한 뜻을 이렇게 대혜스님께서 아주 친절하게 해석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편지로 쓰다 보니까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지요. 거기다 또 조사스님의 말씀을 인용을 합니다.
祖師云但有心分別計較(조사운단유심분별계교)하면,
다만 마음을 두어서 분별계교 할 것 같으면
自心見量者(자심현량자)가 悉皆是夢(실개시몽)이라하시니,
마음을 두어서 분별하고 계교하고 하는 것은 망상부리는 것이지요.
自心見量者 = 자기 마음에 드러난 양만치, 그 말입니다.
見量(현량)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물을 보면, 사물을 본 그만치 그것이 현량입니다. 自心으로 드러내서 헤아리는, 헤아리는 만치 인식하고, 인식하는 만치 헤아리니까요. 그것을 전부 見量이라고 합니다.
見量者가 悉皆是夢이라. 이것은 다 꿈이다. 그런 표현을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若心識(약심식)이 寂滅(적멸)하야,
만약에 마음이 적멸해서, 고요해서
無一動念處(무일동념처)면,
조그마한 하나도 생각이 움직이는 곳이 없을 것 같으면
是名正覺(시명정각)이니, 그랬습니다. 이것이 正覺이고,
아까는 망상분별에 의한 꿈이고요. 두 가지 경우를 이야기했네요.
是名正覺이라. 바른 깨달음이다.
覺旣正則(각기정즉), 覺旣. 깨달음이 이미 바르다면
-바르지 못한 깨달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불교에는 깨달음이 제일 큰 화두이고, 제일 큰 과제고, 제일 큰 문제이기 때문에 깨달음에 대해서는 무슨 “초 견성” 했느니ㆍ1차 깨달았고ㆍ2차 깨닫고ㆍ3차 깨닫고, 과거 조사스님들의 경험을 보면 그 깨닫는 것도 여러 번 깨닫게 되고 그래요. 그런데 완전한 깨달음이 아닐 경우는 그것이 “정각” 이라고 이름 붙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覺旣正則, 覺이 이미 바르다면
於日用二六時中(어일용이육시중)에 見色聞聲(견색문성)하며
齅香了味(후향요미)하며 覺觸知法(각촉지법)하며,
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意, 6근의 작용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見色 = 眼이지요. 눈. 눈이 사물을 보는 것.
聞聲 = 귀로써 소리를 듣는 것. 그 다음에
齅香 = 코로써 향기를 맡는 것.
了味 = 혀로써 맛을 아는 것. 그 다음에
覺觸 = 감촉을 지각하는 것. 감촉을 느끼는 것. 身이지요.
그 다음에 意인데요.
知法 = 법을 아는 것. 법은 眼耳鼻舌身, 이 외에 또 우리가 봄이 왔다ㆍ춥다ㆍ덥다. 겨울이다ㆍ여름이다ㆍ가을이다. 하는 이런 사실들을 아는 것. 이것이 전부 知法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법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한 것을 아는 것 하며, 또
行住坐臥(행주좌와)와 語黙動靜(어묵동정)이
無不湛然(무불담연)호대, 湛然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이,
眼耳鼻舌身의 작용이나 行住坐臥나 語黙動靜이 전부 湛然이다. 그래서
亦自不作顚倒想(역자부작전도상)하야,
또한 스스로 顚倒想을 짓지 아니해요. 顚倒想 = 뒤바뀐 생각. 뭐든지 바르게 생각하지 못하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지요. 顚倒想도 짓지 아니해서
有想無想(유상무상)이 悉皆淸淨(실개청정)하리라.
想이, 생각이 있든 생각이 없든 고요하든 간에 다 모두가 청정. 텅 빌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더럽다ㆍ깨끗하다. 하는 그런 청정차원이 아니고, 텅 비었다는 뜻입니다. 텅 비었을 때 비로소 청정한 것이지요.
우리가 시주 물을 두고 이야기할 때, 觀三輪淸淨(관삼륜청정).
초심에 그런 말 있잖아요. 三輪이 淸淨함을 관찰하라. 그런 표현이 있잖아요. 그럼 施者(시자)와 受者(수자)와 物(물). 그렇거든요.
시주를 하는 사람 = 주는 사람. 또 받는 사람. 그리고 그 중간 사물, 돈이든 매개체. 그것이 三輪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三輪이 淸淨함을 관찰하라. 라고 하는 것을, 어떤 경우는 “이것이 장물이 아니다ㆍ부정해서 번 돈이 아니다ㆍ정당하게 번 돈이다.” 이런 식으로 그런 사람과 그 다음에 시주 물. 돈이 됐든지 뭐가 됐든지 간에 ‘그것이 부정하게 번 돈도 아니고, 부당하게 뺏은 돈도 아니고, 정당하게 내 노력에 의해서 정당한 대가를 받아서 그것으로써 시주하는 것이다.’ 라고 이것이 청정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觀三輪淸淨. 三輪이 淸淨함을 관하라. 라고 觀자가 왜 들어가겠습니까? 텅 빈 것을, 공함으로 관해야 됩니다. 공관을 뜻하는 것입니다.
空觀. 나도 공하고 주는 당신도 공하고, 돈을 시주했다면 돈까지도 공하고, 그래야 서로가 줄 자격이 있고, 받을 자격이 있는 겁니다. 그래 우리 보통 상식으로는 따라가기 참 어려운 그런 차원이지요. 자기 자신이 공한 줄 알면, 뭘 주고받고 하는 것도 사실은 없지요. 주되 주는 것도 없고, 받되 받는 것도 없고요. 그러면서 주고받음이 분명하고요. 사실은 이것이 중도적 관점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중도적 관점에서... 사물도 역시 중도적 관점으로 받아야 되고 주어야 하고요.
그래 淸淨이란 말의 정확한 뜻은 공한 줄 알아라. 텅 빈 줄 알라.
텅 비었을 때 비로소 청정하지요. 예를 들어서, “여기에 쓰레기가 있다. 이것을 쓸어서 다른 데로 옮겼다.” 이 자리엔 청정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옮겨간 그 장소는 더럽잖아요. 그렇게 되어서는 불교적인 청정이 아닙니다. 공해야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청정이다.’ 이런 뜻입니다.
有想無想이 悉皆淸淨하리라.
旣得淸淨(기득청정)하면, 이미 청정함을 얻을 것 같으면
動時(동시)에는 顯湛然之用(현담연지용)하고,
“내가 움직인다. 작용한다.” 우리가 眼耳鼻舌身意를 움직이든지, 아니면 가만히 앉은 상태에서 마음을 쓰든지 간에, 작용할 때에는 모두가 湛然의 작용. 우리마음의 말쑥한 본심이 드러난, 본심의 작용이 드러난 것이다.= 顯湛然之用. 이렇게 돼야 되는 것이지요.
물이요? 철저히 맑으면, 찌꺼기가 하나도 없이 철저히 맑으면 아무리 휘저어도 맑은 물입니다. 그런데 밑에 찌꺼기가 있으면요? 휘저어버리면 금방 흙탕물이 되잖아요. 우리마음은 지금 그런 상황이거든요. 보통 중생들의 마음은 평소에는 가라 앉아있습니다. 앉아있어서 맑은 것 같지만, 마음이 맑은 것 같지만, 좀 이해관계라든지 아니면 경계라든지, 어떤 대상이라든지 이것이 들어와서 휘저어버리면 그냥 흙탕물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흐려지는 것이지요. 제대로 청정한 마음은, 철저히 청정하면 아무리 움직여도 청정한 겁니다.
顯湛然之用이라 그랬습니다. 湛然의 用을 드러내는 것이고,
不動時(부동시)는
歸湛然之體(귀담연지체)리니, 湛然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안 움직이면 湛然한 그 본체에 가만히 그냥 있는 것이지요.
참~ 湛然이라고하는 호를 하나 지어서 주면서 좋은 법문하셨습니다.
이것이 참 좋은 법문입니다.
體用(체용)이 雖殊(수수)나,
體와 用. 이것이, 우리가 국어에도 문법상에 “체언ㆍ용언” 그렇게 표현하잖아요. 그것이 불교에서 나간 말입니다. “체언ㆍ용언” 모든 것이 그래요. 體가 있고 用이 있고요. 우리 몸이 있고 몸짓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가만히 있어도 그대로 앉아있는 몸짓입니다. 걸어가면 걸어가는 그대로의 몸짓이고, 그런데 몸과 몸짓이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둘입니다.
몸이 있고 몸짓이 있습니다. 몸하고 몸짓하고는 다릅니다. 다르면서 또 하나이고, 하나면서 다릅니다. 體와 用도 그래요. 우리마음 본체하고 마음작용하고 어떻게 떼놓을 수 있습니까? 절대 떼놓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體ㆍ用. 이렇게 했는데요? 이것이 우리 심체이고 심체의 작용입니다. 몸과 몸짓의 차이 처럼요.
體用이 雖殊나
而湛然則一也(이담연즉일야)라.
이 사람의 경우입니다. 湛然한 것은 하나다.
如析栴檀(여석전단)에 片片皆栴檀(편편개전단)이니라.
예컨대 전단나무를 쪼개면 조각조각이 전부 전단나무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랬습니다. 우리불교에서 전단향나무를 가지고이야기를 많이 하지요.
점안의식 서두에 보면 전단목주중생상. 염불에는 참~ 주옥같은 고차원 적인내용들이 많이 있지요. 특히 우리 천도의식 문이라든지, 물론 점안법문도 그렇습니다만, 점안의식에도 보면
栴檀木做衆生像(전단목주중생상)
전단나무로 중생의 모습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及與如來菩薩形(급여여래보살형) 그랬지요?
또 여래의 모습도 만들 수가 있고, 보살의 형상도 만들 수가 있습니다.
萬面千頭雖各異(만면천두수각이)나
만 가지 얼굴과 천 가지 머리가 비록 각각 다르지만,
若聞薰氣一般香(약문훈기일반향)이라.
만약에 그 전단나무향기를 맡아보면 거기서 풍기는 향기는 똑 같은 전단향기다.
중생모습을 해놨거나 아니, 중생모습은 놔두고 똥의 모습을 조각했다 하더라도 전단향기가 나지 똥냄새 안 납니다. 생선을 조각해도 전단나무로 조각했기 때문에 거기서 생선냄새가 안 나고, 전단향기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야~~ 그것 참 큰 법문입니다. 그 법문한번 서두에 읽어주면 사실은 그 점안의식이 끝난 겁니다. 그렇게 알아야 되는 것이지요. 참~~ 큰 법문입니다.
栴檀木做衆生像 及與如來菩薩形
萬面千頭雖各異 若聞薰氣一般香
얼마나 좋은 법문입니까? 저는 참 잘 생각하고 인용도 잘하는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든 간에, 본성은 전부 부처입니다. 부처입니다. 석가모니는 석가모니 모습으로 그렇게, 한번 그렇게 나타났고, 관세음보살ㆍ지장보살은, 관세음보살ㆍ지장보살로 그렇게 나타났고, 우리는 우리 인연 따라서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지, 그 본래의 성품에 있어서는 똑 같은 겁니다. 그래서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이라하는 것이지요. 전단나무와 똑 같습니다.
전단나무로 생선을 빚어놔도 전단향기가 나지 생선냄새가 안 납니다.
사실은 그런 안목이 있는 사람은요?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지 거기서 부처를 보지, 다른 것을 보지 않습니다. 전부 부처로 보는 겁니다. 어떤 짓을 하더라도 부처의 한 작용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도 如析栴檀에 片片皆栴檀이니라. 그랬습니다. 湛然이라고하는 도호를 가지고 이렇게 법문을 근사하게하고, 그 다음에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今時에 有一種杜撰漢이 自己脚跟下도 不實하면서 只管敎人으로
攝心靜坐하야 坐敎絶氣息하라하나니 此輩는 名爲眞可憐愍이니라
請公은 只恁麽做工夫어다 山野가 雖然如此指示公이나
眞不得已耳니 若實有恁麽做工夫底事인댄 卽是汚染公矣니라
此心은 無有實體어늘 如何硬收攝得住며 ←4강-1
↓4강-2
擬收攝이나 向甚處安着고 旣無着處則無時無節하며
無古無今하며 無凡無聖하며 無得無失하며 無靜無亂하며
無生無死하며 亦無湛然之名하며 亦無湛然之體하며
亦無湛然之用하며 亦無恁麽說湛然者하며
亦無恁麽受湛然說者하리니 若如是見得徹去하면
徑山도 亦不虛作此號요 左右도 亦不虛受此號하리니 如何如何오
今時(금시)에 有一種杜撰漢(유일종두찬한)이,
요즘에 한 종류의 杜撰漢. 막을 두ㆍ찬탄 할 찬. 드러낼 찬자인데요.
남의 주장은 막고 자기주장은 드러내는 놈, 그런 뜻인데요.
杜撰漢 = 자기주장만 옳다고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특히 선불교에서... 그런데 대개 우리가 대화를 해보면, 토론 문화가 발달하지 아니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지요. 사석에서 이야기할 때라든지, 지대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든지 그런 것들이...
自己脚跟下(자기각근하)도, 자기밑천도
不實(불실)하면서, 실답지 못하면서, 그 말입니다.
자기밑천도 실답지 못하면서, 자기 근본ㆍ뿌리. 다리 밑이라는 것이 근본ㆍ뿌리라는 뜻이고, 밑천이라는 뜻입니다. 不實하면서,
只管敎人(지관교인)으로, 다만 敎人 = 사람으로 하여금,
攝心靜坐(섭심정좌)하야, 마음을 거둬들이고 조용히 앉아서,
坐 敎絶氣息(좌교절기식)하라하나니, 앉아서 하여금 氣息을 끊으라.
氣息을 끊으라. 이것은 氣息끊어지면 죽는 도리지요. 숨이니까요.
그것은 거기에 ‘집중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거기에 “집중하라.”
그것만 집중하지 다른 것은 전혀 관여하지 말라. 조용히 앉아서,
攝心靜坐해서 氣息을 끊으라. 거기에 집중하라. 그 외에 다른 것은 다 끊으라. 이 뜻입니다. 氣息을 끊으면 안 되지요.
그 외에 다른 것을 다 끊으라.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묵조선의 지시가 요즘 많다.’ 이 말입니다.
此輩(차배)는
名爲眞可憐愍(명위진가연민)이니라.
이름이 가히 憐愍한, 불쌍한 사람이다. 불쌍한 사람이다.
請公(청공)은, 청컨대 그대는
只恁麽做工夫(지임마주공부)어다.
다만 그렇게 공부할 지어다. 앞으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 식으로 공부하면 안 되고 ‘내가 가르쳐준 대로’ 그 말입니다.
山野(산야)가
雖然如此指示公(수연여차지시공)이나,
내가 비록 이와 같이,= 如此指示公이나, 앞에서 그 사람들이 지시하듯이 간혹 그렇게 지시할 때가 있어요. 좌선을 지시 아니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득이해서,
眞不得已耳(진부득이이)니, 참으로 부득이해서 할 따름이다.
부득이해서 그렇게 이야기할 따름이다. 사실 좌선 하는 것은요?
앉아서 참선 하는 것은, 그것이 부득이해서하는 방법입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방법이에요.
若實有恁麽做工夫底事(약실유임마주공부저사)인댄→ 저산댄,
만약 實로, 진실로 이러한, 이렇게 공부 짓는 일이 있다면
卽是汚染公矣(즉시오염공의)니라.
진실로 “이것이 실법이다ㆍ이것이 진실한 공부다.” 라고 이렇게 만약에 지시를 한다면 그것은 그대를 물들이는 것이다. 汚染케 하는 것이다.
그대를 아주 혼탁하게 하는 것이다.
此心(차심)은 無有實體(무유실체)어늘,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어요. 실체가 없거늘,
如何硬收攝得住(여하경수섭득주)며,
어떻게 굳게 콱~~, 말하자면 한 곳에다가 아주 집중해가지고 ‘그것을 굳혀 가지고 收攝해서 머물 수 있을 것이며’ 이 말입니다.
이 마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너무 자유자재해요. 너무 자유자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곳에다 집중 한다는 것이, 이것이 될 일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아예 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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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