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4월 6일 성주간 목요일 - 성유 축성 미사
제1독서 : 이사 61,1-3ㄹ.6ㄱㄴ.8ㄷ-9
제2독서 : 묵시 1,5-8
복 음 : 루카 4,16-21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잘 아는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었다면 어떻게 바라볼 것 같습니까?
엄청난 행운아라고 하면서 부러워할까요? 지금 내가 힘드니까 도와달라고 부탁할까요?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하겠습니까? 그의 행운에 배 아파하는 것이 아닐까요?
로또 당첨은 814만 5,060분의 1의 확률이라고 하지요.
불가능한 확률을 뚫고서 당첨된 것은 분명히 엄청난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힘든 확률을 극복한 사람은 어떨까요? 더 엄청난 행운아가 분명합니다.
바로 우리 각자가 그 엄청난 행운아입니다.
한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남자가 가진 1억 개의 정자 중 단 하나의 정자만이 난자를 만나게 됩니다.
즉, 우리 각자는 1억분의 1의 확률을 뚫고서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로또 당첨보다도 어려운 확률을 극복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부모가 만날 확률을 따져보면 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여러분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만날 확률까지 더해보면,
지금 우리의 존재는 거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사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 역시 기적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제가 주님의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
주님의 큰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자기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기적만이 계속 주어지는 삶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자기 삶의 기적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과거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계속해서 표징만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교회는 오늘 우리가 봉헌하는 주님 만찬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성체성사를 이 땅에 새롭게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을 사는 우리도 미사 안에서 커다란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커다란 기적입니다.
혹시 배반한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줄 수 있습니까?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향해 오히려 커다란 선물을 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한 제자가 자기를 팔아넘기고, 가장 믿었던 제자는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끝까지 따르겠다는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열렬히 환호하던 이스라엘 군중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적의 담긴 말을 외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최후 만찬을 통해 성체성사라는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은총에 은총을 계속 더해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며, 주님께 계속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행운아입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식사 자리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사랑을 나누는 마지막 자리입니다.
이를 가리켜 요한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주십니다.
곧 당신의 유산으로 고귀하신 당신의 몸, 당신의 생명을 물려주십니다.
이름하여, 성체성사를 설정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를 유산으로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쟝 바니어 표현을 빌리면 당혹스런 쇼크요, 스캔들입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스캔들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섬기신 까닭입니다.
영광스럽고 드높으신 분이 권위도 없이 천박하게 겉옷을 벗어 재끼고,
낮아지고 비천해지고, 노예나 하는 일을 하는 것을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발 씻김’ 안에는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그 무엇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몫’에 대한 비밀입니다.
바로 여기에, ‘발 씻김’의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곧 ‘발 씻김’은 단지 섬김의 본보기로만 제시되고 있는 것을 넘어서,
무릇 참된 생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성사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무한한 행위요,
동시에 죄를 씻어 주는 용서와 구원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투완 추기경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성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섬김’은 자신을 내어주는 성체가 됩니다.
성체인 이 섬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지고,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 주게 됩니다.
섬김은 이렇게 구원의 성체가 됩니다.
곧 섬김은 성체성사가 현실 속에 실현되는 구체적인 형태인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몫을 나누어 가지게 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유산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결국 예수님과 함께 구원사업의 몫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 섬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섬김을 받은 자라야, 받은 바로 그 섬김으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기 전달, 자기 양도가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섬김’은 예수님을 내어주는 성체가 되고, 신적인 행위가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생명의 전달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몫을 함께 나누고,
당신의 유산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의 행위요, 성체성사가 됩니다.
동시에 죄를 씻어 주는 용서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발 씻김의 성사는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라, 화해 성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는 ‘발 씻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지고, 또한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 주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섬김’은 서로의 용서와 친교를 이루며, 화해 성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할 베드로와, 유다와, 십자가 아래서
옷마저 벗어버리고 도망쳐버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당신의 지극한 사랑으로 전에 이미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요한 13,10)
이토록 발을 씻는 일은 깨끗함을 완성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그러기에 발을 씻는 일은 그 깨끗함의 완성을 가리키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이루며, 진정한 파스카를 이룹니다.
오늘 우리는 이 거룩한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고 압도당합니다.
이 거룩한 섬김, 이 놀라운 ‘발 씻김’으로, ‘당신의 몫’을 건네받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전달하는 이 놀라운 감격의 성체성사요 화해 성사인 ‘발 씻김’으로 하여,
우리는 당신 생명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마침내 구원의 몫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도 이 고귀한 유산을 함께 나누고 전달해야 합니다.
형제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이 바로 그 일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주님!
제 영혼을 씻어 주소서.
당신 사랑을 입고 생명을 몫을 얻게 하소서.
섬김받기보다 먼저 섬기게 하소서.
낮아져 높일 줄 알고 작아져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쪼개지고 부수어져 내어주고 파스카를 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교회는 오늘부터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합니다.
성삼일은 거룩한 삼일이라는 뜻입니다.
성 목요일은 ‘주님의 만찬미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이르자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성 목요일 주님의 만찬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는 성체성사의 의미를 깊이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듯이
우리들 또한 이웃의 아픔에 함께하도록 다짐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함께하도록 다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도록 다짐합니다.
성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길과 십자가 경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배반으로 잡혀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성 금요일에는 우리의 잘못과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우리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려야 합니다.
성 토요일에는 ‘부활 성야 미사’가 있습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부활을 희망으로 기다립니다.
‘파스카’는 성삼일의 정점입니다.
파스카는 ‘대신한다, 대속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파스카는 ‘지나가다. 건너가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세 가지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사악을 대신할 ‘양’을 제물로 주셨습니다.
그 양이 아들 이사악의 죽음을 대신한 속죄양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드러나는 파스카입니다.
둘째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 10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에 있는 모든 맏 배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집 앞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재앙은 양의 피를 바른 문설주는 지나갔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드러나는 파스카입니다.
셋째는 홍해 바다 이야기입니다.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의 앞에는 홍해 바다가 있었습니다.
뒤에는 파라오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사면초가의 상황이었습니다. 앞으로 가면 바다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뒤로 가면 이집트의 군대에게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홍해 바다를 마른 땅으로 갈라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안전하게 홍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드러나는 파스카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파스카’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은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지만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와 산 이들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오늘은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되는 성목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이 이 시대의 ‘파스카’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파스카 축제(미사)의 생활화
-파스카의 꽃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겸손한 섬김의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바야흐로 지금 주님 만찬 성목요일부터 파스카의 성삼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만개하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꽃들이,
겨울 추위를 통과한 인동초 같은 파스카의 봄꽃들이,
벌써 주님 부활을 경축하는 듯 합니다.
배밭의 배꽃들이 참 장관입니다. 계절의 순환이 전례 주기와 정말 잘 맞는 우리나라입니다.
예전 써놨던 파스카의 꽃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주님을 믿는 우리는 꽃입니다. 주님 파스카의 꽃입니다.
그러니 꽃처럼 아름답고 품위 있게 살아야 합니다.
요즘 절정을 이루는 활짝 피어나기 시작한 봄꽃들이 참 예쁩니다.
해당화, 산당화가 특히 그러합니다.
이런 사진을 전송할 때마다 다들 예쁘다고 감탄하면 저는 지체 없이 덕담의 답글을 보냅니다.
“자매님은 더 예뻐요!”
사실입니다. 파스카의 꽃인 사람보다 더 예쁜 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니 꽃처럼 삽시다.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삽시다.
바로 이게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목적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바로 그 답을 알려드립니다.
파스카 축제의 생활화, 일상화, 현재화가 답입니다.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한결같이 겸손한 섬김의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파스카 축제인 미사 전례입니다.
오늘 지금 거행하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 전례가 파스카 축제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눈물 나게 감동스런 사랑의 성체성사, 파스카 축제입니다.
유다인들은 일 년 한 번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의 탈출을 기념하여 파스카 축제를 지냈지만,
우리는 파스카 축제의 생활화, 일상화, 현재화를 위해 매일 파스카 축제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구약의 파스카 축제가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
바로 파스카의 순례 여정 중인 삶임을 자각하면서 생각 없이, 영혼 없이 살지 말고
깨어 준비된 자세로 정성껏 미사 축제를 거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날마다 미사 축제를 봉헌하는 우리들에게
이날은 일년 중 한날이 아니라, 오늘이 바로 이날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파스카 축제의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파스카의 꽃으로, 주님의 자녀답게 살게 합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는 신약의 파스카 축제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바로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 축제입니다.
다음 두 말마디는 늘 들어도 감동적이고 새롭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날마다를 집어넣어 “날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로 바꿔 말하고 싶습니다.
바로 파스카 축제의 미사 전례 거행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망각이 영혼의 치명적 병 입니다.
'아남네시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끊임없이,
한결같이 상기하여 파스카 축제를 거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참으로 파스카 축제의 현재화를 통해 종살이에서 자유인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감으로
파스카 신비의 삶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전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일상에서 겸손한 섬김의 사랑으로 실현될 때 파스카 축제의 완성입니다.
어제 영문주석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은 복음, 전례, 일상생활과 상호작용 사이의 이음매 없는 옷입니다.”
복음, 전례, 일상생활이 완전 하나 된 이음매 없는 옷은
그대로 파스카가 생활화된, 일상화된, 현재화된 삶을 지칭합니다.
오늘 복음의 발 씻김 예식이 바로 파스카 삶의 결정적 요소임을
자각하여 몸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유언적 장면이
주님께서 친히 우리 발을 씻어 주시는 장면입니다.
겸손한 섬김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복음 서두 말씀도 감동이고 마지막 유언적 행위와 더불어 유언이 감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죽음은 허무로 끝나는 마지막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다가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희망입니다.
지상에서 천상의 기쁨을, 파스카의 기쁨을 앞당겨 살게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드린 후 다음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이 거룩한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유언입니다.
꼭 잊지 마시고 평생 날마다 미사 봉헌 때마다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아
겸손한 섬김의 사랑을 ‘선택’하고 ‘배워' '훈련’하고 ‘습관화’하라는 것입니다.
마침 어제 입원하여 재활 훈련 중인 고마웠던 분이 방문했을 때 드린 충고가 생각납니다.
“자매님도 재활 훈련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평생 수도원에서 죽을 때까지 영육의 재활 훈련을 잘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으로,
한결같이 신망애(信望愛)의, 진선미(眞善美)의 재활 훈련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새롭게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잘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주간 목요일
교회는 ‘주님 만찬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다.
이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을 드러내셨다.
제자들과 그 후계자들은 예수님의 당부에 따라 이 만찬을 미사로 재현한다.
탈출기에서는 야훼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한 파스카,
즉 죽음의 재앙이 건너간다는 과월의 축제로, 이를 영원한 법으로 삼아 대축일로 지내라고 하신다.
사도 바울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최후 만찬 때에 행하신
‘성체 성혈의 의미와 그 의식을 우리가 행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밀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되는
이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1절)
예수님께서 ‘건너가심’은 세상에 계실 때,
하느님의 고귀함을 벗고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으며,
우리에게 맞추어 당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이다.
즉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필리 2,7) 우리와 함께 계시던 분이
당신의 충만함(참조: 콜로 1,19; 에페 1,23)으로 돌아가신다는 의미이다.
제자들을 곧 떠나야 할 때가 오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분은 그 일로 그들의 사랑이 더욱 커지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아
그들이 장차 닥칠 끔찍한 일들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절)
여기서 ‘끝까지’는 ‘그리스도다움’을 뜻한다.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이 사랑은 만찬 때, 악마가 이미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은 후에 표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3절)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4절).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5절) 고 한다.
말씀이신 분,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분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분이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려고 무릎을 굽히셨다.
예수님의 이 모든 일은 그분의 겸손을 드러내고 있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손수 부으셨다.
어떤 좋은 일을 할 때는 겉으로만 보이는 행동만 할 것이 아니라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르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행위를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황송했다.
그래서 당황해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7절)
베드로는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8절)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8절)
베드로가 나중에 알게 되는 신비는 그들의 발은 곧 기쁜 소식을 전할 발이므로
그 발을 씻고 당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닦음으로써 아름답게 만드신 것이다.
이제 그들은 “나는 길이요”(요한 14,6)라고 하신 분께로 갈 수 있게 되었고,
또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깨끗한 발로 사람들에게 갈 수 있도록
아름답게, 제자들을 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비를 아직은 깨닫지 못하지만, 나중에 그것을 알고 나면
그 신비를 깨닫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9절) 하자 예수께서는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10절)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다.
예수님은 그를 다른 제자들처럼 영예롭게 대하시며
그에 대해서도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유다는 발을 씻어 주시는 그 사랑을 십자가의 못으로 갚아드리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12절) 하신다. 그리고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14절)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주인으로서 종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더러움도 씻는 것이다.
형제의 발 앞에 몸을 숙일 때, 겸손해지며 더욱 확고해진다.
이 겸손으로 교만해지려는 마음이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15절)
예수께서 먼저 당신의 모습이 사랑하고 봉사하는 모습이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이웃으로부터 멀리할 때가 아니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더 가까이할 때이다.
이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이 거룩한 밤에 이 제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천상식탁에 앉을 때까지 당신의 말씀과 생명으로
우리 모두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발 씻김과 성찬례는 하나다.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이들과 구분되는 특징 하나가 있다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어?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도 사랑할 줄 아는데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유일한 이유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이 아니면 부모를 사랑할 수 없고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가능하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성찬례입니다.
말씀으로는 목욕을 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사랑을 위한 준비를 시킬 수 있지만,
자아와 삼구를 완전히 씻지는 못합니다.
자아와 삼구는 하느님의 피가 아니면 씻겨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부모의 피 흘림이 아니면 그것이 씻겨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유튜브에서 앞이 안 보이는 아빠가 아기를 혼자 키우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이도 선천성 백내장으로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빠는 혼자 젖동냥을 해가며 아기를 키웠고 그것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방영되었습니다.
덕분에 후원금이 들어와 아기는 수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는 왼쪽 눈은 잃었지만, 오른쪽 눈은 0.2라는 시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6년이 지난 뒤 아들은 고등학생이 되었고 공부도 잘하여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제작진은 아들에게 16년 전에 아버지가 자신을 키우기 위해 고생했던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을 꼭 잡습니다.
마치 나무토막에 불이 붙으면 그 안에 있는 물과 진액이 빠져나오는 것처럼
아버지의 피는 아들의 자아를 눈물로 빠져나오게 한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바다를 거닐며 바다의 색깔과 파도의 색깔을 설명해줍니다.
먼저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면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형제는 부모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려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 이야기에서 아이는 형제가 없습니다.
저는 90cm밖에 크지 못한 ‘대성이’의 예를 들고 싶습니다.
대성이는 선천성 왜소증을 앓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지만, 다섯 살짜리 동생에게 장난감을 빼앗깁니다.
하지만 동생을 용서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를 합니다.
제작진이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대성이는 대답합니다.
“형이니까요!”
자신을 동생의 형으로 만들어준 이가 부모입니다.
대성이는 아빠, 엄마가 자기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압니다.
그래서 아버지 폐지와 폐품을 줍는 것을 고사리손으로 도우려고 합니다.
미안해하는 아버지를 오히려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자신은 괜찮다며 위로합니다.
자아가 부모의 피로 죽은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아이가 어떻게 형제를 미워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사랑을 받은 동생은 형이 수술을 할 때 눈물을 흘립니다.
동생도 철이 없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성찬례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발 씻김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요한은 이미 성찬례에 관한 내용이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대신 그 성찬례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기는 발 씻김 예식을 넣음으로써
발 씻김을 통해 성찬례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한 것입니다.
성찬례의 목적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서 형제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우리가 성찬례 없이 사랑이 가능했다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찬례가 어떻게 우리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발 씻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찬례에 참여하나요?
성찬례를 통해 사랑을 방해하는 자아와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이 눈물로 빠져나오나요?
유다는 예수님을 한 번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배반했습니다.
둘 다를 위해 예수님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베드로는 유다를 더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해서만 이웃 사랑이 가능한 것입니다.
한 부모의 피 흘림이 한 형제를 만들 듯이,
하느님의 피 흘림은 모든 피조물을 형제로 만듭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요한 13,1-15 주님 만찬 성목요일
주님 만찬 성 목요일
예수님께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발을 씻겨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신다는 것에
사랑과 섬김, 낮추임...
평소 들었던 많은 의미와 해석들이 머리에 떠오르지만
마음속엔 타성에 젖어
으레 예수님은 그래야 하는 분처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 한 명, 한 명의 발을 닦아주시는 예수님을 떠 올리다
유다의 발을 닦아주는 예수님의 손길에 머물렀습니다.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이,
내 마음속에 앙금이 남아있는 이...
그 앞에 자세를 낮추어 앉는 나를 떠올려봅니다.
자세를 낮추기까지도 어려웠지만,
낮추고 다가선 내 마음속에
여전히 나의 손길로
그의 마음을 바꾸고 싶어 하는 기대가 가득한 걸 봅니다.
자세는 낮추었지만, 마음속엔 아직 내가 우위에 있습니다.
그가 나의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면
이내 적개심을 품을 마음이지요.
예수님의 비움이 어느 정도인지...
예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그 사랑이
한없이 베풀어지고 있다는 것에
참 감사하고 위안이 되는 오늘입니다.
[출처] 요한 13,1-15 주님 만찬 성목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