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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간화선 특강)
제4강 - 3부(2012. 11. 12.)
李叅政(이참정) 漢老(한노)의 問書附(문서부)
答 李叅政 漢老 (一)
李叅政 漢老라고 하는 사람의 問書附라.
묻는 편지를 여기다가 부록으로 붙여 놨다. 이 뜻입니다.
대개 답하는 내용. 대혜스님의 법문 듣고자 편집된 책이기 때문에 묻는 내용은 사실은 크게 중요시 않지요. 그런데 대표로 증시랑하고 이참정하고 이렇게 두 사람을 실었다. 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예를 들어서 증시랑은 깨닫지 못한 사람의 대표로서의 묻는 편지를 붙였고, 또 이참정은 깨달은 사람으로서의 묻는 편지를 붙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편집자가 꼭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李叅政 漢老의 問書附
邴이 近扣籌室하사와 伏蒙激發蒙滯하야 忽有省入호이다
顧惟호니 根識이 暗鈍하야 平生學解가 盡落情見이라
一取一捨호미 如衣壤絮하고 行草棘中하야 適自纏繞러니
今一笑에 頓釋호니 欣幸을 可量이릿가 非大宗匠의 委曲垂慈시면
何以致此리닛고 自到城中으로 着衣喫飯하며 抱子弄孫하야
色色仍舊호대 旣亡拘滯之情하고 亦不作奇特之想하며
其餘夙習舊障도 亦稍輕微하고 臨別叮嚀之語는 不敢忘也니다
重念호니 始得入門이나 而大法을 未明하야 應機接物에
觸事未能無礙호니 更望有以提誨하사 使卒有所至시면
庶無玷於法席矣일까하노이다
李 叅政 漢老의 問書附,
參政은 벼슬이고, 지금으로 말하면 총리지요. 아주 높은 벼슬입니다.
漢老라는 것은 이것은 호거나 이름 정도고, 邴도 이름입니다. 李 邴.
邴(병)이 近扣籌室(근구주실)하사와,
근래에 籌室을 두드렸다. 籌室은 조실이라고도 쓰고 또, 우리 어릴 때는 籌室이라고 하는 편액을 더러 봤습니다. 이것이 산 까치 籌자가 아닙니까?
조실 방을, “염화실 방ㆍ주실ㆍ조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씁니다.
扣籌室이라고 하는 말은 대혜스님에게 물었다. 방문했다. 이 뜻입니다.
대혜스님을 방문했다.
伏蒙激發蒙滯(복몽격발몽체)하야, 伏蒙 = 엎드려 입었다.
蒙滯激發함을... 蒙滯 = 어두울 蒙ㆍ막힐 滯. 어둡고 막힌 저 자신을 激發해줬다 = 깨닫게 해줬다. 대혜스님 만나가지고 법문 듣고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忽有省入(홀유성입)호이다. 홀연히 省入. 살펴서 들어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省 = 살필 성ㆍ덜 생. 두 가지 의미가 있지요. 여기 省入이라고 붙인 것은 “살필 성.” 깨달았다. 깨달아 들어감이 있었습니다.
顧惟(고유)호니, 돌이켜 생각해 보니
根識(근식)이 暗鈍(암둔)하야
平生學解(평생학해)가, 평생 동안 공부해서 이해한 것이
盡落情見(진락정견)이라. 모두들 정견에 떨어져있었다.
情見 = 말하자면 감정의 소견. 감정의 소견에 떨어져있었다.
一取一捨(일취일사)호미,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리고,
또 하나를 버리면 또 하나를 취하게 되는 것이,
如衣壞絮(여의괴서)하고, 떨어진 솜옷을 입고, 이럴 때 衣자는 “입다.” 하는 뜻입니다. 여기는 옷 衣자가 아닙니다. 壞絮할 때 ‘떨어진 솜옷’ 이라는 뜻이고요. 떨어진 솜옷을 입고,
行草棘中(행초극중)하야, 草棘. 가시밭길을 지나가는 것과 같아서
適自纏繞(적자전요)러니, 마치 스스로 纏繞, 얽히고 얽혔더니
今一笑(금일소)에, 지금 한바탕 웃음에
頓釋(돈석)호니, 몰록 다 풀어졌습니다.
一笑. 참~ 좋은 표현이지요?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정말 천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고, 그 캄캄하던 어떤 미혹이 싹~ 다 걷히니까 그 어떤 정신적 변화를 一笑라고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한번 웃음에 頓釋 풀렸다. 그것이 다 풀렸으니
欣幸(흔행)을 可量(가량)이릿가?
기쁘고 다행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非大宗匠(비대종장)의 委曲垂慈(위곡수자)시면,
大宗匠의 委曲, 아주 자세하게 자비를 드리운 것이 아니었다면
何以致此(하이치차)리닛고? 어찌 여기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自到城中(자도성중)으로,
대혜스님을 친견하고 나서 城中으로 돌아 왔습니다. 성중에 이름으로부터
着衣喫飯(착의끽반)하며, 이것이 깨달은 사람의 표현, “불법수행의 어떤 결과로써 이러한 효과가 있더라.” 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 着衣喫飯하며, 옷 입고 밥을 먹어서
抱子弄孫(포자롱손)하야, 아들을 안고 손자를 희롱해요.
표현이 抱子弄孫이지, 손자 안았으면 손자 안고 있는 것이지 손자 안고 있는 사람이 아들까지 안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글은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
손자를 안고 장난치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이
色色이 仍舊(색색잉구)호대, 낱낱이 다 옛 그대로입니다.
밥 먹을 때 밥 먹고ㆍ잠잘 때 잠자고ㆍ옷 입을 때 옷 입고ㆍ목욕할 때 목욕하고ㆍ자식하고 대화하면 자식하고 대화하고ㆍ손자하고 장난치면 손자하고 장난치고, 그대로가 仍舊 = 옛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旣亡拘滯之情(기망구체지정)하고,
어디 걸리고 막히는 그런 감정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없어요.
그 전에는 끈적끈적한 어떤 감정의 뭔가 이렇게 남아 있어가지고, 아~~ 애석하고 아깝고 너무 정이가고 그랬는데 그것이 없어요. 말하자면 손자하고 장난하면 장난하고 좋아할 때 그것뿐입니다.
亦不作奇特之想(역부작기특지상)하며,
기특한 생각을 짓지도 아니해요. ‘야~ 신기하다. 내가 왜 이렇게 됐는가?’ 하는 생각도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 외
其餘夙習舊障(기여숙습구장)도, 숙세의 습기라든지 옛 장애들도
亦稍輕微(역초경미)하고, 또한 차츰차츰 가벼워지고
臨別叮嚀之語(임별정녕지어)는,
이별에 임해서 떠날 때에 叮嚀히 일러준 말은 = 간곡하게 일러준 말은,
不敢忘也(불감망야)니다. 감히 잊지를 못합니다.
臨別叮嚀之語 → 下所云理則頓悟(하소운리즉돈오)라. 이른바
乘悟並消(승오병소)며 事非頓除(사비돈제)라
因次第盡(인차제진)이라 이것은 능엄경의 글이다. 그렇게 됐습니다.
이것을 대혜스님께서 일러준 것입니다. 아주 간곡히ㆍ간곡히 일러준 말입니다. 대혜스님이 인용의 그 전통을 이어서 계속 頓悟頓修(돈오돈수)라고 고집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이참정에게 간곡히 일러줬다고 하는 것은 뭡니까?
理則頓悟. 이치로는 몰록 깨달았지만
乘悟並消라. 그 깨달은 것을 의지해서 업이 차츰차츰 녹아가요.
事非頓除라, 사면으로는 몰록 제어된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因次第盡이라. 차례를 인해서 다한다. 천천히 서서히...
얼음이 봄이 왔다고 한꺼번에 녹나요? 시간이 가야 녹는 것이지요.
초여름 돼도 저 음지에는 얼음이 남는 경우가 있잖아요. 우리의 업장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얘기지요.
돌아올 때 叮嚀히 일러준 말 = 간곡히 일러준 말은 감히 잊지를 못한다.
重念(중념)호니, 거듭 생각하니
始得入門(시득입문)이나, 비로소 入門 = 문에 들어오긴 했으나,
문에 들어온 것 같아요. 그러나
而大法(이대법)을 未明(미명)하야, 큰 법을 밝히는데 아직 밝히지 못해서
應機接物(응기접물)에, 근기에 응하고 중생을 제접 하는 곳에
觸事未能無礙(촉사미능무애)호니, 어떤 사적인 일에 다다라서 = 觸事.
사적인일에 다다라서 능히 無礙치 못해, 걸림이 없지를 아니해요. 걸릴 것도 걸린다 이 말입니다. 분명히 깨달았는데 걸릴 것 또한 걸리지 않으니
更望有以提誨(갱망유이제회)하사,
다시 바라노니 提誨 = 이끌어 가르침을 주소서. 좀 이끌어서 가르쳐 주십시오.
使卒有所至(사졸유소지)시면, 하여금 마침내 이르는 바가 있게 된다면
庶無玷於法席矣(서무점어법석의)일까하노이다.
거의 바라노니 법석을, 말하자면 법석에 오점이 없게 할까합니다.
당신 제자로서, 대혜스님 제자로서 대혜스님께서 일러 가르치신 말씀 잊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좀 더 훌륭한 법문을 내려 주신다면 제가 제자로서 당신의 법석에 오점을 남기지 않는 제자가 될 것 아닙니까? 이런 표현입니다. 이것이 꼭 깨달을 것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스승에게 감사의 뜻도 전하고, 또 겸손해서 이러이러한 이런 지나는 말로 당부하는 표현이지요.
그러면서 말하자면 일상생활을 이렇게... 온갖 끈적끈적하던 감정이 가뿐해졌다. 아주 가벼워졌다. 뭐 돈이나 명예나 자손의 문제라든지, 이런데 대해서도 참 가뿐해졌다. 하는 그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참정에게 답하는 대혜선사의 말씀입니다.
答 李叅政 漢老 (一)
示諭호대 自到城中으로 着衣喫飯하고 抱子弄孫하며
色色仍舊호대 旣亡拘滯之情하고 亦不作奇特之想하며
宿習舊障도 亦稍輕微라하니 三復斯語하고 歡喜踊躍호라
此乃學佛之驗也니 儻非過量大人이 於一笑中에
百了千當則不能知吾家의 果有不傳之妙며 若不你者인댄
疑怒二字法門을 盡未來際히 終不能壞라 使太虛空으로
爲雲門口하고 草木瓦石으로 皆放光明하야 助說道理라도
亦不奈何일러니라 方信此段因緣은 不可傳不可學이라
須是自證自悟하며 自肯自休하야사 方始徹頭니라
公이 今一笑에 頓亡所得하니 夫復何言이리오
示諭(시유)호대, 가르침을 보이되
自到城中(자도성중)으로, 성중에 이름으로부터
着衣喫飯(착의끽반)하며, 옷 입고 밥 먹고 抱子弄孫(포자롱손)하며
色色仍舊(색색잉구)호대, 사물 사물이 다 옛 그대로되
旣亡拘滯之情(기망구체지정)하고, 이미 拘滯 = 막히는 정이 없고
亦不作奇特之想(역부작기특지상)하며,
또한 기특하게 생각을 짓지 않으니
宿習舊障(숙습구장)도, 숙세의 습기와 옛 장애들도
亦稍輕微(역초경미)라하니, 또한 점점 가벼워진다. 라고 했으니
三復斯語(삼복사어)하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이 말을 듣고는
歡喜踊躍(환희용약)호라. 뛸 듯이 기뻐했노라.
此乃學佛之驗也(차내학불지험야)니,
이것이 불교를 배우는 영험이다 말입니다.
이렇게 공부해서 구체적으로 뭐가 달라졌는가?
세상사에 대해서 정말 그 변화가 뭐냐? 불교 믿고 그 변화가 도대체 뭐냐? 라고 우리가 깨놓고 이야기할 때 참, 꼭 찍어서 집어낼만한 꺼리가 사실 없지요? 그렇지만 불교 했어도 계속 소위 그대로이고, 사실 꼭 찍어서 어떤 영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참 마땅치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표현을 했고, 대혜스님은 이것이야말로 學佛之驗也라고 그랬습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영험이다.
儻非過量大人(당비과량대인)이 於一笑中(어일소중)에,
만일 過量大人 = 량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사람이
一笑中에서, 한번 웃는 가운데서
百了千當則(백료천당즉). 100번 깨닫고 천 번 깨달은 것이 안 됐다면
不能知吾家(불능지오가)의, 능히 우리 집, 우리 불교 안에서
果有不傳之妙(과유부전지묘)며,
과연 전할 수 없는 미묘한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어찌 알았을 것이며
若不爾者(약불이잔)댄, 만약 그렇지 아니 한다면
疑怒二字法門(의노이자법문)을 盡未來際(진미래제)히,
疑怒 = 의심하고 성내고, ‘불교를 이렇게 믿고ㆍ이렇게 공부하고ㆍ이렇게 참선하고 이렇게 했는데 도대체 뭔가? 남는 것이 뭐가 있어야지, 달라진 것이 뭐가 있어야지, 불법. 이것이 진짠가? 가짠가?’ 이런 생각들이 疑怒 그래요.
의심과 분노. 그렇겠지요. 이것이 불법이 영험이 있는가? 없는가?
수행자인지, 정말 이것이 바른 길인가? 아닌가? 의심도 할 수가 있겠고, 자기 그 동안 투자한 인생을 돌이켜보면 화도 나고, 그것이 疑怒입니다.
未來際가 다 할 때까지 終不能壞(종불능괴)라. 능히 무너지지 못할 것이다.
使太虛空(사태허공)으로, 큰 허공으로 하여금
爲雲門口(위운문구)하고, 운문의 입을 삼고, 草木瓦石(초목와석)으로
皆放光名(개방광명)하야, 다 광명을 놓기 위해서
助說道理(조설도리)라도, 도리를 다 설한다 하더라도
亦不奈何(역불나하)일러니라. 또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 경험해서 그런 어떤 초행이 나타나야 되는 것이지, 설명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方信此段因緣(방신차단인연)은, 바야흐로 이 인연은
不可傳不可學(불가전불가학)이라. 가히 전할 수도 없고 가히 배울 수도 없는 것이다. 전할 수 있으면 석가모니가 라후라에게 제일 먼저 전했겠지요. 아니면 하다못해 제일 가까운 야수다라에게 전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기록이 없대요. 또 자기를 키워준 이모 마하파사파제 비구니, 얼마나 가까운 절친한 사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에게 전해 줬다면 기록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不可傳.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을 전한다.” 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아주 여법하게 설사 법을 전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인가하는 겁니다. 그 사람 소견이 제대로 됐다하는 것을 대화를 통해서 ‘아, 그 정도면 됐다.’ 하고 인가하는 것이지, 전해주는 것은 아니라고요. 그런데 “傳法(전법)” 이라고 그래요. “법을 전해 줬다ㆍ전해 받았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처음에 그렇게 쓰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구한테도 못 전해주고, 지 자식한테도 못 전해주는 그 도리를 어떻게 전한단 말입니까?
그것 不可傳입니다. 不可傳不可學이라. 가히 전할 수 없는 것이다.
須是自證自悟(수시자증자오)하며,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니, 선불교에 있어서 證자는요? 깨달을 悟자 하고 맞먹습니다. 격이 같습니다. 깨달을 證ㆍ증득할 證. 이렇게 합니다.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깨달으니
自肯自休(자긍자휴)하야사, 스스로 긍정하고 스스로 쉬어야사
方始徹頭(방시철두)니라. 바야흐로 비로소 사무치게 된다.
公(공)이 今一笑(금일소)에, 그대가 지금 한 번 웃음에
頓亡所得(돈망소득)하니,
몰록 얻은 바를 잊어버렸으니, 얻은 바가 없으니
夫復何言(부복하언)이리오? 도리어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
黃面老子 曰不取衆生所言說인 一切有爲虛妄事하며
雖復不依言語道나 亦復不着無言說이라하니 來書所說이
旣亡拘滯之情하고 亦不作奇特之想이라하니
暗與黃面老子所言으로 契合이라 卽是說者는 名爲佛說이요
離是說者는 卽波旬說이니라 山野가 平昔에 有大誓願호대
寧以此身으로 代一切衆生하야 受地獄苦언정 終不以此口로
將佛法以爲人情하야 瞎一切人眼호라
公이 旣到恁麽田地하니 自知此事는 不從人得이라
但且仍舊언정 更不須問大法明未明과 應機礙不礙니
若作是念則不仍舊矣리라
黃面老子曰 不取衆生所言說(황면노자왈 불취중생소언설)인
一切有爲虛妄事(일체유위허망사)하며,
중생들이 한 말들, 一切有爲虛妄한 일들을 취하지 말 것이며,
雖復不依言語道(수부불의언어도)나,
비록 다시 언어를 의지하지 아니하나
亦復不着無言說(역복불착무언설)이라하니,
그렇다고 또한 다시 말 없는 것에 집착하지도 말라. 라고 했으니
來書所說(래서소설)이, 보내 온 편지에 말한 바가
旣亡抱滯之情(기망구체지정)하고,
이미 抱滯 = 걸리고 막히는 정이 없어지고,
亦不作奇特之想(역부작기특지상)이라하니,
또한 기특한 생각을 짓지 않는다고 하니,
暗與黃面老子所言(암여황면노자소언)으로,
가만히 = 暗. 가만히, 은근히 黃面老子의 말한바 로
契合(계합)이라. 계합이 된다 이 말입니다.
卽是說子(즉시설자)는 名爲佛說(명위불설)이요,
이렇게 이야기한 그 사람은 곧 佛說이 되고,
離是說者(이시설자)는, 이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卽波旬說(즉파순설)이니라. 마왕 파순의 말이다.
확신이 이럴 때, 조사스님들은 이런 표현을 잘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것은 부처님이다. 이것은 정설이다. 이것하고 다르게 말하는 사람은, 그것은 사설이다.
山野(산야)가 平昔(평석)에
有大誓願(유대서원)호대, 큰 서원이 있어요. 무슨 서원인가 하면
寧以此身(영이차신)으로, 차라리 이 몸으로
代一切衆生(대일체중생)하야, 일체 중생들을 대신해서
受地獄苦(수지옥고)언정, 지옥의 고통을 받을지언정
終不以此口(종불이차구)로, 마침내 이 입으로 불법을 가져서
將佛法以爲人情(장불법이위인정)하야, 인정을 기다려ㆍ인정을 위하여
瞎一切人眼(할일체인안)호라. 일체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지는 않겠다.
인정 때문에 이리 일러주고, 저리 일러주고, 이것이 도다, 이것이 불언이다. 라고 일러주는 것. 나는 차라리 지옥의 고통을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받을지언정 나는 그 짓은 안 한다.
公이 旣到恁麽田地(기도임마전지)하니,
그대가 이미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自知此事(자지차사)는, 스스로 잘 알 것입니다. 이는
不從人得(부종인득)이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야. 그것을 아마 당신은 알겁니다.
但且仍舊(단차잉구)언정, 다만 스스로 옛 그대로 = 仍舊. 의지할 仍.
옛 그대로, 옛날대로 살지언정
更不須問大法明未明(갱불수문대법명미명)과,
다시 모름지기 묻지를 말라 말입니다. 무엇을 묻지 말라는가 하면 大法을, 큰 법을 아직도 밝히지 못했다고 明未明, 밝혔느냐 밝히지 못했느냐? 하는 것. 또 應機礙不礙(응기애불애)니, 근기에 응하는 데에 걸리고 걸리지 아니하며, 이 따위 소리 묻지 말라 말입니다.
若作是念(약작시념)인댄, 만약 이런 생각을 한다면
卽不仍舊矣(즉불잉구의)리라. 仍舊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옛 그대로 사람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한 생각 일으켜서, 망상을 일으키는 것이지, 옛날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承호니 過夏後에 方可復出이라하니 甚愜病僧意로다
若更熱荒하야 馳求不歇則不相當也리라
前日에 見公의 歡喜之甚일새 以故로 不敢說破는 恐傷言語러니
今歡喜旣定일새 方敢指出하노라 此事는 極不容易하니
須生慚愧하야사 始得다 往往에 利根上智者는 得之호대
不費力하고 遂生容易心하야 便不修行하며 (故로)
多被目前境界의 奪將去하야 作主宰不得하고 日久月深하면
迷而不返하고 道力이 不能勝業力이라 魔得其便하야 定爲魔의
所攝持하며 臨命終時에 亦不得力하나니 千萬記取어다
前日之語에 理則頓悟라 乘悟倂銷어니와 事非頓除라
因次第盡이라하니 行住坐臥에 切不可忘了하며 其餘古人의
種種差別言句도 皆不可以爲實이나 然이나 亦不可以爲虛니라
久久純熟하면 自然黙黙契自本心矣라 不必別求殊勝奇特也니라
承호니, 편지를 받아보니
過夏後(과하후)에, 여름이 지난 뒤에
方可復出(방가부출)이라하니, 바야흐로 가히 다시 나오겠다 하니
甚愜病僧意(심협병승의)로다. 매우 병든 승의 뜻에 잘 맞습니다. 서로 도를 아는 사람끼리 시간 내서 한번 씩 만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반가운 일이냐?
若更熱荒(약갱열황)하야, 만약 다시 熱荒 = 공부 하면서 하~ 빨리 알려고 하는 그런 마음. 부글부글 끓는다 이 말이지요. 熱荒. 좋은 일이자 거친 관계입니다. 마음이 아주 뜨겁게 끓어오르고 거칠어진 정신상태. 그런 상태가 돼가지고
馳求不歇卽(치구불헐즉),
아~ 또 뭐 더 이상 알려고 하는 그런 馳求심이 쉬지를 아니한 줄은
不相當也(불상당야)리라. 서로 맞지 아니할 것입니다.
前日(전일)에 見公(견공)의 歡喜之甚(환희지심)일새,
깨닫고 나서 너무너무 기뻐하는 것을 前日에 보았습니다.
以故(이고)로, 그러므로
不敢說破(불감설파)는, 감히 설파하지 아니한 것은
恐傷言語(공상언어)러니, 言語를, 말을 상할까 염려했다.
恐 = 두려워했다. 그렇지요. 되게 기뻐하고 있는데 이런 소리해봐야 귀에 들어가지 않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말을 해도요. 들을 사람의 마음 상태가 제대로 됐을 때 이야기해야 그것 먹혀들지, 안 그러면 귓전으로 흘려버리고 아예 듣지도 않고, 들어도 크게 마음을 쓰질 않는 경우가 많지요. 이것은 도 닦는 일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今歡喜旣定(금환희기정)일새, 지금은 그 기쁨이 이미 안정이 됐을세.
方敢指出(방감지출)하노라. 바야흐로 감히 지적해내노라. 지적해내노라.
此事(차사)는 極不容易(극불용이)하니,
이 일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容易하지 아니해요.
須生漸愧(수생참괴)하야사, 모름지기 漸愧심을 내야 始得(시득)다.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된다.
往往(왕왕)에 利根上智者(이근상지자)는,
왕왕에 영리한 근기와 높은 지혜를 가진 사람은
得之(득지)호대, 뭔가 깨달음을 얻게 되면
不費力(불비력)하고, 힘을 크게 쓰지 않고 깨달은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遂生容易心(수생용이심)하야, 모름지기 容易한 마음을 내어, 그리고
便不修行(변불수행)하며, 더 이상 수행하지 아니해요.
多被目前境界(다피목전경계)의 奪將去(탈장거)하야,
그러다가 흔히 目前境界. 눈앞에 펼쳐지는
利衰毁譽稱譏苦樂(이쇠훼예칭기고락). 팔풍 같은 것. 이런 경계에 빼앗김을 당한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이로운 것이 생겼다하면 거기에 껌뻑 넘어가고, 손해를 보았다하면 거기에 또 껌뻑 넘어가가지고 거기에 그냥 안달복달해서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이지요. 그런 것을 그런 경계에 “빼앗김을 입었다.” 이렇게 표현 하지요.
作主宰不得(작주재부득)하고, 主宰지음을 얻지 못하고,
隨處作主(수처작주)해야 되는데 隨處作主도 못하고, 主宰지음도 얻지 못하고,
日久月深(일구월심)하면,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迷而不返(미이불반)하고, 미혹해서는 돌이키지 못해요. 다시 도로묵이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 사람들 많지요. 처음에 아주 발심해서 그냥 열열이 공부한데는 세상 명예든 무슨 이로운 일이든 이런 것 관심 없이 정말 발심한 도인처럼 젊을 때는 한참 그렇게 살아요. 그러다가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선 차츰차츰 세월이 가면 그만 속인으로 되돌아가 버려요.
日久月深하면 迷而不返이라. 미혹해서 돌아오지 못한다. 그렇지요.
그 때 돌아오지 못하고 속인으로 사는 것은, 이것은 더 아주 가관입니다. 실지로 더 아주 가관 이예요. 이제는 한 고비 넘었기 때문에 자기가 잘 한건지 잘못 한건지도 모르고, 이것이 무슨 도덕적으로 원만한지 도리에 맞는지도 모르고, 그런 경우가 아주 참 많지요. 그래 늘 살펴야 된다는 뜻입니다.
道力(도력)이 不能勝業力(불능승업력)이라.
도력이 능히 업력을 이기지 못해요.
魔得其便(마득기편)하야, 마군이가 그 짬을 얻어 = 그 편의를 얻어서,
其便이라고 하는 것은 마군이가 그 편의를 얻는다고 해서, 틈을 엿본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定爲魔(정위마)의 所攝持(소섭지)하며,
마군이의 攝持하는 바가 돼버려요. 마군이에게 그냥 끌려가버리고 포섭이 돼버려요. 명예에 끌려가고, 돈에 끌려가고, 益(익) 것에 끌려가고, 존경받는데 끌려가고, 이것이 마군입니다. 定爲魔의 所攝持. 마군이에게 끌려가는 바가 돼버린다.
臨命終是(임명종시)에 亦不得力(역부득력)하나니,
죽을 때에 다다라선 또한 힘을 얻지 못하니
千萬記取(천만기취)어다. 부디부디 기억하고 또 기억할지어다.
全日之語(전일지어)에, 지난날에
理則頓悟(이즉돈오)라 乘悟倂銷(승오병소)어니와
事非頓除(사비돈제)라 因次第盡(인차제진)이라. 라고 했으니,
이치로는 몰록 제거돼요. 몰록 깨달아요. 그 깨달음에 근거해서, 깨달음에 올라가서 아울러서 차츰차츰 녹여야 돼요. 事적으로, 事面으로는 몰록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因次第盡이라. 次第를 인해서 다 한다. 라고 했으니
行住坐臥(행주좌와)에 切不可忘了(절불가망료)하며,
행주좌와에 간절히 말하니 잊어버리지 말라.
其餘古人(기여고인)의 種種差別言句(종종차별언구)도,
그 나머지 옛 사람들의 갖가지 차별된 言句도
皆不可以爲實(개불가이위실)이나,
다 가히 진실이라고 여길 것은 아니지만,
然(연)이나 亦不可以爲虛(역불가이위허)니라.
그러나 거짓이라고 여겨선 안 된다.
조사스님들의 그 고준한 법문을 실법이라고 여겨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헛된 소리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말입니다. 경전의 말씀이나 조사스님들의 그 법문은 그것이 우리의 지침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가르침이라고요. 그렇다고 거기에 넘어가가지고 그것이 실법이라고 여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사에 그 어떤 가르침보다도 뛰어난 것입니다.
久久純熟(구구순숙)하면, 오래 오래 순숙하면
自然히 黙黙契自本心矣(자연묵묵계자본심의)라.
자연히 묵묵히 자신의 본심에 계합하게 될 것이다.
不必別求殊勝奇特也(불필별구수승기특야)니라.
반드시 따로 수승하고 기특한 것을 구하지 말지니라.
昔에 水潦和尙이 於採藤處에 問馬祖호대 如何是祖師西來意닛고
祖云近前來하라 向爾道호리라
水潦纔近前커늘 馬祖攔胷一蹋에 蹋倒라가 水潦가 不覺起來하야
拍手코 呵呵大笑어늘 祖曰 汝가 見箇甚麽道理완마 便笑오
水潦曰가 百千法門과 無量妙義를 今日於一毛頭上에
盡底識得根源去니다 馬祖便不管佗하시며
雪峰이 知鼓山의 緣熟하시고 一日에 忽然驀胷擒住曰 是甚麽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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鼓山이 釋然了悟하시며 了心便亡하고 唯微笑하야
擧手搖曳而已어늘 雪峯曰 子作道理耶아 鼓山이 復搖手曰
和尙하 何道理之有닛고 雪峯이 便休去하며
昔(석)에 水潦和尙(수료화상)이
於採藤處(어채등처)에, 등나무를 캐는 데에
問馬祖(문마조)호대, 마조스님에게 물었습니다.
如何是祖師西來意(여하시조사서래의)닛고?
祖云近前來(조운근전래)하라. 마조화상이 가까이 와봐라.
向爾道(향이도)호리라. 그대를 향해서 일러주리라.
水潦纔近前(수료재근전)커늘, 수료화상이 막 가까이 와요.
그 스님이 가까이 오라 하니까요. 그러니까
馬祖攔胷一蹋(마조란흉일답)에 蹋倒(답도)라가,
마조가 확 그냥 멱살을 잡고 넘어뜨려가지고 밟았어요.
攔胷一蹋에 蹋倒. 이것은 멱살을 잡고 넘어뜨리고는 꺼꾸려뜨렸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水潦가, 수료화상이
不覺起來(불각기래)하야, 자기도 모르는 결에 일어나 가지고서
拍手(박수)코, 박수를 치는 겁니다. 拍手코, 박수를 치고
呵呵大笑(가가대소)어늘, 허허허 하면서 크게 웃거늘,
祖曰(조왈), 마조가 曰,
汝가 見箇甚麽道理(여견개삼마도리)완대 便笑(변소)오?
그대가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웃는가?
水潦曰, 수료 화상이 曰,
百千法門(백천법문)과 無量妙義(무량묘의)를
今日於一毛頭上(금일어일모두상)에, 오늘 한 작은 터럭 끝 위에, -그러니까 스님이 나를 멱살을 한번 잡아서 넘어뜨리는 그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까짓 것 아주 작은 동작이지요. 一毛頭上에서
盡底識得根源去(진저식득근원거)니다. 그 근원을 다 알아버렸습니다.
百千法門과 無量妙義를...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존재 원리. 그것을 환히 알았습니다. 스님이 한번 나를 넘어뜨리는 거기에 나는 환히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그러니
馬祖便不管他(마조변불관타)하시며,
마조가 곧 그를 더 이상 관계치 아니했다.
수료화상과 마조스님의 이런 사례가 하나 있고, 그 다음에 또 설봉스님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雪峰(설봉)이
知鼓山(지고산)의 緣熟(연숙)하시고, 고산스님의, (연화도 여행 고산스님)이 아니고, 하하하하하 緣熟 = 인연이 성숙하였음을 알고, 가만히 공부하는 것 보니까 아! 인연이 다 익었거든요. 이것은 예를 들어서 가을철에 감 홍시가 다 익었어요. 조금만 건드리면 툭 떨어질 것을 알게 됐다. 이런 것이지요.
一日(일일)에 忽然驀胷擒住曰(홀연맥흉금주왈),
어느 날 하루 홀연히 멱살을 잡고는
是甚麽(시삼마)오? “뭐냐?” 이 뭣꼬가 아니고, “뭐냐?” 이 뭣꼬 하려면
“차 시삼마?” 이래야 됩니다. 차자가 있어야 됩니다. 是자는 이다 是자입니다. 시심마가 아니고 “시삼마?” 흔히 쓰는 화두지요. “뭐냐?” 이 말입니다. 그냥 “뭐냐?” 이겁니다. “이 뭐냐?” 하면 무엇이든지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까? “이ㆍ저” 는 지시 대명사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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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