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해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요한 16,20-23ㄱ
성령의 사람이 누구에게도 기쁨을 빼앗길 수 없는 이유
코리 텐 붐은 1892년 4월 15일 네덜란드 하를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의 네 자녀 중 막내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캐스퍼 텐 붐은 존경받는 시계공이었습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했을 때 텐 붐 가족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종교가 깊고 이웃 사랑의 원칙을 믿는 텐 붐 부부는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집에 숨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코리의 침실에 숨겨진 방을 지었고, 그곳은 그들이 수년 동안 보호했던
많은 유대인을 위한 은신처 역할을 했습니다.
1944년 2월, 텐 붐 일가는 네덜란드 정보원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나치는 그들의 집을 급습하고 온 가족을 체포했습니다.
코리와 그녀의 언니는 결국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강제 수용소의 상황은 가혹했고 언니는 1944년 12월에 사망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리 텐 붐은 네덜란드로 돌아와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세웠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녀는 자기 경험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나누기 위해 대중 연설자로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1947년 코리 텐 붐은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과 언니에게 잔인한 핍박과 학대를 했던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코리 텐 붐의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코리야 용서하거라.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이다. 내 명령에 순종하겠느냐, 하지 않겠느냐?”
코리 텐 붐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원수와 같았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그녀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녀는 성령의 힘을 느끼며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고 그 간수는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러한 용서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가 시계공을 할 때 어떤 부자가 비싼 시계를 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왜 시계를 새로 사려고 하느냐고 물었고 그 사람은 자신이 아끼는 시계를
아무도 고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시계를 보고 자신이 고칠 수 있겠다고 말하고 정말 고쳐주었습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시계를 새로 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코리는
“아빠, 시계를 팔았어야지. 우리에겐 돈이 필요하잖아!”라고 아빠를 야단쳤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주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인지 생각해 보아라.”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박해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인데 세상은 누구도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거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일으키는 감정에 휘둘립니다.
이미 뱀인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나가 흔들리면 감정도 흔들립니다.
세상에 속하기 위해 뱀을 선택한 이는 결국 세상이 주는 걱정, 근심, 두려움에 살며
나중에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합니다.
뱀을 선택한 즉시 관계의 단절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나를 버렸기에 세상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에 영향을 주는 분이 되실 것이고 세상은 더는
‘나’에게 영향을 주는 대상이 아니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 내적인 사람이 육체적이고 외적인 것에는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으로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세상에 휘둘리지 않으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죽음을 무릅쓰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지만 기뻐하셨지, 두려워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엘리사벳에게 가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에게 키워졌지만, 인간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옥사나 말라야가 본인이 개가 아니라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면
개들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대해 이전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개가 나를 보고 짖는다고 화가 나서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들고 쫓아간 적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그런 수준이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흔들린다면 ‘나’가 그 누군가와 같은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날아가는 새에게 쥐가 욕을 해도 새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그러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은 세상의 휘둘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