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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4강-4 (2013. 11. 11.)
答 劉寶學 彦修
있는 둥ㆍ마는 둥 그런 사람은 크게 잘 한 것도 없고, 못 한 것도 없고,
유야무야하게 그렇지만, 아주 못하던 사람도 오히려 못하던 것을 잘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리면 아주 잘 할 수가 있는 그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却是箇有力量底漢이라.
左右도 亦須退步(역수퇴보)하야,
그렇게 되면 그대는 이미 먼저 깨달은 사람이지만, 그대도 또한 모름지기 퇴보해서
讓渠出一頭(양거출일두)라사 始得(시득)다.
그 사람한테 한편 양보해야, 그 사람한테 양보해서 한편 내줘야 비로소 될 것이다. 이 말입니다. 비로소 옳을 것이다. 그 사람한테 양보해야지 안 그러면 절대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지금이야 당신이 훨씬 바른 소견을 가지고 있고, 한 소식을 했다하지만, 그 사람이 만약에 제대로 깨닫기만 하면 당신 못 따라갈 거야. 이런 이야기입니다.
比에 暐禪이 歸에 錄得渠答紫巖老子一書어늘 山僧이
隨喜讀一徧하고 讚歎歡喜累日호니 直是好一段文章이러라
又似一篇大義하고 末後에 與之下箇謹對호리니 不識커라
左右는 以謂如何오
昔에 達磨기 謂二祖曰汝但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하야
心如墻壁이라사 可以入道라하야늘 二祖가 種種說心說性호대
俱不契러니 一日에 忽然省得達磨所示要門하고
遽白達磨曰弟子此回에사 始息諸緣也니다
達磨知其已悟하시고 更不窮詰하시며 只曰莫成斷滅去否아
曰無니다 達磨曰 子作麽生고 曰了了常知故로 言之不可及니다
達磨曰 此乃從上諸佛諸祖의 所傳心體니 汝今旣得이라
更勿疑也하라하야시니늘
比(비)에 暐禪(위선)이 歸(귀)에,
이것은 대혜스님 상좌인데요. 내 제자 暐禪이 그저께 돌아왔는데,
그 당시는 순전히 편지로써 왔다갔다 심부름하면서 가르치고 교화를 해야 하기 때문에 대혜스님 편지를 들고 다니면서 가서 또 지도도하고, 편지도 전하고 또 편지 받아오기도 하는 그런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暐禪입니다. 돌아왔는데, 錄得(록득), 기록해 왔더라. 이 말입니다.
渠答紫巖老子一書(거답자암노자일서)어늘, 그랬습니다.
자암노자에게 답장하는, 자암노자 라고 하는 큰스님한테 답장하는 편지 한 통을 얻어왔는데, 기록해서 얻어왔는데
山僧(산승)이 隨喜讀一徧(수희독일편)하고,
산승이 기쁨을 따라서 일편을 읽고는
讚歎歡喜累日(찬탄환희루일)호니,
아주 여러 날 찬탄하고 기뻐했다 이 말입니다.
直是好一段文章(직시호일단문장)이러라.
참 좋은 일단의 문장이었다. 문장이 뛰어나더라 이 말입니다. 글 솜씨 보통이 아니더라. 이런 말입니다.
又似一篇大義(우사일편대의)하고, 一篇大義를 바치고,
末後(말후)에
與之下箇謹對(여지하개근대)호리니,
그로 더불어 謹對. 삼가이 대하는 것을 내려 줄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내가 전체 편지의 뜻을 대강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의 생각을 낱낱이, 그 대목ㆍ대목마다 내가 그것을 분석해보겠다. 그런 뜻입니다.
不識(불식)커라 左右는
以謂如何(이위여하)오? 어떻습니까?
左右는 以謂如何오? 左右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不識도 그런 뜻입니다.
아까 있었던 말처럼 不識. 左右는 어떻습니까? =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昔(석)에, 옛날에 達磨(달마)가
謂二祖曰(위이조왈), 二祖에게 일러 가로되,
汝但 外息諸緣(여단외식제연)하고,
그대는 다만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ㆍ모든 인연을 쉬고,
內心無喘(내심무천)하야,
안으로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어야, 이것 좋은 말입니다.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어야 됩니다. 공부 하려면 그 뭐 이런저런 인연, 전화 온다고 다 받으면 그것 언제공부해요? 도반들 연락 온다고 그 연락에 다 응하면 언제자기 일해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면 일 못한다고요.
外息諸緣. 중요한 말입니다.
內心無喘.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어야 됩니다. 자기도 또 마음에 뭔가 하고 잡이가 되어선 안 됩니다. 영화도 봐야 되겠고ㆍ세상일도 알아야 되겠고ㆍ뭐도 알아야 되겠고ㆍ뭐도 알아야 되겠고 그래가지고는,
특히 선불교공부는 안 되는 것이지요.
心如墻壁(심여장벽)이라사,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可以入道(가이입도)라하야늘. 가히 도에 들어간다.
라고 달마스님이 二祖 혜가스님 한테 그런 법문을 했습니다.
二祖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種種說心說性(종종설심설성)호대, 성품을 설하고, 그렇지만
俱不契(구불계)러니, 계합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一日(일일)에, 어느 날, 어느 하루
忽然(홀연)히
省得達磨所示要門(성득달마소시요문)하고,
달마가 보여준 바의 긴요한 법요의 문을 살피고는, 딱. 깨달았다 이 말입니다. 깨닫고는
遽白達磨曰(거백달마왈), 달마에게 고해 말하되, 弟子가
此回(차회)에사, 이번에야
始息諸緣也(시식제연야)니다. 비로소 모든 인연을 쉬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저 앞에서는 說心說性.
마음이 이런 것이다.ㆍ저런 것이다. 성품은 이런 것이다.ㆍ저런 것이다.
설명해도 영 아니었는데, 아! 이번에는 息諸緣也이다. 그러거든요.
“모든 인연을 쉬었다.” 라고 하니까, 깨달은 사람끼리는 무엇으로 말해도 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알게 되는 것이지요.
達磨가
知其已悟(달마지기이오)하시고, 그러한 사실을 알고는
更不窮詰(갱불궁힐)하시며, 더 이상 따져 묻지 아니하시고,
只曰(지왈), 다만 말하기를
莫成斷滅去否(막성단멸거부)아? 斷滅에 떨어지지 아니 했느냐?
단멸을 이루지 아니 했느냐? 아예 공한데 떨어져 있지 않느냐? 이런 뜻입니다. 공부하다가 제일 큰 함정이 그 겁니다. 공한데 떨어져 있는 것.
아무 것도 없다. 斷滅. 그것을 염려한 겁니다. 그러니까 혜가스님이
曰無(왈무)니다. 아닙니다. 그랬습니다.
達磨曰
子作麽生(자자마생)고? 그럼 지금 자네상태가 어떠냐?
曰, 혜가가 말하기를
了了常知故(요요상지고)로 言之不可及(언지불가급)이니다.
유명한 말입니다. 了了常知 = 아주 환하게 항상 알고 있습니다.
了了常知, 환하게 항상 알고 있는 까닭에 言之不可及이니다. 말로써 미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말로하란 말입니까?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내가 알기는 환하게 알아요. 그렇지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達磨曰
此乃從上諸佛諸祖(차내종상제불제조)의 所傳心體(소전심체)니,
그것이야말로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이 所傳心體 = 전하는 바의 마음심체다. 汝今旣得(여금기득)이라. 그대는 지금 이미 얻었음이라.
更勿疑也(갱물의야)하라하시니. 더 이상 내가 의심하지 않겠다. 그리고 의심하지 말라. 라고 했다. 달마스님이 그렇게 법문했습니다. 그런데
彦冲이 云 夜夢晝思十年之間에 未能全克이라
或端坐靜黙하야 一空其心하야 使慮無所緣하며 事無所託하야사
頗覺輕安이라하니 讀至此에 不覺失笑호라
何故오 旣慮無所緣이라하니 豈非達磨의 所謂內心無喘乎아
事無所託이라하니 豈非達磨의 所謂外息諸緣乎아
彦冲이 云,
언충이라는 사람이 자암노자에게 보낸 편지의 일단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夜夢晝思十年之間(야몽주사십년지간)에,
夜夢晝思. 밤에 꿈꾸고, 이것을 바꾸어서 써야 되는데, 글의 묘를 살린다고 이렇게 夜夢을 먼저 썼습니다. 우리가 아는 말은 晝思夜夢이잖아요.
그런데 夜夢晝思라고 이렇게, 一段文章이라고 그랬습니다.
好一段文章 = 아주 훌륭한 문장이더라. 글 솜씨 좋더라. 이 말입니다.
“글 좋다.” 그 말입니다.
夜夢晝思十年之間에, 晝思夜夢을 10년 한 사이에,
未能全克(미능전극)이라. 능히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가
或 端坐靜黙(혹단좌정묵)하야, 혹은 단정히 앉아서, 고요히 해서
一空其心(일공기심)하야, 한번 그 마음을 텅 비워서
使慮無所緣(사려무소연)하며, 생각으로 하여금 반연하는 바가 없으며,
事無所託(사무소탁)하야사,
생각은 반연하는 바가 없고, 바깥현상에는 의탁하는 바가 없게 되고서야
頗覺輕安(파각경안)이라하니, 자못 輕安.
아주 가뿐하고 편안함을 느끼게 됐다. 라고 했으니, 그런 글을 자암노자에게 써서 보낸 겁니다.
讀至此(독지차)에, 읽어서 여기에 이름에
不覺失笑(불각실소)호라. 不覺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소를 하고 말았다. 何故오? 왜냐?
旣慮無所緣(기려무소연)이라하니,
이미 “생각이 반연하는 바가 없다.” 라고 했으니
豈非達磨(기비달마)의, 어찌 달마의
所謂內心無喘乎(소위내심무천호)아?
안으로 헐떡거리는 바가 없음이 아닌가? ‘그것 딱 맞네.’ 이런 말입니다. 또
事無所託이라하니, 일에 대해서,
현상, 바깥경계에 대해서 의탁하는 바가 없다. 라고 했으니,
豈非達磨의, 어찌 달마의
所謂外息諸緣乎(소위외식제연호)아?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쉰 것이 아니겠는가? ‘달마스님 법문하고 딱 맞네.’ 이런 말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대혜스님 말씀이
二祖도 初不識達磨의 所示方便하고 將謂外息諸緣하며
內心無喘을 可以說心說性하며 說道說理라하야 引文字證據하야
欲求印可할새 所以로 達磨一一列下하사 無處用心코사
方始退步하야 思量心如墻壁之語는 非達磨實法이라하고
忽然於墻壁上에 頓息諸緣호니 卽時에 見月亡指하고
便道了了常知故로 言之不可及이라하니 此語도 亦是臨時하야
被達磨拶出底消息이라 亦非二祖實法也어늘
杜撰長老輩旣自無所證하고 便遂旋捏合하야 雖敎他人歇이나
渠自心火熠熠하야 晝夜不停호미 如欠二稅百姓相似로다
二祖도 初不識達磨(초불식달마)의 所示方便(소시방편)하고,
二祖 혜가도 처음에는 달마가 보인바 방편. 방편을 알지 못했어. 그래서
將謂(장위), 장차 이르기를, 外息諸緣하며 內心無喘을
可以說心說性하며, 마음을 이야기하고 성품을 설하며,
說道說理(설도설리)라하야, 도를 말하고 이치를 말한다.
그런 것이라고 여겨서, 그래서
引文字證據(인문자증거)하야, 문자를 이끌어 증거를 갖다 대고,
欲求印可(욕구인가)할새→ 인갈새, 인가를 구하고자 했을 세.
2조 혜가스님이 달마스님한테 깨닫기 전에는 설명을 늘어놓으면서 그런 억지를 썼다 이 말입니다.
所以(소이)로 達磨一一列下(달마일일열하)하사,
그래서 달마대사께서 그것을 낱낱이 그것을 찢어버려 가지고, 낱낱이 분석해서 따졌다 이 말입니다.
無處用心(무처용심)코사, 마음 쓸 곳이 없게 되어야
方始退步(방시퇴보)하야, 그 때쯤에야 바야흐로 비로소 退步해서,
2조 혜가가 그 때야 물러난 겁니다.
思量心如墻壁之語(사량심여장벽지어)는,
생각하기를 마음이 장벽과 같다고 하는 말은,
非達磨實法(비달마실법)이라하고, 달마의 實法이 아니다.
‘달마스님이 나를 속이려고 한 거구나. 나에게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이제 비로소 알게 됐지요.
忽然於墻壁上(홀연어장벽상)에 頓息諸緣(돈식제연)호니,
그러고는 장벽위에서 비로소, 몰록 모든 인연을 쉬었으니
卽時(즉시)에 見月亡指(견월망지)하고,
이것 중요한 말입니다. 見月亡指.= 달을 보아서 손가락을 잊어버렸다.
그렇지요. 손가락은 달을 가리킨 것이지, 달 보이려고 손가락질을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손가락을 가지고 달 인줄로 알았다 이 말입니다. 방편을 가지고 진짜 實法인줄로 그렇게 잘못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말입니다.
2조 스님이 비로소 달을 보고 나서는 방편을 다 잊어버리고,
便道了了常知故(변도요요상지고)로
言之不可及이라하니, 곧 말하기를
“내가 환하게 알고 있지만, 말로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이렇게 나오는 것이지요. 그 때는 제대로 된 것이지요. 그렇게 된 이야기입니다.
참~ 아주, 대혜스님 글도요? 그 문장이 그야말로 언충의 一段文章뿐만이 아니라, 대혜스님의 문장력도 아~~ 뛰어납니다.
옛날에 그 한암스님 하고 탄허스님 하고 주고받은 편지들이 있는데요.
그 편지 문투가 전부서장 문투입니다. 서장 글이 워낙 뛰어난 글이라서, 이것 천하의 선비들하고 주고받은 편지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유명한 문장가들. 그들의 그 어떤 문장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대혜스님의 그런 문장이기 때문에, 옛날스님들은 이 서장을 많이 읽었습니다. 초발심자경문을 3000독해서 문리 안 나면, 치문을 3000독하고, 치문에서 문리가 안 나면 서장을 다시 3000독 하라. 서장을 다 못 읽으면 진개장, 앞에 증시랑. 그것만이라도 3000독을 하라. 그런 강원에 전해진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만치 이 서장의 문장이 좋은 것입니다.
此語(차어)도 亦是臨時(역시임시)하야,
이 말도 또한 때에 다다라서, 때에 임해서.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了了常知故로 言之不可及. 이 말입니다. 이 말도 사실은 달마스님이 물으니까, 물으니까 할 수ㆍ할 수 없어서 나온 대답이지 그것도 진짜는 아니다 이런 말입니다.
被達磨拶出底消息(피달마찰출저소식)이라. 그랬습니다.
達磨가 拶出. 말하자면, 자꾸 다그쳐서, 다그쳐서 “네가 아는 것을 한 번 이야기해보라.” 라고 그렇게 해가지고서 나온 소식이다 이 말입니다.
안 그러면 그 말도 사실 맞는 말 아니거든요. 了了常知故로 言之不可及이라는 말도 100퍼센트 맞는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달마스님이 자꾸 추궁하니까 그렇게라도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구지선사하고 동자승이야기의 경우를 이끌어다가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면, 동자가 평소에, 손가락 들어서 법문이라고 하는 것을 자꾸 보아서 나중에 동자승 혼자 있을 때 사람이 왔는데, 손가락 법문을 동자승이 흉내 냈다고요. 나중에 구지화상이 와서는 그런 사실을 알고는, 동자야~~ 하고 부르니까 휙 돌아보거든요. 무엇이 불법적적 대의냐? 이렇게 하니까 동자가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착 들어 보이는 겁니다. 그래 스님이 있다가 계도를 가지고 사정없이 삭~ 손가락을 잘라버린 겁니다. 아파서 피를 흘리면서 도망가는데, 또 시자야~~ 하고 부르니까 휙 돌아보는 겁니다.
무엇이 불법적적 대의냐? 하니까 손가락을 착 드니까 손가락이 없거든요. 그 계기를 통해서 깨닫게 됐다 하는 그런 아주 참 재미있는 설화가 있잖아요.
그런 설화를 통해서 ‘아, 손가락밖에 달이 있구나.’ 또 ‘말 밖에 참다운 소식이 있구나.’그래서 손가락을 들어 보이기도하고, 할을 하기도하고, 방을 후려치기도하고 여러 가지 그런 一機一境上(일기일경상)에, 그런 법을 보이는 예들이 있는데요. 여기는 그래도 아주 선불교가 당나라ㆍ송나라로 내려오기 이전에 초기선불교기 때문에 혜가스님은 了了常知故로 言之不可及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뒷사람들은 이렇게 말 안하지요. 이런 식으로 말 안합니다. 할을 하든지 주먹을 치든지 무슨 방망이를 후려치든지,
임제스님 때까지 흘어 오면 그런 식으로 표현 됩니다. 그런 식으로 표현되지, 了了常知故로 言之不可及이다. 이런 너절한 소리,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초기는, 초기선불교는 달마스님하고 혜가스님 당시는 최소한도 이러한 설명이, 이것은 설명이거든요. 이러한 설명이 먹혀들었습니다. 그리고 달마스님도 그 소리 듣고는 그것도 아는 소식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亦非二祖實法也(역비이조실법야)어늘,
또한 二祖의 實法이 아니다 이 겁니다. 了了常知故로 言之不可及이다. 라고 ‘이것도 할 수 없이 하는 말이지, 손가락 들어 보인다. 하더라도 그 역시 할 수 없어서 보이는 모습이지 二祖의 實法은 아니다.’ 그런 말입니다.
杜撰長老輩(두찬장노배)가
旣自無所證(기자무소증)하고, 이미 자신은 증득한바가 없고, 또
便 遂旋捏合(변축선날합)하야,
이것도, 遂旋捏合 = 억지로 꿰어 맞추는 것. 억지로 꿰어 맞추는 것입니다. 맞춰서
雖敎他人歇(수교타인흘)이나,
비록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쉬게는 하나,
渠自心火熠熠(거자심화습습)하야,
그 사람은 스스로의 마음에 마음의 불이 = 心火가 熠熠해요.
속에서 보글보글 타고 있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잿불 있잖아요.
잿불이나, 짚으로 불을 떼면 겉에는 싸늘하게 식은 것 같아도, 안에는 불이 발갛게 있잖아요. 心火가 熠熠이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마음에서는, 속마음은 보글보글 끓고 있는 것이지요. 겉으로는 멀쩡하게 조용히 앉아서 좌선 하느라고 하지만, 心火가 熠熠입니다. 마음불이 바짝바짝 타고 있습니다.
晝夜가 不停(주야부정)호미, 낮으로 밤으로 멈추지 아니 하는 것이
如欠二稅百姓相似(여흠이세백성상사)로다.
봄가을로 조세를 해야 되는데, 세금을 내야 되는데, 농민들이 보리를 지으면 보리 몇 섬 갖다 줘야 되고, 벼 거두면 나락 몇 섬 갖다 바쳐야 되는데, 먹을 것이 없는데, 두 철의 그런 세금을 어떻게 낼 수 있나요? 두 철 세금을 못 내면 이 사람 마음이 보통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고, 그것마저도 버리고 도망갈 수도 없고, 그러니까 선량한 백성의 그 마음이 오죽 하겠느냐? 속에서 그냥 끓고 있는 것이지요. 잠을 못자는 것이지요. 그런 뜻을 여기서 표현한 것입니다. 마치 두 철의 세금을 내지 못한 欠. 내지 못하는 백성의 마음과 같이, 相似하도다.
백성의 마음과 같이,
그러니까 晝夜不停이며 心火熠熠입니다.
그러니까 杜撰長老 = 공부도 제대로 안 된 사람이ㆍ공부도 제대로 안 된 사람이, 자기 깨달은 점도 없고, 그리고 선지식 노릇은 해왔고, 선지식 노릇은 해왔으니까 질문을 하면 뭐라고ㆍ뭐라고 꿰어 맞출 수 밖이 없는 겁니다. 우리가 포교를 하고 있으면서도 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경우를 들고 와서 묻는 경우 많잖아요. 그래도 체면상 대답은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소견은 시원치가 않은 겁니다. 갑갑해요. 자기 자신도 갑갑해요.
‘야, 그 대답을 제대로 했는가? 어디 찾아볼 길도 없고...’ 여기 선불교에서의 상황은 그보다 훨씬 더 심하지요. 그래서
心火가 熠熠해서 晝夜不停이라. 그것이 마치 如欠二稅百姓相似.
그래도 전부 글자 넉자 씩 딱딱 맞췄습니다. 봄가을로 세금을 내지 못한 백성의 마음과 같더라. 그와 같이 불안하다 이 말이지요. ‘불안하고 안정이 안 되어있다.’ 그런 말입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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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