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집들이에 갔다가 샘이 나서 울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딱 한 번 있답니다.
남의 집들이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었어요. 부러워서...
넹? 어디 타워 팰리스 집들이 갔다 왔냐구요?ㅎㅎ
그런 부러움 아니고요, 아무튼 그 이야기 좀 들어보실래용?
내가 포천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포천이 시 승격되기 전인가? 후였나?
아무튼 내가 삼십 대 중반 쯤일 때였고, 내 근무지는 포천 읍소재지 큰 학교였는데
당시에 포천 교육청에서 마련한 교원 사택은 포천읍에서 직행 버스로 20분 정도 거리인 영중면에 있었다.
그해에 우리 학년에는 부산교대인지 진주교대인지를 졸업하고 경기도로 발령받은 경남 출신 처녀 선생님이 한 명 왔는데
그 샘은 포천 읍내에 방을 하나 얻어서 불편하게 지내다가
영중면에 새로 지어진 교원 사택에 운좋게 당첨이 되어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우리 동학년 샘들은 집들이를 빙자한 동학년 단합대회를 하려고
하루 날 잡아 퇴근 길에 삼겹살 등등을 마련하여 신이 나서 그녀의 사택으로 향했다.
이쁜 아가씨가 혼자 사는 사택은 널찍한 원룸.
천리 타향에 귀한 딸을 혼자 보내놓은 어머니가 먼 길 마다 않고 수시로 다녀가셔서
딸의 냉장고엔 온갖 김치와 맛난 반찬이 가득하였고
20대 아가씨의 감성으로 아기자기 꾸며놓은 집안 구석 구석은 너무도 예뻤다.
좋은 조건으로 안전하고 깨끗한 교원 사택에 들어오게 된 행운을 축하하며
삼겹살은 지글지글, 담소는 하하 호호, 한 순배 두 순배 잔도 오고 가고
밤 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에
버스 터미널에서 각자의 행선지로 향하는 차를 타고 떠났는데..
포천읍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많이 울었다.
버스를 타서 내릴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것 같다.
그 선생님이 너무 부러워서..
20대 중반의 아가씨가 누리는 자유, 자신만의 공간인 아늑한 그 원룸이 너무도 부러워서..
원격지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가족 부양의 의무 없이
자기 한 몸만 챙기면서 홀가분하게 미래를 설계해도 되는 그 좋은 조건이 부러워서..
처녀 가장으로 홀어머니를 부양하며 세상과 맞서 나가던,
나만의 방 한 칸을 태어난 뒤 단 한 번도 못 가져본, 그 선생님 나이 무렵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과거의 내가 불쌍해서,
그 원룸이 상징하는 그녀의 풍요와 자유,
처녀가장이던 내가 누려보지 못했던 그 자유가 부러워서 나는 자꾸만 눈물을 흘렸었다.
하늘 아래 당신들 명의의 집 한 채 갖기가 너무도 힘에 겨우셨던 우리 부모님.
나이드신 내 부모님이 어렵사리 하나 얻으신 무남독녀가 나다.
우리 세 식구는 항상 단칸 방에서 살았다.
우리 부모님은 사이도 별로 안 좋으셔서
세 식구가 함께 쓰는 방 하나엔 늘 정적이 흘렀다.
넉넉하지도 포근하지도 않은 가정 환경 속에서 나는 비교적 일찍 철이 들었고
절대자를 찾아 의지하고픈 마음에 찾아간 교회에서 삶의 큰 힘을 얻어
조용하고 소극적이던 성품까지 밝아지고 외향적으로 바뀌었고
내 딸은 나랑 달라서 싹싹하고 붙임성이 있다고, 엄마는 자랑을 하셨더랬다.
연세 많고 병약하셨던 아버지는
하나 뿐인 딸 자식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시려고 사력을 다하시다가
내가 당시 2년제이던 교대를 졸업하는 것도 못 보시고 1년 여를 병석에 계시다가 돌아가셨고
우리 아버지 생애에 처음 마련하셨던 방 두 개짜리 낡고 좁은 아파트,
그나마도 방 하나는 세를 주고 우리는 방 하나만 쓰던 그 아파트는
아버지 간병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진작에 처분되었고
내가 졸업하고 발령을 받았던 시점에서, 우리 엄마의 수중에 남은 돈은
당시 단칸방 보증금에서 그동안 졌던 빚을 갚고 남은 단돈 70만원.
그 돈을 들고 우리 두 모녀는 내 첫 발령지인 포천군 일동면으로 내려와서 또 방 한 칸을 전세로 얻었고
나는 처녀 가장으로 엄마를 부양하는 생활을 시작했더랬다..
내가 처음으로 교직 생활을 시작했던 포천 일동의 그 학교에서의 3년.
햇병아리 교사의 적은 월급으로 우리 모녀는 빠듯하지만 평안하게 살 수 있었고
처녀 가장인 나는, 천지 간에 의지할 곳이 없는 내 엄마를 두고는 혼자 시집을 갈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는 재산도 없었고 아무런 경제적 능력도 없었다.
내 남편은 그 초임지에서 만났는데
고맙게도 날 많이 좋아해줬고 내 엄마를 평생 책임질 각오로 결혼을 했다.
그리고 우리 엄마가 93세를 일기로 2019년 1월에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 불평없이 단 한 번의 생색도 내지 않고 장모님과 함께 살았다.. 살아줬다..
참..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데 그날 나는 왜 그리 그녀를 부러워하며 울었었나?
그때는 우리 막내딸은 태어나기 전, 두 딸 키우며 직장 생활 하며 정신 없던 때인데..
주부로서의 소양이 아주 부족한 내가 워킹맘으로 살며 육아도 살림도 직장 생활도 버겁고 힘들던 시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인가, 내가 입은 이 옷은 과연 내 옷이 맞나,
그런 갈등에 홀로 힘들던 시절,
나는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저 꽃답던 시절부터 내겐 삶의 짐만이 무거웠었다는 생각에
짐지고 힘겹게 가는 현재의 내가, 버겁게 짐지고 갔던 과거의 나에 대한 연민으로 그렇게 울었던 것 같다.
지금 내 세 딸들에게는 당연히 각자의 방이 있고
지금의 나는 여전히 내 방이 없다.
하지만 둘째가 멀리 나가있으니 그애가 매년 귀국하는 여름철 외에는 그 방이 내 방인 셈이다.
애가 워낙 자기 옷 자기 물건을 애지중지 하는지라 옷과 책과 모든 물건들이 다 그대로 있고 치울 수가 없어서
그 방에서 내가 쓸 수 있는 범위는 책상 하나로 국한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책상에 앉아서 방문을 닫으면, 조용한 내 공간이 된다.
거기 홀로 앉아서 책도 보고 노트북도 두들기고 음악도 듣노라면, 여기가 내 천국이지 싶다.
수틀리면 침대까지 접수해서 각방 쓸 거다. ^^
당신은 넓은 안방을 독차지하시구랴, 애 방은 넘보지 말아요. ^^
하긴, 온갖 여자 물건과 아이 취향의 실내 구성이 남편에겐 영 아니라서
그 방을 쓰겠다고 할 것 같지도 않다.
지상의 방 한 칸.
어렸던, 젊었던 내가 누리지 못했던 그 자유. 이제는 내 것이 된 그 자유.
힘겨운 고개도 넘고 발 시린 개울도 건너며 세월을 따라 묵묵히 걸어와
이고 지고 가던 많은 짐을 상당량 내려 놓을 수 있게 된
지금의 내 나이가 나는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지난 세월이 감사하고, 모두가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참으로 수고많으셨습니다
그시절에는 자식들 줄줄이인 시절에
무남독녀 딸하나
얼마나 애지중지였을까요
비록 넉넉치 못한 살림이라지만
내방하나 못가진 설움
부러움이 우뚝서게한 동력이되어 잘살아오셨으니
이제 옛말하며 어화둥둥이자나요
저도 지금이 차암 좋습니다
늙음 우리 나쁘지 않쥬?
우리 부모님이 늦게 만나 결혼하셨어요.
우리 아버지 연세 쉰, 우리 엄마 서른 다섯에 얻으신 딸이 저이고
그 뒤로는 더 자식을 못 낳으셨다고 합니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제게 만큼은 최선을 다하셨기에
저는 가난한 왕국의 공주로 컸어요.
젊어서는 저 좋다는 남자가 몇 명
있었기에 제가 잘난 줄 알고ㅎㅎ
우리 강선생을 한 번 모질게 뻥! 찬 뒤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을 한 번 봤는데
홀어머니의 무남독녀라는 게 맞선 보기엔 최악의 조건이란 걸 바로 알게 됐죠.
그래서 더는 선 안 보고 나 좋다는 사람에게로 유턴해서 현재까지 살고 있어요ㅎㅎ
정아님이 수없이 맞선 보셨다는 댓글을 본 기억이 나네요.
곱게 자라서 좋은 남편과 안락한 가정 꾸려오신 정아님,
정아님도 복이 많으시고 이렇게 좋은 아내를 맞으신 부군께서도 복이 크십니다. ^^
정아님 공감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1. 태어났을 무렵부터 20대 후반까지 부모님 명의로 된 집이 없었다는 거,
2. 월세방에서 다섯 명이 몸을 부대끼며 살았고 ㅠㅠ
3.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열등감에서 비롯된 잦은 부부싸움.
4. 그런 모습을 자주 접했었기에 철이 일찍 들 수밖에 없었다는 거 까지...
다 지난 일들이지만 달항아리 님의 글 때문에
잊고 있었던 어렸을 때 기억을 소환해 보는 시간이었네요.
글을 읽고 첼로 연주인 "영혼의 왈츠" 이 곡이 갑자기 떠올라 올려봅니다.
https://youtu.be/ozcZXCxyZpE?si=KDtfECB-ri-KIuhA
PLAY
첼로 곡 영혼의 왈츠, 처음 듣는 곡인데 참 좋으네요!
첼로가 인간 목소리의 음역과 가장 유사한 악기라고 하는데
단조의 멜로디가 왈츠의 리듬을 타고 호소력 있게 다가오네요.
제가 좋아하는 바이얼린 곡인 세르게이 트로파노프의 몰도바를 연상케 해요.
몰도바는 소프라노, 영혼의 왈츠는 앨토로 2중창을 하는 느낌?
공감의 댓글과 음악 선물까지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곡 여러 번 들어보겠습니다. ^^
제가 좋아하는 곡, 몰도바입니다. 유명한 곡이니 이미 아시겠지만 올려봅니다. ^^
https://youtu.be/Dqew6vbIsGs?si=OD7hcg1saiojt-yt
PLAY
다들 아픈사연 가슴에 안고삽니다
단지 세월이 너무 흘러서 거의다 잊어버렸고
글빨이 부족해서 차마 못쓰기 때문이겠죠
저는 요즘 글도 못쓰고 집중해서 읽지도 못하는 바보가 되었어요 음악도 못듣습니다 근근히 실내쟌차타면서 뻔뻔스럽게 내가 몇곡부릅니다
사진찍고 다니니까 덜 외롭고 재미납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맨발걷기도 쫑내고 조신하게 몸조리중입니다
언제나 건강해서 행복하세요^^
몸님 참 많은 것을 가지셨어요.
평생을 근면하게 일하시고 가정에 충실하셔서
현재의 안정된 노후, 잘 키운 자녀, 다정하게 해로하시는 배우자..
게다가 배우 뺨치는 미남이시고 재기 넘치는 글쓰기 재능에다가 노래도 잘하시고,
무엇 하나 부족함 없으세요.
남달리 감성이 풍부하신 몸님, 여기 수많은 팬들이 늘 몸님 글과 사진을 기뻐합니다.
노래도 녹음해서 들려주세요~~
언젠가 올리셨던 노래 정말 좋았거든요~~
이쁜 손녀들 얘기도 기대합니다~~^^
공감의 댓글 감사합니다!
이제는 힘들었던 지나간 시간을
자신있게 회상할 수 있으니
감사한 오늘이지요.
따님을 해외 유학시킬 정도이며
이제는 각 방을 가질 수 있게 해줄
집이 있으니..
모두 부러워할 정도의 두분의 연금도
남은 인생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기도 할터이고..ㅎ
에고, 애 유학 보낼 재력 없어요. ㅎㅎ
우리 둘째는 대학까지는 국내에서 나왔고 석사는 영국에서 했는데,
우리 나라 국립국제교육원에서 선발하는 국비 유학생 시험에 붙어서 나랏돈 받고 다녀왔어요.
학비 생활비 일체에다가 왕복 항공료까지 주더라고요.
그리고 현재 미국 박사도 학비 전액 면제에 생활비는 조교 월급 타서 써요.
부모 돈 한 푼 안 들이고 공부 중이니 감사하지요.
우리는 영국 미국 보낼 돈 없어요.
아파트도 의정부 우리 아파트 팔아봤자
서울 어지간한 동네 전세도 못 들어가요. ㅎㅎ
연금으로 노후 걱정 없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요.
서글이님, 늘 응원해주심 감사합니다! ^^
@달항아리 개인사 글에 대해 이번엔 댓글달기
솔직히 힘들었답니다.
그래도 현실적인 이야기에
달항아리님 글에 대해 팬으로써..ㅋ
@서글이 이렇게 감사할 데가!
서글이님의 이 댓글이야말로 감동입니다.
과분하신 칭찬과 격려에 진짜 감사드려요~~^^
달항아님!!~~~ 그랬군요...
그래도 똑똑하게 공부잘해서 선생님되시고,
좋은분 만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밝고 어지신 성품이라 잘살고 계시니
더할나이 없이 행복하십니다.
글 잘읽고 갑니다.^*^
저야 별로 똑똑한 사람도 못 되고,
남편은 좋은 사람인가? ㅎㅎ
고집이 쎄기가 황소를 능가하지만 착한 사람인 것은 맞아요.
저는 어려서 친구들 집과는 좀 다른 가정 환경 때문에 좀 어두운 편이었는데
중 3 때부터 교회 다니며 많이 밝아졌어요.
행복이야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니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항상 감사하려고 애씁니다.
늘 제게 힘 실어주시는 도마소리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
아 그랬구나 무남독녀 외동딸 ㅎㅎ 어쩐지 조금 어리광 티가 보인다 했져 ㅎㅎ 얼마나 절실했으면 갖고 싶었으면 울었을까 그 눈물의 의미를 난 알아요 과정과 모양은 틀리지만
알지요 솔직한 삶의 글은 누구나의 마음에 공감을 얻지요
나도 그런 적 나도 그런 시절이 하는 우리 모두의 속 마음~ ❤~^^
ㅎㅎ 글츄? 출신 성분은 못 속여유.
저는 어렸을 때 순정만화 속에서 부잣집 못된 무남독녀 캐릭터들을 종종 봐서
난 부잣집 딸도 아니니 못됐단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했는데
힘든 상황을 버텨내는 인내심도 부족하고 사람 봐가며 부리긴 해도 어리광도 있고요,
아무래도 티가 나더라고요.
그 눈물의 의미를 아신다니 감사합니다.
삶의 온갖 질곡에서 승리하시고 잘 키운 자녀들과 평안한 노후를 보내시며 만학의 열정을 불태우시는 운선님,
그저 건강만 하시어요, 이렇게 오래 오래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
방이 다섯개나 있는
좀 있는 집에 막내로 태어나
쌀밥만 먹고 자랐지만
형제가 많은 통에
제 방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항아리님의 진솔하고
순진한 글에 공감백배에요
고구마 바구니에
계란 하나에
서로 먹겠다고
쟁탈전을 벌리며 살아와서인지
달항아리님 위 글에서
저박지가 아닌
공주의 희고 빛나는 예쁜 그릇이
보여요 ㅎㅎ
라오스 여행 마치고
바로 서울로 와서
지금은
세훈이 집인데
야들이 아직 미동이 없음
난
새참 시간인디 ㅎㅎ
ㅎㅎ 김원장님 일주일 내내 환자 보느라 얼마나 힘들겄어요.
며느님도 힘들..겠지만 그래도 시부모님 오셨는데 늦잠이라니ㅋㅋ
난 아들 없길 다행이네, 남의 며느리 얘기에 왜 이랴?
내 며늘 있으면 시집 살이 시킬 기세네ㅎㅎ
라오스 여행 즐거우셨죠?
평생을 열심히 산 댓가로 누리는 우리 성의 복이 진짜배기 복이라요.
담 행선지 터키, 거그도 잘 다녀오시구요.
아~~ 누군 좋겠다, 작은 며늘도 곧 보고^^
항상 감사드립니다! ^^
@달항아리
ㅎㅎ
막내 딸 똥꼬 냄새가 좋아 흠흠
했다는 샘님ㅡ
그 막내 딸이 딸을 낳아
친정 엄마를 닮아
흠흠 할 때까지
으짜등가 건강하소
우리 손녀의 한미! 하고 부르는 소리어ㆍ
초란만한 작은 손
깨질까
살짝 쥐던 느낌이 을매나
좋은지요
지금은 케텍스 안이요
@윤슬하여 오자마자 가시네~~ 먼 길 조심해서 잘 가세요~~
여독 푸셔야 하는데 또 가자 마자 농장 돌보셔야 하나요?
우리 성은 인자 건강만 하시면 되니까 몸 아끼소~~^^
나도 그럴게요.
에고 그 손녀 얼굴이 달리는 열차 창문에 비춰서 계속 따라 오겠네요.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11.19 09:21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11.19 14:11
세세하게 묘사하여 그려낸 모습들이
언젠가 읽었던 이전 글을 떠올립니다
거짓으로 아버지 직업을 이야기 했다는 어린 소녀의 글도 생각나네요
그러나 동료 여선생님이 누리는 것이 너무 부러워 울었다는 이야기는 의외이지만
젋었을때 누리지 못했던 자유 - 이제 마음껏 누리신다니 다행이지요
그런데 아직도 한 침대를 사용합니까?
각방 쓰세요, 하이고오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얼마나 좋은데 뭐 한닥꼬 여태 같은 침대를 쓴다니 무시라 무신 이런 일이 다있노~
ㅎㅎ 글츄, 오늘 날 이 시점에 뭔 용무가 있다고 같이 자는지 원. ㅋㅋ
그게요, 그 둘째 방 침대가 침대 아래 쪽을 비워놓고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철제 벙커 침대예요.
애가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많아서, 침대 아래 공간도 활용한다고 거기다 별별 것을 다 넣어놓고 나름 심혈을 기울여 꾸며놨어요.
그래서 갸 침대를 쓰려면 사다리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거기 몇 번 오르내렸더니 무릎이 힘들어 해요.
그래서 그림의 떡, 그냥 영감하고 한 침대 씁니다.
애가 다음에 오면 살살 꼬드겨서 갸 물건들 일부 정리하고 일반 침대로 바꿀 생각이예요.
그럼 각방 생활 시작. ^^
오래 전 제 글도 기억해주시고, 총명하신 단풍님 감사합니데이~~^^
네 인생이 다 나와 있어요. ~
ㅎㅎ 항상 스님들의 선문답 처럼 짧은 댓글 속에 여러 생각을 담으신 듯한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오늘도 다녀가심 감사합니다! ^^
읽는 동안
마음이 짠~합니다.
그간
어려움 잘 극복하시고
따듯한 가정 곱게 이끌어가시는 달항아리님..
모쪼록 오늘 저녁시간도 행복하소서...
제가 어제 오늘 바빠서 답댓글이 늦었습니다.
다들 살아온 이야기 풀어내라 하면 힘들었던 순간들이 있지요.
우리 부모님은 힘들게 사셨지만, 저 만큼은 힘써 양지 쪽에 앉히고 볕을 쬐며 자라게 해주셨어요.
세상 천지에 그 두 분을 기억하고 그리워할 사람이 저 하나인 것이 때론 기가 막히고 아직도 좀 서럽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오직, 저 하나 키워내려고 이 땅에서 사셨던 것 같아요.
늘 공감의 댓글로 저를 응원하시는 가을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
내것된 자유 ᆢ
맘속에 작지만 따스한방 만드셨네요
건강하세요 기원합니다
유진유진님 안녕하세요?
제가 어제 오늘 좀 바빠서 댓글이 늦었습니다.
제 글에 공감해주시고 제 건강을 기원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네 나이가 서로의 건강을 빌어주는 것이 최고의 덕담인 그런 연령대가 되었나봅니다.
유진유진님도 늘 건강하시어요. 저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