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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5강-1 (2013. 11. 18.)
答 劉寶學 彦修
언수, 유보학이라는 사람에게 답하는 편지를 계속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수라는 사람은 언충이라는 사람과 형제인데요. 사실은 언충이라는 사람을 교화하기 위해서 형인 언수에게 아주 장황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정법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공을 들이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는데요. 상좌 위선이라고 하는 사람을 곳곳에 보내면서 그들의 동향과, 그들의 공부 진척과, 그들의 소견, 이런 것들을 탐지해오고 또 그들이 어떤 스승의 지도를 받는가? 이것도 면밀히 조사해오고 그래서 심지어 다른 스님과 주고받은 편지까지도 베껴서, 지금 같으면 복사를 쭉~~ 해오든지 스마트폰으로 착 찍어서 가져 오든지 그러면 될 텐데, 그것을 일일이 손수 필사를 해서, 베껴서 가져오게 하는 그런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 참, 우리가 그냥 이 서장책의 내용에 관심을 갖다 보면, 그런 것을 미쳐 생각할 겨를이 없는데, 사실 공부하는 입장에서 조금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우리가 그런 것들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대혜스님은 이런 편지를 쓰시면서 그런 이야기까지는 안하지요. “한 사람을 정법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공을 들이노라.” 하면서 그 공의 내력을 낱낱이 조목조목 적는다든지, 사실 그렇게 적어도 상당히 적을만한 그런 꺼리 입니다. 그렇게 까지 공을 들이는데, 그런 이야기 안하잖아요. 전혀 없는데, 그러한 마음은 행간 속에, 그야말로 행간 속에 담겨있는 대혜스님의 간절한 교화의 정신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이 쭉~~ 나오는데요.
그 동생 언충이라는 사람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기세는 아주 등등한데, 말하자면 선불교에 대한 견해가 당시에 상당히 널리 퍼져있고 일반화 되어있는 묵조선에 젖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대혜스님께서 그러한 사실을 알고는 간화선으로 전향하도록 하려는 그런 내용들이지요. 서장은 일관해서 斥邪解顯正見(척사해현정견)이라고 삿된 견해, 소위 묵조 사선을 배척하고 간화선의 바른 견해를 드러내는 그것이 주된 종지고요. 대혜스님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도 역시 그러한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고, 우리가 앞에서 공부한 내용에도 역시 그러한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고, 그러면서 간화선은 어떻게 하는 것이 정도다. 간화선의 정도를 피력하는 것들을 우리가 사이사이에서 수 차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많은 편지들이 역시 그러한 기조로 계속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시고, 설사서장을 다 마치진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관점을 딱 세워놓고 보면 누구든지 다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서장은 그동안 번역한 책들도 많이 나와 있고요. 그 다음에 최근에 제가 번역하고 설명까지 자세 하게한 그런 책이 나왔습니다. 참고로 그런 것들도 도움이 될 줄 믿습니다.
오늘은 81쪽 상단에
彦冲은 却無許多勞攘이나 只是中得毒深이라 只管外邊亂走하야
說動說靜하며 說語說黙하며 說得說失하며 更引周易內典하야
硬差排和會하니 眞是爲他閑事長無明이로다
殊不思量一段生死公案을 未曾結絶하면 臘月三十日에
作麽生折合去리요 不可眼光欲落未落時에 且向閻家老子道호대
待我澄神定慮少時코사 却去相見이니 得麽아 當此之時하야는
縱橫無礙之說이라도 亦使不着이며 心如木石이라도 亦使不着이라
須是當人의 生死心을 破하야사 始得다
彦冲(언충)은 却無許多勞攘(각무허다노양)이나, 그랬습니다.
도리어 허다한 勞攘이 없다. 이것은 사량ㆍ진로ㆍ번뇌ㆍ망상이다. 이렇게 그냥 생각해 버리면 됩니다. 언충이라는 사람은 그런 허다한 번뇌는 없어. 그런데 只是(지시),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中得毒深(중득독심)이라. 독에 맞은 것이 아주 심하다.
독을 아주 심하데 맞았다. 그것은 뭔가 하니, 묵조선의 사상을 너무 깊이까지 익혀서 그 어떤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말입니다.
그런 것을 표현을 이렇게 했습니다. 中得毒深이라. 독에 맞은 것이 아주 깊다.
그렇지요. 우리가 사상이 한번 잘못 들든지, 소견이 한번 잘못 들든지, 인생에 대한 관점. 또는 불교에 대한 관점이 한번 제대로 들면요? 그것이 빠져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바꾸기가 참~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너무 많이 봅니다. 소위 수로현상이라고 해서 사람의 심리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생겼는가 하면, 예를 들어서 평평한 땅에 마침 비가 오면, 그 비가 내리다ㆍ내리다 나중엔 결국 그 비가 모여서 어디론가 흐르게 됩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길을 내서 비가 흘러가지요. 비올 때 우리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래요. 그런데 한 방울이 두 방울 되고, 두 방울이 세 방울 돼서 어느 방향으론가 약간 0.01미리의 차이 낮은 방향을 택해서 물길이 나기시작 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 비가 오면, 그 물길로 흘러가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더 쉽습니다. 자꾸 쉬워집니다. 왜냐? 수로현상이라.
물길이 거기로 나게 되어있습니다. 아주 얕은 물길이지만 물길이 한번 나기시작하면 계속 그 길로 물길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골짜기가 되는 겁니다. 깊은 골짜기가 되는 겁니다. 그 골짜기는 옮길 수가 없잖아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사상에 젖어든다든지, 하나의 소견으로 고착된다고 하는 것이 마치 그와 같은 현상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에서 그런 표현을 하지요. 참~ 그것 우리가 주의해야 됩니다.
그 전에 성철스님 100일 법문할 때도 그랬었고, 100일 법문은 제가 참석을 못 했지만, 그 다음 철에 또 육조단경 강의할 겨울철에 제가 참석을 했었는데요. 그 때도 역시 그랬는데, 그 때 수산스님이라고 염불을 주장하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평생 염불을 아주 열심히 하시는 스님인데요. 성철스님은 선불교를 주장을 하고, 그 스님은 염불을 주장하고 하는데 연세가 이 분이 상당히 많아요. 성철스님하고 비슷한 연배입니다. 그래서 늘 따지는 겁니다. 강의 중에 계속 따집니다. 소참법문이니까요. 소참법문 때는 이렇게 탁자를 놓고 강의하듯이 했습니다. 강의 하는 가운데 계속 따지니까 녹음도 다 되어있습니다.
“유심정토다. 아니다. 서방정토다. 유심정토다. 서방정토다.” 이것을 가지고 몇 철을 그렇게 따지는 겁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가 안 되고, 또 이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편에서도 아무리 설명을 해도 또 마찬가지입니다. “유심정토냐? 서방정토냐?” 이것을 가지고 수년을 그렇게 따지고 결국은 해결 못한 상태로 끝났습니다. 서로가 각자 자기 갈 길로 가고, 으레 그러려니 하고 그냥 그렇게 한 절에 살았는데요. 그것 참,
“서방정토냐? 유심정토냐?” 지금도 누가 자신 있게 말 할 수는 없지요. “정토, 분명히 서방에 있다.” 그것이 맞는 말이거든요. 경전에 다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또 “유심정토” 무슨 불국토라 하든지 우리마음에 있는 것이지,
마음을 떠나서 무슨 정토가 있느냐? 그래 유심정토를 또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실 큰 차이라고 보면 큰 차이인데 또 차이가 없다고 보면 차이가 없는 것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주 작은 선 하나를 서로 넘지를 못해요. 서로가 못 넘어요. 유심정토를 주장하는 사람도 서방정토를 이해 못 하고,서방정토를 주장하는 사람은 유심정토를 이해 못 하는 겁니다. 그와 같이 우리 심리가 참 아주 조심해야할 것이 그런 사상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공산주의와 또 민주주의 이런 사상적인 이념투쟁이 지금도 크게 일어나고 있지만 옛날 6ㆍ25 이전부터, 6ㆍ25가 벌어지고,
그 다음 6ㆍ25 이후 별별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제주도 4ㆍ3사건에서 부터 그 다음에 전라도로 올라와가지고 지리산문제, 또 경상도 등등해서 지금도 그 사상의 문제가 풀리지 아니한 채 내려오고 있는데, 그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처음에 어느 쪽으로 마음을 썼느냐? 거기서부터 나눠지기 시작하고 도대체가 골짜기처럼 깊이 파져서, 우리 의식 속에 깊은 골짜기처럼 깊이 파져서 그것을 넘어올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사상의 골짜기를 넘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요.
그리고 또
근래에 우리나라불교가, 교통이 아주 편리해지다 보니까 남방에 가서 불교를 공부해온 사람들이 많잖아요. 또 가서 거기 사는 사람들도 있고요. 100여 명이 넘습니다. 예를 들어서 미얀마 같은 데는 우리나라 스님들이 가서 공부하는 이들이 지금 이 순간도 100명이 넘습니다. 태국까지 다 이렇게, 남방 쪽으로 스리랑카 같은 데 까지 다 합하면 얼마가 될지 상당히 많은 숫자인데, 그들이 한국에서 불교를 실컷 공부해서 남방으로 갔다고요. 그런데 남방으로 가서 남방 불교를 익혀서 왔는데, 이것이 어떻게 된 심판인지 그 동안에 과거에 한국불교 익혔던 것은 전혀 어디 가버리고 없고, 남방불교만가지고 진짜불교라고 주장합니다. 끊임없이 주장하는 겁니다. 그야말로 입에 거품을 물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한국불교는 불교 아니다. 그것이 祖敎지, 조사의 교지, 무슨 佛敎. 부처의 가르침이냐?”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거든요.
대승경전도 인정안하고 선불교는 더욱 더 인정안하고요.
대승경전도 인정안하고 선불교도 인정 안 해요. 어느 정도로 인정 안하느냐? 제가 사람하고 도반이니까, 무슨 인연으로 옛날에 같이, -사상의 골짜기가 그렇게 무섭다는 것입니다. 같이 인도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20년쯤 전인가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한국불교를 일으키고 태국 가서 불교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돼서 같이 신도들도 데리고, 저도 같이 동참해서 인도여행을 하게 됐는데, 영축산 밑에 가서 영축산을 안 올라가는 겁니다. 거기에 두 시간 걸린다고 하면서... 두 시간 걸리니까 가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영축산에 올라가면 법화경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지요. 법화경 이야기를 하면 대승불교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지요.
상황이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런데 거기가면 자기가 소승불교만 주장하던 사람이, 대승불교 법화경을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기어이 안 올라가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영축산에 올라갈 일정은 딱 들어 있어요. “그러면 여기 주차장에 있어라. 내가 신도들 데리고 아주 빠른 걸음으로 갔다 오겠다.”
올라가 보니까 15분 걸려요. 15분 걸리는 걸 두 시간 걸린다고 신도들 못 올라가게 거짓말한 겁니다. 왕복 30분밖에 안 걸려요. 거기서 30분 있다 와도 한 시간이면 충분히 갔다 옵니다. 아마 가 본 분들은 다 알 겁니다.
영축산에 가는 것이 그 밑에 주차장에서 15분 거리입니다. 그것 뭐 계단, 완만한 계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대승불교 입에 담기 싫어서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같이 갔으니까요. 저한테 사숙입니다.
중 된지는 저 보다 조금 늦었지만, 절 집안으로 사숙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정도로 사상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아~ 정말 무서워요.
이것은 공산주의ㆍ민주주의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동안 한국불교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남방불교를 집착하는가? 한국에서는 편안하게 아무 어려움 없이 공부를 했어요. 하나도 의식 속에 남아있지가 않아요.
그런데 남방에 가서는 고생ㆍ고생하면 공부한 겁니다. 영어공부 해야지, 그 나라 태국 가서는 태국 말 배워야지, 태국 말 배워서 태국불교 익혀야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나이는 다 들어서, 30ㆍ40돼서 두 가지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또 영어 안 통하면 안 되거든요. 그럼 태국에 있으면 태국어 모르면 또 안 통한다고요.
그러니까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면서 공부 했겠습니까?
낱말 하나하나 배우면서... 그러니까 여기서 10년간 공부한 것보다 거기서 1년간 공부한 것이 가슴에 더 사무치는 겁니다. 그 만치 고생을 더 했고, 공이 더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重處偏墜(중처편추)라고, 무거운 곳에 먼저 떨어진다고, 그 만치 공을 들인 공부기 때문에, 비록 짧은 시간 공부했어도 자기의 의식 속에 그렇게 깊은 골로 남아있더라고요. 그런 것을 저는 그 스님에게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도 많이 경험했지만, 특히 제가 같이 부딪히면서 살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고, 특히 선불교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무엇을 하든지 마찬가지지요. 이렇게 의식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참~ 조심해야 되는 것이 늘 자기를 검증하고, 뒤돌아보고 스스로 좀 비판도 해보고 다른 사람의 소견도 허심탄회하게 들어보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의 이론. 교설 같은 것도 들어봐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이런 것들을 스스로 좀 점검해서 열려있는 마음으로 그렇게 불교를 접하는 것이 참 바람직하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서장 한두 장 더 배우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해요. 전번에도 우리 봤지만, 대혜스님도 내가 구업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가 구업 지어서 설사 지옥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이 소견은 바로 잡아야 되겠다. 이런 표현까지도 했고, 그런 사상의 문제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많지요. 옛날에 우리나라에 공산주의 물든 사람은 형제든 부모든 없어요. 형제도 부모도 없습니다. 사상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그런 사례들이 무수히 많지 않습니까?
中得毒深이라. 독에 맞은 것이 깊다.
只管外邊亂走(지관외변란주)하야,
다만 外邊亂走, 밖으로만 어지럽게 달려서
說動說靜(설동설정)하며, 움직임도 이야기하고 고요함도 말하며,
說語說黙(설어설묵)하며,
말하는 것도 말하고 = 논하고, 묵묵함도 이야기하며,
說得說失(설득설실)하며, 득실도 이야기해서
更引(갱인), 다시
周易內典(주역내전)하야, 주역과 내전을 이끌어서
周易은 유교 주역이고, 內典은 불교 글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역과 내전을 이끌어서
硬差排和會(경차배화회)하니, 굳게 差排하고,
차정안배라고 해서 갖다 맞추는 겁니다. 그리고 和會하는 겁니다.
주역에 이러이러한 말이 불교에 이러이러한 말 아니냐? 불교에 이러이러한 말이 우리유교의 논어에 이러이러한 말 아니냐? 이런 식으로 갖다가 맞추는 겁니다. 差排和會라고 하는 것은 갖다 맞춘다.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어쭙잖은 신도님들 만나보면 한참 이야기 잘 나가다가, “아이 뭐, 불교나 기독교나 다 종교는 그게 그것 아닙니까?” 아~ 이런 소리 들을 때가 간혹 있는데요. 들을 때 마다 참~ 난처합니다. “아, 불교나 기독교나 종교는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닙니까?” 이러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 경험 많을 겁니다.
평생 몸 바쳐 공부한 것을 갖다가 그렇게 비빔밥을 만들어버리니 참~ 그것 설명해줄 수도 없고, 간단하게 설명한다고 그 사람이 납득 하나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납득이 될 리가 없습니다. 한 두 시간 설명해서 납득이 될 리가 없다고요. 어째 기독교하고 불교하고 그게 그겁니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거고...
硬差排和會하니, 불교하고 기독교하고를 그렇게 한다 이 말이지요.
眞是爲他 閑事長無明(진시위타한사장무명)이로다.
참으로 그 사람이야말로 부질없는 일로 = 閑事. 부질없는 일로 무명만 기르는 도다. 무명만 키우는 도다. 참 되도 않는 짓이다 이 말입니다.
殊不思量(수불사량),
그러면서도 자못 생각하지 않는구나. 저 밑에다가 새깁니다.
一段生死公案(일단생사공안)을
未曾結絶(미증결절)하면, 일찍이 結絶 = 맺어서 끊지를 못할 것 갚으면,
生死公案. 하는 것은 뭡니까? 바로 그야말로
動靜一如ㆍ夢中一如ㆍ寤寐一如ㆍ生死一如까지 통과하고 그 다음에,
爆地一破(폭지일파)ㆍ廓徹大悟(확철대오). 이렇게 했을 때, 結絶이 되는 겁니다. 맺어서 끊는다. 이 말입니다. 그것을, 공안을 깨닫지 못할 것 같으면,
臘月三十日(납월삼십일)에
作麽生 折合去(자마생절합거)리요?
折合去하는지를 사량하지 못하는 도다. 생각하지 않는 도다.
臘月三十日 = 죽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죽는 마당에 이르러서 作麽生.
어떻게 맞아가겠는가? 예를 들어서 1미터 된 나무를 딱 중간에 꺾으면,
50센티ㆍ50센티처럼 길이가 딱 맞도록, 그처럼 생사문제. 그 다음 내 공부문제. 깨달음 문제. 이것이 착 맞아떨어져야 된다는 것이지요. 이 말이 표현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도다. 생각하지 않는 도다.
不可眼光欲落未落時(불가안광욕락미락시)에,
가히 眼光이, 눈빛이, 사람 죽을 때에 눈빛부터 간다대요.
눈빛이 떨어질락 말락 할 때에
且向閻家老子道(차향염가노자도)호대,
또한 염라대왕을 향해서 말하되,
待我澄神定慮少時(대아징신정려소시)코사,
내가 정신을 좀 차리고 = 澄神. 또 생각을 안정시킬 잠간 동안, 그렇게 하기를 기다리게 하고서 却去相見(각거상견)이니, 서로 가서 보겠다. 라고 할 수도 없다 이 말입니다. 염라대왕이 왔는데 그것이 되겠습니까?
죽음이 임박해왔는데, 바로 오늘내로 죽는데, “아이 죽음이여, 조금 기다리시오. 내가 정신 좀 차리고, 그동안 내가 게으르고 세상사에 골몰해서 공부를 제대로 못했는데, 단 한 달이라도 공부 좀 합시다.” 공부 좀 합시다. 해서 죽음의 신보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得麽(득마)아? 그것이 되겠는가?
안 되지요. 정신없는데 될 턱이 없지요.
當此之時(당차지시)하야는, 이러한 때를 당해서는
縱橫無礙之說(종횡무애지설)이라도,
종횡으로 걸림 없는 설명을 한다하더라도
亦使不着(역사불착)이며, 또한 사용할 수 없으며,
안 돼요. 아무리 논리가 뛰어나고 설법을 잘 한다하더라도 또한 그것이 아무 쓸 데가 없다 이 말입니다. 돈도 쓸 데가 없고, 무슨 지식도 쓸 데가 없고, 명예도 쓸 데가 없고 亦使不着. 또한 사용할 수가 없다.
心如木石(심여목석)이라도, 마음이 목석과 같다하더라도
亦使不着이라. 또한 쓸 수가 없다.
須是當人(수시당인)의 生死心(생사심)을 破(파)하야사,
모름지기 當人. 당사자가 생사 심을 깨뜨려야 된다.
이것은 그야말로 寤寐一如를 넘고, 生死一如를 넘어서 廓徹大悟를 해서 생사의 마음이 깨진 사람이라야 始得(시득)다. 비로소 된다 말입니다.
선불교는 이것이 본색입니다. 선불교의 본 모습은 바로 이러한 것이지요.
그런데 참, 이러한 선불교가 정말 위대하고 고준하고 뛰어난 것이긴 한데요. 그 어떤 線이, 우리가 이르러가야 할 선이 이와 같이 높습니다.
若生死心을 破하면 更說甚麽澄神定慮며 更說甚麽縱橫放蕩이며
更說甚麽內典外典이리요 一了一切了하며 一悟一切悟하며
一證一切證호미 如斬一結絲에 一斬一時斷이라
證無邊法門도 亦然하야 更無次第리니
左右기 旣悟狗子無佛性話하니 還得如此也未아 若未得如此인댄
直須到恁麽田地라사 始得다
若已到恁麽田地인댄 當以此法門으로
興起大悲心하야 於逆順境中에 和泥合水하야
↑5강-1
↓5강-2
不惜身命하며 不怕口業하고 拯拔一切하야 以報佛恩이니
方是大丈夫의 所爲라 若不如是면 無有是處니라
彦冲이 引孔子稱易之爲道也屢遷하야
和會佛書中에 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 爲一貫이라하며
又引寂然不動을 與土木無殊라하니 此尤可笑也로다 向渠道하노라
欲得不招無間業인댄 莫謗如來正法輪이라
若生死心(약생사심)을 破하면,
만약 생사 심을 깨뜨릴 것 같으면,
更說甚麽澄神定慮(갱설삼마징신정려)며,
생사 심이 깨졌다면 다시 무슨 ‘정신을 맑혀야 되겠다.’
또 定慮 = 생각을 안정해야 되겠다.
更說甚麽 縱橫放蕩(종횡방탕)이며,
또 무슨 縱橫ㆍ放蕩. 종으로 횡으로 그냥 온갖 이론을 다 갖다 대면서 자유자재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縱橫ㆍ放蕩을 말할 것이며, 澄神ㆍ定慮를 설할 것이며, 更說甚麽 內典外典(내전외전)이리요.
다시 무슨 內典ㆍ外典을 설 하리요. 주역이니 화엄경이니 이런 것, 이끌어다가 이야기할 그런 상황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一了一切了(일요일체료)하며, 한번 요달함에 일체를 요달하고,
一悟一切悟(일오일체오)하며, 한번 깨달음에 일체를 깨달으며,
一證一切證(일증일체증)호미, 한번 증득함에 일체를 증득한 것이,
了 = 悟 = 證. ←똑 같은 뜻입니다. 똑 같은 뜻인데, 문장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까 그 깨달음에 대한 표현을 이렇게 여러 가지 글자를 써서 표현한 것이지요.
如斬一結絲(여참일결사)에, 마치 한 묶음의 실을 자름에
一斬에 一時斷(일참일시단)이라. 한번 자름에 일시에 잘라진다.
그렇지요. 한 묶음 실이, 예를 들어서 한 500가닥이 있다손 치더라도 칼로 한번 탁 자르면 500가닥이 동시에 잘라지지, 한 가닥ㆍ한 가닥 자르는 것이 아니라고요. 선불교의 해결 방법은, 선불교의 생사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한번 제대로 팍 깨달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한꺼번에 다~, 일체가 다~ 해결 된다 그렇지요.
證無邊法門(증무변법문)도 亦然(역연)하야,
無邊法門. 가없는 법문을 증득함도 또한 그러해서
更無次第(갱무차제)리니, 다시는 더 이상 次第가 없음이니,
左右가, 그대가, 이 사람은 유보학이고, 사실은 이 편지 내용을 들으라고 하는 사람은 동생, 언충이지요. 그 사람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旣悟狗子無佛性話(기오구자무불성화)하니,
이 사람은 이미 狗子無佛性화두를 깨달았으니
還得如此也未(환득여차야미)아? 또한 이러한 것을 얻는가? 마는가?
이러한 것을 이해하겠지요? 이런 말입니다.
若未得如此(약미득여차)인댄→ 여찬댄, 만약 이와 같음을 얻지 못했다면
直須到恁麽田地(직수도임마전지)라사, 바로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야
始得다. 비로소 된다 말입니다.
若已到恁麽田地(약이도임마전지)인댄→ 전진댄,
만약 이미 이러한 경지에 이미 이르렀다면
當以此法門(당이차법문)으로,
이 법문으로써, 내가 설명한 이 법문으로써
興起大悲心(흥기대비심)하야, 대비심을 興起해서, 일으켜서
於逆順境中(어역순경중)에 和泥合水(화니합수)하야,
이것이 그 말입니다. 대혜스님도 정법으로 이끌려고 하고, 또 당신도 이미 깨달은 사람이니까 어떻게 하더라도 당신동생을 큰 자비심으로 우리가 이끌어서 그 사람을 제도하도록 같이 노력합시다. 하는 그런 아주 간절한 마음입니다.
대혜스님이 대승적인 자비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보면 아주 당신 분야에는 참~~ 뛰어난 분입니다. 당신 분야에는 너무 뛰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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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