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만에 재회한 초등학교 친구
내 고향 전주는 사계절이 아름다운 도시였다. 봄이면 분홍빛 진달래꽃이 산천에 피어오르고, 가을이면 울긋불긋 단풍이 시내를 운치 있게 물들였다. 4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 날, 나는 홀로 뒷동산에 올랐다.
뒷동산은 사방이 진달래꽃 천지였다. 꽃들에 둘러싸여 향기도 맡고, 꽃을 따서 입에 넣으며 봄놀이를 즐기고 있던 내 눈 앞에, 이상한 풍경이 펼쳐졌다. 문득 전주 시내를 내려다보았는데 온통 새하얀 한복을 입은 대략 1만 여명의 사람들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면서 전주 시내를 뛰어다니는 게 아닌가. “방금 내가 본 게 뭐였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전주의 풍경도 달랐다. 1950년대 후반의 전주는 인구 14만 명의 소도시였지만, 내가 본 전주는 옛날 도시였다. 먼 훗날이 되어서야 그날 내가 본 풍경이 1894년 5월 31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할 당시의 전주였음을 알게 되었고, 왜 우리나라 사람을 백의민족이라 하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하얀 한복을 마치 군복처럼 입고 손에 제각각의 무기와 연장을 들고서 전주성을 향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진격했다. 전주성 함락은 동학농민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이자 최후의 승리였다.
열 살 아이의 눈으로 본 60여 년 전 전주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제야 왜 내가 다니던 ‘전주국민학교’의 옛날 이름이 ‘상생국민학교’였는지 알게 되었다. ‘모두 같이 잘 살자’는 의미의 ‘상생(相生)’이야말로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내가 남들과 다른 영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었다. 모악산 근방 친척집에 놀러가게 되었다. 그곳은 강증산 선생과도 인연이 많았고, 진묵 스님이 계셨던 절과도 가까운 장소였다.
저녁을 먹고 동네를 산책하고 있던 나는 저수지 근방 감나무 근처에서 남녀가 함께 앉아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냥 지나칠 법도 했는데, 남녀의 복장이 눈에 띄었다. 남자는 초립을 쓴 양반 소년이었고, 여자는 나이가 좀 있는 미천한 집안 출신의 규수 같았다. ‘1950년대에도 저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아직도 있어?’
그런데 한동안 손을 잡고 있던 남녀는 갑자기 무엇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반 자살을 하는 게 아닌가.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놀랐겠지만, 직감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전혀 놀라지 않고 마치 영화를 보듯 남녀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친척집으로 돌아온 나는 고모부에게 “저수지에 있는 감나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러자 고모부는 “120년 전 쯤에 일인가.... 생원집 아들인 남자가 그 집 마름노릇을 하던 상놈의 여식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지. 생원집에서 아들을 다른 규수와 강제로 결혼시키려고 하자, 둘이 도망을 치다가 그만 감나무에서 같이 자살을 했어. 그 뒤부터 감나무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해서 감나무를 베려고 했지만 결국 베지 못했어.” 그 감나무가 사라진 것은 댐 공사로 마을 전체가 수몰되면서였다. 남녀의 한이 서린 감나무도 자연스럽게 수몰됐지만 아직도 강한 음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금도 전주초등학교 5학년 3반 시절 친구들과 재회한 날을 잊을 수 없다. 당시 같은 반 친구 C는 반장이었던 나를 무척 괴롭혔다. 약간의 소아마비 증상이 있었지만 반에서 1,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다. C는 매일 나를 때렸지만 나는 소아마비인 친구를 때릴 수 없어 맞고만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자, 친구들이 전주역에서 나를 전송해주었다. 그때 나는 교표를 떼어 C에게 주면서 “우리, 학교를 빛내는 사람이 되어서 꼭 다시 만나자!”라고 말하고 기차에 올라탔다.
50년이 흐른 어느 날, J대학교 교수가 된 C와 극적으로 재회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초등학교 때 나를 괴롭힌 속내를 털어 놓았다. “처음부터 너를 좋아했지만 반 친구들이 다 너를 좋아하는 바람에 어떻게 하면 너와 친해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네가 소아마비인 나를 때리면 친구들이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고 너를 때리기 시작했는데, 나보다 키도 크고 싸움도 잘 하는 네가 엉엉 울기만 하고 나를 때리지 않는 거야. 그래서 작전은 실패했지.”
나는 대학로 후암선원에서 열리는 차를 사랑하는 모임인 ‘다사모’에 C를 초대한 뒤, 이미 영가가 된 5학년 3반 친구들까지 초혼하였다. 한 12명 정도가 모이자 그때부터 반가운 동창회가 열렸다. “귀신이 되니까 귀신처럼 왔구나!” “너는 어디서 죽었어?” “나는 월남전에서 죽었어.” “나는 교통사고로 죽었지.” “난 교회 다니는 사람인데 여기에 와도 되니?” 그야말로 산자와 죽은 자가 함께 하는 잊을 수 없는 멋진 초등학교 동창회였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전주의 풍경이 아련히 떠오른다. 동학의 정신이 살아있는 상생의 도시, 봄이 되면 아름다운 진달래꽃이 피어나는 도시, 그리운 전주초등학교 친구들과의 추억이 곳곳에 남아있는 내 고향 전주를 꼭 다시 방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