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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5강-2 (2013. 11. 18.)
答 劉寶學 彦修
答 劉通判 彦冲(一)
그래서 逆順境中에 和泥合水하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그 동생하고 이런저런 세상적인ㆍ정치적인 그런 등등 문제들이 많을 것 아니냐?
그렇지만 그 사람하고 진흙과 화하고 물과 합하듯이 그렇게 해서
不惜身命(불석신명)하며, 신명을 아끼지 아니 말고,
不怕口業(불파구업)하고, 구업도 두려워하지 말라.
그 사람 하나 제도하기 위한 것이지, 어디 동생이 미워서 그러냐? 이미 증오심은 다 끝난 자리다. 뭐 친척이라고 해서 곱고, 남이라고 해서 밉고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상대가 누가 됐든지 간에, 어떻게 하더라도 구업 아끼지 말고, 身命도 아끼지 말고, 구업 두려워하지 말고,
拯拔一切(증발일체)하야, 일체 중생들을 拯拔해서,
뽑아내어서, 사저에 빠져있는데 그 사람을 건져내어서,
以報佛恩(이보불은)이니, 부처님은혜를 갚아야할 것이니,
方是大丈夫(방시대장부)의 所爲(소위)라.
바야흐로 그 쯤 돼야 대장부가 할 바다 말입니다.
若不如是(약불여시)면 無有是處(무유시처)니라.
만약 이와 같이 못할 것 같으면 옳지 못하다. 그랬습니다. 대혜스님이 이 분야에 있어서는 당신의 평생 사업인 간화선 선양. 간화선 선양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렇게 아주 발을 벗고 나서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근래에 보도를 많이 보았겠습니다만, 어떤 스님은 저~ 기 캄보디아등등, 우물을 2000개를, 10년 동안에 우물을 2000개를 파줬잖아요.
그래서 크게 신문에도 나고 거기서 큰 행사도 하고요. 그래서 불교계에 아주 얼굴을 환하게 하는, 그리고 뭔가 다른 종교와 연관시켜서 생각할 때 아주 떳떳한 그런 어떤 자랑스런 모습을 보였는데요. 어느 분야든지 자기가 하는 분야에 그렇게 골몰하고, 그렇게 마음을 아주 많이 쓰고, 자기 자신을 혼신을 다해서 투입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참 필요하지요.
이 대혜스님은 간화선 선양에 그렇게 했고, 어떤 스님은 우물 파는데 그렇게 하고요.
사석에서도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 우리나라에 그런 자선사업을 아주 잘하는 스님이 있지요. 그 스님은 “어느 지역ㆍ어느 나라ㆍ어느 민족이든지 간에, 우리가 그것 분별하지 말고 기본적으로 飢寒(기한)은 퇴치해야 된다. 굶어 죽는 일은 없어야 되지 않느냐?” 그래서 열심히 그런 일을 하고, 그 다음에 문맹퇴치ㆍ기아퇴치, “최소한도 자기나라 글은 읽을 수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래서 곳곳에 그 나라에 다니면서 초등학교 지어주고, 그 다음에 질병퇴치, 기본적인 질병, 전염병 같은 것, 열악한 환경 때문에 병고에 시달리는 그런 질병퇴치 운동. 세 가지 운동을 다 아주 확실하게 그렇게 세워서 열심히 뛰는 사람이 있잖아요.
참~ 아주 훌륭한 스님들이 있습니다. 그런 보살행이 그것이 진짜불교입니다. 기아퇴치ㆍ문맹퇴치ㆍ질병퇴치. 그 세 가지 일이 제일 기본적인 것 아닙니까? 첫째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굶지는 않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 기본적인 병고는 없어야 된다고요. 뭐 특수한 병이야 어쩔 수 없지만요.
그 다음에 자기나라 글은 읽을 줄 알아야 됩니다. 참~ 그것이 우리나라 뿐 만이 아니라, 북한이 됐던지ㆍ저~ 기 인도가 됐던지ㆍ네팔이 됐던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그런 혜택을 우리가 주면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운동. 이것이 진짜불교 같습니다. 이 대혜스님은 또 그 나름의...
이런 스님이 다른 어떤 그런 일에 보살행을 펴기를 했다면 누구 못지않게 크게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오로지 간화선을 선양하는데 힘을 쏟았고, 그 마음이, 그 아주 간화선에 쏟은 공력이 오늘 이 순간까지 미친 겁니다. 이렇게 마음을 아주 독하게 먹었기 때문에 90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지금까지 흘러내려온 것 아닙니까? 아~, 대단한 것이지요.
彦冲이 引孔子稱 易之爲道也屢遷(인공자칭역지위도야루천)하야,
언충이라는 사람이 공자가 말한 易之爲道也屢遷. 주역이 도 라는 것은,
주역의 도는 뭐냐? 屢遷이다.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이다. 라고 일컫는 것을 이끌어서’ 이런 말입니다. 주역은, 주나라 易이라는 뜻이지만 易이 뭡니까? 바뀔 역자 아닙니까? 전부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변천하고 바뀐다.
끊임없이 바뀌어 가잖아요. 우리 세포도 가만히 있는 것 같지요? 천만에요. 무수한 숫자가 1초에도 얼마나 많은 세포가 바뀌어 가는지 몰라요.
우리 육신만 그렇습니까?
지금 여기 등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자주 오니까 계속 켜져 있는 것 같지요? 천만에요. 저것도 끊임없이 오는 겁니다. 1초에 수 10번ㆍ수 100번 오는 겁니다. 오고 꺼지고ㆍ오고 꺼지고ㆍ오고 꺼지고, 그것이 우리 육안이 한계가 있으니까요. 영화 필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필름을 보면 전부 잘라져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쭉~~ 연결해서 보니까 우리 육안이 그것을 보는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이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이치가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주역이라는 것은 참~~, 그런 것을 파악하는 데는 아주 상당히 높은 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주역의 도라고 하는 것은 屢遷이다. 자주 옮겨 다니는 것. 易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바뀔 易자니까요.
그 屢遷이라고 하는 도를, 주역의 도를 이끌어다가
和會佛書中(화회불서중)에,
佛書가운데다가 和會를 시켰는데, 뭐하고 和會시켰느냐?
應無所住而生其心(응무소주이생기심)으로
응무소주이생기심하고 和會시켜서
爲一貫(위일관)이라하며, 一貫을 삼는다. ‘하나로 꿰뚫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應無所住而生其心,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라고 하는 것과 끊임없이 흘러간다. 얼른 보면 똑 같은 것 같지요. 얼른 보면 똑 같잖아요. 무한히 변천하고, 우리마음도 한 순간도 그냥 안 있고요.
보통 상식적으로 사실은 이 사람 잘 갖다 맞춘 겁니다. 상식적으로는 和會를 잘 시킨 겁니다. 그런데 깨달은 입장에서, 대혜스님 입장에서 보면 엉터리다 하는 것이지요. 결론은 그렇습니다.
又引寂然不動(우인적연부동)을,
또 寂然不動을 이끌어서, 寂然히 움직이지 아니 하는 것을 이끌어서
與土木無殊(여토목무수)라하니, 토목하고 다름이 없다. 라고 하니,
此尤可笑也(차우가소야)로다. 이 또한 더욱 가소롭다.
向渠道(향거도)하노라. 저 사람을 향해서 내가 말한다. 말입니다.
언충이를 향해서 내가 말한다.
欲得不招無間業(욕득불초무간업)인댄
莫謗如來正法輪(막방여래정법륜)이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영가 증도가의 한 구절 아닙니까? 증도가하고 신심명은 기본적으로 다 외우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선시의 최고봉 이라고 하는데요.
거기다가 대승찬까지하면 3대 선시를 꼽습니다. 대승찬ㆍ증도가ㆍ신심명.
하~~ 대승찬도 고준해요. 높습니다.
높기로 말하면 그것이 최고로 높아요. 문자가 즉시 도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슨 不立文字라고요? 문자가 즉시 도다. 이정도 수준입니다.
대승찬에는 그렇게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대승찬ㆍ증도가ㆍ신심명을 3대 선시라고 그렇게 치는데 이런 것들이 나오면 아~ 그냥, 증도가 글이,
이런 정도로 익숙하게 알아야 됩니다. 옛날 선방에서 도량 석 같은 것 할 때, 증도가 가지고 으레 하고 신심명도 으레 하고 그랬었습니다.
欲得不招無間業인댄, 무간지옥에 가는 업을 부르지 않고자 한다면,
여래의 정법인연을 비방하지 말라. 증도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랬으니 바로 이 말은 언충이 보고 하는 소리지요.
故로 經에 云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라하시니
謂此廣大寂滅妙心은 不可以色見聲求라
應無所住는 謂此心이 無實體也요 而生其心은 謂此心이
非離眞而立處라 立處卽眞也니라 孔子稱易之爲道也屢遷은
非謂此也라 屢者는 荐也요 遷者는 革也라 吉凶悔悋이
生乎動하나니 屢遷之旨는 返常合道也어늘
如何與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 合得成一塊리요
彦冲이 非但不識佛意라 亦不識孔子意로다.
故로 經에 云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라하시니,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낸다. 라고 했으니
謂此廣大寂滅妙心(위차광대적멸묘심)은,
이를테면 이 광대하고 적멸한 미묘한 마음은
不可以色見聲求(불가이색견성구)라.
사물을 보고, 色을 보고 소리로써 구하는 것이 아니다.
應無所住는 이를테면
謂此心(위차심)이, 이 마음이
無實體也(무실체야)요. 실체가 없다는 뜻이고, 應無所住라는 것은요.
우리가 금강경 가지고 흔히 이야기를 하는데, 대혜스님의 금강경 한 구절 해설입니다. 비록 적은 구절이지만 눈여겨 볼 필요가 있지요. 無實體也요.
而生其心은 이를테면 謂此心이
非離眞而立處(비이진이입처)라. 진리를.
떠나지 아니한 채 서있는 곳이다.
진리 그 자리에 서있는 곳이다. 이 말입니다. 而生其心, 그 마음을 낸다. 라고 하는 것은요. 말하자면 바로 立處皆眞(입처개진). 여기는
立處卽眞也(입처즉진야)니라. 그랬잖아요.
隨處作主(수처작주) 立處皆眞. 유명한, 참~ 다이아몬드와 같은 말.
임제록에서 隨處作主立處皆眞. 여기는 立處卽眞 그랬습니다.
卽眞이나 皆眞이나 같지요. 어디 있든지 항상 진리로써, 또는 진심으로써 우리는 전부 망심 망상으로 생활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항상 진심으로써 삶이 이어져야 된다. 而生其心은 그런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마음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망령된 마음도 끊임없이 흘러가긴 흘러가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孔子稱易之爲道也屢遷(공자칭역지위도야루천)은,
공자가 일컬은 주역의 도 됨이 屢遷이다. 자주 옮긴다. 라고 하는 것은
非謂此也(비위차야)라.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입니다.
屢者(루자)는 荐也(천야)요. 거듭한다는 뜻입니다. 거듭 荐자입니다
遷者는 革也(혁야)라.
옮길 遷자는 고칠 革자다. 거듭거듭 고치고, 거듭거듭 바뀌어 간다. 세포가 끊임없이 바뀌어 가고, 저~ 형광등불이 끊임없이 소멸하고 끊임없이 오듯이, 물도 그렇게 흐르고 하듯이
吉凶悔悋(길흉회린)이 生乎動(생호동)하나니,
吉ㆍ凶ㆍ悔ㆍ悋, 이것 전부 주역의 표현입니다. 길하고 흉하고 뉘우치고 아낀다. 吉凶悔悋하는 것이 生乎動. 움직이는 데서 난다.
屢遷之旨(루천지지)는 返常合道也(반상합도야)어늘,
屢遷의 뜻은 常을 돌이켜서 도에 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생활.
常은 평상도리입니다. 평상도리를 돌이켜서 말하자면 도에 합하는 것이거늘,
如何與應無所住而生其心(여하여응무소주이생기심)으로,
어찌 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써 合得成一塊(합득성일괴)리요?
합해서 한 덩어리를 만드느냐? 말입니다.
彦冲이
非但不識佛意(비단불식불의)라,
비단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亦不識孔子意(역불식공자의)로다.
또한 공자의 뜻도 알지 못하는 도다. 이렇게 아주 사정없이 그렇게 깝니다.
이것 언충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左右가 於孔子之敎에 出沒을 如游園觀하며 又於吾敎에
深入閫域이라 山野의 如此杜撰이 還是也無아
故로 圭峯이 云元亨利貞은 乾之德也니 始於一氣하고 常樂我淨은
佛之德也니 本乎一心이라 專一氣而致柔하고 修一心而成道라하니
此老의 如此和會라사 始於儒釋二敎에 無偏枯하며 無遺恨이어늘
彦冲이 以應無所住而生其心이 與易之屢遷大旨로 同貫은
未敢相許로니 若依彦冲差排인댄 則孔子與釋迦老子를
殺着買草鞵하야사 始得다
何故오 一人은 屢遷하고 一人은 無所住일새니라
想讀至此에 必絶倒也리라.
左右는 於孔子之敎(어공자지교)에, 그대는 공자의 敎에서
出沒(출몰)을 如游園觀(여유원관)하며, 공자의 敎에서 出沒하기를
마치 뒷동산에 들락날락 하듯이 한다 이 말입니다. 공원에서 놀듯이 그렇게 노는 정도로 너무 익숙한 경우 아니냐? 이 말입니다.
又於吾敎(우어오교)에, 또 그리고 우리불교에 있어서도
深入閫域(심입곤역)이라. 깊이 閫域에 들어 왔어, 저~ 기 방안에 까지 쑥 들어 왔다. 이것이 문지방 閫자지요. 방안에 까지, 내실에 들어 왔다. 이 말입니다.
山野(산야)의 如此杜撰(여차두찬)이 還是也無(환시야무)아?
山野 = 내가 이와 같이 부정하고, 막을 杜자. 당신 동생의 주장을 부정하고, 내 소리가 맞다고 찬양하는 것. 이것이 또한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정말 아주 능수능란하고 자유자재하고 그야말로 莊子(장자)에 백정이 칼을 쓰듯이 정말 아주 거침없이 쓰는 그런 경우입니다.
莊子에 백정이 칼을 가지고 하도 고기를 잘 잡고, 그 당시 유행하는 음악곡조에도 맞고, 춤추는 것이 그 당시 무용에도 맞고, 하도 잘해서 당시 임금님이 가서 넋을 잃고 쳐다보다가, “당신 어찌하여 그렇게도 고기를 잘 베고 잘 잡습니까? 그리고도 칼이 성하냐?” 고 그러니까,
“저는 이 칼을 갈아서 새로 쓴지 19년이나 됐어요. 하루에 소를 한 마리 이 상씩 잡아요. 그런데 19년 전에 간 칼이지만, 지금 봐도 금방 숫돌에 갈은 것 같이 날이 퍼렇게 서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냐?ㆍ어째서 그럴 수 있느냐?”
“뼈를 가르는 것 같지만, 저는 뼈는 절대 건들지 않고, 살을 자르는 것 같지만 살은 절대 건들지 않습니다. 내 눈은 뼈와 뼈 사이에 전부 엄청난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으로만 왔다 갔다 하고, 살과 살 사이의 너무나도 큰 공간이 있어서, 공간으로만 왔다 갔다 하니까 나중에 고기가 나눠져 있고 뼈가 나눠져 있어서 칼날이 다칠 까닭이 없어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 莊子도 대단한 글입니다.
탄허스님은 노자 장자를 그냥 보통 3000독씩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데에도 아주 상당한도가 있거든요. 19년이라는 숫자도 상징적인이야기고요. 소를 잡는데 칼을 놀린다고 하는 것은 도가 있는 사람은 세상에 살되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로 하나도 내 마음 다치지 아니하고, 우리는 처처에 마음 다치지요. 처처에 마음 다칩니다. 뭐 일일이 그냥 마음 다치는 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도가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상황 때문에 절대 마음 다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이 대혜스님이 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이 마치 그와 같네요.
故로
圭峯(규봉)이 云, 규봉스님이 말하기를, 이렇게 했습니다.
元亨利貞(원형이정)은 乾之德也(건지덕야)니
始於一氣(시어일기)하고, 이것이 원각경 대 소에 있는 글입니다.
元亨利貞. 이것은 주역의 말입니다. 주역의 개사에 있는 말인데요.
乾之德也, 하늘의 덕이다.
始於一氣하고, 한 氣. 한 기운에서 비롯했고, 常樂我淨(상락아정)은
佛之德也(불지덕야)니, 부처님의 덕이니
本乎一心(본호일심)이라. 한 마음을 근본으로 했다. 야~ 글이 근사하잖아요.
專一氣而致柔(전일기이치유)하고,
한 기운을 온전히 해서ㆍ한 기운을 오로지 해서 부드러움을 이루고,
修一心而成道(수일심이성도)라하니,
한 마음을 잘 닦아서 도를 이룬다. 이렇게 원각경 소에서는 그렇게 썼거든요. 서문이지요. 원각경 서문에...
此老(차노)의 如此和會(여차화회)라사,
이 늙은이의 이와 같은 和會라야
始於儒釋二敎(시어유석이교)에, 비로소 유교와 불교, 두 종교에
無偏枯(무편고)하며, 偏枯 = 치우친 일이 없으며,
無遺恨(무유한)이어늘. 빠뜨린 한이 없다.
치우치면 빠짝 마르거든요. 그래서 마를 枯자를 썼고,
遺恨이라고 하는 것은 뭘 이렇게 이론을, 또는 생각을 빠뜨리면 거기는 한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遺恨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빠뜨린 한이 없다. 규봉스님처럼 유교이야기하고 불교이야기하려면 이쯤 배대를 했어야, 배대라고 그러지요? 이렇게 배대를 했어야 근사하지 않느냐? 그런 말입니다.
彦冲이 以應無所住而生其心이
與 易之屢遷大旨(여역지루천대지)로, 주역의 屢遷의 큰 뜻으로 더불어
同貫(동관)은, 같이 꿴 것은
未敢相許(미감상허)로니,
감히 서로 허락하지 못하겠다. 나는 죽어도 그것은 인정 못해.
若依彦冲差排(약의언충차배)인댄,
만약 언충의 差排를 의지할진댄, 언충의 배대한 것을 의지한다면
則孔子與 釋迦老子(즉공자여석가노자)를, 공자하고 석가노자를
殺着買草鞵(쇄착매초혜)하야사, 짚신을 사서 신겨야 始得다. 될 것이다.
何故오? 왜냐?
一人(일인)은 屢遷하고, 한 사람은, 공자는 자주 옮겨 다니고
一人은 無所住(무소주)일새니라.
한 사람은 머무는 바 없이 계속 돌아다니기만 하니까요.
하여튼 글이 참~~ 어떻게 보면 조금 장난기가 좀 넘쳐나지만, 그야말로 참 끝내주는 표현 아닙니까?
想讀至此(상독지차)에, 아마도 읽어서 여기에 이를 것 같으면
必絶倒也(필절도야)리라. 아마 포복절도할 것이다.
반드시 포복절도할 것이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이쯤 읽고 아마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다.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참~~ 아주 대혜스님 문장력 거침없지요ㆍ거침없어요.
이것 참, 어록이 이래서 좋은 겁니다. 왜냐? 이런 이들은 온갖 경전과 어록과 과거 자기 이전의 그 내용들을 환하게 꿰뚫고 있기 때문에 사정없이 갖다가 인용해서 이렇게 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제대로 우리가 소화하려면 과거 그런 것을 다 알아야 됩니다. 여기 元亨利貞은 乾之德也했는데, 元亨利貞 ←이것만 제대로 공부하려고해도 이것 1년 걸리는 겁니다. 저도 잘 알지도 못하고요. 이것을 책에 보면 “乾은 根(근), 乾은 元코 亨코 利코 貞여한이라.”이렇게 해 놨어요.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元하다. 亨하다. 利하다. 貞하다.” 이렇게 해놓고 거기 주해가 수 10장이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도 제대로 파악이 잘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 유교사람이 元亨利貞은 잘 안다 하더라도 常樂我淨이 뭐냐? 여기 佛之德 이라 했는데, 常樂我淨. 제대로 이해 못합니다. 이해 못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이래서 이런 공부를 우리가 하는데 내용이 참 좋아요. 정말 이런데다가 우리가 골몰하고 여기에 시간을 다 바치고, 인생을 다 바친다고 하는 것은 정말 행운입니다. 무량대복입니다. 서장. 이것은 그냥 이렇게 한번 인연 잠깐내서 맛도 제대로 못 볼 정도로 조금 이렇게 인연 맺고 말 일이 아니라고요. 얼마나 근사 합니까? 이것을 정말 익숙하도록 읽어서 소화를 해낸다면, 참 대단한 겁니다.
제가 염화실이라고 하는 다음 카페, 거기에 여러 가지 글을 많이 올리는데, 화엄경도 올리고, 법화경ㆍ무슨 경ㆍ무슨 경, 많이 올리고 하는데 이 서장도 해석한 것을 쭉~~ 올리거든요. 올리는데 어떤 교수가 그것을 쭉~~ 공부를 다 해요. 그 안에 있는 것을 공부를 다 하는데 나중에 그래요. “야~~ 서장이 참 좋대요.” 딱 결론이 그래요. 예를 들어서, 경전은 단순하잖아요. 물 흐르듯이 잘 흐르긴 하는데 맛이 아주 담백하고 단순한데,
이 서장은 그 모든 것을 전부 아우르는 천하에 둘도 없는 그런 대 도인이 사정없이 그냥 그야말로 “포정” 이라는 백정이 칼을 쓰듯이ㆍ칼을 쓰듯이 온갖 많은 소를 잡으면서도 한 번도 날을 다치지 않고 칼을 쓰듯이 하는 그런 식으로 여기 지금 표현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봐도 그렇습니다.
대단하지요?
그 다음에 진짜 본인. 언충이에게 답하는, 유통판 언충이에게 답하는 내용입니다. 앞에는, 정작 편지는 언수라는 형에게 보내면서 그 표적은 언충이 에게다가 맞춰놓고 이야기를 했고, 아마 그 편지, 앞의 편지가 가서 막~ 읽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도 많이 나눴을 것이고, 읽기도 여러 번 읽어서 휑하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뒤에, 그 사람을 많이 뒤흔들어 놨지요.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은 겁니다. 그래놓고 그 다음에 이 사람에게 직접 편지를 이렇게 보내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먼저 先定(선정)으로써 뒤흔들어 놓고 後以智로 拔(후이지발)이라. 그런 말이 있지요. 뒤에는 지혜로써 그 못을 뽑아준다. 못을 뽑을 때 막~ 흔들어야지요. 바로 안 뽑히잖아요. 막~ 흔들어 놓고 흔들흔들할 때, 그 때 뽑으면 착 뽑혀지지요. 사람 제도하는 것도 그래요. 그것도 참 좋은 방법입니다.
劉通判 彦冲
令兄寶學公이 初未嘗知管帶忘懷之事나 信手摸着鼻孔하며
雖未盡識得諸方邪正이나 而基本이 堅固하야 邪毒이 不能侵이라
忘懷管帶도 在其中矣라 若一向에 忘懷管帶하고
生死心을 不破면 陰魔得其便하야 未免把虛空하야 隔截作兩處라
處靜時에 受無量樂하고 處鬧時에 受無量苦하리니
要得苦樂이 均平인댄 但莫起心管帶하며 將心忘懷하고
十二時中에 放敎蕩蕩地니 忽你舊習이 瞥起라도
亦不着用心按捺하고 只就瞥起處하야 看箇話頭호대
狗子도 還有佛性也無잇가 無니라하면 正恁麽時하야
如紅爐上一點雪相似하리니 眼辦手親者를 一逴에 逴得하야사
方知懶融이 道호대 ←5강-2
↓5강-3
恰恰用心時에 恰恰無心用이니 曲談은 名相勞요
直說은 無繁重이라 無心恰恰用호대
常用恰恰無니 今說無心處가 不與有心殊라함이 不是誑人語리라
令兄寶學公(령형보학공)이,
그대의 형 보학, 유보학. 앞의 편지입니다.
初 未嘗 知管帶忘懷之事(초미상지관대망회지사)나,
또한 처음에는 일찍이 忘懷管帶之事를 알지 못했으나, 이것은 말하자면 묵조선의 가르침이지요.
信手摸着鼻孔(신수모착비공)하며,
믿는 손으로 鼻孔. 근본자리를 잡았다. 摸着 = 만졌다. 鼻孔 = 근본자리. 본심을 잡았다. 깨달았다 이런 말이지요.
雖未盡識得 諸方邪正(수미진식득제방사정)이나,
비록 제방의 삿된 법과 정법을 다 알지는 못해, 그렇지만
而基本이 堅固(이기본견고)하야, 기본이 견실해요. 그리고
邪毒이 不能侵(사독불능침)이라.
기본이 견실해서 邪毒이 침범할 수가 없어요.
忘懷管帶(망회관대)도
在其中矣(재기중의)라. 또한 그 가운데 있더라.
若一向(약일향)에 忘懷管帶하고 生死心(생사심)을
不破(불파)면, 파하지 못할 것 같으면
陰魔得其便(음마득기편)하야,
오음의 마군이가 그 편의를 얻어가지고서
未免把虛空(미면파허공)하야, 허공을 잡아서
隔截作兩處(격절작양처)라. 허공을 잡아서 두 곳으로 나누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허공이 잡을 수나 있을 것이며, 칼로 허공을 쪼갠다한들 두 조각이 나기나 날것이며, 되도 않는 일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한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處靜時(처정시)에, 고요한 데에 처했을 때에
受無量樂(수무량락)하고, 한량없는 樂을 받다가
處鬧時(처료시)에, 시끄러움에 처했을 때에는
受無量苦(수무량고)하리니,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리니,
要得苦樂(요득고락)이 均平(균평)인댄,
苦와 樂이 均平함을 얻고자 할 진댄,
但莫起心管帶(단막기심관대)하며, 起心管帶하지도 말며,
將心忘懷(장심망회)하고, 將心忘懷하지도 말고,
十二時中(십이시중)에
放敎蕩蕩地(방교탕탕지)니, 놓아서 하여금 탕탕하게 할지니,
忽你舊習(홀니구습)이 瞥起(별기)라도,
홀연히 옛날 습관이 문득 일어난다 하더라도
亦不着用心按捺(역불착용심안날)하고,
또한 힘을 써서 내려누르려고 하지 말고,
只就瞥起處(지취별기처)하야,
망상이 일어난, 舊習이 일어난 그 곳을 향해서, 舊習이라는 것은 이 사람에게 뭐지요? 묵조 하는 것. 앉아서 只管打坐(지관타좌). 오로지 앉아서만 한다고 하는 그것이 이 사람에게 舊習입니다. 그것이 옛날 습관인데요.
설사 그것이 생각이 나더라도 바로 그 자리에 가서
看箇話頭(간개화두)호대, 그 화두를 살피되
狗子(구자)도 還有佛性也無(환유불성야무)잇가?
無니라하면, 無라고 하는 것을 볼 것 같으면,
正恁麽時(정임마시)하야, 바로 이러한 때에
如紅爐上一點雪相似(여홍로상일점설상사)하리니,
如紅爐上 = 벌건 화롯불 위에 한 점의 눈과 같이 相似할 것이다.
화로가, 큰 화로가 불이 벌건데 거기 눈이 떨어진들, 눈이 몇 점 떨어진들 그것 뭐 흔적이라도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 망상이라든지, 잡념이라든지 아니면 舊習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그렇게 녹아지듯이 돼야 정상적인 화두입니다. 정상적인 간화라고요. 간화하는데 아주 제대로 해놓은 겁니다. 이것이 원본입니다. 이것이 간화선교과의 원본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제대로 된 간화선이 아닙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그동안 공부한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간화선 지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도요. 빤하잖아요. 이런 표현이 如紅爐上一點雪相似라. “이 뭣꼬?” 또는 “無” 또 “板齒生毛(판치생모)”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그런 화두들이 많지요. 뭘 하든지 간에 그 화두를 딱 하나 챙기면 그야말로 일체 망상과 잡념은 전부 紅爐上一點雪과 같아야 됩니다. 큰 화롯불에 눈 하나 떨어진 것하고 같아야 됩니다. 싹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됩니다. 무슨 김도 안 나요.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눈 한 송이가 무슨 김날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眼辦手親者(안판수친자)를 一逴에 逴得(일탁탁득)하야사,
眼辦手親者 = 눈으로 판단하고 손으로 친한 것. 뭐겠습니까?
우리 한마음이지요. 一逴에 逴得하면, 한번 뛰어서 뛰어 얻을 것 같으면,
方知懶融(방지라융)이 道호대, 바야흐로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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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