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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9일 주님 부활 대축일 - 파스카 성야
제1독서 : 창세 1,1―2,2
제2독서 : 창세 22,1-18
제3독서 : 탈출 14,15―15,1ㄱ
제4독서 : 이사 54,5-14
제5독서 : 이사 55,1-11
제6독서 : 바룩 3,9-15.32―4,4
제7독서 : 에제 36,16-17ㄱ.18-28
서 간 : 로마 6,3-11
복 음 : 마태 28,1-10
1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2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3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4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
5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6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7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8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이는 유대인들의 “세다 예식” 중에 있는 질문입니다.
“세다 예식”이란 파스카 축제 첫날 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는 가족 식사를 말합니다.
이 식사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오늘 우리도 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대체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금 우리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톨스토이가 쓴 글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사나운 임금님이 사제들에게 명령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러나 사제들은 임금님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치기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하느님이 무엇을 하는 지만이라도 알고 싶구나."
그러자 양치기는 말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임금님과 제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어야만 합니다."
임금은 서슴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양치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하느님은 이처럼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밤 우리에게 ‘거룩한 바꿈’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 얼마나 고귀한 교환입니까?
이제 우리의 몸은 거룩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새 인간을 입었습니다.’(골로 3,10; 에페 4,24).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취하시어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이 교환을 가리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것이 되었고, 그분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으로 부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밤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루신 사랑입니다.
그러니 부활한다는 것은 단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 생명을 연장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된 생명,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밤 우리는 새로이 탄생 되고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의 “생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참으로 거룩한 생일, 거룩한 변화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
이토록 부활은 단지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밤은 참으로 기묘한, 참으로 거룩한 교환의 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만들어낸 참으로 기묘한, 하늘과 땅이 결합되고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 된 밤입니다.
하느님의 끝 모르는 사랑이 이루신 파스카의 밤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이 밤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신앙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바로 지금 거룩한 교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탄생의 대전환의 삶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부활의 밤입니다.
바로 지금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밤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주님!
당신은 제가 가는 곳에 항상 먼저 와 계십니다.
항상 먼저 오시어 나를 기다리시는 분,
결코 저를 떠나지를 못하시는 분,
제가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고,
제가 찾으면 ‘나 여기 있노라.’ 하시고,
제가 숨으면 ‘너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시고,
먼저 제 안에 들어와 ‘어서 가자.’ 고 이끌어 가시는 분.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아멘.
2023년 부활 축하드립니다.
류해욱 요셉 신부
오래전 미국 버지니아 성당에서 부활성야를 보내면서
부주임 신부인 김정하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아주 신선한 느낌을 받았었지요.
다시 한번 간단히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김 신부님은 어린 시절 함께 딱지치기를 하던 친구를 무척 부러워했답니다.
그 친구의 왕딱지에게 모조리 자기 딱지를 잃고는 그 친구가 집에 없을 때,
그 왕딱지를 훔치려고 갔다가 그 친구 어머니가 오시는 바람에
훔치지도 못하고 몰래 도망 나왔답니다.
그렇게 그 친구의 왕딱지를 부러워했고, 공부 잘하는 친구를 부러워했고,
커서는 예쁜 각시를 만나서 결혼하는 친구를 부러워했고,
토끼 같은 자녀들을 둔 친구를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부럽다고 하면, 그 친구는 오히려 신부인 자기를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늘 자기가 지니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는 존재인가 보다고하면서
갑자기 본당사목회장님에게 회장님은 무엇이 부럽냐고 질문을 던졌지요.
그 회장은 지금 이순간은 ‘잠’이 부럽다고 대답하셨고요.
이번에는 나중에 혼 날 각오하고 묻는다고 하면서 당돌하게 본당 주임신부님에게
“나중에 다시 태어나신다면, 신부하시겠습니까? 결혼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주임이신 곽호인 신부님은 열 번 다시 태어나도 신부한다고 대답하셨지요.
저에게도 묻더군요. 저는 다시 태어나보아야 알 것 같다고 대답했지요.
본당 수녀에게도 같은 맥락의 질문을 던지자,
그 수녀님도 다시 태어나도 수녀가 될 거라고 답하셨지요.
그런데 작은 본당 수녀님의 답이 웃음을 자아냈지요.
“저는 다시 태어나면 신부 될 거예요.”
전혀 예상 밖의 대답에 김정하 신부님이 한동안 말문이 막혔지요.
김 신부님의 결론은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 말고는 그렇게 부러운 사람이 없다고,
그냥 주어진 현실 안에서 감사하며 살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리고는 노래를 하나 불러드리고 싶다고 하면서
자기가 먼저 부르고 신자들이 따라 부르도록 하셨지요.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뜬다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오손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김신부님이 아주 노래를 잘 부르시더군요.
자기가 절대음감을 가지고 계시다고 자랑 할만 했지요.
사실 부활찬송 부르시는 것을 보고 이미 놀라긴 했지만요.
저는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하하.
그곳 신자분들 중에 연세 드신 분들이 많은데,
젊다는 것이 한밑천이라는 가사를 어떻게 무마하시려고 그 노래를 택하셨나 했더니,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모두 다시 태어나서 젊어졌다고
능청을 떠시며 강론을 풀어나갔습니다.
‘사노라면’은 유신 시절 한때 금지곡이 되었던 노래이기도 하지요.
웃기는 일이지만 내일은 해가 뜬다는 가사가
“그럼 지금은 어두운 시절이냐?”고 하여 금지곡이 되었다고 합니다.
희망에 관한 노래인데, 희망도 지니면 큰일 나는 시절,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우리가 이제 다시 그런 시절로 돌아가면 안 되지요.
예수님 부활에 힘입어 저도 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신부의 재기발랄한 모습이 신선함을 더해 주었고
부활의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부활은 한 마디로 희망입니다.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 모두
희망, 젊어지는 희망, 마음이 젊게 사는 희망을 지니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부활 축하드리며
주님께서 여러분 각자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성토요일은 부활성야 강론을 미리 올리오니
부활의 기쁨을 미리 하루 앞당겨 사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부활 대축일 낮미사 강론을 올리겠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절망으로부터 희망으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아드님을 살려내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좋으신 주님을 찬송합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빛으로 희망으로 생명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이제 예전의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참 자유인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
우리의 빛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도 주님의 빛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 성탄성야 미사 중 성경독서 이사야서 11장1-10절까지의 노래와 쌍벽을 이루는
“용약하라”로 시작하는 파스카 찬송이 주님 부활의 기쁨을 배가합니다.
시간 되면 한번 힘차게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용약하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 환호하라, 하늘나라 신비.
구원의 우렁찬 나팔소리, 찬미하라, 임금의 승리.
땅도 기뻐하라, 찬란한 광채, 너를 비춘다.”
끝까지 이어지는 내용이 구구절절 기쁨 충만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맛 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빛과 생명으로, 희망과 사랑으로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계시지 않다면
이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어둠으로 가득한 광야 세상을 어찌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빛과 생명으로, 희망으로 부활하신 주님 계시기에 비로소 살맛 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세례받아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모두가 주님 파스카의 생명과 빛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하고 그분께서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죄에서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세례성사의 깨달음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 덕분에 우리 역시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끊임없이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은총입니다.
제 주특기가 하느님 자랑입니다. 좋으신 하느님입니다.
예나 이제나 살아계신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을 살려내신 하느님의 자랑을 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바로 오늘 미사 중 제2부 말씀 전례에서 소개되는 하느님은 얼마나 좋으신지요!
매번 독서를 요약하는 후렴 시편의 고백이 신선한 감동입니다. 차례대로 소개합니다.
1. “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제1독서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달라는 청원입니다.
2.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제2독서에서 죽을뻔한 이삭을 살려내신 하느님께 우리를 지켜 달라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2. “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 분”
탈출기에서 모세의 영도하에 이집트의 압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신 하느님을 찬양하듯
우리 역시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3.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이사야서에서 보다시피 영원한 자애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구하시니 주님을 높이 기려야할 것입니다.
4.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이사야서 말씀 후 후렴처럼, 주님의 구원의 샘에서
기뻐하며 생명의 물을 길으라는 고마운 충고 말씀입니다.
바로 미사가 거행되는 성전이 주님 구원의 샘터입니다.
5. “주님,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바룩서 독서 후 후렴은 지혜의 샘이신 주님을,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라는 고마운 권고입니다.
6.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에제키엘 독서 후 시편 후렴은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주시는,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는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고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구약의 여섯 독서 말씀과 후렴 시편이 얼마나 다채롭고 은혜롭고 풍요한지요!
생명의 말씀, 빛의 말씀, 희망의 말씀, 사랑의 말씀, 진리의 말씀, 구원의 말씀입니다.
새삼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말씀의 종교요 우리 인간의 본질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아, 이 모든 하느님 말씀의 종합이자 완성이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 그리스도님이십니다.
말씀의 신비,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부단히 찾고 만나야 할 사랑하올 분은 파스카 예수님뿐이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파스카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 여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무덤을 떠나 제자들을 향해 달릴 때
다시 나타난 주님은 ‘평안하냐?’ 말씀하신 후
당신 발을 붙잡고 절하는 여인들에게 자상히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찾지 말고,
각자 삶의 현장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시는
우리의 형님이신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신 파스카 예수님을 찾아 만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과의 우정友情을, 우애友愛를 날로 깊이 하며
우리 모두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살게 하시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은총입니다.
다시 한번 나누고 싶은 자작 고백시,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새롭게 폈다지는
사람은 꽃이다
아름다운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아멘.
부활하신 예수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7,24).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성야를 지내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의 증언을 강조하는 것과
그들이 무덤으로 갔다는 것과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다(9-10절)고 전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복음에서처럼
주님의 몸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덤을 보러(1절) 갔다.
그들은 거기서 빈 무덤을 보게 된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마태오는 이 증언을 여인들의 증언에 따른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맨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것을 전했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 순수함 또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보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도들은 어땠는가?
겁에 질려있었고 그 여자들의 증언을 믿기보다는
헛소리 정도로 생각하였다(참조: 루카 24,11).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엎드려 절하였다”(9절).
이 행위는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그분을 손으로 포옹할 듯 넘치는 기쁨과 환희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그분이 진정 다시 살아나셨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먼저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 것은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신앙의 선포에 있어서 사랑과 기쁨이 우선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기쁨의 주제는 처음부터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순간에
겁에 질린 경비병들의 모습과 여자들에게 주어지는 기쁨은 큰 차이가 있다.
마음의 상태가 달라서 그렇다.
여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찾고,
이미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부활해 계신다.
그러나 그분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을 단죄하고 심판하기 때문에
그분이 영원히 죽어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여자들이 두려웠던 것은(8절)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일을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기쁨에 사로잡혀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쳐”(8절)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러 달려간다.
여기서 마태오는 기쁨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부활 체험이라는 것은 두려우면서도 기쁨에 넘치는 일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될 때 가능한 체험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을 때, 바로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 전체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해야 한다.
세례로 그분과 함께 묻혔다면, 그분의 생명을 누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위해 사는 자세를 의미한다고
바오로 사도께서는 말씀하신다.
오늘 우리는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행위와 업적을 통하여 보여주신
놀라운 구원의 파노라마를 묵상할 수 있었다.
천지창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은
당신의 사랑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절정을 이루는 순간은
바로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고
십자가 위에 죽게 하시며 또 부활시키신 이 사건이다.
또 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을 온전히 바치신 아들의 순명,
즉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신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계시오,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역사라고 할지라도,
이 부활 사건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활하신 주 예수의 모습은 바로 영광스럽게 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 부활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드러나야 하며, 선포되어야 하는 신비이다.
영광의 주님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큰 대가가 지불된 사건이다.
우리가 전할 부활의 신비도 우리 자신이 지고 가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하여 하느님의 뜻을 어기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이길 수 있다면,
거기에 따르는 보상은 백 배의 보상이 될 것이며,
그것은 큰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부활을 잘 지내는 것은
진정으로 나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서,
나 자신이 주님 안에 다시 태어나는 삶이 될 때
부활을 잘 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이기기 위한 부단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때,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고, 그 기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미사 중에 우리의 삶이 참으로 부활의 신비를
힘차게 선포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부활하신 예수님, 저희들이 당신을 뵙게 하소서, 알렐루야!
부활하신 예수님, 저희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인간의 눈으로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 길이 없으므로
오늘 밤 저희 모두가 하느님을 새롭게 체험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빕니다.
물론 성주간 때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우리 공동체의 모든 분들이 깨닫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은총으로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심미안을 청합시다.
그러나 단순한 심미안이 아니라 예수님을 뵈올 수 있는 깊은 심미안을 원합니다.
이것은 창조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를 가르치시는 말씀과 사건을 두루두루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전례는 파스카의 신비를 드러내는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례로써 어둠의 밤을 불로 밝히는 초 축성을 통해서 해방 의식을 드러냈습니다.
오늘 밤은 불기둥으로써 죄악의 어둠을 몰아낸 밤,
세속의 온갖 죄악과 어둠에서 구원하여 은총으로써 성덕에 뭉쳐진 밤,
하늘과 땅이 결합 된 밤, 참으로 복된 밤입니다.
죽음은 어둠이지만 죽음을 통해서 해방이 오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밤, 어둠과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어둠과 죽음이 오겠지만,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죽음에서 새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오늘 밤이 재탄생의 의미를 갖는 부활성야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새롭게 우리에게도 나타나시리라는
확신을 갖는 부활을 오늘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밤에 하느님께서는 세 가지 구약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고 일깨우십니다.
첫 독서인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 창조를 밝히셨습니다.
하느님 모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하느님의 숨결인 우리 인간, 하느님의 숨결은 생명이고,
창조 이래 하느님의 숨결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숨결로 살아가는 이 생명을 거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첫 말씀에서 인간 창조를 당신이 직접 하셨음을 밝혀 주심으로써
이 창조가 오늘 밤에 우리 안에서 새롭게 체험되었으면 합니다.
둘째 독서인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신앙을 일깨워 줍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면에서 먼저 본능을 가졌고,
그다음에 윤리 도덕을 지니고 살다가, 마지막에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본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윤리 도덕이고, 도덕을 이기는 것은 신앙뿐입니다.
하느님께로 옮아갔을 때 신앙이 주는 가르침에는 힘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첫 모범을 보인 아브라함을 통하여
우리 신앙이 새로워지는 은혜를 오늘 밤 체험하면 좋겠습니다.
셋째 독서인 탈출기의 말씀은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 군대의 추격에 몰려
바다에까지 이르러 어쩔 수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되면서 두려움에 쌓이게 됩니다.
이때 야훼 하느님께서 바다를 가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고
이집트 군대를 싸워 이기는 역사를 펼치시어
인간 해방의 역사를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들이 노예 삶을 청산하고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셨겠습니까?
오늘 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죄와 악습에서 해방시켜
온전히 자유롭게 살게 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종합하면 하느님의 숨결로 지음 받은 우리는 그분을 새롭게 믿음으로써
이스라엘이 노예 삶에서 해방되었듯이 우리도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새롭게 해방되고 하느님의 은총을 누리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인류 역사를 겪어오며 체험한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이 늘 인간과 함께하시려는 사랑을 보여주고 계시다는 것을
오늘 우리가 깨우치면 좋겠습니다.
제2독서인 로마서 말씀은 죄 때문에 고통과 죽음이 왔지만,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 왔다고 밝혀 주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극복 할 수 있는 은총의 방식이 무엇이냐고 할 때
이런 의식을 통해서 예수님께 참여함으로써 극복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부활의 징표가 됨을 밝혀 주십니다.
죄로 죽었지만, 은총으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새로 태어나는 것인데 우리에게 새로 태어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를 통해서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참여하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참으로 중요한데 부활의 의미와 적절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다시 태어남,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 6,8)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오늘 밤 우리는 세례로 다시 태어나 살게 되었다는 신아의 요점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은총을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11)
온르 복음 말씀은 빈 무덤에 관한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빈 무덤이라고 하면 두려움과 공포를 느낍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두려움을 보여주는 빈 무덤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가 하나 둘 씩 드러나는 빈 무덤입니다.
돌은 이미 움직여 입구는 열려있었습니다. 무덤에 들어갔더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마르 16,5)고 합니다.
또 젊은이가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고 했습니다.
이것은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빈 무덤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좀 더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 봅시다.
부활을 암시하는 빈 무덤의 뜻은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을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에, 무덤에 계시지 않고 비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결정적인 내용이 되는 빈 무덤은
부활의 증거일 뿐 아니라 예수님이 어디 가셨는가 하는 질문도 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이제 인간적인 선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이면서 참 하느님임을 보여주는 내용을 밝혀 줍니다.
이것은 놀라움 자체이고 본질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예견하셨는데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빈 무덤의 상징성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묵상해서 새겨야 합니다.
빈 무덤은 나를 위해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빈 무덤에 계시지 않으니
어디서 만나게 될 수 있는가가 문제이고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장소나 시간에 국한된 사건이 아닙니다.
여기서부터 부활의 신앙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하셨는데,
이제 그분이 살아계시는 참사람이셨다가 부활하신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길은 그분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하는 길이 관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우리에게 “이는 내 몸이다.”,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6-28 참조) 라고 말씀하시며
내주신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되었습니다.
성체로 내 안에 사시는 것이 우리가 그분을 살게 하는 길입니다.
달리 말해서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하심이야말로
그분이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길이고, 각자 그분을 만나 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길은 장소나 시간에 국한되지 않고,
바로 성체를 통한 내 안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체성사의 의미이고 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빈 무덤의 근원적인 신앙고백이고,
또 예수님을 체험하는 참 부활의 길이라고 봅니다.
오늘 부활 성야에서 우리는 이런 신앙고백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을 입었으면 합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마태 28,1-10 파스카 성야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마태28,1참조)는
예수님의 행적, 인성, 말씀을 보고 들으며
그분을 체험했고, 따랐으며 주님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 그 이후 다시 부활하리라는
그 말씀은 믿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막달레나와 마리아는
어쩌면 두렵고 슬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들은 주님을 뵙기 위해 새벽녘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찾아갔고, 그들은 천사를 마주했습니다.
천사는 말합니다.
“와서 그분이 누워계신 자리를 보아라.”
그들이 마주한 예수님의 흔적은
죽음에 굴복해 썩어가는 시체가 아니었습니다.
썩은 내도, 핏자국도, 구더기도 없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죽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죽음 이후에 무언가가 일어났음을,
주님의 죽음이 완전한 끝이 아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경험했고,
이로인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한층 깊어졌습니다.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돌아가는 길에 동이 트는 것을 바라보며
어둠을 찢어내고 솟아오르는 희망에 벅찼을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늘 새로운 빛을 줍니다.
그러나 그 흔적을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고통스럽고 두렵다고 느끼는 것들, 각자가 마음속의 무덤에 묻어둔 것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흔적을 발견할 때
새로운 방향의 전환점 혹은 두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합니다.
두려움에 혹은 슬픔에 ‘숨은’ 제자들이 아니라
슬픔을 이겨내고 주님을 뵙기 위해 ‘발을 뗀’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돌아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그 얼굴은 너무나 환해서 부러울 정도입니다.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참으로 주님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더없이 기쁜 얼굴로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을 전하는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출처] 마태 28,1-10 파스카 성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