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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샤론 |
펌) 배문성 선교사
현충일!
꼭 한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죽느냐 사느냐?
대한민국이 공산독재 북한과 중국의 지배 아래 살것이냐 자유 대한민국으로 살아 갈 것 인가?
제 대학 CCC 시절 영적 아버지이셨고 한국CCC 설립자겸 총재였던 김준곤 목사님의 6.25남침시 전라도 신안 섬에서 공산당에 의한 가족의 몰살 간증과 교회의 박해 이야기가 눈에 선합니다. 그러기에 공산화를 막아야한다 는 눈물의 간곡한 부탁을 하시면서 베트남 공산화 이후, 피난보트에 탄 한 청년의 고백을 눈물로 읽으시던 '백기' 라는 시가 이 시기에 절절이 가슴에 닿아 옵니다.
김준곤목사님이 돌아가시기전 하나님께 받은 3가지 예언중 2가지는 정확히 맞았고,
마지막 세번째 예언은 노무현 정권이후 다시 좌익이 정권을 잡으면 세종로에 이순신장군 동상대신 좌익에 의해 김일성 동상이 세워지고 애국가 대신에 김일성 찬양이 불려지고 국회에서 북한과 손잡고 낮은 연방제로 가면 남한의 교회는 끝이 난다고 예언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에 교회가 있는가? 베트남에 교회가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꼭 명심 기억하십시요. 돌아가시전에 유언처럼 예언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잔이 교회 위에 있고 한국위에 있습니다.
그러면 선교사사역과 지원도 끝 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번 기회를 놓치면 한국은 그동안 누려왔던 자유와 신앙의 자유가 심각한 훼손을 받게되고 나라는 사회공산주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요. 한국의 현실을.청와대의 위세에 꼼짝 못하는 공무원, 군인, 경찰들 ,언론을 장악한 공영방송들과 정권의 시녀인 언론사와 신문기자들, 혹시 일구어온 회사가 망할까봐 공포속에 말 못하는 시장 경제의 주체인 경제인들 을 보십시요.
국가 명령하에 코로나19 상황을 기회 삼아 배급제의 시행등. .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딱 3년만에 이 정권에 의하여 이루어진 결과들입니다.
교회는 얼마 안가서 무서운 이리들의 밥이 되고 일부 유명한 목회자들은 정권에 의해 국민들에게 저주의 대상으로 공작되어 조롱과 비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전략과 전술에 의해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는 철저히 유린되고 말 것입니다.
북한의 교회가 무너진것처럼 세상사람들이 교회를 미워하며 외면하게 만들 것 입니다.
현 정권의 주세력인 586세대는 저와 같이 공부했던 세대들이고 공산주의 이론을 치열하게 공부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죽거나 감옥에 가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죽기 살기로 투쟁한 사람들입니다. 무섭습니다.
그동안 보수는 경제 성장의 단 맛만 빨아 먹고 살았고 교회는 거기에 기대어 살았습니다.
저들이 교회를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공산주의 유물사관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대척점에 있습니다. 교회를 철저히 내동댕이 칠 것입니다.
이것은 영의 전쟁입니다.
북한 중국 베트남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둠의 영이 이 민족의 권세와 권력을 이미 장악했습니다.
이번 부정선거를 통해 한국을 장악한 사악한 무리를 보고도 교회가, 의식있는 목회자, 선교사, 신앙인들이 부르짖지 못한다면 자유 대한민국이 침몰하는 것은 시간문제 입니다.
그래도 이 시대에 교회가 희망입니다.
이번 선거는 전체주의, 공산주의로 가는 길목의 부정선거 입니다.
언론의 침묵, 여당 야당의 침묵 , 경찰 검찰의 침묵, 선관위의 위증, 국민들의 침묵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일본의 군국주의 정권도 국민의 환호속에 태어났지만
결국 나라와 국민들을 전쟁과 파멸로 무너트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부패한 베트남은 월맹에 의하여 공산화될때 남부 베트남에 수많은 간첩들이 활동했지만 부패한 지도자와 백성들의 안일함으로 결국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공산화를 당하고 모욕과 치욕을 당하고 보트 피플로 세계각지로 흩어지는 나라잃은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도 예외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나라가 공산화된다면 목사요 선교사는 공산화된 나라에서 죽든지 망명의 길을 떠나야 할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한국만은 지켜주신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된 선민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2000년을 세계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자유를 지킬 수 있을때 지켜야 합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닙니다.
꼭 지키어 신앙의 자유가 있는 자유대한민국으로 살려내야 합니다.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
예언의 날이 다가오고 있기에
멸망직전의 이스라엘처럼 예레미아 선지자의 심정으로 눈물로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향하여 주신 마지막 기회, 부정선거의 의혹이 밝혀져서 정권이 바뀌고 자유 민주주의가 회복 될 수 있는 아마도 최후의 기회라고 생각되어 호소합니다.
다 같이 행동해서
부정하게 얻는 정권을 바로 돌려 놓도록 국민 저항권을 통해 부정선거의혹을 밝히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여기에 동의하시는 분은 이 글을 많은 분들께 공유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한국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에서 긍휼과 자비, 선하심으로 이미 영적 회복이 어려운 길에 들어선 대한민국을 회복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 부탁드립니다.
배문성 선교사 올림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48009756836838&id=100048834440878&sfnsn=mo
2019 11 13 배문성선교사님 계기
https://www.youtube.com/watch?v=EVuxE0v5dBo&feature=emb_logo
게시일: 2019. 11. 13.
배문성 선교사의 인생이야기 2020.05.27.
배문성 선교사의 인생이야기(부제 : 치열한 인생 :TIMELINE을 사건 중심으로 기록) 나는 1962년 12월 추운 겨울 충남 논산의 한 농가에서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배문성 선교사의 인생이야기(부제 : 치열한 인생 :TIMELINE을 사건 중심으로 기록)
나는 1962년 12월 추운 겨울 충남 논산의 한 농가에서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대전으로 이사와 조그마한 사업을 시작하여 이사온 대전의 집 가까운 곳에 외갓집이 있어 외할머니의 손에 이끌리어 5살때부터 교회에 발을 디뎠고 그 이후 지금까지 교회안에서만 머물며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 그리스도 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구원의 은혜를 방언과 각종 은혜를 경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과 더불어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절을 안 해서 집안의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고 매년 명절 때 큰 집에 가는 것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큰 두려움 중에 하나가 되었다.
중학교 2학년때 세례를 받고 우리가 살던 집이 개척 교회를 위해 팔리면서 교회 옆으로 이사하였고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시기 시작하면서 나도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신자로 등록하여 지금까지 성결교회 목사와 선교사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중학교 2 학년말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가정의 위기로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해서 육사를 가려는 길에서 공업계 고등학교로 갈수 밖에 없게 되어 미래의 길에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좌절 중에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는데 중학교 3학년 방황과 실의의 기간중에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치열한 전국 경쟁의 동아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여 전교생 기숙사 생활을 하며 집에서 떨어진 생활을 2년간 하였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학교를 들어갔지만 자긍심을 잃어버려서 성적은 최 하위권이었고 내적갈등과 자신감을 상실하여 1학기를 보내게 되었디.
1학기말 교회부흥회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였고, 주님의 비전을 받아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에 다시 도전하여 2학기중에 주님이 주신 지혜로 전기과 최상위권으로 올라서고 공과대학 진학의 꿈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동안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으로 집안의 식구들이 다 어려움을 겪었는데 고3 봄 어느 날 아버지의 허벅지 큰 부상으로 약 4개월간 병원 생활과 어머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대학 진학의 꿈이 좌절되었지만 담임 선생님 격려로 9월까지 왔고 어느 날 집을 방문하여 부모님 설득으로 대학 시험만 보고 합격 한 후 포기하기도 약속하고 대학 시험을 치기로 하였다. 시험 후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교육공학과에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그러나 4년간 수업료 면제와 약간의 기성회비만 있으면 대학을 다닐 수 있어서 부모님의 허락과 여러 도움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대학을 들어가서 신앙적인 면은 교회생활과 C.C.C. 기독 동아리에 들어가 체계적인 신앙훈련과 선교에 대한 비전을 보았고 믿음의 멘토와 좋은 선배와 믿음의 동지들을 만났다.
대학 생활 중에도 집안의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가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 호떡 장사를 할 때 나는 매일 같이 호떡을 반죽하고 학교에 갔으며 저녁에는 10시쯤 어머니가 일을 마치면 빈 반죽 그릇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던 중에도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참석하셨으며 85세인 지금도 새벽 기도를 계속하고 계신다. 아버지도 지금은 교회에 출석하신다.
대학 3학년 생활 중 대학원에 진학할 꿈을 가지고 공부하던 중 어느 금요일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 금요 철야 기도회를 참여하고 학교로 돌아오던 중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가 임했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계속적인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의 경험으로 더 이상 공부를 못하고 도서관 뒷산에 가서 기도하던 중 주님께 소명을 받고 삶을 드리기로 하였다.
대학을 마치고 방위로 복무하며 군대 안에서 한국사회의 깅자들의(현역) 횡포와 약자들의(방위병) 고통을 지켜보며 한국 사회의 약육강식의 부조리를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다. 군복무후 바로 대전 대덕 연구 단지안의 천문우주과학연구소의 연구소 생활을 경험하며 20대 공학 박사의 꿈을 가지기도 했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로 하고 교사의 길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내 인생의 최대의 전환점 중에 하나인 1988년 5월 5일 고등학교 3학때부터 기독동아리에서 친구로 알아온 아내와 결혼에 골인하였다. 주님이 주신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해 9월 1일자 충남 보령의 주산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고 복무하게 되었다.
다음해 폐결핵 판정을 받아 폐결핵과 싸우며 교사 생활을 하며 신대원 시험공부를 하여 서울신학 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부모님이 오셔서 어려운 신학의 길보다는 교사로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할 것을 눈물로 부탁하셨지만 끝내 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다음해 1990년 갑자기 충남 예산 중앙고를 예산 공업 고등학교로 바꾸는 창설요원으로 준비를 위해 교육청에서 소집을 하여 발령을 내서 부득이 신학 대학원을 휴학하고 교사 생활을 계속 하였다. 다음해 학교에서 양해를 하여 학교 교사 생활과 부천 소사에 있는 서울신학대학원공부를 병행하면서 예산 신례원 교회 교육전도사로 3중직을 감당하며 시역하다가 탈진도 하였지만 3년만에 신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신학대학원 졸업 후 교사로 일하며 아산온천의 신창교회 담임 전도사로 부임하여 사역하였고 부임후 얼마 되지 않아 교회 봉고차 사고로 학생들 5명이 크게 다치고 나도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후 어려움이 있었지만 3년간 교사와 담임 전도사의 사역을 병헁하였고 목사 안수를 받는 해 교사생활을 사직하였다.
1997년 3년간의 목사 고시의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4월15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997년 10월 성도 수 약 2000명의 부여 중앙성결교회 부목사로 부임하여 사역을 하였다.
부목사 사임과 개척의 길에 들어섬-1999년 12월 대전 신도시 지역에 송촌 중앙 교회란 이름으로 개척에 도전하였고 가족은 아내와 어린 딸 3명과 아들 하나를 데리고 대규모 아파트앞 빌라 3층을 얻어 개척을 시작하였다. 2번의 교회 이사와 개척 5년째 3번째 180평정도의 단독 건물의 교회와 교육관, 사택이 딸린 교회를 구입하여 자체 건물을 가지게 되었으며 교회 부설로 예찬 지역아동센터(아동 45명)와 기아대책 지역 이사와 행복한 가게 운영하였다.
개척 후 8년 교회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지역 아동센터도 정부 보조를 받으며 보람있게 사역하던 중 2007년 창 12장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나에게도 감동이 와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40대 중반의 나이에 백지상태로 2008년 1월 교회 사임후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주님의 인도를 기다리었다. 그러던 중 잠시 장로교 목사님의 사역을 돕다가 필리핀에 국제학교를 인수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국제학교 책임자로 필리핀 마닐라로 오게 되었다. 2008년 5월 NBCA INTERNATIONAL SCHOOL DIRECTOR로 필리핀 마닐라로 새로운 선교사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외환 위기로 학교를 그만두고 선교사의 삶을 시작하며 성경적 선교사상인 사도의 바을의 텐트 메이커의 선교사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고 그 마음과 삶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2009년이후 자비량 선교와 팔라완 선교의 삶은 재정적인 압박과 더불어 자녀 교육를 감당하느라 몇차례의 재정적인 위기가 왔지만 지혜로운 아내의 내조로 위기들을 넘어갈 수 있었다. 아내의 내조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삶이었다. 여러 번의 편한 길을 반대하지 않고 묵묵히 따라와준 아내가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에 아내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고 어려움속에서도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아빠로서 미안함을 마음 한구석이 가지고 있다.
김성진 한국 목회 컨설팅 연구소(MSC) 소장님을 만난 것은 또 다른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MSC필리핀 지소와 더 나아가 필리핀 지부와 이사회 구성 필리핀 목회 컨설팅 연구소(PMSC)까지 이용진 전 이사장과 이사들의 만남은 또 다른 인간적인 감동과 새로운 사역의 장을 갖게 되었다.
필리핀 선교 생활 13년째로 작년에 아내와 나는 팔라완섬으로 이사하였다. 10여년 동안 팔라완에서 성결교회 개척 20여개와 팔라완 지방회가 조직되었다. 작년 9월부터 교회 안에서 시작한 벧엘 신학교 사역은 올 1월부터 구입한 신학교로 이사(약 1150평 넓이와 9개동 건물)하여 약 40명의 학생들과 더불어 공부하던 중 코로나 19바이러스로 학교는 현재 잠정 중단된 상태이지만 올 9월의 개학을 기다리며 조금씩 신학교를 수리하고 학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인생의 여정에 많은 스토리가 있었고 그곳에는 즐거움만이 아닌 고통과 쓴맛, 슬픔, 이별 그리고 많은 아픈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보따리에는 감동이 있었고 아름다운 스토리와 희생과 사랑, 행복, 감사의 이야기가 또한 가득하다. 주님의 만지심과 훈련이 지금까지의 나를 만들었다. 미완성의 나는 아직은 3막이 시작되지 않았다. 새로운 3막의 스토리를 주님과 함께 쓰고 싶고 나의 약함과 허물을 인식하고 좀 더 깊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나만의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능력의 성령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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