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산책 –1 최익현과 맥켄지, 그리고 죽창가
추야우중(秋夜雨中)이라 일요일(10일) 저녁 가을비가 잠을 설치게 하더니 다음 날부터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군요. 내자동에서 연포탕으로 점심을 하고 정동 길을 걸어 덕수궁에서 열리는 한국현대 미술전을 구경하러 갔습니다. 새롭게 근사하게 지은 새문안 교회 앞을 건너니 옛 경기여고 자리는 이제 분쟁이 해결되었는지 미 대사관 건축 공사를 시작하려 하군요. 미대사관저인 Habib House 앞에는 경찰들이 경비를 삼엄하고 서 있군요. 다가가서 ‘애들이 담을 넘으려고 했던 곳이 어딘가요?’ 했더니 눈으로 가리키는데 정문 바로 옆이군요. 1980-90년대만 해도 RAS(Royal Asiatic Society)나 Fulbright 모임 같은 걸 가져 쉽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시절이 하수상하니 이제는 너무 삼엄합니다. 엄연히 국제법적으로 보호대상인 대사관저를 넘어가려는 시도를 철없는 애들의 무분별한 짓으로 돌리고, 이런 ‘불상사’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정부는 무엇인가요? 지킬 것을 지키면서 협상이나 입씨름을 해야지 소영웅주의에 빠진 엉뚱한 짓을 ‘잘 했다’고 박수치는 것 같은 모양새는 보기 흉합니다.
Harry Harris 미 대사가 ‘다행히 우리 집 고양이는 다치지 않았다’고 한 건 또 뭔가요? 한국 대학생들이 쥐새끼라는 건가요? 쥐새끼가 들어올 틈도 없는 철옹성이고 또 쥐를 잡으려 고양이가 나설 만큼 큰일도 아니었다는 유머인가요? 한-미 양국이 말장난인지 기 싸움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Horace Allen의 전기를 보면 1883년 Lucius Foote 초대 미국공사가 부임하기 전후 외국사절들이 수도에 ‘상주’하는 걸 원치 않았던 조선정부는 외교사절이 수도에 상주공관을 설치한다는 시대의 변화는 막지 못했지만 경복궁에서 약간 떨어지고 외진 지역인 정동 일대에 외국인이 거주하도록 유도하지요. 미국이 민씨 일가의 집 중 하나를 사서 공사관으로 사용하면서 주변에 영국, 러시아 공사관들이 모였다고 하더군요. 이게 지금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으니...., 생각이 이어지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덕수궁의 늦은 단풍이나마 즐기면서 석조전에서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 기념전인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의 첫 전시실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집 애 후배 김인혜씨가 큐레이터로 기획했다고 합니다.(사진 1) 첫 전시실에서 나를 맞는 건 최익현(崔益鉉, 1834-1907)의 초상화네요.(사진 2) 아무리 충신이니 위대한 유학자니 떠받들어도 그는 ‘위정척사’, ‘서양이나 이를 모방한 일본은 사악한 무리들’ 즉 양즉사(洋卽邪)라고 배척하면서 개화와 근대화를 거부하여 조선을 결국 쇠망의 길로 인도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물론 한 개인의 행적에는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이 공존하지요. 그는 초기에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지지했지만 만동묘 철폐 등 반유교적 정책 이후 대원군 타도에 앞장섭니다. 대원군이 유교적 테두리 내에서 착수한 시정개혁은 지지했지만 서원철폐 등 ‘반유교적’으로 비치는 정책으로 나가면서 반대한 겁니다. 최익현은 만동묘 등 유교적 폐단을 척결하는 대원군의 정책을 반유교로 몰아 민씨 일파들과 연대하여 대원군을 실각시키지요. 대원군이 결코 반유교적 인물은 아니죠. 유교라는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과 대원군의 정신세계가 그의 비극이라 할 것입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임진왜란 직전 조헌(趙憲)이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엎드려 개혁을 호소한 것을 본받아 도끼를 메고 광화문 앞에서 ‘개항5불가’를 외칩니다. 도끼를 메었다는 것은 군주가 자기의 건의를 받아들이기 싫으면 목을 치라는 말입니다. 갑오개혁 후 단발령이 시행되자 '나의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를 자르지 못한다'고 유명한 말을 남긴 인물도 바로 최익현입니다. 1906년 의병활동 중 토벌군에 포위되자 ‘우리끼리는 싸우지 말자’면서 의병들을 해산시키고 혼자 토벌군을 맞아 죽으려하니 22명이 남아 같이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대마도로 압송된 후 단식으로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20 여 년 전 BK 프로젝트로 학생들과 대마도에 갔을 때 이즈하라(嚴原)에서 그의 순국비를 본적이 있습니다. (사진 3, 구글, 시니어오늘(http://www.seniortoday.co.kr)
송나라의 문천상(文天祥)과 당태종 시대의 위징(魏徵)이 떠오르군요. 문천상은 송이 멸망한 뒤 쿠빌라이에게 잡혔으나 항복하지 않고 죽임을 당합니다. 이 때 지은 정기가(正氣歌)가 유명하죠. 한번 외워보려 했으나 중국 고대 이야기들이 많고 문학적으로 별로여서 그만 두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위징은 ‘양신’과 ‘충신’을 구분합니다. 충언을 통해 군주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인물을 ‘양신’이라하고, 군주에게 충언하지만 군주가 그의 고언(苦言)에 분노하여 죽이면 군주도 결국 망하게 되는데 이같은 신하를 ‘충신’으로 구분합니다. 위징은 자기는 ‘충신’이 아니라 ‘양신’이 되고 싶다고 했지요. 최익현은 문천상과 같이 충정을 바쳤지만 자신도 망치고 나라도 망국으로 이끌었지요. 위징이 말한 ‘충신’의 대표적인 인물일겁니다. 우리 역사에는 충신이 넘치지요.
더욱 중요한 것은 최익현이 개인으로서는 양심과 지조를 지켜 고결한 일생을 살았지만 정치적 안목은 별로였다는 점입니다. 성리학의 마지막 버팀목이자 한국의 정치문화가 ‘정론’이란 명분아래 타협보다는 대결로 치닫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죠. 민주주의가 타협의 정치라 하죠. 현 정부나 권력을 쥔 여당이 야당과 타협하려면 몇 가지 양보할 것을 가지고 야당대표들을 만나야지 즉 조그마한 것이나마 줄 것을 먼저 생각하고 야당과 대화에 나서야지 밥 한번 먹으면서 야당대표들을 설득하여 정부의 정책을 밀고 나가려는 자세는 정부의 정책은 ‘정당한’ 것이니 잔소리 말고 따라 오라는 말이죠. 요즘 정부의 정책은 정당하지도 않고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투성이가 아닌가요? 최익현과 태도와 차이가 있나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최익현은 1905년 초 국내외적 상황을 비판하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그가 고종에게 올린 상소는 영문으로 번역되어 영국 외교문서에 있더군요. 읽으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가 말한 개혁은 근대화를 위한 여러 조치들, 당대의 표현으로는 ‘개화’가 아니라 유교에서 말하는 왕도정치로의 복귀를 뜻합니다. 그러나 진(秦) 상앙(商鞅)과 같이 봉건적 구습을 철폐하여 국가체제를 과감히 획기적으로 바꾸려는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더군요. 고종을 둘러싸고 있는 간신배 5-6명을 처형하는 것이 화합과 개혁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그가 말한 간신배는 전통적 의미에서 가렴주구를 일삼는 부패한 관료들이 아니라 개화파를 말합니다. 개화파 무리들을 먼저 정부에서 몰아 낼 뿐만 아니라 죽여서 앞으로 ‘개화’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하라는 겁니다. 그 다음 양심적 인물을 내각에 임명하여 모든 권한을 주면 수개월 내에 괄목할만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며 국민들의 충성과 하늘의 축복을 받아 정치는 평온을 되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양심적 인물은 당연히 수구파들이겠지요. 대외관계에서는 주변에 한국을 집어 삼키려는 강도들이 있음으로 한국이 국제회의를 소집,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협정에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한심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제국주의 시대 조선의 문제점이나 국제사회의 권력정치에 대한 이해는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첫 전시실에서 만난 첫 작품이 최익현의 근엄한 인물화라니 기분이 야릇해지더군요. 그런데 다음 방에서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일면 반갑고도 놀라운 전시가 나를 기다리더군요. 아래 ‘사진 4’의 의병 사진을 잘 아시죠? 지금은 우리에게 낮 익은 사진이지만 나는 1970년대 중반 이 사진을 보았을 때 느낀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맥켄지(Frederick McKenzie)가 찍은 겁니다. 그는 영국 <Daily Mail>지의 극동 특파원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1906년 다시 방문합니다. 맥켄지는 의병 활동을 직접 취재하기 위해 제천 의병 근거지를 방문하는 데 이때 찍은 이 사진이 의병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유품입니다. 마치 경주 남산에 흩어져 있는 석불에서 옛 조상들의 얼굴이 보이듯이 100여 년 전의 인물들이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맥켄지의 취재는 요즘 시리아의 쿠르드 족 근거지에 들어가 취재하는 종군기자와 비슷할 겁니다. 이 사진은 1908년 발간한 <한국의 비극 (Tragedy of Korea)>에 실려 있습니다. 책 첫 면을 넘기면 나오는 이 사진을 본 순간의 전율이 다시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이 사진에 나오는 의병들이 누구인지 부질없는 상념에 잠겨보았습니다. 어릴 때 동네에서 이빨 빠진 ‘개오지’라고 부르던 머슴의 모습과 너무 닮았는데... (사진 4)
맥켄지의 반일활동은 유명합니다. ‘폭도 토벌작전’이란 이름아래 의병진압에 나선 일본군의 만행을 배설의 <대한매일신보>에 보도합니다. 미국과 영국 총영사는 일본에 대한 ‘악의에 차고’, ‘신중하지 못하며’, ‘매우 반일적(very anti-Jap.)이며 신뢰할 수 없는 보도’라는 비난하는 보고서를 본국에 보냅니다. 그러나 서울에 거주하는 일반 서양인들은 그의 기사가 정확하다고 말했다고 하네요. 맥켄지는 3.1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반일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벌입니다. 1920년에 나온 <한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은 임정의 3.1운동 보고서 격인 박은식(朴殷植)의 <조선 독립운동지혈사>의 내용을 상당 부분 번역한 3.1운동의 영문판 보고서라 할 것입니다. 이 책은 3.1운동을 해외에 알리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하며 특히 영국 의회와 언론, 학자들에게 배포되어 영국에서 ‘한국의 친우(Friends of Korea)’라는 단체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맥켄지는 이 책에서 서양 열강 중 한나라가 일본과 전쟁을 통해 한국은 해방될 것이라는 선지자적 예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최근, 아마도 2014년에서야, 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왜 이제인가?’라며 당시 보훈 심사 현장에서 받은 쇼크도 잊을 수 없습니다만 여기에 쓸 것이 아닌 것 같아 생략합니다. 선교사들과는 달리 국내에 연고가 없는 외국인이라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의병 사진을 배경에 두고 그 앞에 창과 칼, 그리고 화승총이 전시되어 있군요.(사진 5) ‘죽창가’가 연상되더군요. 나는 최근 유명인사가 ‘죽창가’를 부르기 전까지는 이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1985년 어느 시인의 창작품이라 하군요. 나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같이 동학운동 때나 그 직후에 나온 그래서 연륜이 오래된 민속노래인줄 알았습니다. 여기에 전시된 것은 장창(長槍)이지 죽창은 아닙니다. 죽창은 쉽게 만들 수 있어 전통시대 농민군이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동학군들이 죽창으로 무장했다는 건 과문한 탓인지 보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은 죽창으로 싸웠나요? 대부분의 경우 봉기군은 관아의 무기창고를 틀어 무장하지 않던가요? 전문가의 조언을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죽창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군을 상대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지요.
정부 인사가 죽창가를 들고 나온 것은 우리사회에 반일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국민들을 정부의 정책에 호응하도록 하는 또 하나의 ‘의병가’이겠지요. 북한과의 평화는 이제 약발이 시들해져 정부가 써먹을 수 있는 것 반일 밖에 없지 않는가요? 그런데 이 약발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요? 언론이나 시민단체가 반일분위기를 획책하더라도 정부는 이를 진정시키면서 일본과의 관계를 차분히 풀어나가야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다고 죽창가를 부르면서 반일 분위기를 조성하고 국민들을 반일로 몰아가나요? 정부가 그렇게 힘이 없나요? 정책수단이 없나요? 정부가 국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리니 앞장서서 반일을 획책하여 난관을 헤쳐 나가겠다는 발상이라면 유치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오지요. 내일 모레 ‘지소미아’ 종료를 앞두고 정부가 당면한 딜레마가 바로 이런 겁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다음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계속) (2019.11.17)
사진 1, 큐레이터 김인혜씨와
사진 2, 최익현 초상화
사진 3, 대마도에 있는 그의 순국비
사진 4, 5, 맥켄지가 찍은 의병과 의병의 장창 등 병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