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은 강하다
골짜기로 든다. 길은 언덕 아래로 이어진다. 밭을 이고 있는 언덕배기는 무성한 풀밭이다. 밭에는 콩이며 고추며 감자며 옥수수며 여러 가지 농작물들이 자라고 있지만, 언덕배기에는 누가 가꾸지 않아도 절로 나는 갖가지 풀들이 살고 있다. 꽃 안 피는 풀은 없다. 언덕배기는 갖가지 꽃이 어우러진 화원인 셈이다. 봄까치꽃, 현호색, 꽃다지 냉이, 씀바귀, 애기똥풀, 개망초, 돌나물, 미나리냉이, 쇠별꽃, 별꽃, 괭이밥 …….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꽃들이 철철이 다투어 피고 진다.
고요와 평화가 있는 골짜기를 향해 걷는 재미도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하지만, 걸으면서 보는 언덕배기의 풀꽃들이 설렘으로 다가와 눈을 흠뻑 적시곤 한다. 그 꽃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다가 보면, 어떨 때는 골짜기로 드는 걸음을 잊을 때가 있다. 아늑한 고요를 찾아가려던 걸음이 황홀에 유혹당하여 외도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풀꽃들의 아름다운 유혹에 젖고 있을 때, 시샘과 미움으로 속을 태우는 사람들이 있다. 언덕배기 위아래 농작물 밭 임자다. 풀을 그냥 두면 풀씨가 날아들어 곡식의 생장에 지장을 준다며 속을 끓인다. 그래서 그들은 연록, 진록의 빛깔도 싫고, 갖가지 색깔과 모양으로 피어나는 꽃들도 귀찮기만 하다.
밭 임자가 땀을 많이 흘렸을 것 같다. 날카로운 예초기 칼날을 갖다 대어 풀꽃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무거운 기름통을 메고 언덕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며 그 많은 풀을 쳐내자면 팔이며 목은 얼마나 아프고 힘은 또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물론 그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는 걸 안다면 얼마나 물색없는 사람이라 할까.
풀들이 깎여 나간 언덕을 바라보는 내 심정을 그가 알 바도 없거니와 알려고 할 일도 없다. 베어져 누운 풀들을 바라보는 나는, 아끼고 사랑하던 소중한 것을 잃어 비린 듯, 산산조각이 난 보물을 아리게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이를 어쩌나, 발을 구르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은 어이없기도 하다.
그렇지만, 안다. 저 베어져 나간 풀이 저들의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곧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풀은 결코 죽는 법이 없다. 죽은 자리에 새 풀이 돋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머지않아 새 얼굴, 새 모습으로 다시 난다. 베어져 나간 것들을 거름으로 하여, 저들을 딛고 더 어여쁜 모습으로 날 것이다.
문득 김수영 시인의 「풀」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물론 이 시는 시인 나름의 깊은 알레고리를 담고 있을 것이지만, 어쨌든 ‘풀의 끈질긴 생명력’을 나타낸 것은 틀림없다. 지금 여기 풀은 바람에 눕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베어져 드러누웠다. 날카롭고 빠른 칼날에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그 자리에 다시 난다. 다시 움이 돋고 잎이 나고 꽃이 핀다. 자리를 옮기지도 않는다. 모습을 바꾸지도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난날 그곳에서, 그 모습으로 다시 난다. 풀의 강인성을 알고 믿기에 베어진 풀을 보며 아린 마음을 이내 거둔다. 농부의 헛수고가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농부도 그런 풀의 생명력을 모르지 않는다. 다시 날 때까지의 시간을 좀 벌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나도 풀이다. 살면서 어려움과 아픔을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나 역시도 지금 몹시 고단한 마음과 몸을 안고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잃어 마치 어디 한 부분이 피를 흘리며 잘려나간 듯한 데다가, 몸도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 큰 고장이 났다. 내 몸을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치 고통스럽다.
베어져 나간 풀이 새로 돋듯, 나도 지금은 새로 돋는 풀이 되어 가고 있다. 풀처럼 그렇게 끈질기지는 못하지만, 시나브로 예전의 모습을 회복해가고 있다. 풀이 혼자 돋는 것은 아니다. 흙이며 물, 바람이 도와준다. 세상은 모든 것이 혼자 고적하게 굴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나도 고통 속을 홀로 헤매도록 버려두지는 않았다. 따스한 도움의 손길이 뻗쳐왔다. 그 도움의 고마움 속에서 다시 살아나가고 있다.
오늘 같은 휴일은 그 손길도 쉬는 날이지만, 그 손길이 잠시 닿지 않을지라도 그 온기는 늘 나를 감싸고 있다. 그 따스함으로 또 하루를 살아간다. 풀은 결코 죽지 않는다. 나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 풀의 언덕을 보듬어 안으며 고요와 평화의 골짜기로 향한다. 베어졌지만 다시 살아날 풀을 보며 걸음도 가볍게 골짜기로 내딛는다. 평화가 안겨 올 골짜기로 든다.
풀은 강하다.♣(2024. 5. 19)
첫댓글 선생님 안녕하시지요? 좀 아파하고 공감하며 좋은 글 감사히 새겼습니다. 언덕을 덮은 푸른 융단을 걷어버린 사진만 보아도 선생님 아린 마음 이해됩니다. 비 한번 내리면 강인한 본성은 무성하게 자라나서 좀 때늦으나마 저마다 별들을 피워내리라 믿습니다. 자연을 자적하시며 同病相憐 “풀은 결코 죽지 않는다. 나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에 손뼉 치겠습니다. 선생님 강녕하게 지내십시오.
제 글이 비로소 완성되었군요~! ㅎ
이 선생님께서 언제 보시나 싶었지요~ ㅎㅎ
풀의 강인성을 처음 안 건 아니지만.
제 몸이 고단하고 보니 풀이 더욱 강해 보이네요.
언제나 부지런하신 선생님, 늘 좋은 일 많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