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다 :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영진스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여러분 어떤 물건이 이렇게 앉아있습니까?
육조 스님께 남악회양 스님이 찾아뵈었을 때
하신 이 물음에 남악회양 스님이
8년간 침식을 잊고 고뇌했습니다.
8년만에 깨닫고 돌아온 남악회양 스님은
육조 스님에게 "설사 한 물건(一物)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육조 스님이 "닦아 증득함이 있느냐?" 하니,
스님이 "닦아서 증득할 건 없지 않으나
물들지는 않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이 문답으로 남악회양 스님은 법 인가를 받게 됩니다.
오늘 사부대중께서는 지금까지 조계사에서 여섯 분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이 문제를 해결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가 나눌 이야기의 주제는 '일체유심조' 입니다.
당나라 때 마조도일 선사 밑에 81명의 선지식이 배출되어
이른 바 '선의 황금시대' 를 이루었습니다.
각처에서 법을 편 이 선사들 가운데
뛰어난 분이 5~6명 계셨는데,
이 가운데 대매법상이란 스님이 계셨습니다.
이 스님은 대매산에서 30년 동안
나오지 않아서 호를 대매라고 한 것입니다.
스님의 게송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베고 버려진 고목이 또한 찬 나무를 의지하니
(摧殘枯木依寒林)
몇 번이나 봄을 만나도 마음 변치 않았던고
(幾度逢春不變心)
나뭇꾼도 오히려 돌아보지 않거늘
(樵客遇之猶不顧)
편수(片手)가 이를 어찌 간절히 찾을까 보냐
(郢人那得苦追尋)
여기서 쓸모없는 나무는 '이뭣고' 화두를 들고
평생 씨름하는 수좌의 모습입니다.
저도 이러한 삶을 살고 잇습니다만,
어떻게 하다 보니 외람되이
선원장 법회에서 설법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수좌들의 삶을 몸소 보여주신 부처님께서는
6년간 고행후 성도하시고 49년간
중생 구제를 위해 법을 설하시다
8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부처님의 탄생게에는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 이유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 三界皆苦 我當安之)
"하늘위 하늘아래 오직 나홀로 존귀하도다.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가 고통 속에 잠겨있으니
내가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 는
이 선언은 인류 최초의 평등선언입니다.
요즘도 4성계급이 뚜렷한 인도에서 그것도
2600여년전에 이러한 선언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목숨을 내건 부처님의 이 선언을
우리는 아주 의미깊게 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아(我)] 가 무엇이길래 존귀할까요?
삼계가 고통속에 있어서 나의 고(苦)를
해결한 것이 불교라고 할 때,
그럼 왜 '고' 인가요?
여러분 돌아가시고 싶으세요?
늙고 병들어 죽고 싶은 분은
아무도 안 계실 겁니다.
이런 고통은 태어남 자체가 원인이어서
날 때부터 고통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죽음 뒤의 세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 뒤의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라면
두렵지 않을텐데 알지 못해서,
무명(無明)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이 무명은 윤회의 원인입니다.
무명만 타파되면 괴로움이 소멸합니다.
따라서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은
마음을 닦아 무명을 밝히는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기에
마음 한번 바로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의 아(我)는
마음이요 불성이자 선(禪)입니다.
그때그때 설명하기 위해 구분한 것입니다.
마음을 밝혀서 알고 보면 마음이란
원래 밝아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선이니 마음이니 하지만
글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말과 글을 빌려서 이야기 할 뿐입니다.
여러분 극락과 지옥이 궁금하세요?
경전에서도 극락과 지옥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만,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 일본의 한 무사(武士)가 노선사를 찾아가
"극락과 지옥에 대해 말씀해 달라" 고 했습니다.
그러자 평소 점잖은 노스님이 그 무사한테
"이놈, 나쁜 놈" 하며 침을 튀기고
핏대를 올리며 욕을 했습니다.
무사가 "그만하세요" 라고 해도
노스님이 더욱 욕을 하자
무사가 큰소리로 경고합니다.
"스님, 한번 더 욕을 하시면 목을 벨 겁니다."
그래도 스님이 욕을 하자 무사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검으로 목을 베려는 찰나, 노스님이 말합니다.
"그게 지옥이야!"
그 말을 듣자 말자 무사가 바로 깨닫고
"스님, 죄송합니다" 하자,
노스님이 이번에는 "그게 극락이야" 라고 말합니다.
지옥과 극락을 이처럼
극명하게 설명한 것은 없을 겁니다.
이처럼 목숨을 내걸고 한 마디
한 예를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지옥과 극락을 설명해 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지옥 명부의 행정착오로
이웃집 노인을 대신해 명부전에 끌려갔다가
무죄임이 입증되자 손해배상 차원에서
지옥과 극락을 구경시켜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지옥에 가보니
일반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소문으로 듣기에는 끓는 물에 몸 담그고
혀를 뽑는 무시무시한 곳인 줄 알았는데
막상 지옥에 가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마침 식사시간이라 사람들이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식사를 하는데,
이상한 것은 하나같이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같이 젓가락이 1m나 되어서 산해진미를
차려놓고도 먹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 청년이 이어서 극락에 가 보니
지옥 하고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화기 애애하고
생기가 넘친 얼굴이었습니다.
음식 먹는 젓가락도 똑같이 긴 것인데,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상대의 입에
서로 넣어주는 것이 달랐습니다.
젓가락 사용법에 따라극락과 지옥이 갈린 것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에 달려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요?
지금 심한 설사가 나신 분들은
제 법문이 하나도 안 들어 올 겁니다.
이처럼 마음이 불편할 때가 지옥이요
더없이 행복하고 즐거우면 그것이 극락입니다.
왜 꼭 죽어서 가는 곳을 따지세요.
현재에 충실해서 바르다면
내생은 저절로 행복할 것이니,
왜 내생을 미리 고민하느냐 이 말입니다.
물론 이 마음을 닦으라는 말도 맞지는 않습니다.
닦을 것도 없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에 대해서는 '마음에 점을 찍는'
점심(點心) 법문을 아니 할 수가 없군요.
당나라 때 덕산 스님은 금강경의 대가로
성은 주가였는데 주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했답니다.
자신의 금강경 실력에 자만하여
당대 유명한 스님과 법거량을 하러 가는
도중에 떡파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노파가 "내가 묻는 질문을 대답해 준다면
스님께 떡을 보시하겠소" 라고 말하자
출출하던 덕산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금강경에 관해서라면 뭐든지 물어보시오.
다 답해 주리다."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금강경의 한 구절)이라 하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 하시오?"
이 한마디에 덕산 스님은 떡파는 노파가
떠날 때까지 한마디도 못하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 점심하시겠습니까?
이 물음에 답한 일화가 있습니다.
경허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만공 스님은
덕숭산에서 선 중흥에 크게 이바지한 선지식입니다.
당시 남쪽의 혜월 스님, 북쪽의 수월 스님,
동쪽의 한암 스님과 함께 널리 법을 펼 때입니다.
만공 스님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한 수좌가
혜월 스님께 공부하러 간 후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더랍니다.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인데
큰스님께서는 어디다 점심하시겠습니까?"
만공 스님이 답하길 "위음왕불(威音王佛, 최초의 부처님)
이전에 점심해 마쳤느니라" 했답니다.
우주가 생기기 전에 이미 점심해 마쳤다는 말입니다.
만공 스님이 이 편지를 부치려 하는데,
수제자인 보월 스님이 그걸 보고
"스님, 그동안 평생 수행한 게
겨우 이겁니까?" 하는 것입니다.
만공 스님이 이 말을 듣자 말자 그 자리에서
침식을 잊고 7일간 좌선했다고 합니다.
만공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신 후
"보월이가 내게 10년 먹을 양식을 꿔주었다" 고 칭찬했답니다.
만공 스님은 다시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자네가 호서지방을 등지고 영남으로 내려간 것은
남아있는 의심을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여우같은 의심을 끊지 못했구나.
이 편지를 읽은 즉시 다시는
의심치 말고 소각해 버리거라."
여러분도 오늘 점심을 드시고
이 법문을 깊이 천착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출가 전에 이미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의심을 가져서 출가해서도 자연스럽게
'이뭣고' 화두를 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뭣고' 가 참 안되더군요.
서양 철학자들은 우주의 근원을
물, 불, 공기, 숫자 등으로 표현하고
동양의 노자는 혼돈일기(混沌一氣)니,
무극(無極), 태극(太極)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둥글고 움직인다' 고 주장했다가
신을 모독한 죄로 사형 당했습니다.
서양의 종교는 지구 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불교는 2600년전에 우주를 바로 본 종교입니다.
금강경의 삼천대천 세계가 무한 우주를 표현한 말입니다.
우주를 감싸는 '허공' 은 안과 밖이 없기에 가장 큽니다.
하지만 이 허공도 나온 곳이 있다고 불교는 말합니다.
<원강경>에 '변허공 각소현발
(無邊虛空 覺所顯發)' 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가없는 허공은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
이라는 이 말은 우주의 근원이 마음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마음이란 닦을 것이 없어서
닦는다는 말도 허물이지만 마음을 찾고
밝히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 동요(파란마음 하얀마음)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마음은 이처럼 정형화된 틀이 아니라
가장 자유로운 것입니다.
깜짝할 사이에 우주도 여행할 수 있지만
문을 닫으면 송곳하나 세울 곳이 없습니다.
불성이라고 표현되는 이 마음을 '여래장' 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 마음이 선악과 시비 등이 나눠지지 않은,
구분 안된 한 덩어리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은 원래 하나이건만 홀연히 일어난
무명 때문에 분별심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무명의 구름 때문에 태양과 같은 마음이
가려질 뿐이어서 따로이 닦아야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수행과정을 통해 부정적인
습기를 녹여 없애면 바위 속에서 금을 얻듯이,
용광로에서 제련된 금이 다시 흙이 되지 않듯이
다시는 어두워지지 않습니다.
근원적으로 이 '부처 마음' 은 윤회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아직 공부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마음을 밝히기 전에는 윤회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광석에서 금을 제련하는 과정이 참선이라고 한다면
먼저, 우리는 큰 믿음을 내야 합니다.
이 대신근(大信根)이란 선지식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선지식에 의지해서 공부하고
점검함으로써 확철대오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왜 요즘은 큰 도인이 적을까요?
선지식에 대한 믿음이 약해서입니다.
남북한을 합해도 40배나 큰 중국 대륙에서
전화도, 기차도 없을 때 선지식이 계시다고 하면
천리 밖을 몇 달이 걸려서라도 찾아갑니다.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구구절절 간절한 믿음을 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렵게 찾아가더라도 뵐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서
마침 그 자리에 계시다면 더없는 기쁨이었지요.
그래서 객실에서 스님끼리 우연히 만나면
생사의 대사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고들 할 정도입니다.
자기의 고뇌가 클 수록 선지식에 대한
믿음이 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큰 믿음으로
"어떠한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을 때
"마른 똥 막대기니라" 할지라도
전체가 '참 의심' 으로 변하게 됩니다.
천 걸음, 만 걸음이 진의(眞疑)를 돈발시키는 것입니다.
이때 선지식이 "마른 똥 막대기니라" 할 때
"마른 똥 막대기가 뭡니까?" 하면 안 됩니다.
큰 믿음과 의정없는 화두는 사구(死句)이기 때문입니다.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없다(無)" 고 했을 경우
여러분은 당연히 의심을 가질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부처님과
조주 스님의 말씀을 모두 믿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일체중성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 스님은 왜 없다고 했을까?"
당연히 의심이 생겨야 합니다.
이 의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당송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는
선지식을 불신하는 병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승오 스님을 찾아가 시험을 해봅니다.
승오 스님이 "시주는 성이 뭡니까?" 하고 묻자,
소동파는 "칭(秤)가 입니다" 라고 답합니다.
큰스님을 저울질(秤) 하러 왔다는 뜻입니다.
"억!"
"이 소리는 몇근이나 됩니까?"
천년전의 소동파도 승오 스님의 이 할에 깜짝 놀라서
"스님, 제가 잘못됐습니다" 하고 반성합니다.
여러분은 선원장 초청법회에
나오는 스님들 저울질 하지 마세요(웃음).
여러분, 화두가 잘 안될 때는 화두를 바꿔도 될까요?
저의 경우는 화두가 얼마나 안되든
'이뭣고' 를 하다가 몇분도
지나지 않아 화두가 자꾸 끊겼습니다.
그래서 내 맘대로 '무자' 화두로 바꿔 보았습니다.
글쎄, 무자 화두를 들었더니
'이뭣고' 가 들리는 게 아닙니까.
바위에 잔디가 눌려있다가도 끝내 뻗어 나오듯이
'무자' 를 하는데 '이뭣고' 가 되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저는 죽어도 '이뭣고'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라도
'어째서 이뭣고가 무(無)라 했을까'
이런 화두를 들면 안됩니다(웃음).
여러분 생과 사는 하나입니다.
형상이 없는 물이 기체, 고체,
액체가 되듯이 자유로운 것입니다.
구름, 이슬, 서리였던 물이 바위를 만나면
돌아서 흘러가고 그릇을 만나면 담겼다고,
사람이 마시면 입으로 들어가지만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이 바뀔 뿐 질량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과 사도 모양이 바뀌어
무상할 뿐 본질인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이 법신(체), 보신(상),
화신(용)으로 나눠지듯이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생사와 관련해서 제가 존경하는
나옹혜근 스님의 글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사라짐
(念起念滅)을 생사(生死)라 한다.
생사의 흐름 속에서 있는 힘껏 화두를 들어야 한다.
화두가 한길로 이어지면 모든 일어나고
사라짐이 바로 없어지는데 이를 고요(寂)라고 한다.
이 고요함 속에서 화두가
사라짐을 무기(無記)라고 하며
고요함 속에서도 화두가 밝으면 신령하다고 한다.
이 '텅비고 고요하며 신령한 앎'(空寂靈知)이
무너지거나 뒤섞이지 않게 할 것이니,
이렇게 공부하면 머지 않아 깨치게 될 것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간절하고도
끊어지지 않는 믿음과 의정은
공부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한 나그네가 밤에 활을 메고 가다가 큰 바위가 나타나자
호랑이 인줄 알고 깜짝 놀라 활을 쏘앗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활을 당겼더니
'퍽' 소리가 나서 바위에 꽂혔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화살은 호랑이인지 바위인지
아리송 해서 바위에 부딪치자 말자
화살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생사문제에 부딪쳐 무심으로
활을 당겼을 때만 화살이 바위를 뚫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랑이가 작은 짐승을 잡을 때도
납작 엎드렸다가 온 힘을 다해 덮치듯이,
사막에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간절하게 답을 찾아야 합니다.
공부의 가장 큰 힘은 '간절 절(切)' 자에서 나옵니다.
간절함이 있으면 아무 잡념도 안 들어와요.
하지만 이 잡념은 없애려 하지 말고
내버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관여치 말고 뒷 꽁무니만 보면 저절로 사라집니다.
선방에서 스님들이 정진하다가 어느 기간에는
일주일씩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는데,
정진이 끝나면 두 부류의 스님들로 나뉩니다.
'아, 끝났구나' 하고 홀가분해 하는 스님들과
남몰래 통곡하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용맹심과 분심을 이렇게 내야 합니다.
"너(역대 조사들)도 장부면 나도 장부다.
나라고 못할소냐. 다만 하지 않을 뿐이요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춘성 스님이 망월사에 주석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20세 연하인 성철 스님이
망월사 선방에서 정진한 적이 있는데,
춘성 스님은 성철 스님이 잠 안자고 공부한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방선 시간 후 늦은 밤에 객실 문구멍으로 들여다보았는데,
젊은 수좌가 앉아 있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답니다.
자신의 나태함을 자책한 춘성 스님은 그때부터 대중
생활만하고 남이 잘 시간에 몰래 잠 안자고 공부를 했답니다.
당나라 때 계현(誡賢)-신찬(神讚) 스님
사제간의 이야기도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제자인 신찬 스님이 어느 날 계현 스님을 떠나
백장산의 도인 백장 스님을 찾아가
공부한 후 견처를 얻고 3년만에
스승의 은혜를 갚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하루는 신찬 스님이 목욕물을 데워 스승의 등을
밀어드리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법당은 좋다만은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스승이 듣고 말했습니다.
"영험은 없어도 방광(放光)은 잘하느니라."
서로 웃고 목욕을 마친 후 스승은 한숨
주무시더니 일어나서 글을 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벌 한 마리가 방안에 들어왔다가
나가지 못하고 창에 부딪혀 방바닥에 떨어지곤 했는데,
그걸 본 신찬 스님이 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공(空)의 문으로 나갈 줄을 모르고(空門不肯出)
크게 어리석어 창만 뚫으려하고 있구나(投窓也太痴)
100년을 낡은 종이 만 뚫으려 하니(百年鑽故紙)
어느 세월에 머리가 나가리오(何日出頭時)
이 게송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친 스승은
법좌를 마련하고 상좌의 법문을 청해 들었다고 하니,
후세 많은 구도자들의 좋은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위의 글에서 '공문(空門)' 이란 참선 공부를 말합니다.
참선하지 않고 경전만 공부한다면
어느 세월에 생사해탈하겠습니까?
그동안 많은 선사님들의 법문을 들었으니
선에 깊이 천착하셔서 나고 죽음에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가장 행복한 공부' 無量光明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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