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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없는가?
하나님의 이름은 ‘히브리’어
성경, 즉 “구약”에서 요지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그 이름의 발음을 중단하긴 하였지만, 그들은
성서의 오래된 사본들을 복사할 때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그 이름을 삭제하지는 못하였읍니다.
따라서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어느 이름보다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즉 “신약”의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계시록」(성서의 마지막 책)의 사본들에는 이름의 단축형인 “야”(“할렐루야”라는 말 속에)의
형태로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읍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고는
「마태 복음」에서 「계시록」까지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고대 희랍어 사본 중에는, 온전한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이 희랍어 성서에 없었다는 의미입니까?
예수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의 중요성을 인정하였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것을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의 사본들이 원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 ‘누가’ 및 다른 성서
필자들에 의해 기록된 실제 책들은 많이 사용되어서 속히 닳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본들을 만들었고 그 사본들이 닳아 없어지면 그 사본들의
사본들을 또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했을 것으로 충분히 기대할 수 있읍니다.
왜냐하면 사본들은 대개,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사본이 수천개가
있지만, 대부분이 통용 기원 4세기 중이나 후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즉 제 4세기 이전에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의 본문에 어떤 일이 생겨서 하나님의 이름을 빼버리는
결과가 있게 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들은 그런 일이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그 이름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사도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하나님의 이름을 포함시켰음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그 복음서를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제 4세기에, ‘라틴’어 「벌게이트역」을 번역한 ‘제로움’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읍니다.
'레위’이기도 하며 세리 출신으로서 사도가 된 ‘마태’는 우선
무엇보다도 ‘유다’에서 ‘히브리’어로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작성하였다.
그 후에 누가 그것을 희랍어로 번역하였는지는 충분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더우기, 그 ‘히브리’어본 자체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이사랴’에
있는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히브리’어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마태’가 특히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는 “구약”의 부분들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두번째 부분의 다른 필자들은
전세계의 독자를 위해 그 시대의 국제적인 희랍어로 기록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원 ‘히브리’어 기록이 아니라 희랍어 「칠십인역」에서 인용하였읍니다.
그리고 ‘마태’의 복음서까지도 결국 희랍어로 번역되었읍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희랍어 기록들에 나와
있었읍니까?
실제로 예수 시대에 존재했던 「칠십인역」의 아주
오래된 파편들의 일부가 우리 시대에까지 남아 있으며,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 그 파편들에 나온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신약 신학 신 국제 사전」(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2권, 512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최근의 원문의 발견들은 「칠십인역」의 편찬자들이
‘테트라그람마톤’인 YHWH를 ‘키리오스’로 번역했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게 한다.
현재 우리가 입수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칠십인역」 파편들에는 희랍어 원문에 ‘테트라그람마톤’이
‘히브리’어 글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관습을 그후 기원 제
1세기의 ‘유대’인 구약 번역자들까지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읽든 희랍어 성경을 읽든, 하나님의 이름을
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조오지아’ 대학교의
‘조오지 하워드’ 교수는 이러한 설명을 하였읍니다.
“신약 교회가
사용하고 인용한 「칠십인역」에 하나님의 이름의 ‘히브리’어 형태가 들어 있을 때, 신약 필자들은 틀림없이 그들의 인용문에 ‘테트라그람마톤’을
포함시켰을 것이다.” (「성서 고고학 평론」(Biblical Archaeology Review), 1978년 3월호, 14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어떤 권위가 그들에게
있었겠읍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구약”의 희랍어 번역판들에
잠시 더 남아 있었읍니다.
기원 제 2세기 전반기에, ‘유대’인
개종자 ‘아퀼라’는 ‘히브리’어 성경의 새로운 희랍어 번역판을 만들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고대 ‘히브리’어 글자로 된
‘테트라그람마톤’으로 표기하였읍니다.
제 3세기에, ‘오리겐’은
“그리고 가장 정확한 사본들에는 그 이름이 ‘히브리’ 글자로, 그러나 오늘날의 ‘히브리’ [글자]가 아니라 아주 고대의 글자로 나와 있다”고
기록하였읍니다.
심지어 제 4세기에도, ‘제로움’은
「사무엘」과 「열왕기」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읍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고대 글자로 표기된 하나님의 이름 즉 ‘테트라그람마톤’을
특정한 희랍어 서적들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이름의
삭제
그러나, 이 때쯤에는 예수께서 예언하신 배교가 틀잡혀
있었고 그 이름이 사본들에 나와 있긴 하였지만 점점 덜 사용하고 있었읍니다. (마태 13:24-30; 사도 20:29, 30)
결국, 많은 독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조차 못하였으며
‘제로움’은 그의 시대에 “어떤 무식한 자들은 글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희랍어 서적에서 [‘테트라그람마톤’]을 발견하면 ΠΙΠΙ 라고 읽는 것이
예사였다”고 보고합니다.
[칠십인역]의 후기 판들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삭제되었고 “하나님”(“데오스”) 및 “주”(“키리오스”)와 같은 단어들로 대치되었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포함된 「칠십인역」의 초기 파편들과 하나님의 이름이 삭제된 「칠십인역」의
그 동일한 부분들의 후기 사본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읍니다.
“신약” 즉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에도 동일한 일이 발생하였읍니다.
‘조오지 하워드’ 교수는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히브리’어 형태가 「칠십인역」에서 희랍어 대용어들에게 밀려나 제거되었을 때,
또한 「칠십인역」의 신약 인용문에서도 그것이 제거되었다. 오래지 않아서 하나님의 이름은 이방인 교회에서는 사라지게 되었고, 겨우 단축형 대용어로
나타내지거나, 이따금 학자들에 의해서 기억될 뿐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지 않으려고 한 한편, 배교한 그리스도교 교회는
성서 양쪽 부분의 희랍어 사본들에서, 그리고 다른 언어 번역판들에서도 그 이름을 완전히 삭제해 버리고
말았읍니다.
이름의 필요성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결국 그 이름은 ‘히브리’어 성경의 많은 번역판들에 회복되었읍니다.
그러나 희랍어 성경은 어떠합니까?
성서 번역자들과 연구생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없이는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의 어떤 부분들이 올바로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읍니다.
이름을 회복시키는
것이 영감받은 성서의 이 부분을 더 명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한 말을 고려해 봅시다.
「흠정역」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읍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을
것이다.” (로마 10:13)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까?
예수가 종종 “주”로 일컬어지고 심지어 한
성귀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그대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이 여기에서 예수에 관해 이야기한 것으로 결론지어야 합니까?―사도 16:31,
흠정역.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결론지어서는 안 됩니다. 「흠정역」의 로마서 10:13의 난외 참조는 우리에게
‘히브리’어 성경 요엘 2:32을 지적해 줍니다.
만일 그 참조문을
조사해 본다면, 당신은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사실상 ‘요엘’의 말을 인용한 것이며 ‘요엘’이 원 ‘히브리’어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개역 한글판)고 말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것은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야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읍니다.
이러한 예는 희랍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한 것이 많은 사람들의 정신 속에 예수와 여호와에 대한 혼동을 크게 불러 일으켰음을 입증해 줍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읍니다!
그 이름은 회복되어야
하는가?
현존하는 사본들에 그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번역자에게 과연 그 이름을 회복시킬 권리가 있읍니까?
그렇습니다.
번역자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읍니다.
대부분의 희랍어 용어 사전들은 성서에서 “주”라는 단어가 종종 여호와를 가리키는 말임을
인정합니다.
예를 들어, ‘로빈슨’의 「희영 신약 사전」(A
Greek and 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1859년 인쇄)은 희랍어 단어 ‘키리오스’(“주”) 이하
부분에서, 그 단어가 “최고의 주 및 우주 주권자로서의 하나님, 보통 칠십인역에서 ‘히브리’어로 여호와”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필자들이 초기 ‘히브리’어
성경을 인용한 곳에서, 번역자는 ‘히브리’어 원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는 경우에는 언제나 ‘키리오스’라는 단어를 “여호와”로 번역할 권리가
있읍니다.
많은 번역자들이 그렇게 하였읍니다.
적어도 제 14세기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의
‘히브리’어 번역판들이 다수 만들어졌읍니다.
번역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구약” 인용문들이 나올 때 어떻게 하였읍니까?
종종, 그들은 본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회복시키지 않을 수 없음을 느꼈읍니다.
‘히브리’어로 번역한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의 부분역 혹은 전역판
다수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읍니다.
현대어로 번역한
역본들, 특히 선교인들에 의해 사용된 역본들이 이러한 본을 따랐읍니다.
그리하여 희랍어 성경의 많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어 및 태평양 섬 언어
번역판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자유로이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독자들은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읍니다.
그 이름은 ‘유럽’어의 번역판들에도 나오게
되었읍니다.
합당한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담대하게
회복시킨 한 가지 번역판은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New World Translation of the Christian Greek
Scriptures)일 것입니다.
최근에는 13개 현대 언어로 볼
수 있게 된 이 번역판은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는 ‘히브리’어 성경 부분이 희랍어 성경에 인용될 때마다 그 이름을 회복시켰읍니다.
그 번역판의 희랍어 성경에는 그 이름이 모두 합쳐 237회 나오는
데는 건전한 근거가 있읍니다.
그 이름에 대한
반대
성서에 하나님의 이름을 회복시키려는 많은 번역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 이름을 제거하려는 종교적인 압력이 있어 왔읍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서에 그 이름을 남기긴 하였지만, 그 이름을 발음하지 않으려 하였읍니다.
제 2, 3세기의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은 희랍어 성서 사본들의
복사판들을 만들면서 그 이름을 삭제하였고 성서 번역판들을 만들면서 그 이름을 빼버렸읍니다.
현대 번역자들은 심지어 그 이름이 거의 7,000번이나 나오는 ‘히브리’어 원문에 기초한 번역을
할 때에도 그 이름을 삭제하였읍니다. (그 이름이 1984년판 「신세계역 성경」의 ‘히브리’어 성서 부분에는 6,973회
나온다.)
여호와께서는 성서에서 자기 이름을 삭제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만일 당신이 저자라면, 당신이 저술한
서적에서 서슴없이 당신의 이름을 삭제한 사람에 대해 어떻게 느낄 것입니까?
발음 문제나 ‘유대’인의 전통 때문에 그 이름에 반대하는 번역자들은 예수께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고 말씀하신 자들에 비할 수 있읍니다. (마태 23:24)
그들은 이러한 보다 작은 문제들에 걸려 넘어지지만, 우주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의 이름을 그분의
영감받은 책에서 삭제함으로써 결국 중대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만 것입니다.
시편 필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읍니다.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시
74:10.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뜻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소개할때 스스로 있는자라고 했지요 이것은 여호와라는 단어의 문자적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언약대로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 라고 말하는 것은 문자적 뜻을 말하는 것이고 의미라는 것은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모든 과정의 논리적 흐름에서 파악된 것입니다. 신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없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말라" 라는 계명에 열심이던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이름 대신 별칭을 사용했는데 그것이 "아도나이"(히)로서 바벨론 포로해방 이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이 칭호는 우리말로 하면 "주님" 이라고 번역되고 신약성경에서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한다면 여호와라고 칭해야 할 부분에서 주님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한가지만 비교해보겠습니다. 구약 시편 32:1-2 "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 신약로마서 4:7-8 "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 위의 글중에서 시편은 구약이고 신약 로마서는 구약의 언약을 인용한 글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을 "주" 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 처럼 신약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넣어야 할곳에서 주로 번역 했을뿐 그 이름이 사라진것은 아닙니다.
신약에서 여호와란 이름이 없는 이유?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뜻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소개할때 스스로 있는자라고 했지요
이것은 여호와라는 단어의
문자적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언약대로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 라고 말하는 것은 문자적 뜻을 말하는 것이고 의미라는 것은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모든 과정의 논리적 흐름에서 파악된 것입니다.
신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없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말라" 라는 계명에 열심이던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이름 대신 별칭을 사용했는데 그것이
"아도나이"(히)로서 바벨론 포로해방 이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이 칭호는 우리말로 하면
"주님" 이라고 번역되고 신약성경에서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한다면 여호와라고 칭해야 할 부분에서 주님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한가지만
비교해보겠습니다.
구약 시편 32:1-2
"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
신약로마서 4:7-8
"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
위의 글중에서 시편은
구약이고 신약 로마서는 구약의 언약을 인용한 글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을 "주" 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 처럼
신약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넣어야 할곳에서 주로 번역 했을뿐 그 이름이 사라진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없는 이유
샬롬! 문의하신 내용에 대해 답변을 드립니다.
신약성경에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 성경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모두 '주'(主)를 뜻하는 '퀴리오스'라고 표기했습니다.
② 신약성경 역시 헬라어로 기록되어 <70인역>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③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예외없이 '주'(主)를 뜻하는 '퀴리오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모두 '주'(主)로 표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번역성경에는 구약성경에도 '여호와'라는 이름 대신 '주'(主, Lord)로 표기한 성경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이 하나님의 이름을 'Jehovah' 대신 '주'(主)라는 뜻을 가진 'Lord'라고 표기했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을 'Jehovah'로 표기한 영어성경은 ASV(미국표준판), RV, Darby 등 일부에 불과합니다.
개역성경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로 표기한 것은 ASV의 영향입니다. ASV가 개역성경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죠. 그리고 개역성경을 현대어로 번역한 표준새번역 성경도 하나님의 이름을 모두 '주'(主)라고 표기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히 밝혀둘 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은 구약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부른 정확한 발음이 아니라 추정상의 발음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마소라학파가 모음부호를 히브리어 자음에 추가할 때 'YHWH'라는 히브리어 자음에 '주'(主)를 뜻하는 '아도나이'라는 모음을 결합함으로써 생겨난 것입니다(참고로 히브리어는 자음만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모음부호가 없으면 읽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른 하나님의 명칭과 동일한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본래는 '야훼'로 발음되던 것이 종교개혁 후로는 '여호와'로 불리게 되었고 근래에는 '야훼'가 '여호와'보다 더 정확한 발음임이 입증되어 공동번역 성경에는 하나님의 명칭을 '여호와' 대신 '야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른 하나님의 명칭이 왜 정확하게 전해지지 못했을까요? 유대인들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십계명의 제3계명을 너무 철저하게 지키려고 한 나머지 기원전 300년경부터 이것을 전혀 발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주'(主)를 의미하는 '아도나이'로 읽었습니다. 이의 영향으로 후대에는 히브리어 네 자음(YHWH)으로 표기한 하나님 이름의 원래 발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는 22개의 자음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음이 없어서 발음이 구전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발음을 하지 않으면 원래의 명칭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상으로 '여호와'라는 명칭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어느 하나만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즉 '여호와'라고 불러도 되고 '주'(主)라고 불러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나 '주'(主)나 모두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경전화 과정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하나님도 유일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며 그런 견해는 옳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말해 그리스도교의 유일신관은 ‘삼위일체론적 유일신’(Trinitarian Monotheism)관이다. 이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그에 앞선 신앙적 모태인 유대교와 분리되어 그리스도교로서 독립하여 세계 보편 종교의 하나로 발전해 간 여러 가지 동기와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위일체론’이라는 신관이 정립된 것을 들 수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유일신 신앙을 철저히 견지하는 종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삼위일체론이라는 매우 난해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진의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데에 그 관건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이라는 교의가 공식적으로 교회 공의회에서 정립된 것은 325년이기 때문에, 그 이전 300년 동안 이어져왔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발전 과정, 그리고 『신 ․ 구약성경』의 확립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창세기」를 비롯한 『구약성경』39권과 「마태복음」을 비롯한 27권의 『신약성경』을 통산하여 66권으로 구성된 『신 ․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개신ㄴ교와 달리 몇 가지 경외전(經外傳)을 인정하고 있다. 『신 ․ 구약성경』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 민족의 유대교 경전을 받아들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새 약속’[新約]이라는 전제 아래 유대교 경전 속에 포함된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들이 ‘옛 약속[舊約]’이라는 신앙적 해석과 판단을 내린 결과이다. 그러나 유대교 입장에서는 그런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경전을 『구약성경』이라고 부르지 않고 『율법서-예언서-성문서집』(Torab-Nebiim-Ketbubim)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교 경전의 일부인 『구약성경』의 내용을 보면 「창세기」1장에 천지 창조 이야기, 12장엔 기원전 1850년 전후에 살았던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오며, 「출애굽기」는 기원전 1250년 전후에 활동했던 모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구약성경』이 매우 일찍 이스라엘 백성의 경전으로 집대성되었을 것이라는 오해를 갖게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대교 경전이 문자로 집대성되고 경전으로서 최종 확정된 것은 대체로 기원전 600년 이후의 일이며, 유대교 정경(正經)으로 확정된 것은 ‘모세 오경’(율법서)이 기원전 400년 전후, 예언서는 기원전 200년 전후, 그리고 「시편」등 성문서집은 서기 90년 전후이다.
물론 문서로 집대성되고 정경으로 확정된 시기가 그렇다는 말이지, 그 내용들은 구전을 통해서 또는 파피루스나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에 문자로 쓰여진 자료들 속에 간직되어 멀리는 2천 년 전부터, 가깝게는 기원전 600년까지, 따로따로 전승 자료 속에 담겨 이스라엘 백성과 그 주위 문화유산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단군 신화의 내용이 한 민족 역사 속에서 오랜 옛날부터 구전되어 왔지만, 중국을 지배한 몽골의 한반도 침략으로 국운이 시련을 당하던 13세기 고려 충렬왕 때의 승려 일연(一然)에 의해 『삼국유사』에 문자로 기록된 경우와 비슷한 것이다.
유대교의 경전은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는데, 헬레니즘 시대 때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쳤다. 세계사 속에서 헬레니즘 시대란 연대기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 그의 제국 휘하 장군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는 시기부터 로마제국이 알렉산더제국의 영토 일부인 이집트를 합병할 때까지(기원전 323~30) 약 300년 동안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단순히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헬라(그리스)의 철학, 과학, 문화 및 생활 약식과 가치관 일반이 알렉산더제국 영토 각 지역에 보편적 문화양식 내지 가치로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제국의 영토는 지금의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포함한 지중해 연안 도시들과 이집트, 마케도니아 지역 전체, 터키, 이란과 이라크 지역,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그리고 시리아와 레바논, 이스라엘 지역 전체를 포함하였다. 헬레니즘 문화는 헬라어를 만국 공용어로 사용하면서 그리스 정신, 그리스 생활양식, 그리스적 예술과 문화가 보편적 문화로서 풍미하던 시기를 말한다. 이 무렵 유대인들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았는데, 특히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는 헬라계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많았고, 때문에 유대인의 후손은 헬라어로 번역된 경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5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계 유대인 장로 70인이 모여 히브리어로 쓰여진 유대교 경전을 헬레니즘 세계의 보편적 국제어였던 헬라어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는데, 이를 『70인역』(Septuagint, LXX)이라고 부른다. 자연스럽게 이 『70인역』은 헬라계 유대인들(Hellenistic Jews)에게 크게 환영을 받으면서 절대적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읽었던 성경도 이 헬라어 역본이었다고 학자들은 판단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초대 신도들도 이 헬라어 역본의 『구약성경』을 읽었다고 학자들은 결론 내린다.
야훼-여호와-하나님 호칭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서 야훼(Yaweh)라고 표기된 히브리어 신 호칭이 나타나는 곳은 『70인역』헬라어 경전에서는 모두 ‘큐리오스’(主, Kyrios)로 번역되었다. 그 이유는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브리어 성경을 읽을 때, 감히 ‘야훼’(Yaweh)라고 읽지 못하고 히브리어로 ‘아도나이’(主, Adonay)라고 발음하여 읽었으므로, ‘아도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큐리오스’로 번역하여 일게 된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도들의 대부분은 1970년대 새로 번역한 『공동성경』번역본에 표기된 ‘야훼’라는, 히브리어 발음으로 표기된 ‘하나님 이름’을 접하고 거부 반응을 보였다. 오랫동안 익숙한 『한글개역성경』(1937년 완간)에서 ‘여호와’라고 표기된 유일신 하나님 이름이 갑자기 ‘야훼’라고 변경되어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야훼’와 ‘여호와’가 종교가 다른 유일신인 것은 아니다. 두 이름 모두가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들었고 예언자들이 선포하던 이스라엘의 유일신 이름인데, ‘야훼’가 ‘여호와’로 잘못 일컬어져 굳어져버린 경위는 다음과 같다.
본래 이스라엘의 경전(모세 오경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집)이 문자로 기록될 때 사용된 원어가 히브리어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원래 히브리어는 자음만 있고 모음은 없는 문자였다. 그리하여 경전을 낭송할 때 히브리어 발음의 다양성이 큰 문제가 되었다. 성경을 정확하게 낭독할 수 있도록 새로운 모음 기호를 제정한 것은 이스라엘의 맛소라 학파에 의해서이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것을 ‘맛소라 모음 기호’라 부른다.
경전 단어 하나, 구절 하나마다 유일신 하나님의 계시적 진리가 신비롭게 나타나 있다고 믿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를 ‘여호와’라고 잘못 발음할 리가 없다. 그들은 ‘야훼’(YHWH)라는 네 글자로 이루어진 히브리어 단어가 나오면 ‘아도나이’라고 금방 바꾸어 대체하여 읽곤 했다. 유일신 이름을 직접 입으로 발음하여 부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여호와’라는 유일신 발음이 발생하게 된 것은 히브리어 자음인 ‘야훼’(YHWH)와 ‘아도나이’(Adonay)라는 히브리 모음이 혼합하여 ‘예호와’(YeHoWaH)라는 혼성어 발음이 생기게 된 데 기인하고, 이 혼성어 히브리 발음의 영어 발음식 표기가 13세기 무렵부터 나타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영어식 알파벳으로 표기된 것이 ‘예호와’(Jehova)이고, 그것의 한글 발음 표기가 ‘여호와’로 된 것이다.
그것이 왜 『신약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성경』속에서 ‘야훼’라는 가장 중요한 신 호칭을 한 번도 발견할 수 없는가 하는 직접적 이유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읽는 『구약성경』엔 왜 ‘여호와’라고 인쇄되어 있는가에 대한 언어학적인 역사 과정과 거기에 얽힌 신앙적 이유인 것이다. ‘야훼’와 ‘여호와’는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체험하고 불렀던 동일한 유일신 이름이었다는 것과, 히브리어의 본래 발음에 더 충실한 발음과 표기법은 ‘야훼’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한글판 『신약성경』에는 ‘야훼’도 ‘여호와’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호칭할 때는 거룩하신 ‘주 하나님’ 또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이름을 부르면서 감지하던 ‘두렵고 떨리며 황홀한’ 영적 체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실상이다.
뿐만 아니라 ‘야훼’라는 신 호칭을 그 이름 자체가 담고 있는 초월적 의미, 신성, 권능을 이해하고 감지하면서 읽으려면 히브리 언어를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신앙 고백적인 ‘삶의 자리’ 혹은 ‘종교적 맥락’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헬레니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헬라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혹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은 그러한 ‘삶의 자리’로 전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해석학적 삶의 자리 변환이 일어나지 않은 채 단순하게 신 이름만 ‘야훼’라고 부르면, 낯선 외래의 신 이름이 전통적 신명을 대체한 형국이 되어버리고, 본래 모세와 예언자들이 ‘야훼’라고 부르면서 느끼던 영적 체험은 증발되어 버린다.
전문 학자에 의하면 기원전 540년 무렵 제2이사야 때에 이르러 ‘야훼’가 유일신으로 확고하게 인정되고 이로써 이스라엘 종교사에 철저한 유일신관이 확립되나, 유일신의 거룩한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두렵고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은 더욱 보편화되어 갔다. 느헤미야(기원전 444~432년) 시대인 기원전 5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이르면 이스라엘 백성의 고유한 유일신의 명칭인 ‘야훼’가 더 이상 쓰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구약학자 폰 라드도 1세기 무렵에 유대인들의 회당에서는 이미 ‘야훼’라는 신 호칭이 사라졌고, 단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것도 특별한 기회에만 사용되었다고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도덕경』 제1장에서 갈파한 대로 ‘절대적 진리 자체’, ‘유일하신 하나님’ 또는 ‘유무를 포함한 참 도(道)’는 인간 문화사 속에서 형성된 문자나 발음에 매여 있는 제한된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류 종교사 속에 나타난 다양한 유일신 이름들(야훼, 알라, 브라만, 도, 하눌님 등)은 신비 자체, 진리 자체, 존재 자체이신 언표 불가능한 절대 포괄자로서의 ‘궁극적 실재’가 구체적인 인간 공동체들의 ‘삶의 자리’, 곧 그들이 처한 정치적 ․ 역사적 ․ 문화적 ․ 자연 환경적 맥락 속에서 계시된 ‘궁극적 실재’를 이해하고 응답한 해석학적 반응인 것이다.
구체적 구원 경험과 진리 체험을 현실적으로 알게 하는 구체적인 신의 이름들은 해당 인간 공동체 안에서 심원하고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어느 특정 문화 공동체의 신 이름만이 ‘참하나님’의 이름이고 다른 문화 공동체에서 표기된 신 이름은 우상의 이름에 불과하다는 단순 논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성숙한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만약 그런 논리가 기승을 부린다면, 고대 모세 시대처럼 21세기에도 다양한 신들의 이름을 가진 문명들간의 ‘문명 충돌’과 ‘종교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 전통을 귀중하게 여기고 자기 종교에 충실한 열린 신앙심과, 맹목적이고 반지성적인 종교적 광기를 뜨거운 신앙심이라고 착각하는 닫힌 신앙심은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 일은 개인의 선택에 맡길 문제가 아니고, 21세기를 살아갈 성숙한 종교인이라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진리의 덕목 문제이다.
여호와가 사라진 신약성경
여호와(hwhy)란 단어는 구약성경에 6828번 나타난다. 이 숫자는 하나님(엘로힘)이란 보통명사가 구약성경에 2600번 정도 나타나는데 비해 훨씬 많은 숫자다. 그러나 이렇게 많이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hwhy)가 영어 신약성경이나 우리말 신약성경에서는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리를 예수님에게 내어주셨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영원불변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약시대에 사라졌을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언급은 되어야 할 텐데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은 어찌된 일일까? 이 문제가 만일 신약성경 번역자의 잘못으로 이런 결과가 생겼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책이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하게 쓰지 못하고 모두 다른 이름으로 썼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어쩌면 신약의 내용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 수 있으며 나아가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신론과 기독론에 있어서 상당한 혼란을 야기시킨 내용일 수도 있다. ‘여호와’로 번역되어야 할 단어가 ‘주님’으로 번역되어서 그 주님이란 단어가 예수님으로 인식되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성경의 ‘여호와’가 칠십인역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가?
먼저 이 문제를 위하여 히브리어성경의 ‘여호와’가 칠십인역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를 한번 살펴보자. 여기서 사용하는 본문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은 바이블웤스의 BHS Hebrew Old Testament (4th Ed.)이고 헬라어 성경은 Bible Works Greeks LXX/BNT이다. 우리말 번역은 필자의 번역이며 히브리어 신약성경은 Salkinson-Ginsburg Hebrew NT이다.
1. 칠십인역은 히브리어성경의 여호와를 ‘큐리오스’로 번역하곤 하였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헬라어성경은 여호와를 번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창세기 2장 8절에서는 여호와(hw"hy>)를 큐리오스(ku,rioj)로 번
(처음에
,
(처음에
2. 칠십인역은 아도나이(yn"doa])를 큐리오스(ku,rioj)로 번역하였다. 아도나이(yn"doa])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사자를 직접 보고 부를 때 쓰는
yn"doa]
an"-la; ~h,lea] jAl rm,aYOw:
WTT
Genesis
(처음에
BGT
Genesis
3. 칠십인역은 아돈(!IwOda])도 큐리오스(ku,rioj)로 번역하였다. 아돈(!IwOda])은 종이 주인을 부를 때 또는 자신보다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을 부를 때 자신을 낮춰서 부르는 호칭이다. 찬양들 110:1은 여호와와 아돈이 같이 나오는 경우이다. 칠십인역은 구별하지 않고 둘 다 큐리오스로 번역하였다.
(예)
(예호슈아
(찬양들 110:1) 다뷛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신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등상에 둘때까지 내 오른 편에 앉아 있어라
(처음에
히브리어성경의 ‘여호와’나 ‘아도나이’나 ‘아돈’은 칠십인역에서 ‘큐리오스’란 단어로 번역되었다.
위의 예들을 통하여 구약성경에 있어서 히브리어성경의 여호와나 아도나이나 아돈은 칠십인역에서 각각 다른 단어로 번역되지 않고 큐리오스란 한 단어로 번역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왜 칠십인역이 이 단어들을 각각 다른 단어로 번역하지 않고 큐리오스란 한 단어로 모두 번역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 히브리어 세 단어의 뜻이 각각 다른데도 불구하고 칠십인역은 큐리오스란 한 단어로 모두 다 번역하였다. 따라서 칠십인역에 있어서 ‘큐리오스’란 단어의 뜻은 ‘여호와’와 ‘아도나이’와 ‘아도니’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그 문맥에 따라서 큐리오스의 뜻이 분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 큐리오스란 단어는 어떻게 번역되었는가? 그러나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가?
신약에 있어서 큐리오스란 단어는 717번 등장한다. 영어성경과 우리말성경은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주님(Lord) 또는 주인(lord)’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칠십인역의 ‘큐리오스’란 단어가 여러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처럼 신약에 쓰여진 큐리오스도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단어인 ‘큐리오스’는 기계적으로 주님이라고 번역되어서는 안되고 그 문맥에 따라서 ‘여호와’ 혹은 ‘주님’ 혹은 ‘주인’ 혹은 ‘어르신’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큐리오스가 여호와로 번역되어야 하는 경우
(마태
마태복음 22장 44절은 시편 110편의 구약인용구절인데 개역판 한글 시편 110편에서는 분명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나 개역판 한글 마태복음에서는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라고 번역하였다. 이런 경우에는 구약의 본문 그대로 ‘여호와께서’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BGT
Matthew
(마태
요셒이
예수님의 탄생을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계시 받는 장면이다.
개역한글에서는
‘주'의
사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주’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성자 예수님을 가리키는지 상당히 모호하다.
사건상황으로
볼 때 ‘주의
사자’보다는
‘여호와의
사자’가
더 정확하고 분명한 표현이다.
이렇게
여호와로 번역되어야 하는 경우가 마태복음에서만
16군데
정도 발견된다
(마태
2 큐리오스가 ‘주인’으로 번역되는 경우
BGT
Matthew
(마태
이 구절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중 일부다. 여기서의 큐리오스는 종과 주인 중에서 주인(아돈)을 뜻한다.
물론
이외에 큐리오스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 쓰일 때가 마태복음에서
28번
있다(마태
신약전체에 큐리오스가 717번 나타나는데 이중에 얼마나 여호와로 번역되어야 할까? 헬라어 신약성경을 헬라어 단어 그 자체만을 놓고 기계적으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히브리어성경을 통하여 그 단어의 뜻을 충분히 알고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히브리어성경과의 연속성을 생각한다면 신약성경에서 갑자기 ‘여호와’란 단어가 사라진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더욱이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모두 다 유대인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여호와란 단어가 신약시대에 와서 그들의 머리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신약성경에서 사라진 '여호와'
여호와란 칭호는 신약에서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본 성도라면 구약 성경에
그토록 많이 나오는 하나님의 성호 "여호와"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겼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 글을 쓰기로 마음을 정하고 다시 점검하여 보았는데, 구약에서 5909번 나오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신약에서는 마태복음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들은 목회자에서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기도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이 감히 부르지 못하고 "아도나이"라고 대신 부르던 그 성호를 오늘의 성도들은 뭔가 더 신앙적이고 다분히 권위적인 분위기를 위하여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성호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신앙태도는 적절한 것일까요?
저는 왜 신약 성경에 여호와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가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신약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표현을, 오늘의 성도가 기도 중에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와 메시아 강림의 약속이 성취된 신약에서의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질적으로 현격하게 다릅니다. 먼저 관계 변화의
추이를 도표로 만들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창세 |
에덴
동산 |
범죄
후 | |
하나님 (여호와) |
창조주 |
동산
주인 |
심판주 |
인간 |
피조물 |
청지기 |
죄인 |
후 | ||||
성부 |
성자 |
성령 | ||
하나님 (삼위일체) |
아버지 |
구속
주 |
보혜사 |
내주하심 |
성도 |
자녀 |
부름받은
종 |
성도 |
성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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