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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하신 하나님 빌립보서 4:18-19
오늘은 한가위, 추석명절입니다. 제가 어릴때 시골살던 기억으로는 추석이란 말만 들어도 정말 가슴이 풍성해졌어요.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죠. 달은 휘영창 밝은 보름달이에요. 논과 밭에는 오곡 백과가 무르익습니다. 기후도 한국에서는 그때가 일년중 가장 좋은때죠? 또 멀리 나가 있던 식구들, 친척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집집마다 웃음꽃이에요. 밤이 깊도록 이야기 소리가, 웃음소리가 떠나가지를 않아요. 그날은 어찌 그렇게 먹을게 많은지. 겨울을 위한 새옷 새 신발도 그때 사서 입어요.
여러분 그래봐야 시골에 사실 뭐 그렇게 크고 좋고 맛잇고 재미있는게 많이 있었겠어요. 햇쌀이라야 겨울 나기 전에 이미 다 떨어집니다. 과일이 저장할곳도 없는데 얼마나 가겠어요. 그것도 과수원집 아니면 사실 별로 못 먹었잖아요. 또 아무리 추석 먹을것이라야 해봐야 송편 빼고 나면 요즈음 우리가 식당에서 먹는,,,,, 저녁정식도 아닌 런치스페셜, 그 반찬보다 못하잖아요. 새옷이라해도 대부분 다 시장에서 산 싸구려 옷 아닙니까?...... 마음이 풍성한거죠. 그래서 추석 인사말이 이렇습니다. “더도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일년내내 한가위 같이 마음이 그렇게 풍성했으면 좋겟다 하는거죠. 우리 옆에 분들에게 추석인사 한번 인사합시다. 좀 길긴한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같이 늘 풍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 우리도 하나님처럼 풍성하게 살기를 원하세요.
자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해요. 먼저 19절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를 괄호 안에 집어넣고, 다시 말하면 그것 빼고 나머지만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것을 채우시리라”
“나의 하나님이 그 풍성한대로”…….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말로는 다 표현 할 수 없지만, 뭔가 가슴이 꽉 차 오르고, 태평양을 안은 것처럼 큰 넉넉함을 느끼는거에요. 아무리 밤을 새우고 이야기 해도 다 못할 것 같은 그런 아름아고 풍성한 뒷 얘기를 느끼는거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이 시간 이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여러분들의 심령을 온통 지배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자 그런데 그 풍성하심의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풍성하심의 비밀이 있는거에요. 그 구체적인 뒷 이야기, 아름다운 비밀은 무엇인가? 아까 우리가 읽지 않았던 괄호속이에요. 괄호속만 다시 한번 읽습니다. 시작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아멘……. 그 풍성하심의 진정한 비밀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의 풍성함이다”
여러분 이게 무슨 이야기 입니까?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생각 할 때마다 그 풍성함의 중심을 이루는 뒷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는거에요. 그것을 기억하라는 거에요. 어떤 이야기나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한 이야기인거에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죽음과 다시 사심에 얽힌 아버지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인 거에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때,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 할때에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깊이 있게 알 수가 있다는거에요.
우리가 아이들 기르면서 아이들이 아프거나 다치거나 그래서 심지어 생사가 왔다 갔다 한 일들이 있습니다. 들쳐업고 병원 뛰어 갈때 그때 부모로서 우리 마음이 어떠했나 생각해 보면 조금 쉬울것 같아요. 저도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그랬을때가 제일 힘들고 마음 아팟던 시간이었던것 같아요. 그때는 공부잘해라 훌륭한 사람 되어라 그런게 문제가 아니죠. 그저 생명만 건져라. 어떻게든 회복만 해라. 내가 너 대신 아팠으면, 내가 차라리 다쳤으면 그게 고텅받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든요. 그것도 우리가 그렇게 하실만큼 뭐 대단한 존재들도 아닌 죄많고 허물많은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그런 우리를 위해, 아니 나같은 죄인 살리시기 위해 죽게까지 하셨잖아요. 그냥도 아니고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조롱 받고 멸시받고 침 밷히고 창에 찔리고 못에 박혀서 물과 피 한방 울 남기지 않고 다 흐를때까지 그렇게 십니가 위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그것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된 하나님의 고통이 없으셨겠어요? 아버지의 뜻을 알기에 그 처절한 고통을 참는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눈물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 아버지의 고통과 그 눈물뒤에 그것을 넘는것이 있었어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신 죽음을 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였어요. 아무런 갋엇이 댓가없이 베푸신 긍휼과 지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이었던거에요.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무덤속에 그냥 두지 않으셨어요. 죽음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시고 부활의 영광속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구원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하셨어요. 그를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고, 하늘에 잇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어요.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영광을 보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기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도 이렇게 풍성하실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고귀한 아들의 피 값을 주고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아들의 죽음으로 대신 얻은 생명인거에요. 그 부활과 권세의 영광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하시겠어요. 얼마나 보시기에 좋으시겠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영광의 풍성하심의 은혜를 고스란히 입은 주인공 들인거에요.
그러기에 우리는 고백하는것입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인자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여러분 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늘 사모하고 늘 앙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의 풍성함은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에요.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요 후사인 우리들도 풍성하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경험하는 축복의 말씀을 약속 하십니다. 영적인 풍성함분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쓸 것마저 채우시리라 약속을 하시는거에요. 그런데 양의 풍성함이 아니라 질의 풍성함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쓸것들,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염려 하고 걱정하며 살아가요. 지난 한 주간도 여러분 염려가 있고 걱정이 있었다면 대부분 거기 관련된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 하시는거에요. 너의 욕심은 내가 채우지 않겟다. 너의 세상적인 기대는 내가 안 매꾸겟다. 그런데 너의 꼭 쓸것 꼭 필요한것., 그 모든것은 내가 채우겠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으지도 않는 새도 하나님께서 기르시는데 너희는 이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꽃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 일까 보냐? 걱정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아라 그것은 이방인,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하는것이야. 그런것은 세상적인 욕심때문에 생기는 것이야.
그리고 결론을 무엇이라 하십니까? 이런 부탁을 하세요.”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비결이 바로 그거라는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면 모든 필요한것 모든 쓸것 채워 주시겠다는거에요.
제가 미국 와서 처음 교회를 개척했을때 이야기입니다. 제가 그전에 Biola에 있는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때 초등학생이었언 아이들을 자주 도서관에를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서 같이 공부를 했었어요. 그때 에스더가 늘 이야기 하기를 “아빠 나는 나중에 biola에서 공부하고 싶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모인 학교가 너무 좋아” 그랬습니다. 그리고 미국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 왔는데 대학 들어갈때가 되니까 정말 그렇게 말하는거에요.
그런데 문제는 사립학교 학비였어요. 개척교회 목사에다가 영주권도 없었는데 감당이 안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비가 싼 college를 가라 했는데 에스더는 죽어도 바이올라를 가겟다는거에요. 하나님께서 아빠 장학금 해 주셨는데 왜 나는 안해 주시겠냐고 하는거에요. 목사가 믿음없다 소리 들을 수도 없고 그 말에 할 수 없이 apply하라고 햇어요.
합격을 하고는 등록준비를 위해 학교를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장학금이 목회자 자녀 장학금 500불 밖에 안된다는거에요. 그런데 더큰 문제가 있었어요. 등록금도 등록금이지만 법이 바뀌어서 학생 자녀신분으로는 대학 등록자체가 안된다는거에요. 제가 그때는 학생 신분으로 목회학 박사 과정중에 있었어요. 올해부터 학생자녀도 다시 허가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때 911때문에 갑자기 바뀐것을 전혀 몰랐던거에요. 한편으로 미안햇지만 미안한건 둘째치고 학비 때문에 걱정하던 저는 말은 안 햇지만 속으로 “잘 되었다” 했어요. 그리고 한 학기동안 열심히 일을 해서 학비를 마련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도 어떻게 학비가 마련이 됩니까? 턱도 없었어요. 그런데 가겠대요. 해리도 학생신분으로 바꾸어사 등록을 되는데 학비마련이 도무지 게산이 안서는거에요.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요. 무엇보다 혹시 또 학비때문에 등록을 못해서 아이가 상처를 또 받으면 어떡하나? 또 다른 염려가 꼬리를 물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돌리고 막고 해서 겨우 등록을 했습니다. 그때 학비가 책값까지 포함해서 총 10200불이었어요. 책도 거의 중고로 샀습니다. 그런데 제가 학비 계산을 하면서 깜짝 놀랐어요.
해리가 일 해서 모은 돈이 5000불이 모였어요. 그런데 교회에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년말 상여금이라고 3000불을 주는거에요. 개척교회였는데 재정이 그래도 돌아가서 특별 상여금을 주신거에요. 또 어떤 분이 학교 이야기 전혀 안했어요. 그런데 해리 장학금이라고 천불을 주셨습니다. 또 학교에서 장학금이 나왔는데 500불 밖에 안 된다고 하던 장학금이1250불이 나왔어요. 여러분 합계가 얼마나면요, 10250불입니다. 50불이 남았어요. 아마 짜장면 탕수육으로 축하파티를 했을거에요.
여러분 풍성하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저는 이 계산을 하면서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몰라요. 너무 감사해서 그때 그 기록한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본인도 가족도 많이 아팟죠. 누구보다 본인이 더 힘들엇을거에요. 정말 감사한것은 저는 염려했는데 딸 자랑 같지만 우리 해리는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본거에요. 그때 예배 set up을 해리가 다 했는데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침 수요일 저녁에 했어요. 그런데 제가 조금 빨리 교회를 갓더니 이미 다 해놓았어요. 보니까 해리가 미리 낮에 교회가서 예배준비 set up다 해놓고 그러고 졸업식 간거에요. 비록 조그만 일이지만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아이의 마음을 하나님게서 받으셨구나. 학비 게산 하면서 깊이 느겼어요.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다 채워 주시는구나. 그때 새벽 기도때마다 믿음없이 염려하고 걱정했던 제 모습을 생각하며 얼마나 울면서 회개 했는지를 몰라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한 모든것을 채워 주시는 풍성한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아야 풍성하다고 생각 합니다. 철철 넘쳐야 풍성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욕심 자기 기대 다 차야 풍성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가 생각 하던 때에 타이밍이 맞아야 풍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풍성한줄로 믿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본다면 어쩌면 너무나 빠듯하고 늘 부족해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것임을 깨달으니 그게 진짜 복이요 진짜 풍성함 아닙니까? 참 풍성함의 맛을 누리며 사는거에요. 그 안에서 참 감사를 알고 양의 풍성함이 아니라 질의 풍성함을 깨달으며 사는것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야러분,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을 쓴 곳은 감옥 안이었어요. 습기차고 춥고 외로운 감옥안에 무슨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풍성함이 있었겠습니까? 모든것이 다 있고 빌립보 교회에서 보내 준것도 있다고 하지만…… 세상적인 눈으로 본다면 그게 무슨 풍성한 것이겠고 거기에서 무슨 당당함이 그렇게 있겠어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그 풍성하심으로 인하여 너무나 풍성 했던거에요. 환경은 뭐가 부족 할는지 몰라도 그러나 하나님의 풍성하심... 그 안에 사는 그에게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당당햇어요. 다 있다 다 있다 자기 자신을 최면에 거는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풍성함을 그 가운데서 깨달았던 거에요. 그래서 그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서도 자신있게 외치는거에요. “하나님께서 풍성하시기 때문에 너희에게도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채우시리라”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풍성함은 가진것에 있지 않습니다. 누리는것에 있지 않아요. 우리의 풍성함은 예수 안에 있는 줄 믿습니다. 예수의 영광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풍성함에 있는줄 밍습니다. 그것을 누리며 사는 , 그래서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풍성한 자들에게 하나님게서는 모든 필요한것을 채워 주심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진것은 넉넉지 않도도 마음이 넉넉한 부자 될 수 있어요. 지치고 힘들때라도 짜증 나는 일들 있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풍성 할 수 있습니다. 모잘라 보이는것, 연약해 보이는것, 그것 붙들고도 뜨겁게 감사가 넘치는 그런 풍성함의 삶을 살수 있어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10절에서 그 풍성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로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요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요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풍성한 자’라는 뜻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다.”
풍성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풍성하고, 우리의 영혼이 풍성하고,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며 내가 풍성하기에 내 가정과 내 모든 주변이 풍성해지기를 소원합니다. 또 우리의 예배 가운데 우리의 나눔 가운데 우리의 사역 가운데 이 하나님으로 인한 풍성함이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측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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